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8주(다해)
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루카 6,39-40.)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복된 제자들은 세상을 이끌고 가르치는 일에 곧 나설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을 모두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복음적 삶의 방식을 알아야만 했고 온갖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만 했습니다. … 거룩한 빛으로 밝은 마음과 시력을 얻은 제자들이니, 눈먼 이를 이끄는 눈먼 이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무지의 어둠에 묻혀 있는 자가 똑같은 어둠에 묻혀 있는 자를 진리에 관한 지식의 빛으로 인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랬다가는 둘 다 구렁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빠져드는 우쭐거리는 마음인 교만에 빠져 감히 스승을 능가하려는 헛된 노력을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다짐하셨습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어쩌다가 스승 버금가는 경지에 올랐어도 제자는 스승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해서는 안 되며, 스승을 본받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우리에게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1코린 11,1).(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2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5)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은 그 사람의 성품과 마음 상태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덕성스러운 사람은 자기 성품에 어울리는 고상한 말을 하고, 사악한 자는 자기 안에 감추어둔 악행을 토해냅니다. 여기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4)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나 포도 같은 달콤한 열매를 기대한다면 그런 어리석음과 무지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선자나 저속한 자들한테서 고상한 품행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다른 말씀으로도 이 가은 사실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루카 6,45 참조) 이와 반대되는 성향을 지닌 자, 즉 마음이 교만과 사악함에 사로잡힌 자는 자기 속에 깊숙이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고 맙니다. 속에서 부글거리는 것이 말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덕성스러운 사람은 그 품성에 어울리는 고상한 말을 하고, 쓸모없고 사악한 자는 은밀히 숨겨둔 더러운 것들을 토해냅니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루카 복음 주해』 33.)
참고로,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412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θεοτόκος, 테오토코스)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루스는 429년 부활절 서간에서 처음으로 네스토리우스를 반박했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θεοτόκος, 테오토코스)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는 430년 에페소 공의회를 개최하여, 성모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어머니’ (θεοτόκος, 테오토코스)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네스토리우스를 단죄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는 444년에 죽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의 가르침을 깊이 명심하면서, 우리는 결코 눈먼 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마음의 곳간에서 항상 선한 것만 내놓을 수 있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