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외투
이은자
첫아이를 출생한지 백일이 지나자마자 둘째가 들어섰다. 잇따른 임신으로 쇠약해진 내 몸은 쓰러지면서 기둥모서리에 머리를 찧고 정신을 잃었다. 아직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큰 아이가 있는데 또 다시 둘째를 갖게 되니 건강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연로하신 시어머님께서 아이 둘을 돌보기는 힘에 부치겠기에 결국 낳지 않기로 결정이 되었다.
어느 날 병원에 가기로 맘을 굳히고 출근길을 나섰다. 몸도 마음도 아프고 착잡하여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큰 소리로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시어머님이 아들 녀석을 들쳐 업고 보를 덮은 채 뛰어오고 계셨다. 그러더니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어떻게든 당신이 길러 보겠으니 일단 낳으라는 거였다. 한 시간에 한 대만 다니는 시골버스시간이 임박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난 너무도 감격해서 길바닥에 엎드려 무릎 꿇고 절이라도 올렸을 것이다. 내 딸아이는 그렇게 가까스로 태어났다.
시어머님이 두 아이를 보는 일은 힘겨웠다. 큰애가 울면 작은애가 따라 울고, 큰애가 오줌을 싸면 작은애는 똥을 쌌다. 아픈 큰애를 병원에 쫓아다녀 겨우 숨을 돌려놓으면 작은애가 아파 응급실엘 가야했다. 기저귀를 손빨래하던 시절 며칠씩 비가 내리면 집안에 천기저귀를 만국기처럼 널어 말렸다. 남편은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느라 하숙을 하고 어머님과 외출이라도 할 때면 우유와 젖병, 기저귀와 옷 보따리를 한 짐씩 이고 지고 아이를 안고 업고 집을 나섰다.
딸이 백일 때 다니러 온 친정엄마는 진땀을 흘리며 아이 둘을 돌보는 시어머님을 보다 못해 돌때까지 당신이 길러주겠다며 딸을 업고 시골로 가셨다. 그때 이미 친정엄마는 칠순이 훨씬 넘은 연세여서 당신 한 몸도 추단하기 어려운 병약한 몸이셨다. 막 엄마와 할머니 얼굴을 알아볼 무렵 하루아침에 떼 내어 낯선 시골 외가에 떨어지게 된 딸은 얼마나 낯설고 허전했을까. 그렇게 딸은 주름투성이의 쪼그라진 외할머니를 엄마로 알게 되었다. 어쩌다 내가 다니러 가 안아보기라도 하려면 낯을 가리며 외할머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돌 무렵이 되자 친정엄마가 딸아이를 업고 와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는 아이를 떼어놓은 채 다시 시골로 가셨다. 그날 저녁에 퇴근하여 집에 오니 갑자기 엄마로 알고 있던 외할머니를 잃은 딸아이는 안절부절못하고 낯설어하며 하루 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시어머님이 전하신다. 그런 딸이 손뼉을 치고 반색을 하며 내게 기어왔다. 단지 하룻밤만을 같이 잤을 뿐인데 그렇게 피하던 딸이 내 품에 안기는 게 감사했다.
엄마는 7남매를 낳아 3남매를 잃고 4남매를 길렀는데 그마저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노산으로 나를 낳고 일을 많이 하셔서인지 엄마는 일찍 늙어갔다. 막내로 태어나 가장 안타까운 건 부모와 함께 할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일 게다. 세월 속에 흰머리가 늘어났고, 고생과 걱정으로 주름이 깊었으며 일찌감치 치아도 다 잃으셨다. 맛난 음식을 보아도 쳐다만 볼 뿐 소량의 유동식만을 조금씩 넘기니 검불처럼 가냘프셨다. 내 기억에 엄마가 화장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분첩 한통, 붉은 립스틱 하나 없이 어쩌다 외출할 때면 기껏해야 동백기름을 발라 빗질할 뿐이었다. 게다가 새 집을 지으며 몇 달 동안 일꾼들 식사와 새참, 손빨래 등 뒷바라지를 하느라 심신이 더욱 쇠약해졌다.
어느 해 그런 몸으로 유행이 지난 무거운 외투차림으로 간신히 우리 집에 다니러 오셨다. 오래 사시지 못할 것임을 예감했다. 몸에 버거운 외투를 짐처럼 입고 다니는 게 안쓰러워, 극구 만류하는 엄마를 끌다시피 백화점에 모시고 갔다. 당시 유행하던 가볍고 따뜻한 알파카 외투를 고르면서 엄마에게 어울리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과 색상으로 사이즈도 다소 큰 것으로 선택했다. 기력이 쇠잔한 엄마가 얼마 사지지 못할 것 같기에 혹시라도 훗날 물려 입고 싶은 영악한 속셈에서였다. 그러나 바느질 솜씨가 야무졌던 엄마는 당신 몸에 맞지 않는 외투가 마뜩찮으셨나 보다. 결국 다시 오셔서, 수선 집에 맡겨 소매와 기장을 당신 체구에 맞게 잘라달라고 하셨다. 그 외투를 엄마 몸에 꼭 맞게 고치면서 제발 엄마가 오래 사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 외투를 몇 번이나 입어 보셨을까? 그 해 겨울을 마지막으로 엄마는 돌아가셨다. 임종소식을 듣고 엄마를 빼닮은 이모가 달려오셨다. 미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이모는 그 외투를 내심 갖고 싶으셨나보다. 혹 망자를 위해 유품을 태울 게 아니라면 당신에게 줄 수 있는지를 조심스레 물어왔다. 제가 입을 거라고 이모님께 말씀드렸지만 말할 수 없이 미안했다. 그 후로 내게는 좀 작기에 장롱 속에만 걸어두다가 언제가 이모님께 갖다드려야겠다고 맘먹고 있었다. 그 외투가 늘 맘에 걸려서인지 어느 날 친정엄마가 자꾸 춥다고 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애당초 돌아가셨을 때 입고 가시라고 태워드리지 못한 나의 이기심과 죄책감이 그런 꿈을 꾸게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그 외투는 태우게 되었다.
첨부터 그 외투를 엄마 몸에 꼭 맞는 것으로 사 드렸더라면 엄마가 두 번 걸음 하 지 않고 흡족하기라도 하셨을 것을, 이모님께라도 선뜻 내줘 기쁘게라도 해드릴 것을, 돌아가셨을 때 바로 태워 입고 가시게라도 해드릴 것을, 나아가 더 큰 병원 더 유명한 명의를 찾아 최선을 다해 볼 것을. 엄마는 용돈을 드리면 언제나 시골로 내려가 내 집 어딘가에 살그머니 놓아두고 왔노라고 연락을 해오셨다. 그 후부터는 나도 엄마처럼 가시는 가방 속에 몰래 찔러 드리고는 연락을 했다. 엄마 임종 후 그때 드린 수표는 한 푼도 헐어 쓰지 않고 꼬깃꼬깃 접힌 채 주머니에서 나왔다. 쓰기 좋게 잔돈으로 바꾸어 드리지 못한 짧은 생각과 나의 아둔함이 두고두고 원망스러웠다.
이런저런 회한이 남아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 한동안을 마음이 텅 빈 허깨비로 살았다. 그러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게 엄마는 자식들의 허물과 잘못을 감싸 가리고, 추위와 더위로부터 보호해주며, 풍파를 막아주는 든든한 바람막이 외투였다는 것을.
이은자: lej_1107@naver.com
2019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지송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