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본문 : 살후1:11-12
예전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들이 성적표에 성적을
‘수우미양가’다섯 단계로 평가해서 기록하셨습니다.
이 단어만 들어도 벌써 가슴이 벌렁거리는 분도 계시지요?
그 때는 ‘수우미양가’의 뜻도 모르고
‘수’는 좋은 것, ‘가’는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평가에 쓰이는
이 다섯 단어는 모두 좋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수(秀)'는 '빼어날 수'자로 '매우 우수하다'는 뜻입니다.
'우(優)'는 '넉넉하다'는 뜻입니다.
'미(美)'는 '아름다울 미'로 '좋다'는 뜻입니다.
'양(良)'은 '양호하다', '어질다', '뛰어나다'의 뜻이 있습니다.
'가(可)'는 '가능하다'고 할 때의 '가'로 '옳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교육적인 내용을 담은 평가였다는 생각입니다.
선생님들은 그 반의 꼴찌에게도 가능성을 보시고
‘너는 가능성 있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다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시지만,
아직 잘 따라오지 못한다고 해서 절망하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
언제나 우리를 향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의 ‘가능성’을 보시고 열린 마음으로
우리를 향해 손을 내미시고,....
오라고 부르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중보기도>....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성도의 가능성을 보고 기대와
소망을 품은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단지 복음을 전한 것만이 아닙니다(전도).
그것은 아이를 넣고 방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서신을 통해 교육하고
양육하였습니다(양육).
중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습니다(중보기도).
살전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살전3: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중보 기도의 위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절5:17)고 가르쳤고,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만큼 기도의 능력을 확신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구약 사무엘 선지자의 고백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늠하게 해 줍니다.
삼상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기도할 때마다
서로 기억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하나되는 비결입니다.
<중보기도의 내용>
그러면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어떤 기대와 소망을 품고 기도했을까요?
11절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
먼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구원의 복음은 철저히 위로부터 주어진 선물입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요15:16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길을 내시고 우리를 부르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길을 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입니다.
누구든지 그 은혜에 응답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 은혜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도 요한도 ‘사랑’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4:1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것이 신앙의 첫 출발입니다. 신앙은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짝사랑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청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마 18:12-14, 눅15:4-6).
어떤 목자가 양 100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 목자는 99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찾고 찾다가 어렵게 찾아서 그 잃은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너무 기뻐서 친지들을 불러 즐기면서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는 내용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한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기를
원하셔서 이 비유의 말을 하신 것입니다.
한 영혼을 얻으면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랑스런 존재입니다.
“당신의 자녀 삼으시려고” 부르시는 너무도
고귀한 존재입니다.
<믿음으로 응답하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22:1~14절에서 ‘청함 받은 자’와
'택함 받은 자’를 구별하여 설명하셨습니다.
한 임금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갑자기 잔치를 열지는 않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손님을 초청합니다.
‘몇 월 며칠에 결혼식이 있으니 와 주십시오’라고
음식 메뉴까지 밝히면서 청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초청받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참석하는
것을 감사히 여기거나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밭으로 일하러 갔고,
어떤 사람은 자기 사업 때문에 갔습니다.
이에 화가 난 임금은 “이미 준비된 혼인잔치니
네거리 길에 가서 만나는 사람, 누구든지
혼인잔치에 청하라”고 종들에게 명합니다.
그래서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습니다(마22:10).
임금의 초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잔치는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사환들에게 예복입지 않은 자를
들어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오라고 초대해 놓고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왜 내쫓았을까요? .....
당시 유대의 관습은 혼인 잔치에는
꼭 예복을 입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는 것은.....,
그 잔치 자리를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예복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의의 옷”(계19:8)을 말씀합니다.
즉 이 예복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라도 동일하게 사랑하셔서
‘독생자’라는 초청장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응답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명"(召命, 부를 소 /
목숨, 명할 명, ‘calling’)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
소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택함을 받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입니다.
청함에 응해야 그 잔치에 택함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
초대 받은 손님이요, 초대 응하여 잔치 자리에
참석한 택함 받은 백성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께서 먼저 당신을 사랑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단지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으로 친히 찾아 오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친히 불러주셔서
오늘 이 구원의 자리에 있게 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신앙이 흔들립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금방 불안해지고
작은 어려움에도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이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미 응답한
성도들을 위하여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다.
11절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이 부르심에 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소명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간혹 우리가 ‘소명’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있다면....
성직자만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이 다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목회자만 성직자가 아니라 모든 성도는 다 성직자입니다.
사업가는 사업이 성직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하고...,
학생은 공부가 성직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하고,
연로하신 분은 기도가 성직인 줄 알고 최선을 다하고,......
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소명자의 삶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 11절에서 그 내용을
동의 반복적 표현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절 “...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다소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엡4:1-3절에 나옵니다.
<엡4:1-3>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겸손, 온유, 오래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등이 바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성령의 열매).
이러한 것이 선을 기뻐하는 것이요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는 주체가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서 하나님께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사람의 인격만으로는
절대로 하나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됩니다.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를 죽이고 성령님이 내 안에
역사하시게 하는 작업입니다
(바울 -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성령님이 우리 안에 강하게 역사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여김을 받는 삶입니다.
<맺는 말씀 –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성도님들 !
오늘 우리는 모두 소명을 받아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바라기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왕 순종하는 것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하십시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억지로 할 일이 아닙니다.
나를 부르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시면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셔서
주님 오시는 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는 ...
저와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