1) 유혹의 커피와 야쿠모 가의 탄생, 그리고 환상향의 시작
현대의 환상향에서는 외래인 농부들이 각종 작물을 키우는 외곽 농장지구의 온실이 있기에 카카오나 커피는 풍족한 자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구하기 어려운 재료는 아니다. (물론 가끔 물자가 너무 부족하면 바깥 세계에서 어느 정도 환상들이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이백년 전만 해도 이 희귀하고 이국적인 열매는 환상향에서 구할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향에서 카카오와 커피가 준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나 큰 편이다. 이를 알기 위해 먼저 환상향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커피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 역사 상으로는 커피가 들어온 시기는 메이지 시대이지만 환상향의 역사에서만큼은 그보다 훨씬 전, 환상향이 제대로 등장하기 직전이다. 바로 삼현자 중 결계를 관리하는 야쿠모 가의 당주가 환상향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당시에 대한 서술은 별로 없어서 확정할 수는 없지만, 자료를 통해 추측해보면 야쿠모 가의 당주는 환상향에 도착하기 전에 커피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틈새를 활용하여 커피를 들여와서 재배를 시도한 것으로 파악된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야쿠모 가 관리자의 인수인계 문서이다.
“야쿠모 가 저택의 구석에는 유리로 된 온실이 있으며, 이 온실에서는 커피 나무를 키우고 있다. 지금은 그저 관상용으로 쓰이고 있지만, 먼 옛날부터 당주님이 이 곳에 오시자마자 이 온실을 만들어서 커피 나무에서 커피 열매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주님은 식물학자나 농업인이 아니었기에 이 나무를 키우는 데까지 수많은 오차가 있었고, 현재 이 나무 역시 외곽 농장지구의 커피 나무들에 비하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 하지만 이 온실은 당주님이 매일 아침에 마시는 커피를 제공해줬고 많은 신들을 설득하기 위한 선물로도 쓰여 지금까지 환상향이 발전하는 데에 큰 디딤돌이 되어줬다.”
- 야쿠모 가 관리자의 인수인계용 책자 중 일부 -
위 글에서 ‘많은 신들을 설득하기 위한 선물’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야쿠모 가의 당주가 마시는 커피를 본 삼현자 중 나머지 두명은 이를 환상향 계획을 소개할 미끼로 쓰자고 주장했다. 이 아이디어에 모두 동의한 삼현자는 이 아마추어스러운 커피를 ‘머나먼 서방에서 악마의 유혹이라 불리는 검은 차, 커피’라 부르며 환상향 계획 설명회에 참석하는 모든 신들에게 이를 마실 수 있게 해주겠다며 홍보했다. 중화 대륙이나 그 남부의 제도에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일본의 여러 신들은 이 홍보에 넘어가서 환상향 계획 설명회에 도착했는데, 당연히 그들이 마신 아마추어 커피는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커피와는 별개로 당시 인접국에서 퍼져나가는 유교와 아브라함계 종교,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중앙집권화를 인지하고 있는 많은 신들이 환상향 계획에 동조하였고 협력하게 되었다.
2) 동방을 넘어선 동방에서 온 신의 열매 카카오
한편, 카카오와 초콜릿은 환상향이 자리잡고 앞서 이야기한 “해리엇네”와 같은 외래인들이 들어온 후 얼마 안 지나서, 유랑하는 어떤 신에 의해 환상향에 소개되었다. 이야기는 어느날, 환상향의 용신이 드물게도 직접 당시 하쿠레이 신사에 등장하여 무녀에게 ‘날개 달린 거대 뱀이 환상향을 방문할 것인데 포악하게 생겼어도 나와 비슷한 용신 같은 존재이니 공손하게 대하고 성대한 연회를 열어 맞이하라’고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려한 깃털로 뒤덮인 날개를 달고 천둥을 일으키며 드넓은 동방의 바다를 건너온 이 뱀은 직접 이름이 언급이 된 적이 없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최고신으로 여겨지는 ‘케찰코아틀’로 추정된다.
동방을 넘어선 동방, 미지의 대륙에서 그 지역의 최고신이 유랑자 신분으로 환상향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환상향은 물론 아시아 전 지역의 신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물론 신적인 존재들이 새삼스레 당시 인간들마냥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태껏 고립상태를 고수하던 이들이 갑작스레 유랑자 신분으로, 뒤따라오는 추종자들도 전혀 없이 동아시아로 찾아왔다는 것은 아메리카 대륙에 그만한 격변이 발생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환상향 이외의 동아시아의 신들은 이 현상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환상향의 신들은 이와 달리 어마무시한 손님을 맞이하느라 정신 없었다. 우선 앞서 말한 아메리카 대륙의 격변을 파악하기 위해 동아시아 각지에서 파견된 신의 사자들을 맞이할 준비도 해야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멀리서 온 신비로운 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연회다. 당시 환상향에는 ‘해리엇네’ 외에도 꽤나 다양한 요리와 술을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이라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타국의 용신’을 맞이하느라 긴장하던 환상향의 신들은 꽤나 문제가 될법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당시 “해리엇네” 사람들이 아메리카(정확히는 미국) 출신인 것을 알고 이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과 ‘천둥뱀’에 대해 정보를 얻어냈다. 문제는 이 아메리카 이주민들이 알고 있던 이야기는 대부분 스페인 정복자들이 자신들의 정복을 미화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종교의 잔인함을 과장하고 부풀린 이야기들이었다. 자신들의 이야기에도 이런 과장과 왜곡이 있는 것을 아는 신들은 당연히 어떤 부분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알 수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내린 결론은 ‘천둥뱀은 인간 제물을 즐겨먹었다.’는 것이다.
‘천둥뱀’이 환상향에 도착할 무렵, 연회는 준비가 거의 다 완료되었고 마지막으로 신들은 당시 감옥에 수감된 사형수(탄압받아 도망쳐온 사회주의자들이 환상들이하여 정착하기 전까지는 감옥, 수감자, 형벌 등이 당시 바깥 세계처럼 존재했다.)를 처형하여 그를 정성들여 요리했다. 당시에는 요괴들은 아직 식인을 하지만 신들 입장에서는 그래도 연회상에 인육이라는 것을 티내면서 올리기에는 거부감이 심했는지라 최대한 인육이라는 것을 티는 내지 않되, 실수로 다른 사람들이 인육을 먹지 않게 냄비 옆에 인육 주의 표시를 두었다. 이윽고 ‘천둥뱀’이 환상향에 도착하여 연회상을 맞이하니… 어찌 보면 놀랍게도,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천둥뱀’은 천둥을 내리치며 감히 하찮은 정보만으로 제멋대로 인육을 상에 올리냐며 분노를 표했다. 당시를 묘사하는 글귀는 아래와 같다.
“푸르른 하늘 아래에 벚꽃이 흩날리면서 연회상의 술을 달게 만드니, 천둥뱀은 사람 모습을 하여 다른 신들과 함께 다양한 음식과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겼다. 점점 연회상에 음식이 모자라니 천둥뱀은 더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으니, 신들 중 일부가 직접 커다란 냄비가 올려져 있는 상을 가져와 천둥뱀 앞에 놓았다. 천둥뱀은 흡족하게 냄새를 맡고 있으나 이내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상 외의 반응에 다른 신들은 당황하고, 그들의 직감은 적중했다. 천둥뱀은 다시 뱀의 형태가 되어 날아오르며 하늘을 비구름으로 뒤덮고, 환상향을 강풍으로 몰아치며 사방에 천둥을 울리면서 외쳤다. ‘세월이 흘러 인간은 더 이상 신들에게 자신의 동족을 바치지 않고 대신 사랑을 하거늘, 너희는 아직도 시대에 뒤쳐진 인간의 소문을, 그것도 거짓으로 점철된 소문을 믿고서는 감히 한때 최고신이던 위대한 존재에게 인육을 바치는가?!’ 그러자 환상향의 인간과 요괴는 천재에 놀라 집과 굴에 숨느라 바빴고, 신들은 노한 천둥뱀에게 용서를 비느라 바빴다.”
- 천둥뱀의 환상향 방문기 중 일부 -
다만 여기서 재밌는 점은, 정작 이렇게 ‘천둥뱀’이 분노하였지만 막상 인육이 담긴 냄비를 치우려 하자, ‘천둥뱀’은 다급하게 이를 말리며 점잔을 피우면서 이왕 준비한 거 아까우니 시대착오적인 음식을 나 혼자 다 먹겠다며 게걸스럽게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근래에 환상들이한 메소아메리카권 주술사의 의견으로는 실제로 가톨릭 신앙이 해당 지역에 정착한 후로는 ‘케찰코아틀’ 등 원주민들의 신들이 더 이상 인신공양을 받지 않고 유일신을 따르는 천사가 되거나, 신앙을 포기한 유랑자가 되거나, 천사들과 계속 싸우다 제압당해 죽거나 봉인당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케찰코아틀’은 특히 아이러니하게 인간을 찬양하며 사랑하는 만큼 인신공양도 중요시하고 좋아하다보니 환상향의 신들이 차려놓은 인육에 대해 변화에 맞춰 분노는 표해야겠지만 막상 눈 앞에 있으니 식탐을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사소한 소동이 있었지만, ‘천둥뱀’은 연회에 만족하였고, 이에 대한 답례로 카카오 열매와 이를 사용하여 만든 초콜릿을 선보였다. 다만 당시 초콜릿은 현대의 당분이 듬뿍 들어간 고체 초콜릿이 아닌, 걸쭉한 액체 상태로 마시는 음료였다. 게다가 본래 메소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초콜릿에 꿀처럼 단 재료도 넣었지만 주로 매운 맛을 내는 고추를 넣어 매콤씁쓸한 초콜릿을 마셨다.’천둥뱀’은 직접 이를 ‘신의 열매로 만든 신의 음료’라 소개하였으며, 용신과 맞먹는 권능에 관심이 있는 적지 않은 신들은 이 문구에 홀린듯이 환상향 기준에는 맛있는 음료보다는 건강 식품이나 도전 음식에 가까운 ‘신의 음료’에 열광하였다. 이 신들은 후술할 사건에서 ‘초콜릿파’로 부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신들이 이런 ‘천둥뱀’의 선물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천둥뱀’ 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미 인신공양과 거리를 두고 유교 및 불교, 간혹 기독교(기리시탄)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던 신들은 ‘천둥뱀’의 식인에 대한 모순적인 모습을 보고 실망했으며, 심한 경우 그를 힘이 센 요괴에 불과하다고 면전에 비하하고 연회 자리를 뜨기도 했다. 결국 며칠 후 ‘천둥뱀’이 다시 유랑하여 자리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반초콜릿파’와 앞서 말한 ‘초콜릿파’ 간의 갈등은 점점 고조되며, 신들끼리 심심하면 자잘한 싸움이 일어났고, 결국 환상향 내에서 신들이 제대로 제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환상향의 날씨는 바깥 세계보다 더 변덕스러워졌고, 인간은 물론 요괴들마저도 재해와 흉작으로 고통받았다.
3) 달콤한 핫 초콜릿으로 화해하기
이런 상황을 현자 중 한명으로서 두고볼 수 없던 야쿠모 가의 당주는 해결책으로 ‘신의 열매’인 카카오와 그 부산물인 초콜릿의 가치와 상징성을 낮추는 방안을 택했다. 그는 이 해결책을 실행하기 위해 초콜릿에 설탕을 넣어 달게 먹는 문화를 형성하여 단 맛을 좋아하는 환상향 토착민의 입맛을 맞추고, 이와 더불어 요괴의 산에 정착하고 있는 텐구들에게 에너지 식품으로 제공하면 될 것이라고 단번에 파악했다. (앞서 이야기한 커피 이야기도 고려하면 야쿠모 가의 당주는 당시 기준 미래, 현재 기준 현대의 식문화를 알고 있다는 추측도 있지만, 증거가 많이 부족하다.) 다행히 “해리엇네”의 직원들은 초콜릿을 달게 먹는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이들은 이미 쉽 비스킷(건빵)을 텐구들에게 유통하고 있었기에 초콜릿을 유통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만큼 대량의 카카오를 환상향에 보급하는 것인데, 단순히 틈새를 사용하여 원격으로 카카오 물량을 확보하기에는 아직 야쿠모 가의 기술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갓파의 기술자들과 협력하여 카카오 열매를 재배하려 했다. 온실을 마련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막상 카카오 열매를 재배할 수 있는 적합한 환경 조성이 너무 어려워서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 때 만들어진 온실은 인간 마을에서 잘 활용하여 바깥 세계의 일본에서는 자주 접했으나 환상향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다소 키우기 쉬운 작물들을 재배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결국 야쿠모 가의 당주는 다소 무모한 계획을 세우는데, 바로 당주가 직접 바깥 세계의 카카오 생산지를 방문하여 카카오를 대량구매하는 것이다.
이 계획이 왜 가능하냐면 환상향에서 틈새만으로 바깥 세계 머나먼 곳에서 카카오를 대량으로 가져오는 것은 당시에는 아직 어려운 일이지만(지금은 바깥 세계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필요한 자원(및 인간)을 환상들이 하고 있다.), 생각보다 자신과 주변의 사물을 대량으로 특정 지점에 이동시키는 것은 복잡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계획인 것이다. 당연히 이 계획도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뿐이지, 여러 난관이 있었다. 예를 들어 당주는 처음에 스스로를 영국인 귀족 여성으로 간단하게 분장하여 영어로 카카오 농장주와 대화하여 작물을 사려 했다. (이와 관련된 기록에서 영어 악센트 지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보면 당주의 출신지가 점점 궁금해지는 구간이긴 하다.) 처음에는 이 방법이 먹혔으나, 점점 농장주들이 귀족 여성이 굳이 직접 카카오 열매를 사러 온다는 점을 수상하게 여겨 거수자로 신고당하기도 했다. 이후로는 다소 복잡한 분장술을 쓰더라도 영국인 무역업자로 변장했는데, 이 외에도 갑작스런 초콜릿에 대한 수요 증가로 치솟는 카카오 열매 가격 등 여러 곤란한 난관을 겪기도 했다.
비록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충분한 카카오 열매를 확보하여 핫 초콜릿을 접해본 외래인들, 달달하고 에너지가 넘친다는 핫 초콜릿에 관심이 있는 갓파와 텐구들의 도움을 통해 첫 핫 초콜릿이 “해리엇네” 및 여러 찻집과 주점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직 직접적으로 카카오 열매를 수확하지 못하기에 핫 초콜릿은 여전히 사치재였지만 그래도 일반 백성도 일주일에 한번쯤은 마실 수 있었다. 카라스 텐구들은 먼 거리를 비행하면서 소모한 칼로리를 쉽 비스킷과 핫 초콜릿으로 회복하였다. (이 때 텐구 사회에서 카라스 텐구 이상에게만 핫 초콜릿이 보급되어서 갈등이 심화되었고 심지어 하급 텐구들이 공용 창고에서 핫 초콜릿을 만드는 분말을 털어가는 일도 발생했다.) ‘신의 열매’였던 카카오는 이제 그저 고급진 기호식품을 만들기 위한 원재료가 되었다. 이후 ‘반초콜릿파’는 대중이 선호하는 새로운 기호식품에 관심을 가지며 핫 초콜릿을 가끔 먹어보기도 했으며, ‘초콜릿파’ 역시 텐구 따위가 주구장창 마시는데 특별히 신성할 것 없다며 카카오에 대한 광적인 열광을 멈췄다. 참고로 신들 중 누가 ‘반초콜릿파’였는지, 누가 ‘초콜릿파’였는지 명단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기록은 신들이 스스로 부끄럼을 느껴서인지, 아니면 남아있으면 갈등이 더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아서인지, 불로 태워서 없어졌다고 한다. (당연히 무리해서 알고자 하면 신들이 노할 것이니 그러지 말자.)
4) 초콜릿에서 커피로
19세기 말, 환상향은 대결계로 바깥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와중에, 바깥 세계는 제국주의적 야욕에 의해 곳곳에 산업 혁명 이후 기계화된 공장이 들어서고 지역의 시장은 자본주의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세계 곳곳에 자본주의의 부작용이 발생하였고 이에 저항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사회주의자가 등장하였다. 다양한 계급이 존재했지만 주로 피지배층인 노동자와 농부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평화적인 전단지 살포, 집회, 경제적 압박을 노리는 파업, 과격한 폭탄 테러 등 당시 자본과 국가에 대한 저항 활동을 하였고, 자연스레 공권력을 동원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그 탄압의 규모는 단순한 경찰력 출동부터 국운을 가릴 내전, 어쩌면 국제전 수준까지 이르렀고,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생명이 위기에 몰렸다.
많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생각보다 꽤 되는 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우연히 목격한 틈새를 통해 환상들이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이 중 상당 수는 환상향의 위험한 환경과 요괴의 외래인 사냥으로 죽었다. (현대에는 극히 소수만 하지만 당시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요괴들이 외래인을 사냥했다. 물론 여기서 외래인은 어디까지나 인간 마을에 정착하지 않고 갓 바깥 세계에 유입된 경우만 해당된다.) 반면 살아남은 자들은 대개 살아오던 바깥 세계에 미련이나 뜻을 가지고 기억을 지운 채 되돌아가는 것을 선택했지만 적지 않은 숫자는 환상향(정확히는 인간 마을)의 공동체 사회를 미래를 향한 단서로 보고 이 마을에 남게 된다. 이들이 정착하면서 토착민과 융화함에 따라 과거 지배층 소실로 인한 역변의 잔해, 예를 들어 앞서 이야기한 잔인한 형벌 제도, 자치주의적인 마을 회의 내에서도 존재하는 권위주의적인 촌장의 위치 등이 개혁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야기할 것은 이런 사회 시스템적 변화보다는 식문화 측면에서의 새로운 수요 등장에 대한 것이다.
서구권(실은 중화권도 해당한다.) 외래인이 환상향 내에 증가하면서, 자연스레 식수 대신 차 음료, 초콜릿, 커피 등 식수 대체 음료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무엇보다 앞서 이야기한 19세기 말 외래인의 증가는 초콜릿과 커피에 대한 수요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외래인들은 차 음료를 대체품으로 마시긴 했지만 핫 초콜릿의 달콤쌉싸름하고 걸쭉한 맛, 또는 커피의 진한 향을 그리워했다. 야쿠모가가 더 이상 바깥 세계에서 공수해오는 카카오 열매만으로는 환상향 내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환상향에서 본격적으로 카카오나 커피를 재배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적어도 그리 판단하고 있었다.
정작 해결책은 이미 정착한 타문화권의 주술사와 마법사들이 알고 있었는데, 바로 개인 화분에서 기르는 커피 나무이다. 물론 본래 커피 나무를 작정하고 재배하기에는 부적합한 환경인 일본 열도에서 커피 나무를 키워봤자 수확률은 좋지 않다. 하지만 카카오 나무와 달리 커피 나무는 관상용 정도로 키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서 모든 가정에서 커피 나무를 한 그루씩 키운다면 조금이나마 커피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야쿠모가에서 커피 열매를 씨앗으로 배급하고 커피 나무를 키우기 위한 토양을 준비하는 방법을 전수하자, 인간 마을에서는 자연스레 가정집마다 커피 나무를 키우기 시작했고, 이내 카카오와 커피에 대한 수요가 충족되었다. 이렇게 가정집 커피 빈이 자리잡자, 환상향의 찻집이나 서양식으로 새로 등장한 ‘카페’에서는 기존의 전통 차와 새로운 서양식 차 외에도 주문자의 커피 빈을 받아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물론 바깥 세계 기준으로는 대개 아마추어다.)도 자리잡았다.
5) 고체 초콜릿의 탄생과 그 한계
커피가 점점 인간 마을의 인기 음료가 되어갈 때, 카카오로 만드는 핫 초콜릿은 점점 희귀하지만 수요가 별로 없는 식품이 되어갔다. 하쿠레이 대결계 이후 굳이 장기 비행을 잘 하지 않게 된 텐구들도 초콜릿의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고 커피에 설탕을 넣어 달게 마시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 환상들이한 외래인, 일부 신과 텐구 상류층은 초콜릿을 여전히 종종 먹고 싶어했다. 이런 와중에 새로운 수요층이 생겼는데, 바로 옛 도시(또는 옛 지옥이라고도 불린다.)의 주민들이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지저세계에서는 에너지 소모가 심했고, 이를 쉽게 회복시켜준다는 식품에 관심이 생겼다.
이런 애매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초콜릿 가공법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왔다. 왜냐하면 바깥 세계에서는 초콜릿이 수요와 공급이 모두 높은 인기 상품이었고 갓 환상들이한 외래인들이 이에 대한 정보를 계속하여 공급해줬기 때문이다. 옛 도시에서 관심을 가질 때는 고체 초콜릿이 바깥 세계에 이미 유통되고 있었고, 이를 모방하기 위해 텐구들이 정보를 모아 갓파들과 함께 개발을 추진했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바깥 세계의 초콜릿을 모방하기 위해서는 우선 카카오 원두를 2.7톤의 압력으로 압착해 카카오 버터를 효과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어야 하고 일단 갓파들은 이런 기계를 개발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론상 무려 100톤까지 압력을 가할 수 있다지만 적정량만큼 압력을 조절하는 것이 어려웠고 기계의 비효율적인 연료 소모 역시 문제였다. 즉, 최적화가 형편 없었던 것이다.
이 소문을 접한 지령전(요괴들을 통해서 들었다보니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의 관리자는 당시 옛 도시에 정착한 오니들에게 카카오 원두를 2.7톤이라는 엄청나지만 적절히 조절되는 힘으로 압착해볼 것을 권했다. 차라리 술이나 더 마시고 싶지, 초콜릿에 전혀 관심이 없는 오니들은 시큰둥했지만 지령전의 관리자는 가공한 초콜릿 재료를 술과 안주로 교환할 것을 제안하자 한때 오니들의 사천왕이라 불렸다는 호시구마 유기가 갓파들이 제공해준 금속 통에다 카카오 원두를 넣고 적절하게 압착해보았다. 이 ‘몸이 약하면 머리가 고생한다’는 말이 떠오를 법한 가공 절차는 성공적이었으며 환상향의 초콜릿 팬들은 희소식으로 여겼으나, 정작 오니들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오니들 입장에서는 가공한 재료, 즉 분리된 카카오 버터와 카카오 덩어리로 뭘 하기도 애매모호했고 작업 역시 상당히 지루하여 기피하는 일거리 중 하나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다른 물건과의 교환 비율이 좋다보니 오니 공동체에서 사사로운 규칙을 어기거나 잘못을 하면 그에 대한 형벌로 ‘천둥뱀의 열매 압축하기’가 새로 등장했다. 아래는 현재에도 존재하는 옛 도시의 카카오 열매 압착기 옆에 부착된 설명문이다.
“이 카카오 열매 압착기는 과거 오니들 사이에서 규칙을 어기거나 잘못을 하면 벌칙형벌용으로 사용되는 장비이니 오니가 아닌 요괴나 인외는 함부로 손대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오니가 압착기로 형벌을 수행 중이면 절대로 가까이 가지 말아주십시오. 약 2.7톤에 가까이 되는 압력을 해당 압착기에 가하고 있으니, 잘못 사고가 나면 큰 충격을 받고 물리적으로 다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오니가 압착기에서 형벌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있어도 우리 오니들이 알아서 단속하고 처리할테니 무리하여 신고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 옛 도시의 카카오 열매 압착기 설명문, 호시구마 유기 작성 -
환상향에서 성공적으로 카카오 버터를 분리하자, 바깥 세계에서 고체 초콜릿을 접해본 외래인들은 최대한 비슷하게 고체 초콜릿을 재현했다. 여러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성공적으로 재현된 고체 초콜릿은 환상향의 초콜릿 팬들을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문제는 당분간 환상향의 초콜릿은 이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자원도 부족했고 수요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초콜릿을 그리워하던 외래인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달달한 모찌와 단고, 탕위안, 달걀 푸딩 등 일본식, 혹은 동양식, 심지어 초콜릿을 사용하지 않는 서양식 디저트에 만족하며 살아갔다. 초콜릿의 각성 효과를 즐기던 자들은 찻집이나 카페에서 제각각 다르게 만드는 커피를 대체재로 즐겼다. 그나마 일부 신들이 여전히 ‘신의 열매’에 대해 미련을 가지며 초콜릿을 종종 먹곤 했다.
6) 외곽 농장지구의 등장과 초콜릿의 부활
시간이 흘러 바깥 세계에서 두 거대한 전쟁이 끝나고 살벌한 분위기가 지구를 감쌀 때, 환상향에서 다양한 문화가 점점 섞이며 수요 역시 점점 다양해졌다. 이 때 텐구들의 지도자 텐마의 제안으로 풍요신들과 환상향의 결계 관리인까지 협력하여 외곽 농장지구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외곽 농장지구는 일본 밖의 외래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외래인 농업 종사자로 구성되었다. (이 외래인은 다른 외래인과 달리 직업군을 선정하여 풍요신들이 직접 설득을 한 후에야 환상들이했기에, 험악한 환상향의 환경을 거쳐서 인간 마을까지 살아남아 도착해야 했던 외래인과는 성질이 꽤나 달랐다.)
이들은 보통 주로 북미, 남미를 모두 포함한 아메리카 대륙 출신인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은 특히 초콜릿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애초에 농업을 전담하기 위해 환상들이한 이들은 순식간에 카카오 나무를 갓파들이 마련해준 온실에서 재배할 수 있었으며, 이는 환상향에서 초콜릿의 제대로 된 대중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마침 이 때에 맞춰 갓파들이 과거에 개발한 카카오 열매 압착기 역시 최적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서 텐구 사회에서 공장화 후보 1순위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애초에 명분상 환상향의 다양한 식재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지, 텐구 공장과 연계하기 위해 세워진 외곽 농장지구는 자연스럽게 텐구 초콜릿 공장에 카카오 열매를 공급하였고, 텐구 공장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액체화해서 먹을 수 있는 분말형 초콜릿, 간식처럼 먹을 수 있는 고체형 초콜릿, 그리고 요리용으로 쓸 수 있는 기타 초콜릿 재료를 상품화했다.
재밌는 점은 이 상황이면 당연히 초콜릿은 앞으로 텐구 공장을 통해서 공급될 것 같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막상 텐구 공장의 초콜릿을 맛본 외곽 농장 지구의 미식가들은 바깥 세계에서 먹었던 값싼 초콜릿과 비슷한 수준이라 여겼다. (물론 그래도 맛있으니 잘 먹는다.) 실제로 “해리엇네”는 텐구 공장의 상품을 그대로 사서 쓰는 것보다는 초콜릿 덩어리와 카카오 버터를 따로 구매하여 다소 번거로워도 직접 추가 가공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지령전, 시간이 지나 등장하는 홍마관, ‘자동화된 기계로 탁해진’ 초콜릿을 안 좋아하는 신들도 카카오 버터 분리 단계는 오니들의 힘을 빌리고, 이후로는 아예 초콜릿 전문가(홍마관의 경우 메이드장 이자요이 사쿠야)를 고용하여 초콜릿을 만들어 먹는다.
한편, 외곽 농장 지구에서는 텐구 공장에서 가공한 초콜릿을 즐겨먹긴 했지만, 단 맛이 아예 없는 초콜릿 분말을 따로 주문하여 대신 고추 등 매운 재료를 넣어 카레 소스처럼 음식(주로 닭고기 등 육류) 위에 부어먹기도 했다. 이 음식은 ‘몰레(Mole)’라고 불렸는데, 인디오 언어로 ‘소스(Mix)’라는 뜻이며, 어찌 보면 인도의 ‘커리’와 비슷한 말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몰레’는 초콜릿을 베이스로 한 소스 외에도 다양한 소스가 존재한다.) 초콜릿에 관심이 있던 신들은 오랜만에 매운 초콜릿을 다시 접한 것인데, 이들은 ‘몰레’를 만들 줄 아는 자들을 초콜릿 전문가로 임명하여 주기적으로 자신의 신사에 방문하여 요리를 바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