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하순 하
▶ 화명수목원 - 서문 - 암문 - 장대 - 통일동산바위/주먹바위(왕복) - 4망루 - 의상봉/ 638m - 원효봉/ 687m -
- 사기봉/ 682m - 북문 - 준행암장/돌고래바위(왕복) - 고당봉뒤 - 범어사 - 자장암 - 범어사역
◐ 화명수목원 - 10분 "서문" - 20분 "암문" - 15분 "장대" - 25분 "통일동산바위/주먹바위(왕복)" -
- 20분 "4망루" - 5분 "의상봉" - 20분 "원효봉" - 10분 "사기봉" - 10분 "북문" -
- 10분 "준행암장/돌고래바위(왕복)" - 30분 "고당봉뒤쪽" - 40분 "사배고개" - 15분 "범어사매표소" -
- 5분 "에어건 / 화장실" - 15분 "자장암" - 20분 "범어정수장" - 10분 "범어사역" ◑
◈ 5시간 30분 ~ 6시간 정도
▶▶
▶▶▶
"도시철도 2호선"
"덕천역 10번 출구"
"금정구-1번 버스" 승차
"화명수목원" 하차
주차장 지나오면
"화명수목원 전시실"
아스팔트 도로따라
위로 올라간다.
1분 후
뎨크계단을 올라가고
3분 후
"금정구 방면"
"(갈맷길6-4 상행)" →
잠시후
"海月門(해월문)"
금정산성 서문은
금정산의 서쪽 구릉지(해발 230m)에 위치하고
방어 사찰인 해월사海月寺에서 관리하였다.
해월海月의 어원은
'바다에 달이 밝아서 그림자가 없는데海月登無影
홀로 노니는 물고기가 스스로 미혹했다遊魚獨自迷' 라는
옛 선문집禪文集의 화두話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문 일원에서 보는
낙동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옛 뱃길을 따라 이동하는 선인들의
서정적 정취를 담은 서문 문루 이름을
향토사학자, 문화재위원 등의 전문가 자문과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부르게 되었다.
"서문"
안쪽으로 들어오면
버스 다니는 도로가 보인다.
"금정산성 서문ㅣ金井山城西門"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진 것이
서문이다.
서문의 초루와 ㄷ자 모양으로 조성한 성곽의 모습은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졌으며
낙동강과 구포, 김해 방면으로 왕래한 성문이다.
서문은 홍예식문(虹霓式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단층문루 건물이며,
좌우에는 폭 4m, 길이 5m, 높이 5m 규모의 적대(敵臺)와 여장이 복원되어 있다.
서문 북측 대천천의 수문은
교량식 홍예형으로
폭이 약 250cm, 높이 약 300m 규모의 수구(폭 약 230m) 3개로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수문은 금정산성에서 유일한 것으로
천연요새인 협곡에
서문과 수문을 만들었던 선조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동래부사 정현덕(1867 ~ 1874)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을 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동문을 맡은 스승은
야욕과 욕심이 많아 웅대하게만 짓고자 하였으나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성벽을 따라간다.
1분 후
목 계단을 올라간다.
"고당봉 6.4km"
"학생교육원 1.4km" →
♠ 뒤돌아 본 "서문"
3분 후
"고당봉 6.3km"
"학생교육원 1.3km" →
(이정표 두 개 지남)
8분 후
사거리 갈림길
직진으로 올라간다.
♠ 오른쪽에 개인 농장
"파리봉" 이 보여서
당겨보았다.
"고당봉 5.9km"
"학생교육원 0.9km" →
1분 후
좌측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표식 없음) →
진행방향 표식은 없는
이정표
성벽을 따라간다.
1분 후
우측에 개인 농장이 보이고
잠시후
사거리 갈림길이 되는
"암문"
내려가서 바라보고
계속 성벽을 따라간다.
3분 후
"금정산성ㅣ金井山城"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 29)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18,845m,
성벽높이 1.5~3m,
총면적은 약8.2km²에 이르는
국내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처음 산성을 쌓은 시기는
문헌상으로는 확실하지 않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 (현종8)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산성의 기초는
1703년(숙종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의 건의로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이 성을 쌓았고,
1707년(숙종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중성(中城)을 새로 쌓았으며,
1808년(순조8)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 고쳐 쌓았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부터 복원을 하여
금정산성 정비계획에 의거
연차적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 있다.
금정산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편리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북문로" 도로를 가로질러
"장대 450m" →
7분 후
"4망루 1.2km" 갈림길
우측으로 올라간다.
1분 후
"금정산성 장대(將臺)"
장대란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지은
장수의 지휘소를 말하며,
금정산성 장대는
금정산성의 중앙에 솟은 구릉 정상 (해발475m)에
산성 전체를 볼 수 있는 곳에 세워졌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벽체가 없이 원기둥이 늘어서 있어
사방을 살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703년(숙종29년) 건립된 것으로
「동래부지(東來府誌)」에 기록되어 있으나,
'여지도','부산고지도' 등에 장대건물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문화재위원들의 고증 정차를 거쳐
2009년 5월 25일 금정구민의 날에 복원되었다.
"장대" 뒤쪽에 있는 등로
♠ "장대" 를 뒤돌아보고
"4망루 1.5km" →
4분 후
우측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금정산성 4망루 1.1km" →
♠ 직진으로 등로는 없지만
"통일동산바위/주먹바위"
방향으로 질러갈 것 같은데
그냥 조신하게 길따라 둘러간다.
5분 후
"장대 600m" 길과 만나면
우측으로
"4망루 750m" →
1분 후
좌측 직진에 보이는 길은
"4망루 680m" 길이다.
우측으로 올라간다.
2분 후
좌측 갈림길에서
직진 →
1분 후
"4망루 이정목"
뒤쪽에는
"천주교목장 0.6km"
5분 후
사거리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꺽어
"통일동산바위/주먹바위" 를
다녀와서
좌측으로 갈 것이다.
▶ 왕복 10분 정도 거리 ◀
▶ 우측 초입에
"디딤돌산악회 리본" 이
하나 매여있다.
♠ 직진으로 가면
"부채바위, 3망루" 를 갈 수 있다.
▶ 억새밭이 멋진 곳을
두어 번 오르내린다.
4분 후
먼저 우측으로 내려가서
"주먹바위" 를 보고온다.
▶ 왕복 5분 정도 ◀
2분 후
"주먹바위"
옆에있는 바위
곁에 붙어있는 바위가
떨어지지 않는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내려올 때는
길을 따라 내려왔지만
올라갈 때는
암릉을 타고 올라가는데
"추모비" 도 하나 있다.
올라가며- 1
올라가며- 2
올라가며- 3
올라가며- 4
실제로는
대단히 경사진 슬랩인데
사진은 표현이 제대로 안되네!!
위로 올라오면
"통일동산바위"
"연꽃바위" 라고??
주변 바위- 1
주변 바위- 2
주변 바위- 3
주변 바위- 4
"3망루" 방향 능선 뒤로
해운대 "장산"
"동문" 방향 뒤로
"백양산"
"산성마을" 뒤로
"망미봉, 1망루, 파리봉"
능선 뒤로
"금정산 서릉" 뒤로
"김해" 산군들
능선 뒤로
"미륵봉, 고당봉"
능선 뒤로
"고당봉"
살짝 당겨본
"미륵봉, 고당봉"
"파리봉" 을 당겨보고
☞ ☞ 갈림길로 뒤돌아 간다.
▶▶ 다시 돌아온
사거리 갈림길에서
직진 좁은 산길로 간다.
♠ 우측은- "부채바위" 로 갈 수 있다.
4분 후
넓은 등로에 합류하여
우측으로 올라간다.
2분 후
"4망루"
"미륵봉, 고당봉"
"의상봉" 뒤로
"원효봉" 뒤로
"고당봉"
"의상봉, 무명바위"
"회동수원지" 뒤로
"아홉산"
"부채바위" 뒤로
"3망루" 뒤로
"장산, 마린시티"
"망미봉, 1망루, 파리봉"
"금곡" 일대
"금정산 서릉" 뒤로
"김해" 산군들
한바퀴 둘러보고
"의상봉" 으로 간다.
당겨본
"부채바위"
"회동수원지" 뒤로
"아홉산" 뒤로
"운봉산"
"금정산성ㅣ金井山城"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 29)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18,845m,
성벽높이 1.5~3m,
총면적은 약8.2km²에 이르는
국내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처음 산성을 쌓은 시기는
문헌상으로는 확실하지 않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 (현종8)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산성의 기초는
1703년(숙종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의 건의로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이 성을 쌓았고,
1707년(숙종33)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중성(中城)을 새로 쌓았으며,
1808년(순조8)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 고쳐 쌓았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부터 복원을 하여
금정산성 정비계획에 의거
연차적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 있다.
금정산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편리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3분 후
"의상봉" 아래를 돌아
"의상봉(義湘峰)"
의상봉(義湘峰, 620m)은
금정산성 제4망루가 있는
위쪽의 봉우리로,
의상봉은 용호봉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금정산 산신령인 호랑이가 나타나
승천을 저지하려고
용과 격렬한 몸싸움을 했다고 한다.
마침내 무승부가 된
호랑이와 용은 각각
위쪽은 용을 저지하는 호봉(虎峰)이 되었고
아래쪽은 용을 닮은 용봉(龍峰)이 되었는데,
두 봉우리를 합쳐
용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1970년대 산악인들이 의상봉이라 명명한 뒤
지금까지 부르고 있다.
*망대 :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높이 세운 곳
잠시후
정상석이 사라져 버렸다.
"의상봉 638m"
※ 참고로 없어진 정상석에는
"의상봉/ 640.7m" 였다 ※
오늘 바람이 너무 세차서
잘못하면 날아갈 것 같다.
얼른 내려가야 안전하겠는데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무명암" 을 바라보며 ~
시계 방향으로 ~
"망미봉, 1망루, 파리봉"
"금정산서릉" 을 따라 ~
"미륵봉, 고당봉" ~
"원효봉" 뒤로
"계명봉"
도로 건너
"철마산, 거문산"
아래 "무명바위"
뒤쪽으로는
릿지가 이어져있는데
빠른 시일 내에 올라봐야지!
당겨보면
내려오는 것은 쉽지 않다.
옆에 있는 암릉도
반대쪽에서 보면
멋있다.
♣ 나머지 사진은 2페이지로 ~ ~ ~
보고 걷고 | 서문-주먹바위-▲원효봉-북문-준행암-범어사-자장암-범어사역 2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