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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종말과 카프카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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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변신>과 신자유주의의 <변신>
<ESG자본주의>가 우릴 구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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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는 <변신>에 대한 인문학적 통찰로 <ESG자본주의>를 좀 더 들여다 보기다.
소설 <변신>은 1915년 발표된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이다
이야기는, 어느 날 아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영업사원 그레고르 잠자가 침대 위에서 거대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변신>이 출판된 1915년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 다음 해다.
1차 세계대전은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시작되었고,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지금의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의 팽창이 극에 달하고, 경쟁세력이 겹치면서 발생했다.
제국주의는 19세기 후반 서구열강이 좋게 말해서, 값싼 원료와 상품시장, 투자처 확보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사실은 산업화로 얻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 약소국을 정치, 경제적으로 식민 지배하려 한 팽창주의다.
산업화의 후발주자 독일 역시 식민지 쟁탈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영국 프랑스가 이미 대부분을 선점한 상태였다.
후발주자 독일의 자리가 없었다.
결국 독일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자리를 뺏고자 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다.
“유혹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외양을 띠고 있다.
유혹은 우리를 노골적으로 악으로 초대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서툰 짓일 것이다.”
히틀러 암살을 음모하다 실패하고 사형을 당한 독일의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가 자신의 저서 <유혹>에서 한 말씀이다.
제국주의 역시 식민지쟁탈의 명분이 필요했다.
도덕적인 외양으로 악마의 뿔과 꼬리를 숨기기 위해서, 우생학적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을 끌어온다.
사회진화론은 스펜서가 정립한 이론으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사회에 적용한 이론이다.
사회나 국가도 생물처럼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인종주의(Racism)는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본다
물론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특히 백인이 흑인 또는 황인보다 생물학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유색인종이 백인의 지배를 받는게 자연이치에 맞다는 주장이다.
우생학(優生學, eugenics)은 1883년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이 처음 제창한 이론이다. 인간의 유전적 자질을 개량하여 인류 전반의 유전적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본다.
1883년은 영국이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맞서 동아시아에서 자국 이익을 지키려, 조선(대한제국)과 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해다.
영국 주도의 불평등 조약으로, 거문도 사건의 빌미가 된다.
골턴의 우생학은 영국의 제국주의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식민지쟁탈을 도덕적 명분으로 <변신>하기 위해 나온 이론이다.
골턴의 우생학은 어용 지식인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제국주의는 산업국으로 정치군사적 전략적 우위는 이미 확보됐고, 문명국으로 이제 도덕적으로도 우월해야 했다.
그래서 진화론 역시 사회진화론으로 <변신>시킨다.
인종주의는 너무 노골적 악이다.
그래서 우생학적 인종주의로 <변신>시킨다.
<인종주의>는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이라는 유사과학(사이비 과학)의 이름으로 <변신>한 덕에 충분히 살아남는다. 제국의 충견으로 말이다.
식민지쟁탈전인 세계대전은 <적자생존>이라는 오직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밀림과 같다.
각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각자‘에는 식민지국가들은 제외된다.
식민지국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들 또한 몸부림치지만 살아남기위한 몸부림이 아니다.
그냥 고통에 몸서리칠 뿐이다.
살아남을 자격도 능력도 의지도 없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이 침대에서의 몸부림이다.
우생학적으로 가장 열등한 벌레의 몸부림이다
카프카의 <변신>이 쓰여지는 순간이다.
이렇듯, <변신> 역시 그 시대적 산물이다.
다만 처절한 절망을몸부림으로 극대화하고, 문학적 상상력으로 <변신>시켜, 기록할 뿐이다.
아니 기록함으로 저항할 뿐이다.
아니 <변신>을 기록함으로 훗날 <혁명>의 불씨를 남길 뿐이다.
이렇게, 카프카의 <변신>은 시대의 실존적 부조리함에 대한 장렬한 고발이다.
다만 유예된 판결이다.
고발과 판결에 앞서 죽어버린 우리의 주인공 잠자를 애도할 뿐이다.
우리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에게서 자신을 봤다면, 당신은 분명 <혁명>의 불씨를 가슴에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덕분에 미완의 촛불혁명이 빛의혁명으로 피어났음이다.
그러나 아직 <혁명>을 말하기엔 이르다.
잠자가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다. 방문이 열리고, 그레고르의 어머니인지 여동생인지 빗자루를 들고 들어온다.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등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박혀있는 채로 죽어있다.
그레고르의 어머니인지 여동생인지 빗자루로 그레고르를 꾹꾹 찌르며, 죽은 지 확인하는 장면이다.
진즉에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이다.
빗자루라? 그럼 카프카의 주인공이 드디어 재활용의 가치도 없는 완전히 치워져야할 쓰레기로 <변신>했음이다. 쓰레기로!!
”액시언Acxiom(데이터베이스 마케팅 전문기업)은 사람들을 오로지 경제적 관점에서 70가지 범주로 분류한다.
고객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낮은 개인들의 집단은 ‘웨이스트waste’라고 불린다.
쓰레기라는 뜻이다.“ (한병철의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김영사/ p37~38)
소비를 찬양하고 강제하는 천민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만약 당신이 일주일에 적어도 몇 십만원 이상 소비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쓰레기다.
아! 구토를 참을 수 있겠는가? 조금 참아라!
혹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구원의 길이 있을런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쿤데라 역시 카프카와 같이 체코 출신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영화 <프라하의 봄>으로 만들어졌다.
전두환의 군사반란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제목 <서울의 봄>이 <프라하의 봄>에서 착안했으리라 짐작된다.
그 만큼 ‘프라하’는 1915년의 카프카 때나, 1968년 68혁명의 쿤데라 때나 이념이 현실을 옥죄는 공간이었다.
여기서도 밀림과 같이, 누군가는 살아내고 또 누군가는 도태된다.
또 누군가는 삶과 도태의 칼날 경계선에서 곡예하듯 산다.
이 또한 살아남기 위한 <변신>일테지만!
이 <변신> 또한 ‘스스로’와 ‘강요’ 사이의 팽팽한 긴장, 그 자체였으리라!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카프카가 존재의 무거움으로 <변신>을 토해내는 순간이다.
순간이라는 시간이 칼날같은 공간과 만난다.
어찌 가슴에 담을 여유가 있으랴! 토(吐)하지 않고 견딜 수 있으랴!
이 또한 ‘살아남기‘위한 본능이라!!
이는 사르트르의 작품 <구토(嘔吐)>에서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이 “세상은 우연성과 허무”를 깨닫는 순간 했던 구토다.
세상은 필연적인 이유 없이 그냥 거기에 존재할 뿐이다
사물은 존재하는 목적이나 의미와 같은 것은 없다.
사물은 본질 이전에, 그저 덩어리로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그냥 거기 우연히 있을뿐이다. 창조주의 섭리에 의존했던 자들에겐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느낀 <구토>는 카프카가 토(吐)해놓은 <변신>에 비하여 지극히 관념적이다.
사르트르의 우연성과 허무에는 카프카의 흉칙한 벌레의 물성이 없다.
사르트르가 느낀 <구토>는 대상을 보고 느끼는 역겨움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자신이 역겨운 대상 그 자체다.
어느날 침대 위에서 거대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신한 자신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석가모니께서 “삶이란 고통이다”라고 하신 뜻을 어렴풋하게 알듯하다.
生이란 소牛의 외줄(一)타기다.
칼날 위에서 곡예만큼 베이거나 떨어지거나 양자택일이 일을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떨어질 것인가?
벌레로 <변신>할 것인가? 아니 <변신>당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에 사는 우리의 청년의 현실이다.
자살율1위 헬조선이다. 헬(hell)은 지옥이다.
끝없는 지하동굴로 추락으로, 희망없음을 의미한다.
악마도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성경'을 인용한다.
윤석열이 감방에서 아침저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고 한다.
김건희는 구약을 줄줄 외운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한 쑈일테지만!
이렇듯, 악마가 살아남기 위해 성경을 빌려쓰둣, 착한 자본을 무이자로 빌려 쓴 ‘ESG 자본주의‘에서 아직 <변혁>의 진정성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다.
카프카의 주인공 고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사회진화론으로 포장된, 제국주의의 착취적 자본주의에 의한 강요된 <변신>이다.
우생학적 인종주의 역시 잠자의 강요된 <변신>과 같이, 인종주의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렇듯, ESG자본주의 역시 살아남기 위한 강요된 <변신>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선택했든, 강요된 <변신>이든, ESG자본주의의 운명은 어찌될까?
<변혁>이 아난 모든 <변신>은, 자의든 타의든, 카프카의 주인공 고레고르 잠자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반론도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의 1992년에 출간한 <역사의 종말>이 있다.
<역사의 종말>은 신자유주의의 최종 승리로 역사가 끝났다는 뜻이다.
냉전종식 후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인류 이데올로기 진화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다는 내용이다.
출간 당시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주장이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도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렇게 <ESG자본주의>에 대한 반응 역시 뜨겁다.
이는 <역사의 종말>과 같은 운명을 예고하는게 아니겠는가?
ESG자본주의 역시 자체모순으로, 또는 환상적인 대안체제의 공격으로 무너질 수 있음이다.
<변신>의 주인공 잠자는 제국주의의 운명을 예고하듯, 잠자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서, 그 상처가 깊어저서 죽음에 이르듯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외과의사 토마시와 그의 아내 테레자는 소설 후반부에 시골로 내려가 트럭 운전과 농사일을 하며 조용히 살다가 트럭에 치여 함께 죽음에 이르듯이 ESG자본주의 역시 사라질 수 있다.
ESG자본주의는 자체모순도 아니고, 환상적인 대안체제의 공격도 아닌,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 그 어디에 있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갑작스런 죽음과 같이, 의미와 무의미와 사이에, 그 어디에 있을 <변신>의 어이없는 이 죽음과 같이!, 사라질 수 있음이다.
세상에는 원인도 불분명하고, 우연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네안탈타인의 멸종과 발해의 멸망이 있다.
ESG자본주의가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당분간 <변신>의 생명력은 강하다.
지난 우리의 역사는 청산해야할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였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은 적폐를 용서한 역사였다.
앞으로는 살아남아 또 다른 배신을 꿈꾸는 <착한 자본>에 속은 역사로 남을 수 있다.
수구꼴통 우위라는 기형적 원형은 또 이렇게 살아남는가? 젠장!!
<변신>의 생명력을 얕보지 말라는 말이다.
우생학적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은 오늘날 ‘미국제일주의’ MAGA로 <변신>하고 있다.
<변신>의 강력한 생명력을 증거하고 있음이다.
'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MAGA복음은 아메리카가 고난과 죽음을 주변국에 강제함으로 패권국임을 증명한다.
자신의 마가복음을 다시 쓰려했기 때문인가?
트럼프는 대통령선서 때, 성경에 손을 안대고 선서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미국은 위대하게 <변신>중이다.
하여, 갑각류가 탈피하듯, 뱀이 허물벗듯 부활하여 옛 영광을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변신>이 그렇듯, MAGA로 <변신> 역시 그레고르의 운명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22세기의 디지털리스트와 18세기의 페더럴리스트(연방주의자)의 전면적 충돌이 내전을 촉발하고 미합중국의 붕괴를 야기할지도 모른다.
과연 역사가 증언하는바, 일국가 일체제가 300년 버티기가 녹록지 않았다.
그리스의 민주정도, 로마의 공화정도 결코 오래가지를 못하고 고꾸라졌다.”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 p80)
“사과에 맞아 고꾸라졌다. 트럭에 치여 고꾸라졌다.
미국이 내전으로 고꾸라졌다.
중국이 50개 소수민족으로 분열하여 고꾸라졌다.”한들 무슨 소용인가?
지구행성이 종말을 앞두고 있음이다.
자본주의가 <변신>의 <변신>을 거듭한 덕분이다.
스티븐 호킹이 경고했다.
“AI가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면 인류의 통제를 벗어나 인류 멸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걷잡을 수 없는 온난화가 지구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다.
인간의 공격적인 본능과 기술 발전이 결합해 만든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가 스스로를 파괴할 것이다.
인류가 멸종을 피하려면 앞으로 100년 이내에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시작해야 한다.”고.
그러나 호모 사피엔스는 자본주의의 <변신>을 멈출 생각이 없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가 절실함이다.
<이주>와 같은 공간의 이동도, ESG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시 살아남기 위한 <변신>의 한 형태다. 이를 진즉에 준비한 자가 있다. 바로 일론 머스크다.
일론 머스크는 화성 <이주>를 추진하기 위해서 <스페이스X>를 설립했다.
우주선을 이용해 화성에 식량과 에너지 자급자족이 가능한 도시를 건설할 계획이다.
2050년까지 100만 명 이주를 목표로 <변신>에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2026년 말까지 화성에 첫 유인탐사를 시작한다고 한다.
여기 100만 명에 들지 못한 나머지는 ‘웨이스트waste’라고 불린다.
그렇다면, “ESG자본주의가 ‘웨이스트waste‘를 구원할까?”
이 물음에, “ESG자본주의는 변신이냐? 변혁이냐?
ESG자본주의가 통일코리아의 비전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무색해졌음이다.
다만 ‘쓰레기재활용‘이 생존의 무게로 느껴진다.
2026년이 3일 남았다. 12.3내란의 한 해, 을씨년스런 을사년이 저물고 있다.
해는 저물고, 나그네의 발걸음은 무겁다.
일출에서 일몰을 보는 것을 지혜라 하고, 일몰에서 일출을 보는 것을 지성이라 한다.
일출에서 일몰을 봤다면 좋았으리라.
하나 지혜를 놓친 까닭에 지성마저 잃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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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글) 지금바로 민족통일로, 통일당준비위원회
이재명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우성·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