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라는 책
《논어》는 약 2500년 전 오늘날 중국의 작은 마을 취푸曲 곡부)에서 태어난 공자)가 그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위정자들과 나눈 대화록이다. 개인의 인격수양과 정치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고, 공자 사후에 제자들 혹은 그 제자의 제자들 그룹에 의해 기록되었다. 공자가 죽은 지 약 2500년이 공자 넘었지만 그의 어록인 《논어》는 아주 오래된 고전들 중 하나이자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와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책으로 현재까지 많은 대중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논어》는 모두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논어》의 체제는 처음부터 그랬을까? 이러한 체제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정확한 편찬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학계에는 공자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들이 편찬했다는 설도 있고, 재전(再傳) 제자들이 편찬했다는 설도 있다. 또 《논어》는 총 20편이 아닌 판본도 있고 판본마다 구성하는 내용, 글자에도 차이가 많았다.
상이한 여러 판본이 있었지만 판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기 시작했다. 중국 전한(前漢) 때 크게 유통된 판본으로는 《노론(魯論》, 《제론(齊論)》, 《고론(古論)》 3종의 《논어》가 있었는데 장우(張禹?~BC 5?)가《노론>을 위주로 하면서 《제론>을 참조하여 새로운 판본인 《장후론>을 만들었고, 이후의 《논어》 판본들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이것이 인기를 끌자 나머지 판본은 사라졌다.
장우가 새로운 판본을 만든 후에는 《논어》 텍스트를 해석하는 주해서들이 만들어졌다. 한(漢) 대에 많은 학자가 《논어》 주석서를 내놓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인 후한(後漢) 정현(鄭玄 127~200)의 《논어정씨주》이다. 정현은 앞서 언급한 《장후론》, 《노론》과 여러 주석가의 주석, 《제론》, 《고론》을 참고하여 《논어정씨주》를 완성했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논어》가 바로 《논어정씨주》로부터 변모해온 텍스트이다.
정현 이후에는 대표적으로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하안(何?~249)이 《논어집해語集解》라는 주석서를 냈고, 이 이후로도 주석서가 많았지만 대표적인 것은 남조)의 양(梁)나라 때 황간(侃 488~545)의 《논어의소義疏)》, 북송(北宋) 때 형병(邢昺 932~1010)의 《논어정의 있다. 그중 《논어》는 그전에 있었던 여러 주석을 가 포함해 내용이 충실한데다가 당대의 인쇄술 발달에 힘입어 세상에서 크게 유행했다. 《논어정의》가 널리 보급된 결과 다른 주석서들은 유실되고 말았다.
남송(南宋) 때는 또 다른 걸출한 《논어》 주석서가 나오는데, 그것은 조선시대에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고 현대까지도 널리 읽히는 성리학자 주희(朱熹 1130~1200)의 《논어집주(論語集註)》이다. 《논어집주》를 신주(新注)라 부르고 그 이전의 주석들을 고주(古注)라 하는데, 주석의 내용과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고주는 보통 《논어》의 자구 해석에 치중한 주석이다. 신주는 주희가 송대유학자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세운 도덕 사상 체계인 도학(道學)의 시각으로 쓴 《논어》 주석이다.
남송 말에 와서는 소흥(紹興) 연간(1190~1194)에 국가 편찬 사업으로 13개 주요 경전에 대한 주석을 모아서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라는 일련의 전서(全書)를 간행했다. 그 시리즈의 일부로 편찬된 《논어주소(論語註疏)》는 앞서 논한 하안의 《논어집해>와 그에 대한 주석을 담은 형병의 《논어정의 》 를 합본한 책이다. 이 역서 또한 《논어》 고주라 불리는 《논어주소 》 의 주석들을 주로 참고하여 번역하였다.
2024. 9. 1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