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5장 13절 -21절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도 의미가 있고, 밤과 낮이 있는 이유가 있고, 개개인이 다른 모습과 성격을 지닌 것도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만물은 의미와 목적을 지니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따르는 하나님, 그분의 말씀만이 우리의 목적에 대해 말해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성경이 쓰인 목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이,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인 성경의 목적은 우리 개개인에게 ‘영생’,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입니까? 영원불사로 살아가는 것이 영생입니까? 영원을 꿈꿨던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찾고, 사후에도 부와 권력을 누리기 위해 병마용을 만드는 것으로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영생은 어떤 평화와 안녕, 건강과 번영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영생을 어떤 행복과 안녕의 차원으로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20절을 통해 영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영생이란 영원불사의 삶을 영위하며 평화, 안녕, 번영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즉, 영원의 근원이며 영원 속에 계신 전능한 하나님 아버지와 결합을 의미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영생은 전능한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과 동거하며, 동행하며, 그분과의 사귐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동거와 동행, 사귐은 어떤 무릉도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왜 사도 요한이 ‘영생’의 정의를 내리는 것입니까? 요한일서의 수신자들은 큰 신앙적 도전을 마주하였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의 도전이 그것입니다. 영적 깨달음과 앎의 문제에 골몰하던 영지주의자들은 육신과 그로 인해 파생된 모든 것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기독교의 핵심진리,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육신을 입은 성육신 사건을 부정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부정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사실을 결코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구원과 영생이란 어떤 영적 깨달음을 통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영적 깨달음이 중요하기에 현실은 도외시하며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현실의 모든 문제는 열등하고 하등한 문제로 취급했는데, 당시 그들의 가르침이 교회와 성도들의 근간을 흔들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를 바로 잡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만난 진리의 근원, 예수님을 요한복음 1장 14절을 통해 증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경험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결코 영적 존재에 불과하거나 관념적 사상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연약함을 체휼하기 위해 스스로 연약해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주신 사명은 육신의 일과 무관한 고매한 영적 과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요한의 사명은 고된 노동에 가까웠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린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특별한 임무를 주었습니다. 모친, 마리아를 모시는 일입니다. 구전에 의하면 마리아는 장수하였습니다. 사명을 받은 요한은 다른 사도들이 순교로 세상을 떠난 뒤, 뒤늦게 복음의 현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의 관점에서 하등한 육에 속한 봉사를 했지만, 요한의 영성은 영지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도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성을 압도하는 깊이가 있었습니다. 특히 계시의 절정, 요한계시록을 주님께 직접 듣는 탁월한 영성을 지녔습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적 깨달음, 그리고 영의 일만이 고매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뱃사람으로 거칠고 약삭빨랐던 요한은 40년 가까이 오직 마리아를 봉양하는 일을 통해 바뀌었습니다.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사도로 변한 것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통해 영생의 참 의미를 알고 체화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사명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동거했고, 동행했으며 사귀었습니다. 마침내 영생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안에서 형제자매 된 이들이 동일한 영생을 누릴 것을 애정어린 요한일서를 통해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다수 서신서는 문안과 격려로 끝을 맺습니다만,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의 웅변적 외침으로 끝을 맺습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열심을 낼수록 하나님의 허상을 좇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상이란, 나의 욕망을 좇는 일이며 하나님의 허상을 섬기는 일입니다. 요한도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의 허상, 영적 깨달음에 매몰된 영지주의자들과 가르침에 현혹된 그리스도인들을 마지막까지 깨우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제가 종교적 제의는 모두 지켜왔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어라." 주님의 말씀이 청년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성경은 부자였던 젊은이가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기록합니다. 부자 청년의 열심은 참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지 못한 채 종교적 허상을 따르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교묘하게 숨어있는 우상을 발견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있는 우상을 파괴하십시다.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주님께서 거하실 집을 아름답게 가꾸어가십시다. 예수님의 말씀에 부끄러운 뒷모습을 보인 부자청년은 되지 마십시다. 주님이 주신 사명, 마리아를 돌보는 요한처럼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여 내게 주신 자리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주님의 사람들, 영생의 소유자들이 되십시다.
기도
하나님, 요한을 통해 주신 사랑의 서신을 오늘 받았습니다. 서신의 목적이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하시니 참 감사합니다. 영생은 안녕과 평화의 차원이 아니라, 각자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의 동거· 동행· 사귀는 것임을 다시 가슴에 새깁니다. 허상을 좇았던 부자청년의 어리석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허상을 이겨내고 사명을 따라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고 참된 영생을 누리는 하루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