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머금은 수국
류 주 현
마음 저 밑바닥에
감춰 놓은 무엇이 있었나
꽃잎 살짝 건드리니
우수수 비밀이 떨어진다
차마 내놓지 못하고
이슬 밑에 숨겨 둔
옛사랑, 옛 청춘이
쪼르르 드러난다
사랑은
뜨거운 가슴일수록
둥글고 투명한 빛깔로
가슴 시린 것
아물지 못한
상처 난 것들이
먹먹한 가슴으로
또르르 떨어진다
노부부
우리 동네에는 매일
손수레를 끌고 오는 부부가 있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온 동네 파지를 챙기는 부부
한낮 불볕더위로
지친 땀방울을 훔치는 그들에게
시원한 냉차를 건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뭉클한 미소
부부의 연륜만큼이나 낡은 손수레
얼마나 걸었는지 바퀴가 하얗다
이고, 짊어져야 가벼워지는 몸뚱이라며
그들은 생을 싣고 또 걷는다
수통골 할머니
오늘도 할머니는
길 위에 좌판을 펼친다
갓 뜯은 냉이, 시금치
작년에 주운 밤 말랭이
금수봉 도덕봉 빈계산 산행으로
들뜬 기분의 행인들
쏠쏠한 눈요기로 지갑을 연다
노파는 손주 용돈이 생겨
엉덩이가 절로 들썩댄다
덩달아 환히 웃는 사람들
계곡물도 걀걀걀 소리 내어 웃는다
뜰에 앉아
무뚝뚝한 겨울이 웃는 낯으로
양지바른 자리를 내어줍니다
어느 남자가
고운 처자를 마다할 리 있을까요?
앞뜰의 매화나무가 볼그레한 주머니를 만들고
앵두 뿌리는 가지로 연신 물을 밀어 올립니다
앙증맞은 참새 부부도 산란 일자를 잡나 봅니다
세상은 온통 속삭이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봄은 털어내고 일어나는 시간입니다
얼어붙은 대지를 흔들어 씨앗을 깨우고
겨우내 걸려 있던 침묵의 빗장을 여는
푸른 노동의 시간입니다
뜰에 나와 동살에 영근 이슬방울을 봅니다
그 안에 조그마한 내가 보입니다
바람이 건드리면, 햇살이 건드리면
‘툭’하고 떨어질 봄이 보입니다.
명월담(明月潭) 6곡
9곡 중에 6곡은
실로 맑고 맑아
처연하기까지 하다
한파에 얼음 섞인 폭포
맑게 내리는 폭포는
바람 소리, 구름 한 점, 산새 소리,
수줍어하는 나목들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낸다
내 마음속 응어리를
불경 소리 가득 고인 물속에 던져본다
갑사 명월담이 거칠게 흔들린다
물욕이 떠내려가는 소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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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정동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중어중문학과., 전북대 경영대학원
수상소감
넉넉했던 유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채워지지 않던 젊은 날이 있었습니다.
비움과 채움을 모두 경험한 내 삶의 시간이
시어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 삶과 세상을 관조할 만한 연륜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물 그리고 자연과도 대화하고 교감하는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선, 문학상 수상에 기쁨을 표합니다.
그리고 설익은 언어를 이어갈 기회를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글 쓰는 것은 나와는 다른 영역이라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논어와 대학을 읽고 고전을 접하면서
나도 ‘내 사상과 감정을 오롯이 글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더듬더듬 서툰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만난 문우들과의 인연에 감사하고
항상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고 용기를 주는 우리 가족과 이웃과도
수상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기교가 시심을 앞지르는 문단에 담백한 시 몇 편을 소개합니다.
전통적 창작규범에 대한 고민이 깊을 만큼
메타 유형의 시가 주목을 받는 문단 현실입니다.
여기에 소개한 시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에 다가가 교감하고,
느낀 정서를 그대로 담아낸 담백한 시들입니다.
이슬 머금은 수국의 물방울에서 가슴 시린 상처를 찾아내고
파지를 줍는 노부부에게서 짊어져야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지는 생의 노곤함을 발견합니다.
시적 화자는 길에서, 뜰에서 만난 자연과도 교감하며,
그 속에서 삶의 깨달음을 이어갑니다.
문학은 마음을 툭툭 털어내며 끝없이 먼 길을 걷는
즐거우면서도 고된 여정입니다.
그 속에서 삶의 가치를 일구고 가꾸어 나가는 것이
문학이기도 합니다.
류주현 작가의 시에서 그 길을 가고자 하는 힘과 의지가 보입니다.
작가의 작품이 더 높고 깊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 이대영(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