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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忠節)이라 함은 충성 스러운 절개(節槪) 또는 굳게 충의(忠義)를 지키는 지조(志操)를 뜻함이니 본란(本欄)에서는 나라에 충성(忠誠) 한 절의(節義)를 말함이다. 平簡公 韓 公 義(평간공 한 공 의)10세 충렬왕33년(1307)공민왕14년(1365)高麗國三重大匡淸城君贈諡平簡韓公(諱 公義) 동영상 왕이 즉위한지 14년에 비로서 平簡公(평간공)이 密直副使(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에 장차 다가올 원나라의 새 왕조인 정조를 하례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사절을 보내려고 신들이 회의를 열어 원나라 승상이 궁전 뜰에서 투구와 갑옷으로 천하를 호령하며 일찍이 뵙기를 재촉하니 실로 죽음을 무릅쓰고 보낼 적격한 사절을 선정하기 곤란하다고 왕에게 고하니 왕이 그 즉시 傳旨(전지)를 내리기를 "한모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하고 공을 불러들여친히 "정유년에 聖節(성절)을 하례하러 갔을 때도 무나히 잘 다녀 왔으니 나는 가상히 여겨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네가 또 가서 공경히 할지어다"하니공이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신과 같이 불초한 자가 樞府(추부)의 자리만 지키고다른 재능이 없어 聖恩(성은)의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고 있는 터에 어찌 감히 사명을 피하오리까?"하고 사절로 가니 과연 왕의 뜻에 부합한 바 있었다.얼마 후 封君(봉군)되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 기용되기를 기다렸더니 아!, 슬프다,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公의 성은 한씨이니 대대로 청주사람이었다.먼 조상에 蘭(란)이란 분이 계셨으니 고려 개국의 공이 커서 三韓功臣(삼한공신)의 호를 내렸다. 그 후 이름이 있는 분은 康(강)이니元宗(원종) 때에 成均館(성균관)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충렬왕을 도와서두 번이나 知貢擧(지공거)로 국가의 고시를 관장하였으며, 中贊(중찬)으로 임명되시니시호는 文惠(문혜)였다. 문혜공이 諫議大夫 謝奇(간의대부 사기)를 낳았고簡議公(간의공)이 上黨府院君 渥(상당부원군 악) 낳으니 시호는 思肅(사숙)이며 충숙왕이 원나라에 참소 당하여 욕보고 있는 것을 기발한 계책으로 왕을 위기에서 구하였고 또, 충혜왕을 도와서 두 번이나 정승이 되어 大廟(대묘)에 배향되었다. 사숙공이 同知密直典理判書 元卿(동지밀직전리판서 원경)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장남 大淳(대순)은 죽었는데,벼슬이 知都僉議司事(지도첨의사사)였고 中禮(중례)와 方信(방신)은 다 政堂文學(정당문학)이었으니 공은 차서에 있어 그 둘째였다.형은 아우를 우애하고 동생들은 형에게 공손하여 사람들이 모두 형제애를 흠모하였고,또 다른 형제는 불법을 배워 覺星(각성)이라 이르니 조계종의 학자라,공의 이름은 公義(공의)요, 자는 宜之(의지), 향년 59세였다.처음에는 錄南部事(녹남부사)가 되었더니 충혜왕이 알아보고 계급을 초월하여 護軍(호군)에 제수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大護軍三司右尹(대호군삼사우윤)이 되었다.그 때에도 안정되고 경거망동하지 않는 굳은 심기로 인해 세상 일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全州牧(전주목)으로 나가 백성에게 惠政(혜정)을 베푼 바 있고 충목왕 때에 小府(소부), 衛尉(위위), 繕工(선공)의 세 判事(판사)를 역임하였고 충정왕 때에는 代言(대언)에 발탁되었으며,왕이 遜位(손위; 왕위를 이성계에게 물려 줌) 하던 날 白馬山(백마산) 아래로 달려가 사사로 "임금과 신하는 모름지기 시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니 왕이 공은 충성이 있다 하여그 재능을 시험한 것이 오래전이더니 관제를 개정하면서 散騎常侍(산기상시)에 임명하고 곧 戶部尙書(호부상서), 2년 후 形部(형부)로 옮겼는데 토지에 대한 송사가 법대로 처결되지 않는다고 여러 사람들이 떠들다가 공이 들어가서 일에 따라 처결하니 원망하는 사람이 없더라. 그가 조정에서 결재할 때 옳지 못한 것은 반복해서라도그 것을 고친 후 서명하였다. 부인 慶(경)씨는 右大言 斯萬(사만)의 따님이요.贊成事 鄭해(찬성사 정해; 王+皆; 검은 옥돌 해)의 외손인데 남편에게 화순하고 자녀들이 본 받는 어머니였다. 아들 셋이 있는데 脩(수)는 학문을 좋아하고 옛 것에 능하여 과거급제를 거쳐 관직에 나가 현재 軍簿判書(군부판서)로 있으며, 다음 理(리)도 역시 과거급제하여 현직 開城判官(개성판관)이요.그 다음 齊(제)는 별장으로서 과거를 보려고 학업을 닦고 있고 딸 3명은 모두 먼저 죽었는데 宗簿令 金士謙(종부령 김사겸)과 三司右尹 李彰路(삼사우륜 이창로)와 軍簿判書 廉興邦(군부판서 염흥방)은 그의 사위들이다. 손자가 넷인데 右復(우복)은 別將(별장)이요, 다음이 善復(선복)이고 그 다음은 다 어리며 손녀가 5명이다. 외손자인 金禑(김우)는 權務(권무)이며, 손녀2명이 있다. 장차 12월 甲申日(갑신일)에 臨津縣 瑞谷(임진현 서곡) 남쪽 산기슭에 장사 지내려 하는데 脩(수)와 興邦(흥방)이 와서 墓銘(묘명)을 내게 구하니 공의 아들과 사위는 모두 나의 벗들이다.벗의 아버님 묘에 銘(명)하는 것을 어찌 사양하겠는가.공께서 賢詳勤儉(현상근검)하셨고 예법에 따라 행동이 일체하였으며 온화하였으나마음의 뜻을 펴지 못하여 經世濟民(경세제민)의 才具(재구)로 하루도 국정을 맡지 못한 것도 역시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몸과 행실을 바로하고 아들들을 가르쳐 모두 출세시켰으며 돌아가신 후에도 아름다운 시호를 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후세에 전하기에 족하며 유감이 없다."문혜공의 손자요 사숙공의 아들이니 그 형제들이 모두 이름을 떨치도다.공이 왕을 처음부토 끝까지 한결 같이 섬기니 충정왕은 그의 충성은 묻지도 않고 먼저 재능을 시험하여 두 번이나 원나라에 조관함을 수행하니 왕이 칭찬하였다.이에 사람들은 이제야 때가 왔다고 하였으나 공은 물러나고 말았다.어떤 공도 이보다 높을 리 없건만 거기에 그치고 말았으니누가 하늘의 이치를 증명할 것인가.내 여기에 시를 지어 오는 세상에 물어보리. 1365년 겨울 졸하니 향년59세시요, 시호(諡號)는 평간(平簡) 이다.배위 청주 경씨는 대언 사만 (大言 斯萬)의 따님 이고 아들은 판후덕 부사 문경공 수와 이부상서 충간공 리(理) 호부판사 제(齊) 이다. 공이 공민왕 14년 91365) 10월 졸하여 동년 12월 임진현 서곡 장단군 진동면 단곡리남쪽 산록에 장사 하고 목은(牧隱) 이색(李穡) 이 비문을 지어 묘비를 세워으나 오랜 풍상을 거치고 난세병화로 퇴멸 되어 1993년 청명절 개수 하였다. 배위 청주 경씨(淸州慶氏)는 공과 합폄(合貶)이다. 恕齋公 韓 천(서재공 한 천)11세?~태종3년(1403)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 삼중대광첨의 우정승 악 의 손자로 지도첨의사(知都僉議司事) 대순(大淳)의 아들이다. 1365년 공민왕14년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고부(古賦)로 민안인(閔安仁) 등 55인 십운시(十韻詩)로 임 한(林翰) 등 41인을 뽑았으며 1371년 경상도 도순문사가 되었다,1391년 공양왕3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거쳐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으로 찬성사 성석린(成石璘)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유배 되었으나 뒤에 풀려나와 조선 건국후 1393년 태조2년 태조로부터 전조대신(前朝大臣)71인을 포상하라는 명에 의거 개국 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장관공신녹권(張寬功臣錄券)에 실려 있음)이 되어 원종공신(功臣田)전 15결과노비 2명을 받았다.1400년 정종2년 권희(權禧) 등과 함께 팜산사사로 치사(致使) 하였다. 그리고 1403년 태종3년 검교시중(檢校侍中)으로 졸하였다. 배위 (配位)광산 김씨는 대제학 진(大堤學)의 따님으로 무후(无后)이다.고려사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공민왕 20년(신해 서기 1371년) 2월에 한천을 경상도 도순문사로임명했다.공양왕 3년(신미 서기1391년)에 한천을 판개성부사에 임명했다.공양왕 4년(임신 서기1392년) 7월에 예문관 대제학 한천을 유배 보냈다.또한, 려사제강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공양왕 임신 7월에 공양왕이 원주에서 왕위를 이성계에게 양위하였다.이태조는 단양군 우성범과 진원군 강회계를 목 베어 죽이고 예문관 대제학 한천을 외곽지대에 유배 보냈다.고려사를 살펴보면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여 우성범, 강회계는 참살하고 한공은 외곡에 유배 보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과 지조가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 마치 해와 별처럼 환하다. 忠簡公(韓 理)(충간공 한 리)11세忠簡公(諱 理)(충간공 휘 리)공은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이며 휘는 理이다.평간공 공의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묘 배향공신인 삼중대광 도첨의 우정승 사숙공 악의 손자이다.고려 공민왕 11년(1362) 10월, 감문위 녹사로 문과에 응시하여 동진사 제 17인으로 급제한 후 우왕 1년(1375) 7월 시중 이인임이 김의와 공모하여 명나라 사신을 죽이고도 죄를 면했다는 등의 네가지 죄목을 들어 간관 이첨과 전백영이 상소하므로 공이 親從護軍(친종호군)으로 옹양군 상호군 이인열과 함께 이인임의 뜻을 호응하여 글을 올리기를 간관이 재상을 논핵하는 일은 작은 것이 아니오니 변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이에 이첨과 전백영을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일찍이 공민왕이 子弟衛(자제위)를 설치하더니 급기야 사건이 발생하자 우왕 2년(1376)에 韓 安(한 안)의 족이라 하여 공을 먼 고을로 유배 보냈다.공양왕 3년(1391) 7월에 세자를 명나라에 朝見(조견; 인사)하려 보내려 하자 공이 예조판서(상서)로 상소하기를, 지금 세자를 명나라에 조현케하려하나 신이 생각컨데 즉위하신지 3년만에 처음으로 명나라 조정이 사신을 보내 말 일만필을 구입하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낸 것은 2천필에도 못미치니 세자가 명나라에 갔다가 갑자기 이것을 책망하게 되면 세자가 무엇으로 대답하오리까,원컨데 전하는 다시 신료들과 의논하여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왕이 도당에 명하여 이를 다시 의논케 하였다.그 해 12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에 앞서 공은 한 천과 우성범, 강준 등과 함께 벼슬하여 매우 교분이 두터웠으며포은 정몽주와도 생사를 맹서한 친우로서 사돈을 맺었고, 문장덕행으로 당세에 이름이 높았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혈족간의 비호로 유배를 면하고 조선 건국 후에는 태조의 명으로 고려 왕실인 왕씨의 제사를 총괄하였으며,태조 3년 7월 17일에 왕이 왕씨의 명복을 천거하여 당시 전예의판서(상서)이던 공에게 명하여 법화경 4부를 금으로 글자를 써서 각 절에 나누어 분치하게 하였다. 한 때 계림부윤으로 좌천된 후 태종 5년(1405)에 노비 변경 사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양인인 박상문 등을 민 제, 권 홍 등이 천인으로 만들어 사역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졌다.태종은 사헌부와 형조에 진상 조사를 시켰는데 전 계림부윤 한 리도 이 릴에 연루되었다 하여 안성으로 유배 되었다가 몆 년후 풀려나 집에 기거 중 태종 17년(서기 1417) 11월 13일에 졸하니 태종은 시호를 충간이라 내렸으며 장례품 일체를 하사하는 후대를 베풀었다. 이는 왕의 총애가 지속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부인은 정부인 광산김씨로 충정공 속명의 따님이고 아들은 문과총제 포은 정몽주의 사위인 승안,중추원부사 청성군 승순이다.공은 부친인 평간공의 묘 아래쪽 청룡 하단 300m 쯤의 癸坐(계좌)에 안장하고 배 정부인 광산김씨는 아래쪽이다. 공이 돌아가신 후 102년인 중종 14년(1519)에 5대손 영의정 효원이 묘갈명을 짓고 406년이 지난 1925년에 18대손 참전대신 규설이 지은 묘표도 6,25 동란으로 훼손되니 제손들이 새로운 비를 도모하여, 1993, 4, 5에 임시정부 국무위원,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조경한의 찬으로 개수하였고 매년 청명일에 세일제를 드린다. 夢溪公(韓 哲 沖)(몽계공 한 철 충) 13세충숙왕8년(1321)~? 고려말의 문신으로자는 홍도요 호는 몽계 이니 판서공 희적의 아들이고 참의공 연의 손자이다. 諱(휘)는 哲沖(철충)이니 本貫은 淸州요. 陜天(합천)에 居하셨다. 선생은 고려 말엽에 출생하시어 經學에 밝고 言行을 바르게 닦았으며 知德을 兼備하여 學文이 純美하고 藝技가 高明하였다. 少年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여 덕망이 뛰어 났으며 좋은 벼슬 자리를 역임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아 지위가 典法判書(전법판서)에 까지 이르렀더니 高麗의 國運이 終末을 告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절개를 굳게 지켜 종적을 감추고 이 세상을 마치셨다. 일찍이 掌令(장령)으로서 楊廣道按廉使(양광도안염사)에 特拜(특배)되어 부임 길에 오르는데 興安君 文忠公 樵隱李(흥안군 문충공 초은이) 先生이 贈別詩 한 폭을 주었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經傳에 關한 儒學界에 있어 귀중한 보배요, 청렴한 治績은 세상이 모두 賢人으로 받드는 터이요, 判詞에 기재된 文辭는 國論에 간여되는 바 많고 特命으로 받은 簡策은 朝庭 官僚界를 숙연케 하오. 결백한 善治에 의지가 더욱 견고하도다. 名聲(명성)과 威光(위광)이 形罰(형벌)보다 앞서 갔고 到任(도임)하는 행차 모습은 바람결에 나부끼는 깃발에 빛나도다. 王室의 모든 일이 급하다 한들 백성들의 일이 또한 可憐(가련)하지 않은가 과도하게 거두는 租稅가 그칠 날이 없고 兵亂을 알리는 烽火가 아직도 계속되네. 바다가 다 말라 凶年(흉년)이라도 밥은 지어 먹어야 하고 山이 헐벗어 빈 동산이라도 사다리 만들 나무는 남아 있으리. 방랑의 유랑민도 즐거운 살 곳을 찾을 것이요 과부나 홀애비들도 豊年 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요 이왕부터 지니고 있는 재산이 없음을 각오하였지만 장차 처지가 바뀌면 그 때의 괴로움을 뉘라서 해결하여 줄 것인가. 어려운 백성을 구휼할 때는 시간을 지체하지 말 것이며 訟事를 재판할 때는 편중되게 사정을 써서는 아니되오 들이 시원하게 터였으니 전답도 널찍하고 봄 일기가 쾌청하니 온갖 物色이 美麗하도다. 君의 廳舍는 江流가 명주 띠 같이 둘러있고 本官의 도임 길에는 버들 꽃이 날리네. 詩를 써서 珠玉 같은 글을 주고 받고 하며 노래를 부르니 管絃奏樂이 갗추었도다. 우두커니 바람 앞에 섰다가 달빛을 따라 자리를 옮기노라. 돌아 보건데 난는 이제 늙었도다 이별하는 마당에 홀로 암담할 뿐 일세 원컨데 그대는 노력하시어 우리의 儒道를 흥케 해주오.公의 諱(휘)는 哲沖(철충)이니 淸州人이다. 先考의 諱는 希迪(희적)이시니 禮儀判書요, 高麗開國功臣 太尉 韓蘭은 즉 鼻祖가 되신다. 公은 3娶(妻를 세명 두시다)를 하셨는데 初娶는 李氏요. 再娶는 安東 權氏니 代言 確의 따님이요, 다음 再娶는 永嘉 張氏(영가장씨)니 判衛尉 之順(판위위 지순)의 따님이다. 4男 2女를 두시니 아들 중 珍(진)하시는 분은 郡守였고 廉(염)하는 분은 文科에 及第한 尙州牧使(상주목사)였고 兼(겸)하는 분은 代言公이요, 讓(양)하는 분은 麗節校尉(려절교위)였다. 따님 중 한 분은 平海郡守 柳伯通(평해군수 류백통)에게 출가하고 또 한 분은 大司憲 李垠(대사헌 이은)에게 출가하였다. 公은 少年時節에 文科에 及第하여 名望이 높았고 여러 官職을 歷任하여 典法判書(전법판서)에 拜任(배임)되시었더니 高麗가 亡하자 李朝에는 臣下가 될 수 없다고 하여 行跡을 陜川 釣洞에 감추고 隱居하시다가 一生을 마치셨으며, 號를 夢溪라 하였다. 陜川郡의 西便 粉土洞 子坐에 자리한 山麓에 禮葬되었고 天啓 甲子年(仁祖 2년, 서기 1624년)에 許函(허함)이 陜川 郡守로 來任하였는데 公의 外叔 後裔(외숙의 후예)가 되어서 郡內에 사는 子孫들과 相議하여 碑石을 세우고 自己가 직접 그 事蹟을 敍述하였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서 碑面이 흙 속에 매몰되고 墓道가 거의 荒廢해져 景宗 甲辰(서기1724)년에 10世孫 翼舜(익순)이 그 碑石을 파내어 다시 墓 앞에 세웠으나 碑石面이 부숴지고 字劃이 마모되어 後人에게 보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해 가을에 郡內에 居住하는 子孫들이 誠力을 다하여 앞서 禮儀公(예의공) 墓所에 墓碣을 세우고 또 公의 墓碑도 새 돌로 바꾸어서 永久히 전하도록 도모하였다. 公의 名聲과 業蹟은 이미 樵隱의 詩와 后溪의 文詞로 서술되어 있는지라 나는 감히 조그만 기교로써 公의 참 모습을 꾸미는 분수 밖의 碑文을 지었다는 책망을 스스로 취할 수가 없어서 다만 公의 不二臣節(불이신절)의 志操만을 여러번 되풀이하여 기술하였으니 後日에 역사가들이 麗末의 遺民錄을 쓸 기회가 온다면 반드시 여기서 자료를 채택할 것이로다. 忠毅公(韓 온)(충의공 한 온)11세 공의 휘는 온이요, 자는 군수(君粹) 이니 정국공신(靖國公臣) 서평군(西平君) 숙창(叔昌)의 셋째아들이요, 증 보조공신(補祚公臣),서성군(西城君) 익(翊)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로 환성군(歡成君)군 징(澄)의 따님이다. 공은 기품이 장엄 하고 언행이 신중하며 공리를 멁리 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 하였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 병환중에도 단지 주혈(注血) 하며 연명(延命)케 하였고, 마침내 하세(下世) 하시니 묘막(墓幕)에서 산채조식(山菜粗食) 으로 삼년상(三年喪)을 마쳤다. 공이 중종 35년(1540)에 무과에 급제 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처음 으로 병조,이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이원현감(利原縣監) 으로 있을 때 남해요지(南海要地)인 장흥부사(長興府使)에 특별히 선임되었다. 때마침 이 지방에 흉년이 들어 공은 불철주야 구휼양곡(救恤糧穀)을 마련하여 백성구호(百姓救護)에 전력을 기울이며 선정(善政)을 베풀으니 장흥부민(長興府民)이 공을 부모처럼 받들고 나라에서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내렸다. 공의 부중(府中) 군졸(軍卒)의 기강(紀綱)을 엄히 하고 지방에서 선출한 젊은이 들에게 무예를 연마케하여 국가유사시에 대비 하였다. 명종10년(1555)5월에 왜적 70여척이 달양(達梁)포구(浦口)에 불법 침입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성을 포위했다. 공은 휘하 군졸들을 거느리고 병사 원 적(元 績)과 더불어 적군(敵軍)과싸우니 좌충우돌, 공의 용역(勇力)이 이르는곳마다 적병이 쓰러지고 피해 달아나는 적군을 쫓아 격전하였으나 세(勢)가 미치지 못하여 성이 함몰되고 공도 장렬한 최후를 맞으니 바로 명종10년 5월31일의 일이요,공의 향년45세였다.공의 배위 전주이씨로 문천정(文天正) 수갑(壽甲)의 따님이고 묘는 공과 합조(合兆)이다. 이남이녀(二男二女)를두었으니 장남은 증 호조참판(贈 戶曹參判) 경유(景裕)요, 차는 창릉참봉(昌陵參奉) 경기(景棋)요, 여(女)는 권식(權寔)이다. 공이 몰후에 지사(志士)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이 이전쟁의 전모를 상세히 밝히는 전기(傳記)를 썻으며 율곡 이선생(栗谷 李先生) 의 추기(追記)로 서문(序文)을 썻다. 이와같이 공의 충절(忠節)이밝혀지므로 선조조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전례(典禮)에따라 치제(致祭) 하였으며, 철장석담일심순국(鐵腸石膽一心殉國)이라고 친필(親筆) 사액(賜額)이 있으니 백수십년에 長興儒林)들은 공의 위국 충절(爲國忠節) 과 애민선정(愛民善政))을 기려 사우(祠宇)를 영건(營建) 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그후 조정에서는 다시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시호(諡號)를충의(忠毅)라 내렸으며 향리인 평택에는 충렬문이라 정문이 세워지고 장흥에는 충렬서원(忠烈門))을 세워 학행(學行)을 기리고 있다. 전남장흥에는 공의 충절을 기리기위한 충렬사를 지어 향배 하고 있다.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 시향일 음 10월4일 이다. 조선 牧使公(韓 明 胤)(목사공 한 명 윤)중종 37년~선조 26년(1542~1593) 18세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자(字)는 회숙(晦叔)이고,부호군공 0(副護軍公 0 )의 아들로 부사공 수정(府事公: 守貞)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숙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니 교위 창신(校尉: 彰信)의 따님이시다.선조 1년(156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추천에 의하여 연은전 참봉(延恩殿 參奉)이 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동왕 23년 영동현감으로 부임하여 치적(治迹:백성을 다스린 성적)을 올렸다.동왕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동에서 의병을 모아 용감하게 싸워 전공(戰功:싸움에서 이겨서 세운공로))을 세우니 조정에서 그 충용(忠勇 :충성스럽고 용맹함)을 가상히 여겨 품계(品階:직품과관직의등급)를 올려주고,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게 하였다. 동왕26년 상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여 왜적과의 전투(戰鬪)에서 전사하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하고 배위 밀양 박씨도 순절(殉節 :임금이나 남편의 죽음에 따라 자살함)하니 선조(宣祖)는 공과 부인의 정려(旌閭:충신,효자,열녀 등을 그 살던 고을 정문을 세워 표창함)을 세우도록 명하여 고향에 충신문(忠臣門)과 열녀문(烈女門)이 세워졌다. 배위는 두 분이다, 초배는 증 정부인 나주 박씨(羅州朴氏)로 충의위공 운종(忠義衛公 雲從)의 따님이고, 계배는 증 정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현감공 인(縣監公 寅)의 따님이시다. 슬하에 2남을 생육하니 장남은 비안공각(庇安公: 珏)이요 2남은 참봉공진 (參奉公: 璡)이다.묘: 용인군 구성면 보정리, 신도비와 충렬문과 열녀문이 있다. 毅壯公(韓 楯)(의장공 한 순)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사한(士閔), 도사공 극심(都事公 克諶)의 아들로,승지공 옥(承旨公 沃)의 손자이며,어머니 숙인 양천 허씨는 흥효(興孝)의 따님이다.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평양판관 등을 거쳐 동왕 23년 남평현감에 부임하여 풍속을 바로 잡고 가난에 허덕이는 많은 백성을 구제하며제반 행정에 충실하고 선정을 베푸니 다른 고을에 거주하는 백성들까지도 칭송과 존경하기를 어버이와 같이 하였다.동왕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으로 가서 전라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 등과 합류하여 왜적을 격멸코자 하였으나 금산에 도착하기 전에 고경명의 의병군은 이미 패전하여 전세가 불리한 가운데 들어가 힘써 싸웠으나 500여명의 군사와 함께 전사하였다.숙종 38년(1712)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고 서성군에 봉하였으며 시호를 의장(毅壯)이라 내렸다.지금도 평양에 평양판관 당시의 선정비가 있고 공의 충절과 충혼을 기리고 위로하기 위하여 금산 종용사(錦山 從容祠)에 배향하였으며 예산 덕산(禮山 德山)에 정각(旌閣)을 세웠다.배위는 정부인 장수 황씨로 진사 延吉(연길)의 따님이며,슬하에 5형제를 두시니 장남은 천지중추부사 震英(진영)이요,차남은 정의 仁英(인영)이며,다음은 의사 尙英(상영), 다음 첨지중추부사 道濟(도제)는 부사 謙(겸)에게 계후 입양되고 다음은 彦江(언강)이다. 묘소는 양주군 장흥면 삼상리에 있으면 10월 3일이 세향일. 忠壯公(韓 百 祿)(충장공 한 백 록)실록公의 (휘)諱는 백록(百祿)이요,字는 수지(綬之)이니 몽계공 철충(夢漢公 哲沖)의 6代孫으로 조선 명종 10년(1555)에 태어났다.아버지는 선비 굉(宏)이요 할아버지는 경인(敬仁)이다.선조 13년(1580)에 25세로 알성무과(謁聖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바로 진잠현감(鎭岑縣監)에 배명(拜命)을 받고 농업(農業)과 잠업(蠶業)을 권장하며 병기(兵器)를 수리보완(修理補完)하여 사졸훈련에 힘쓰던 중 지세포(知世浦) 만호(萬戶)에 제수(除授)되었다.公이 남쪽 요새지를 맡아 튼튼히 방어하던 차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 해 4월부터 6월까지 부산(釜山),옥포(玉浦), 당포(唐浦) 등 해전(海戰)에서 연전연승한 것을 참작하여 전사(戰死)한 정 발(鄭 撥) 장군의 후임으로 公을 부산첨사(釜山僉使)에 특별 제수하였다.이는 남방(南方)의 보루를 더욱 확고히 하자는 지휘부의 뜻이었고 따라서 公의 능력이 그만큼 특출하였음이다 이 후 전쟁이 더욱 치열(熾烈)하여 7월 17일 미조항 싸움에서 38세를 일기로 전사(戰死)하였다.미조항(彌助項)은 남해도(南海島) 동남쪽 끝에 위치하는 바 公이 적에 탄환을 맞고도 전진하여 싸우다가 전투가 끝난 후에 사망하자 公의 군중(軍中) 노복(奴僕)인 충득(忠得)이 시신(尾身)을 수습하여 公의 고향인 춘천군 서면 금산3리 관음동(春川那 西面 鎬山三里 觀音洞)으로 반장(返葬)하였다. 公의 배위(配位)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참봉(參奉) 겸(謙)의 따님으로 公과 합폄이다.아들은 우천(佑天)이니 증 병조참판이다.公의 행장(行狀)은 예조판서 김이익(金移益)이 짓고 시장(諡狀)은 예조판서 오재소(吳載紹)가 지었으며 비문(碑文)은 좌의정(左議政) 이경일(李敬一)이 지었다.公이 몰(歿)후선조 38년(1605)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等에 책록되었고 인조 6년(1628)에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공에게는 영조 28년(1752)에 정려(旌閭:충신,효자,열녀,등을 그들이 살앗던 고을에 정문,또는 각을 세워 표청 하던일)가 내려지고 충장으로 증시 하였으며.순조 8년(1808)에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작되고 배위 성씨에게는 정부인이 가자 되었다. 정려각: 춘천시서면방동1리에 있다.신도비는 강원도춘성군서면금산3리에 있다. 韓 彦 恒(한 언 항)공은 선(璿)의 2남 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왜적(倭敵)과 싸우다가 굽히지 아니하고 순절(純節)하였다. 韓 德 鳳(한 덕 봉) 공(公)은 세걸(世傑)의 아들이다. 수문장 위직불명(守門長 位直不明)으로써 임진란(壬辰亂)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月浦公(韓 日 休)(월포공 한 일 휴) 공(公)의 자(字)는 경일(敬逸)이요,호(號)는 월포(月浦)이다. 임진란(壬辰亂)때 임금(王.王朝)이 용만 의주(龍灣.義州)으로 파천(播遷.임금이피난함) 할 때 호가(扈駕.임금이타는수레)를 수행 하였으며 순조(純祖) 계해(癸亥.단기4136년서기1803년)에 집의(執義)로 증직(贈職)을 받았다. 府事公(韓 謙)(부사공 한 겸) 공(公)의 자(字)는 희맹(希孟)이다. 공(公)이 임진란(壬辰亂)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 (戰死)하였다.는 유록(遺錄)이 있을뿐이므로 상세한 관작과 세계(世系)를 살필길 없다. 한 종 유(韓 종 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자인도(慈仁道 경상북도 자인)천산(天山) 아래 유지(柳地) 위에서 왜적(倭賊)을 만나 칼을빼어 참수(斬首)하였다, 이윽고 왜군(倭軍)이 대대적으로 이르렀으므로 힘껏 싸우다가 순절 (純節)하고 말았는데 바로 5월5일 이다. 해마다 그날이 돌아오면 유지(柳池)의 물이 반드시 적색(赤色)으로 변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어제와 같다고 한다. 秋月堂(韓 山 斗)(추월당 한 산 두) 공(公)의 호(號)는 추월당 秋月堂 이다. 정유왜란(丁酉倭亂)때 강도:강화(江都:江華)로 피난(避難) 가는 임금을 호종(扈從) 하였다. 병자(丙子).정축(丁丑).년 이후로 과거(科擧) 공부를 폐지하고 조용히 살았다. 淸節公(漢 必 迪)(청절공 한 필 적) 공의 호는 청절(淸節)이다. 공은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인조(仁祖)의 강화(江都) 피난(避難)길에 임금의 수레(御駕)를 호종(扈從) 하였다. 이후과거 (科擧)볼일을 폐하고 스스로 시경(詩經)을 벗 삼아 여생(餘生)을 지냈다. 韓 惟 赫(한 유 혁) 공(公)은 관(瓘)의 아들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사(戰死) 하였다. 선계(先系)와 관작(官爵)을 살필 유록(遺錄)이 없으므로 후일(유록이나타나길바람)을 기다린다. 副正公(韓 南 秀)(부정공 한 남 수) 22세 공의 자는 방한(邦翰)이요 호는 신촌(新村)이니 좌랑공(佐郞公) 팽년(彭年)의 아들이요 양혜공(養惠公)의 후손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였으나 곧 바로 어머니상(喪)을 당하여 눈물을 흘리며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곳을 효자동(孝子洞)이라 불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자 선조(宣祖)가 특별히 남문(南門)을 지키라고 명(命) 하였는데 이는 공(公)의 충성 스러운 용맹(勇猛)과 기개(氣慨)가 평소부터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과 같이 의병(義兵)을 일으켜 국난(國難)에 나아갔는데 전후(前後)의 사적(事跡)이 우산일기(牛山日記),야사(野史),읍지(邑誌),절의록(節義錄),에 모두 기록되어있다. 공(公)이 일찍이 지은 시(詩)에" 가문(家門)의 구업(舊業)인 청전(靑氈:代代로 전해내려오는 유물遺物 또는 구업이라고 한다면 정(情)의모전毛氈을 짜던업業)은 간데가 없고 보국(報國)의처음 마음(가진뜻)백발(白髮) 되자 짧아졌네" 라고 하였다. 공의 배위(配位) 해주오씨(海州吳氏) 는 남도령 연경(南都令 延慶)의 따님으로 墓는 안량 의신동 자좌 (安良 義臣洞 子坐)에 公과 상하조(上下兆)이다. 아들은 참판 득량(參判 得良), 군수 해룡(君守 海龍)이다. 副將公(韓 宗 任)(부장공 한 종 임) 23세 공의 휘(諱)는 종임(宗任)이요 자(字)는 이백(而伯)이요 호(號)는 송오(松塢) 이니 부정공 응창(應昌)의 아들이요 군자감 정(軍資監 正)을 지낸 형수(亨壽)의 손자 이다. 병자호란때 의병을 일으켜 부장이 되어 공을 세웠는데 그 공적이 호남(湖南) 창의록(愴義錄 :義兵錄) 에 기록 되어있다. 죽산 안명길(竹山 安明吉)이 행장(行壯)을 지었다. 공의 배위(配位) 평강 채씨(平康蔡氏)는 묘가 고흥 남면 수산 신좌(高興 南面 樓山 辛坐) 이다. 아들은 상윤(尙允),상현(尙顯) 이다. 韓 得 弘(한 득 홍) 공의 휘(諱)는 득홍(得弘)이요 자(字)는 이원(而遠)양 이요 호는 야옹(野翁)이니 남식(南式)의 양자(養자)로 생부(生父)는 부정(副正) 응창(應昌)이다. 따라서 충의위 (忠義衛)팽형(彭亨)의 손자가 된다. 병자호란(病子胡亂) 때 종형 종임(宗林)과 안우산(安于山)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세웠는데 그 사적(事蹟)이 호남 절의록(湖南節義錄)에 기록 되어 있다.공의 묘는 여동면 오동촌 멱치 해좌(廬洞面 梧洞村 覓峙 亥坐)이다. 공의배위는 광산 노씨(光山盧氏)로 묘는여동면 내동촌 임곡 해좌(廬洞面 內洞村 林谷 亥坐)이다.아들은 치복(致福)이다. 韓 英 發(한 영 발) 공의 자는 자정(子挺)이다. 한준발(韓駿發)의 아우로 의행(誼行: 방정한품행)이 있었다. 병자호란(病子胡亂)때 형(兄)과 같이 시골로 내려갔는데 창해(滄海) 허격(許格)이 써준 시(詩)에 "벗들은 지금에도 다름이 없건만 천지(天地)는 옛날과 같지를 않다네" 하였다. 대신(大臣)이 公을 교관(敎官)으로 천거(薦擧) 하였으나 끝내 벼슬 하지 않았다. 承旨公(韓 訓)(승지공 한 훈)세조5년(1459)~연산 5년(1499년) 1월24일(갑신)15세 공의 자는 사고(師古)이며호는 죽총(竹 )이다.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충인(忠仁)의 아들이요, 참의공(參議公) 전( ) 의 손자 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 김씨 이시다.공은 천순(天順)3년1459년기묘(己卯)(세조 5년)에 출생 하였다.공(公)이 진사(進士)를 거쳐 성종(成宗)25년(1494)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하여 연산군(燕山君) 1년(1495)(동반 홍문관 정6품) 修撰, 貞言,昭格署令을 歷任 했으며, 그후 수찬으로서 김안로(金安老)를 탄핵 하였다. 연산군때 김안로(金安老)가 선량(善良:善流) 한 관리(官吏) 들을 많이 모해(謨害)하자 피신(避身)하는 선비도 있었으나 공은 스스로 나아가 화(禍)를 당하였다, 연산군 3년(1497)에는 이조에서 그 한사람 만을 홍문관 부교리로 추천하자 헌납 손중돈(孫仲暾) 이 추천의 부당성으을 제기, 논박하여 죄 주기를 청하였는데 신수근의 정병(政柄)에 힘입어 탄핵이 면제 되었다.1498년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성종의 묘제의(廟制議)를 송나라 인종(仁宗)의 고사(故事)에 따라 백세불천지주(百世不遷之主)로 할것을 기초 (起草)한 사건에 연루되어 이성(利城)에 부처되었으나, 그곳에서 연산 5년(1499년) 1월24일(갑신)졸하셨다.1501년 특방(特放) 되었다.1504년 김감(金勘),임사홍(任士洪),강훤(姜훤)등이 이극균(李克均),이세좌(李世佐),윤필상(尹弼商),조지서(趙之瑞),이주(李胄),한훈(韓訓),홍식(洪湜),전향(田香),수근비(水斤非)의 죄명문(罪名文)을 진사(進辭)하면서,"한 훈 은 간원(諫員)으로서 임금을 업신 여기는 마음을 품고 도리에 어긋난 말을 하니 형법에 따라 그 죄를 엄히 다스리려고 했다. .그 뒤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되었다. 글씨를 잘 쓰신 명필이셨다.(문헌)연산군 일기,근역서서첩에기록되어있다. 배위 숙부인 광주 정씨이며 부 군수를 지낸 찬우의따님 이시다.묘는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유동 선영 인좌 합조 이다.아들은 진사 곤(進士 鯤),참판 붕(參判 鵬) 이다.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大東韻府群玉. 〈朴天植〉 참고서적:한국서화인명사서(韓國書畵人名辭書)94페이지에 수록,*국역왕조실록 韓 如 海(한 여 해)병자호란(病子胡亂)때 강화(江華)가 이루어지자 조정(朝廷)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은거(隱居) 하며 도(道)를 강론(講論) 함으로써 一世의 모범(模範)이 되었다. 앉을 때마다 西쪽을 향하지 않았다.(학행록 참조) 參判公(韓 秀 雲)(참판공 한 수 운)중종28년(1533)~선조25년(1592)18세 공은 조선 선조(宣祖)때의 무신이며 순국자(殉國者)이다. 공의 휘는 수운(秀雲) 이며 증 참판공 협의 둘째 아들이고 부정공 경기 의 손자이다. 공은 중종 28년(1533)년에 태어나 천성이 무예를 좋아 하였다. 장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군자직장(軍資直長)으로 재직중 임진왜란을 만나 전선으로 출정 하여 접전끝에 전라남도 강진포에서 선조25년(1592) 12월15일 순국하니 향년59세였다. 선조는 호국군장(護國軍葬)으로 정하여 국지사(國地師)를 하명(下命)하여 장지(葬地)를 와우혈(臥牛穴)에 안장케 하니 지금의 나주시 봉황면 와우리촌 와우혈 자좌(子坐)이다. 그후 선조 께서 참판 서천군을 증 하였다. 선조 39년(萬歷34년 1606) 전에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증 되었다. 배위는 증 정부인 죽산 박씨이며 아들은 양무공 교(嶠)와 수문장 엄이다. 묘비는 인조14년(1636)에 입비(入碑) 하였는데 난세병화로 오랜세월에 마멸되니 1995년 3월에 후손 기홍 찬으로 개수비 하였다. 공의 배위 증 정부인 죽산 박씨 는 봉황면와우리 대각동 축좌에 안장 하였다. 공묘의 부근이다. 세향일 음 10월12일. 西陵君(韓 守 謙)(서릉군 한 수 겸)선조 3년 (1570)~광해군14년(1622) 19세 공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휘(諱)는 수겸守謙, 자(字)는 중익(仲益)이다. 서흥부원군(西興府院君) 장헌공 효순(莊獻公 孝純)의 둘째 아들이고 별제공 여필(別提公 汝弼)의 손자 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 의 5대손으로 선조 3년 (1570) 생이다. 일찍이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고 광흥창수(廣興倉守)를 거쳐 임진왜란(姙辰倭亂)을 맞아 종묘피란(宗廟避亂1592)을 도왔으며 세자(世子)가 북도,호서등지로 피란(北道,湖西等地) 갈 때도왔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부딪치게 되는 어려운 일을 극복하고 왜적을 평정 한후 호종공신(扈從孔臣), 자헌대부이조판서지의금부사(資憲大夫吏曹判書知義禁府事) 에 서능군(西陵君)을 증하였다. 공은 광해14녀(1622)12월14일 졸하였다. 공의묘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아동 후곡이다.인조 1년(1623)임금이 바뀔초에 종묘피란 (宗廟避亂)의공을 인조 가 삭훈(削勳) 하였으나 증손 경주부윤 명상(曾孫 慶州府尹 命相) 이 귀(貴) 하게 됨에 훈(勳)이 신원 되었다. 배위 증 숙부인 파평 윤씨는 군수 흥신(興信)의 따님이며 아들은 찰방 성일(察訪 誠一), 영일(英一) 이다.공의 배숙부인 파평 윤씨 는 공보다.4년전인 광해10년(1618) 6월11일에 졸하니 공묘(公墓,交河面 牙洞後谷) 아래 20보쯤 안장 하였다. 忠毅公(韓 護)(충의공 한 호)?~1592 18세 공의 자는 유경(惟景)이요, 호는 송당(松堂)이니 문정공의 현손이다. 증직으로 병조 참판 여림(汝霖)의 아들이요 통정대부 성주목사를 역임한 승형(承亨)의 손자 이다. 공은 선조 신묘(宣祖 辛卯:1591) 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제천 현감(提川縣監),으로 재임중(在任中) 임진왜란을 맞아 스스로 의병(義兵)을 이끌고 금산(錦山) 싸움에 참전(參戰)하여 조중봉(趙重峰 憲) 선생과 같이 싸웠으나 왜적의 포위망에 들어 전멸위기에 몰리니 조중봉선생은 공에게 피신할 것을 강력히 권 했음에도 공은 이를 거절하고 끝내 싸우다가 조중봉 선생과 같이 순절하니 이때가 1592년 8월18일(선조25년)이다. 공은 조중봉 선생과 같이 순절 하여 칠백의총(七百義塚) 에 합폄 되어 있으나 후손들이 선조를 기르기위해 단향을 드리고자 분으로 모시고 비를 세우며 묘의 와 같이 석물을 갖추웠다 향사일은 음 3월10일 이다.*금산(錦山)칠백의총종용사(七百義塚從容祠) 비치(備置)된 명부(名簿)에는 충의공忠毅公 의 성명은 한호韓護, 본관(本貫) 청주 자(淸州 字), 國翰 號,方正 先祖(家系) 領相 韓尙敬 後孫 副正 汝霖의 아들,戰蹟地 錦山이고 뒤에 宣武勳에 錄 하였다.묘: 전남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참고문헌:조헌 전서(趙憲 : 重峰全書360P) 府事公(韓 천 두)(부사공 한 천 두)1563~1649 20세 공의 자는 추경(樞卿)이니 증 병조 판서 숙창(淑昌)의 아들이고 군수를 지내고 승지에 추증된 충손(忠遜)의 손자이다. 선조때 임진왜란을 만나 공적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策錄)되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후에 호조판서 로 증작(贈爵) 되었다. 인조 기축 11월 15일 수 88세 하고 영서(永逝) 하였다. 공의 묘는 본래 경가도 고양시 행신동 소만 부락 후산 에 배위 정부인 충원 최씨(忠原崔氏)와 쌍조(雙兆)였으나 이 지역이 도시개발 됨에 따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 산23번지에 양위 함폄으로 면봉(緬奉)하였다.공의 제사는 음 1월 5일(生辰日)11월15일(忌日)이다. 贈 承旨公(韓 好 誠)(증 승지공 한 호 성)18세 조선 선조때의 지사(志士) 자는 경보(敬甫) 호는 계촌(桂村) 어모장군 정(偵)의 아들로 승지공 (承旨公:世信)의 손자이며 공안공(恭安公:致仁) 의 현손(玄孫)이다.정유재란 (丁酉再亂:조선조 14대 선조 30년(1597 정유년) 정월에 한번 패한 왜장 카토오키오마사(加藤淸正)가 14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쳐들어온 난리)때 구례 출신(求禮出身) 인 왕득인(王得人) 이정익(李廷翼), 양응록(梁應錄),등과 등과 더불어 승려153명과 의병 300명을 통솔 하고 석주관(石株關)에서 왜적과 맞서 수십명을 죽였는데 그 피가 강물을 물들여 이를 혈천(血川)이라 불렀다 한다. 뒤에 적이 다시 칩입하니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 하였다. 순조 5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추증(追贈) 하고 옛전적지 인 석주관 에 7의사를 지어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배위는 성씨 불명이고 아들은 하나뿐인데, 충의위(忠義衛) 창복이(昌福)다. 묘소는 구례 봉성산 선영하로 되어 있다. 柳塘公 韓 有 後(한 유 후)선조33년(1600)~인조22년(1644) 19세 공은 조선중기(中期)의 의인(義人)이다., 자는 흥백(興伯)이고 호는 유당(柳塘)이다. 통덕랑공 성(通德郞公 誠)의 아들이고 사직공 여익(司直公 汝益)의 손자 이며 참판공 계선(參判公 繼先) 의 5대 손이다. 어머니는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 로 무공랑 건(務功郞 建)의 따님이다. 공은 조선 선조(宣祖) 33년년(1600) 2월 25일 생이다. 성품(性品)이 강개(慷慨) 의롭지 못한것을 보고 정의심이 북 받치어 슬퍼하고 한탄함)하고 기절(氣節) 이었다. 그리고 벼슬을 싫어하고 대명처사(大明處士) 로서 세칭(世稱) 하였다.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 이 일어나자 민간인 신분(民間人身分) 으로 의리(義理)로써 항전 (抗戰)하여 충절(忠節)을 세운 3인 이었으니 두곡 홍우정(杜谷 洪宇定,亂 후에 國朝의恩典을받음),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亂후에 書院에配享) 그리고 공 이다. 그러나 공의 명예(名譽) 는 세상 에 현양(顯揚) 되지 못했다. 공은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홍천(洪川)으로 피난 하였을 때 남한산성(南漢山城) 이 청병(淸兵)에게 포위(包圍) 당하고 함락(陷落) 되니 인조왕은 항서(降書)를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공은 북천(北川)을 향하여 삼주야(三晝夜)를 통곡 하였다. 병란이 평정 되었으나 서울 본가(本家)로 돌아 가지 않고 호남(湖南)의 함라현(咸羅縣)에은둔(隱遁) 하여 자기집에 살면서 경사(經査)를 학습 하고 성리학(成理學)에 잠심(潛心)하여 덕행(德行)이 일취(日就) 하고 학식(學識)이 고매(高邁) 하니 누차 관직(官職)에 천임(薦任)되었으나 취임(就任) 하지 않았다.양주(楊州)의 선조 참배(先祖參拜)때나 기거(起居)할 때는 물론 중신(從臣)토록 청나러를 등지며 서향(西向)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홍패,백패(紅牌,白牌) 에 오랑케 청(淸)나라 연호(年號)를 쓰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인조 22년(1644) 1월14일 45세로 졸하니 정조 3년(1779)에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朝奉大夫 司憲府 持平)을 추증(追贈) 하였다.배위(配位)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선무랑공 극검(宣武郞劇 克儉)의 따님이고,아들은 증 좌승지 석휴(贈座承旨 碩休),석태(碩台),석좌(碩佐),이다.공이 인조(仁祖) 22년(1644) 1월14일에 졸하고 배 전주리씨(配 全州李氏)는 공보다 4일전에 졸하니 상장리 산91 막곡 갑좌(上長里 山 91 幕谷 甲坐) 에 합조(合兆) 되었다. 縣監公(韓 振 夏)(현감공 한 진 하)1601~? 21세 임진왜란때 공을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策錄) 되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증직(贈職)된 천두(天斗)의 아들이고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祖功臣)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증작(贈爵)된 숙창(淑昌)의 손자이다. 상석(床石)에 각표(刻表)된 바로 과천현감(果川縣監)을 지낸 행적(行蹟)을 알수잇으나 그외는 전해오는 기록이 없으니 고증 할 수 없다. 또한 출생년은 기록에 의해 1601년으로 알고 졸년을 모르므로 수를 얼마나 누린지도 가늠할 수 없다. 공의 묘는 본래 경기도 행신동 소만리 선영이었으나 도시개발로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 산 23번지로 천묘 하였다. 이곳 묘역에는 선후대의 합설묘역을 조성하고 영구보존할 영역이다. 한 철 우(韓 喆 愚)1817(순조 17)∼?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보(景寶). 경기도 안산출신. 진하(鎭夏)의 증손자로, 백원(百源)의 손자이며, 익동(益東)의 아들이다.1864년(고종 1)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관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사헌부장령·부호군을 거쳐, 1879년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1884년 다시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1888·1892년 두 차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守門將公(韓 春 立)(수문장공 한 춘 립)?~인조5년(1627)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무신(武臣)이며, 자는 여경(汝景)이니 상당 부원군 충성공 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明會)의 후손이다.공은 무용(武勇)이 뛰어나고 기사(騎射)에 능하였다. 광해군11년(1619) 우리나라의 조명군(助明軍)이 요하(橈河)를 건너 심하 에서 후금군에게 패하여 요동(遼東)·심양(瀋陽)이 함락되자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하여 그곳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을 물색 하였는데, 공과 소통사(小通事) 이용복(李龍福)이 뽑혔다.그들은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산해관(山海關)까지 당도하여 천자(天子)를 알현하고 그 자문(咨文)을 받아 돌아 왔다. 이 공로로 수문장(守門將)에 제수되고 이듬해인 1620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인조5년(1627)정묘호란때 의주를 수비 하면서 많은 적을 살해 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동쪽으로 나와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어가 전사 하였다.1647년 공조참의에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세웠졌으며,의주 구암사(龜巖祠)에 배향 되었다. 禁衛將公(韓 有 起)(금위장공 한 유 기) 중종36년(1541)~선조41년(1608) 20세 공은 선조(宣祖)때무신이다. 휘(諱)는 유기(有起) 이며 초휘(初輝)는 유인(有仁)이다.. 판관공 척(判官公 척)의 아들이며 교위공 수복(校尉公 壽福)의 손자이고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장성공 효원(章成公 效元)의 현손(玄孫)이며 찬성공 장손(贊成公 長孫)의 6대손이다. 공은 중종 36년(1541)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南楊州市 別內面 花蝶里)에서 태어났다. 천성(天性)이 무예(武藝)를 좋아 하더니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조(宣祖朝)때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이 일자 의거장수(義擧將帥) 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내금장(內禁將:內禁衛將 조선 선조때 임금의 좌우(左右)에서 호위(護衛)를 맡아보던 군관(軍官))으로 출정하여 전전남하(轉戰南下),승전(承戰)으로 선조31년(1598)11월 종전(終戰)을 맞았다. 왜적(倭敵)의 최후도망자(最後逃亡者) 적장 소서행장(敵將 小西行長) 이 남해 노량진(南海鷺梁津)을 빠져 도주할 때 공이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러나 회향(回鄕)치 아니하고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석평리 청룡(慶尙南道 南海郡 二東面 席坪里 靑龍)에서 남해도(南海島)를 왜적(倭敵)으로부터 지키면서 유유자적(悠兪自適) 망향(亡鄕)의 정을 그리우며 향학(鄕學)에 힘쓰고 난세(亂世)의 한을 자위(自慰)하다 선조 41년(1608) 68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는 정부인 문화유씨(貞夫人 文化柳氏) 로 참봉 상필(參奉 尙弼)의따님이고 후배는 정부인 남원 양씨(貞夫人 南原 梁氏) 이다. 아들은 첨정 돈,(僉正 敦),증 참판 경(贈參判 敬)이다. 공은 도산리 가청산 해좌 에 안장 되었다. 비갈(碑碣)이 있었는데 난세병화(亂世兵禍)와 오랜 세월로 마멸(摩滅) 되고 공 묘의 아래에 있는 배양위묘(配兩位墓) 앞에 세우고 새로 묘비를 1976년 윤8월 세우니 후손 규식(圭植)이 찬(撰)하고 성욱(性旭)이 서(西) 하였다. 察訪公 (韓 汝 璟) (찰방공 한 여 경)중종 39년(1544)~선조 30년(1597) 19세 공은 선조 무신 이며 의인(義人)이다. 자는 중진(仲珍)이며 호는 의재(毅齋)이다. 참봉공 세빈(參奉公 世빈)의 아들이며 참의공 겸(參議公 謙)의 손자 이다. 어머니는 유인 신천 강씨(孺人信川康氏)로 내금위장 응복(內禁衛將 應福`)의 따님이다. 중종 39년(1544)생이며 선조때 내금위 찰방(內禁衛 察訪: 조선조 세조(世祖)말년에 설치한 군대의 一種으로 主로 宮內의 경비를 맡아보았으며 이 기그안에 중종 30년(1535) 찰방(察方)을 두어 외직(外職)으로 마정(馬政)을 맡아 보았다. 선조 임진 왜란(1592)때나 정유재란(정유재란,1597)때 60여명의 의병을 일으켜 수성(守城) 하였으나 왜병(倭兵)의 습격을 받아 교전(交戰)중 외원(外援)은 전혀 없게 되니 병력이 부족하여 장렬(壯烈)히 순절 (殉節)하였다. 이는 19월 18일이었다.배위(配位) 숙인 함평 이씨(淑人咸平李氏)는 부사맹 구영(副司猛 九榮)의 따님인데 어느날 흉보(凶報)를 들고 기절하여 북두칠성(北斗七星)을 향하고 절하고 통곡하며 이르기를 남편은 나라를 위하여 순절(殉節) 하엿으니 나 또한 남편을 따르리라 하고 곧 바로 시신(屍身)곁으로 달려가 예(禮) 대로 염(殮)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순절하였으니 세인(世人)들이 감탄하였고 충신(忠臣)과 열녀(烈女)의 미거(美擧)는 청사(靑史)에 남으리, 아들은 고(固)이다. 공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순절(殉節)하니 영광읍 연성리 제봉산 계좌(靈光邑 連城里 祭奉山 癸坐) 에 안장(安葬) 하였는데 배 숙인 함평이씨(配淑人 咸平李氏)와 합조(合兆)로 안장 되었다.공의 묘비(墓碑)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에 없어지니 함평 노민표 찬(咸平 魯玟杓 撰,완산 이용연 서(完山 李龍淵 書),진산 강경원 전(晉山 姜瓊遠 篆) 으로 1964년 여름 개수(改竪) 하였다. 공이 정유재란때 수성(守城) 하다 순절(殉節) 하나 이를 기리기 위해 1965년 무룡리에 수성비(守城碑)를 세웠다. 府使公 (韓 洽)(부사공 한 흡) 명종4년(1546)~ 광해 1년(1609) 18세 공의 자는 유여(有餘)이다. 호은공 삼걸(湖隱公 三傑)의 아들이고 부사공 순명(府使公 舜命)의 손자 이며 절제공 중손(節制公 仲孫)의 현손(玄孫)이다. 어머니는 영인 남원양씨(令人 南原 梁氏) 로 참봉 인숙(參奉 仁淑)의 따님 이다. 공은 명종 1년(1546) 생으로 벼슬 길에 올라 사마직장(司馬直長), 형조정랑(形曹正郞)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 귀성부사(귀城府使)를 지내고 강계도호부사(江界都護府使)로 승차(陞差:같은 관청에서 윗자리오름)하였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에 적(賊)이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를 유린(蹂躪)하였을 때 분통함을 견디지 못하고 병병단충(炳炳丹忠)으로 호서(湖西) 각처의 뜻있는 선비들과 의논하여 홍성(洪城)에서 창의(倡義)하고 "신자(臣子)들이여 종묘사직과 생민(生民)의 화(禍)가 조석(朝夕)에 급박하니 차마 보지 못하고 대의(大義)를 천하(天下)에 펴고자 할진대 진실로 우리 한몸이 나라를 위해 죽음을 당하고 삶을 보지 못하더라도 신천(神天)이 돕는 바에 어찌 급히 이룰 수 없겠는가"하고 솔제생(率諸生)하여 행진삼일(行進三日)에 금주대첩(錦州大捷)에 이르러 대의위공(大義偉功)을 피던중 여러번 피압(被狎) 당했다가 방환(放還)되었다 만년(晩年)에 장사 오리동 방라산지우(長沙 五里洞 坊羅山之隅)에서 무경역색조월영풍(務耕力穡釣月詠風)으로 지락(至樂)을 삼다가 광해 1년 1월 8일 64세로 졸하였다 배위(配位) 숙부인 경주 김씨(淑夫人 慶州 金氏)는 봉정 경남(奉正 景南)의 따님이고 아들은 부사 경(府使 景), 봉정 욱(奉正 昱)이다. 공의 배위 숙부인 경주 김씨( 配位 淑夫人 慶州 金氏)가 광해 1년 11월 16일 졸함에 나산 후록(羅山 後麓)에 쌍조(雙兆)되었다. 화담 서경덕 찬지(花潭 徐敬德 撰誌)이고 진주인 정익환(晉州人 鄭益煥)이 비문을 지었다 비갈(碑碣)은 마훼(磨毁)되었다. 龜窩公 (韓 應 聖)(구와공 한 응 성) 명종12년(1557)~선조25년(1592) 18세 공의 자는 경기(景期)이고,호는 구와(龜窩) 이다. 대호군공 추(大護軍公 추)의 아들이고 시정공 계상(寺正公 繼常) 의 손자 이며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현손이다. 어머니는 숙부인 함양박씨(淑夫人 咸陽朴氏)로 생원 승호(生員 承豪)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 12년(1557) 2월7일생으로 중봉 조헌(重峯 趙憲) 선생의 문인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이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공은 수하 수십명을 데리고 합세 8월에 청주에서 분전(奮戰) 적군을 격퇴하고 금산(錦山)으로 진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선봉이 되어 용전하다가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전사 하였다.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시강원보덕 이다. 충신정려(忠臣旌閭)가 내려졌다. 공이 순몰지(殉歿地)인 금산 종용사(從容祠)에 배향(配享) 되지 못했다가 1961년 9월에 유림(儒林)의 건의로 종용사에 추배(追配) 되었다. 배위 증 숙부인 남원 양씨(贈 淑夫人 南原 楊氏)는 진사 순(進士 洵)의 따님이고 아들은 충의위 선(忠義衛 선)이다. 공이 전사하니 동계면 구미리 산33 율호 갑좌에 장사(葬事) 지냈다.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이 갈명(碣銘)을 찬 (撰)하고 연제 송병준(淵齊 宋秉濬)이 묘표(墓表)를 찬 하였다. 배 증 숙부인 남원 양씨(贈 淑夫人 南原 楊氏)와 쌍조(雙兆) 이다. 宣務朗公 (韓 기),(配 羅州 鄭氏)(선무랑공 한 기, 배 나주 정씨) 명종15년(1560)~선조30년(1597) 19세 공의 자는 자장(子長)이다. 집의공 효우(執義公 孝友)의 아들이고 종부정공 원(宗簿正公 垣)의손자이다. 공은 선무랑(宣務朗)을 지냈다. 이에 앞서 배위(配位) 나주정씨 대사헌 윤복의(羅州丁氏 大司憲 胤福)따님을 맞이 하였다. 나주정씨는 명종(明宗)15년(1560) 9월19일에 태어났다. 대대(代代)로 서울에 살다가 갑작스럽게 임진왜란을 당하였는데 형제도 없고 친척도 없이 낮으로는 산중(山中)에 은신하고 밤으로 보행 하다 불의(不義)에 적병(賊兵)이 내습(來襲)하니 정씨(丁氏)는 탈출(脫出)의 불가능을 알고 단도(短刀)를 가지고 절벽에서 투신하여 유혈(流血)이 만면(滿面)하니 적병이 죽은줄알고 버리고 갔는데 다행이 행인이 구제하여 보명(保命)하고 천신만고(千辛萬苦)로 광주(光州)에와서 피난하니 효우동(孝友洞) 은 그의 선영이 있는곳이다.정유재란에 왜적이 광주를 함락하니 정씨가 자녀들을 거느리고 해안으로 두류( 머물러서 떠나지 않음)하다가 이르렀으나 피신할길 이 어렵더니 한 아들이 불행하게도 적에게 잡혔다. 이미 피신할 방책(方策)을 못찾은 정씨는 끈으로 높은 나무에 목을 메었으나 끈이 끊기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왜놈에게는 더럽힐수 없다고 하여 자부(子婦)와 두딸과 함께 수십길 되는 절벽(絶壁)에 투신하여 물에 빠져죽으니 때는 선조(宣祖) 30년(1597) 9월18일이다. 왜병에게 잡혔던 아들은 천행(幸行)으로 탈출하여 수소문(授所聞)끝에 모친이 40일전에 절사(節死) 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지(死地)에 가보니 산사람과 같았다, 정씨의 정절(貞節)은 그 마을 에 마땅이 정려하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지가 오래 되었으나 타향(他鄕)에서 절사(節死)한 관계와 한문(韓門)의 힘이 부족하여 정표(旌表)의 은전(恩典)을 받지 못했다.광주목사(光州牧使) 이후원(李厚源)이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 하되 이 절정문(節呈文)은 이 고을 에사는 전별제 신택(前別提 申澤)과 이정태(李鼎泰)와 참봉유평(參奉柳坪),생원 여응백(生員 呂應伯)등 87인의 정장(呈將)으로 나주 정씨(羅州丁氏)를 기리기 위한 것이고 인조(仁祖)22년(1644)광주 목사 민응협(閔應協)도 진사 박충렴(朴忠廉)등 101인의 정서를 감사(監司)에게 보고한 바 있다. 아들은 현감 위겸 이다.공과 배위(配位) 나주 정씨(羅州丁氏)의 합조묘(合兆墓) 가 선영하 경좌(先塋下 庚坐)에 있었는데 1982년 2월16일 도시 계획(都市計劃)에 따라 광주고덕동(光州高德洞)에 이장(移葬) 하였다가 公州市 이인面 龍城里 山 251-2 인좌(寅坐)에 합조(合兆) 되었다. 縣監公(韓 위 鎌)(配 河東 鄭氏)(현감공 한 위 겸, 배 하동 정씨) ?~선조30년(1597) 20세 공의 자는 군측(君측)이다. 선무랑공(宣務朗公) 기 의 아들이고 집의공 효우(執義公 孝友)의 손자 이다. 공은 임진 왜란(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젊은 나이로 세파(世波)를 헤치고 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을 맞아 불행하게도 왜적에게 붙잡혔다. 이미 피신할 방책을 못찾은 어머니 나주 정씨(羅州丁氏)는 왜놈에게 더럽힐수 없다 하여 자부인 하동정씨(河東鄭氏)와 두딸과 함께 절벽(絶壁)에서 투신하여 떨어져 죽으니 선조(宣祖) 30년(1597) 9월 18일 이었다. 예(禮曹)조에 회계(回啓)한 절점계하(節粘啓下)에 이르되 현감 위겸의 아들 선교랑 황(宣務朗 황) 등의 상소(上疏) 내용에 조모 나주정씨와 (祖母 羅州丁氏) 전모 하동정씨(前母 河東鄭氏) 가 정유재란(丁酉再亂)에 동일 순절(殉節) 하였다고 정표 요청(旌表要請)도 하였거니와 광주 목사 이후원(光州牧使 李厚源)이 순찰사(巡察使)에 보고한 절정문(節呈文), 인조(仁祖)때 광주 목사 민응협(閔應協)도 정서를 감사(監司)에 보고 한바 있었다. 그러나 정려는 이루지 못했다. 공의 배위 하동정씨(配位 河東鄭氏)는 사과 원흥(司果 元興)의 따님이며 아들은 선교랑 황 이다. 공(公)의 배위(配位) 하동 정씨(河東鄭氏)는 광주 송산 간좌(松山 艮坐)에 안장 되었고 공의 묘가 광주 고덕동 선영하(光州 高德洞 先塋下)에 후배 평산신씨(後配 平山申氏)와 합조(合兆)였는데 도시 계획(都市計劃)따라 公州市 이인面 龍城里 山 251-2 인좌(寅坐)에 삼합조(三合兆) 되었다. 寺正公(韓 繼 常)(시정공 한 계 상) 16세 공은 조선선조때 의병(義兵)이다. 자는 상지(常之)이며, 부사공 희(府使公 曦)의 아들이고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손자 이며 어머니는 숙부인 연안 이씨(淑夫人 延安李氏)로 참찬 숭원(參贊 崇元)의 따님 이다. 공은 천성이 강개(慷慨) 하고 지략(志略)이 있었고 궁마(弓馬)를 좋아 하였으며, 음사(蔭仕)로 현종(顯宗) 15년(1674) 2월14일 증 사복시 정(贈 司僕寺 正)이됙었다. 임진 왜란때 금산싸움이 처참(悽慘) 하였을 때 분연히 적개심(敵愾心)을 일으켜 여러 읍(邑)에서 격문(檄文)을 띄워 식량을 모으고 가솔(家率)을 거느리고 흥덕(興德)으로 나아가 야수 채홍국(蔡弘國)과 함께 금산의 산졸(散卒)을 수습 하고 군사300여인을 거느리고 남당(南塘)에 이르러 피로써 맹서(盟誓) 하고는 흥덕으로 유진(留陳) 하여 방비(防備) 하니 7,8읍이 힘입어 온전(穩全) 하였다 이듬해 화의(和議)됨을 듣고 통곡(痛哭)하여 파병(罷兵)했고 정유재란(丁酉再亂)(1597)에 남원성(南原城)이 함락(陷落) 됨에 공이 채공(蔡公)과 같이 옛날 군사를 초집(招集) 하여 호벌치(胡筏峙)에서 대진(對陳) 하여 각축전(角逐戰)을 하기 수일전에 제장(諸將)이 많이 죽으니 분개(奮愾)하여 나아가 싸워 수십 창상(槍像)을 입으니 채,고공(蔡.高公)이 떠메고 귀가(歸家) 하였으나 순절(殉節) 하였다. 흥덕 모충사(興德慕忠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배위(配位) 증 숙인 안동 김씨(贈 淑人 安東金氏)는 부사 성동(府使誠童)의 따님으로 아들은 대호군 축(大護軍 軸), 참찬관 복(參贊官 輹),정략장군 번(定略將軍 번) 이다. 공은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창상(槍像)으로 집에서 순절(殉節)하니 삼개면 어은리 선영자좌(三溪面 漁隱里 先塋 子坐)에 장사 (葬事)하였는데 묘비(墓碑)는 추연 권용현(秋淵 權龍鉉)이 찬(撰)하여 세웠다.공의 배위 증 숙인 안동 김씨(配位 贈 淑人 安東金氏)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후포등자리 자좌에 홀로 안장 되었다.석의가 있다.세향일 음 10월11일. 判官公(韓 慶 生)(판관공 한 경 생)선조10년(1577)~효종9년(1658) 19세 공의 자는 자선(子善) 호는 육우당(六友堂)이다. 첨정공 응문(僉正公 應文)의 아들이고 참찬공 보(參判公 輔)의 손자이며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5대손이다. 어머니는 숙인 연안 김씨(淑人 延安 金氏)로 참봉 벽(參奉 壁)의 따님 이다. 공은 선조10년(1577)생이며 광해5년(1613)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현풍현감(玄風縣監)을 지내고 통훈대부 순천,춘천부사로 있었는데 치적(治蹟)이 있었다. 관직이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이르렀으나 광해정란을 당하여 취임 하지 않았다.어은동에 남하 하여 몽선루를 짓고 아계수(阿溪水) 상산수(上山水)에서 유유자적(悠兪自適) 하였다.경기좌도 수운 판관(京畿左道 水運判官)에 제수(際授)되었으나 취임 하지 않앗다. 인조14년(1633)병자호란를 당하여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이르러 적 수십명을 죽이고 이어 과천에 이르러서도500여명을 죽였다. 그러나 이미 화의(和儀)가 성립(成立) 되었음을 듣고 통곡(通哭) 하였으며 돌아와서는 여러차례의 관직제수(官職際授)에 응하지 않았으며 청淸))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다. 특히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 되었을 때는 오랑케 연호의 교지(敎旨)라 취임 하지 않았다. 동지십사현(同志十四賢)과 더불어 고향인 횡탄(橫灘)에서 문회(文會)를 설(設) 하였으며 효종9년(1685) 2월 15일 82세로 졸하였다.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이다.배위(配位) 증 숙부인 흥성 장씨(贈 淑夫人 興盛 長氏)는 사촌 경세(沙村 經世)의 따님으로 무후(无后)이며 증 숙부인 평양조씨(贈 淑夫人 平壤 趙氏)는 동추 효원(同樞 孝元)의 따님이고 아들은 현감 유량(縣監 有良),부사 용량(府使 用良),통덕랑 익량(通德郞 翊良),출척 석량(黜陟 碩良),첨추 우량(僉樞 遇良)이다.六友堂實記(육우당실기)가 있다.공을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홍곡리 용부동 간좌(三溪面 鴻谷里 龍釜洞 艮坐)에 안장(安葬) 하였다. 표석(表石)이 있으며 월성 이규헌(月城 李圭憲)이 묘비명(墓碑銘)을 찬(撰)하여 세웠다.공의 배 숙부인 평양조씨(贈 淑夫人 平壤 趙氏)는 숙종11년(1685)졸함에 시흥시 과림동(始興洞 果林洞)에 홀로 안장(安葬) 되었다.공의 호가 육우당(六友堂)으로 생전 거소(生前 居所)이며 공이 직접 건립(建立)하였다. 參判公 (韓 必 遠)(참판공 한 필 원)선조11년(1578)~현종1년(1660) 20세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원이(遠而)호는 도천(道川)이다. 석탄공 효중(石灘公 孝仲)의 아들이고 참판공 천뢰(參判公 天賚)의 손자 이며 문정공 계희의 6대손이다. 어머니는 증 정부인 전주 이씨(贈 貞夫人 全州 李氏)로 감찰 언형(感察 彦亨)의 따님이다.공은 선조 11년(1578)일생이다. 선조38년(1605)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장의(成均館 掌議)로 있을 때 이황(李 愰)의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반대하는 정인홍(鄭仁弘)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가 한때 광해군을 노하게 하였으나 이항복(李恒福),이정구(李廷龜)의 변호로 무사 하였다. 선교랑(先敎郞)으로서 광해(光海)8년(1616)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고 승문원저작, 봉상시 직장을 역임하였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 갔으며,뒤에 주서에 제수 되었으나 사직 하였다.인조반정후에는 충청도 선유어사(忠淸道宣諭御史)로 나간 바 있고 이듬해 인조 2년(1624)이 괄(李适)의 난때는 공주로 왕을 호종 하였다가 난이 끝난 뒤 병조좌랑,종랑,성균관 직장을 역임하고,정언,집의,등 8년동안 대간으로 봉직한뒤 통정으로 승계하여지냈다.1636년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을 잘지켰기 때문에 가선(嘉善)으로 승계되고 예조,형조,의 참판과 한성부서윤등을 역임 하였으며, 효종때는 역시예조참판,도승지,특진관,부호군 등을 역임 하였다. 그뒤 가의(嘉義)에 승계하여 1660년에 별세 하였다. 성품이 안온하여 직언은 하지 않으면서 왕의 덕을 잘 보필하였고,교걸(皎걸)의 명성을 떨치지는 않았으나 행위가 깨끗하였으며,이름난 학자는 아니나 어리석음을 능히 깨우친 인품이었다. 현종1년(166)년 2월4일 83세로 졸하하였다.배위 정부인 전주최씨(貞夫人 全州崔氏)는 영의정 기남(嶺議政 起男)의 따님이고 정부인 전주이씨(貞夫人 全州李氏)는 감찰 갑록(監察 甲祿)의 따님이다.아들은 현감 여두(縣監 如斗,生父 必厚),군수여우(郡守 如愚), 이다.공은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 신촌 건좌(乾坐)에 안장 되었고 우암 송시열(尤암 宋時烈)이 지명(誌銘)을 찬(撰)하였다. 후배 정부인 전주 이씨(後配 貞夫人 全州李氏)는 현종12년(1671) 3월 1일 졸함에 공묘(公墓)와 합조(合兆) 하였다. 여서 외제 이서하(女서 畏齊 李瑞夏)가 지명을 찬하였다.공의 배 증 정부인 전주 최씨(配 贈 貞夫人 全州崔氏)는 인조18년 (1640)11월23일 졸함에 양주마치본종 선영 유좌(楊州 磨峙 本宗 先塋 酉坐)에 홀로 안장(安葬) 하였으나 오랜 세월로 실호(失護)되었다.세향일 음 10월6일 左尹公 (韓 會一)(좌윤공 한 회 일) 선조13년(1580)~인조20년(1642) 20세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형보(亨甫)이고, 호는 유주(柳州)이다. 문익공 준겸(文翼公 浚謙)의 아들이고 유음공 효윤(柳陰公 孝胤)의 손자이다. 어머니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檜山府夫人 昌原 黃氏) 는 좌랑 성(佐郞 城)의 따님이며 공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오빠이며 선조13년(1580년)4월8일에 태어났다. 종백부(從伯父)인 구암공 백겸(久庵公 百謙)에게 수학(修學) 하였다. 처음에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으로 출사(出仕)하여 인의 겸 참군(引儀 兼 參軍)을 거치고 함열,고양,강서,이천,남양,부평,여주,양근,임천,연안등 10군의 수령(守令)을 지냈는데 선정(善政)함에 백성들의 마음이 평안 하였다. 그뒤 전부(典簿), 군기시 첨정(軍器寺 僉正),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을 지냈다. 인조 15년(1637)병자호란 당시에 위산성(衛山城)에 들어가서 공을 세워 경(卿)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다.인조20년91642) 12월23일 졸하니 향년(享年) 이 63세 이다.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이 묘갈명(墓蝎銘)을 찬(撰)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전주 이씨(貞夫人 全州 李氏)로 판서 성중(判書 誠中)의 따님이며 아들은 이성(以成),이명(以明,系興一后)이다.공은 경기도 시흥시 군자면 거모리 상용산 고묘 좌측에 안장되었다, 배 정부인 전주이씨(配 貞夫人 全州 李氏)는 효종(孝宗) 6년(1655) 5월16일 졸하니 공묘(公墓)와 합조(合兆)이다.세향일 음 7월17일. 府使公 (韓 得 信)(부사공 한 득 신)선조20년(1587)~인조17년(1639) 20세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휘는 득신(得信)이다. 참봉공 의(參奉公 義) 의 아들이고 봉사공 거벽(奉事公 巨擘)의 손자이다.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6대손이다. 어머니는 영인 전주 최씨(令人 全州 崔氏)로 중진(仲津)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20년(1587) 2월 14일에 청양군 대치면 농소리에서 태어났다. 천품(天稟)으로 도량(度量)이 넓고 정의심(正義心)이 강하여 지조(志操)와절개(節介)가 굳었다. 재지(才智)가 있어 성경현전(聖經賢傳)을 탐구하고 정자,송자서(程子,宋子書),에 밝았다. 인조조에 무과급제(武科及第)하여 나중에 부사(府事)에 제수(際授) 되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와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하여 후학에 힘썻다. 인조 병지호란이 일자 패배(敗北)가 계속 되고 대가(大駕)가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 하는등 나라가 위태롭고 어수선 할때 의연히 일어나 여러 의사(義士)들과 창의(倡義)하여 중직대부 건공장군(中直大夫 建功將軍)으로 수천명 이 토적(討賊)할 때 공이 최선봉(最先峯)으로 역전고투(力戰苦鬪) 하였으나 적새(賊勢)가 왕성하여 끝까지 사투(死鬪)하다 수성(壽星)이 진영중(陳營中)에 떨어져 인조 17년(1639) 5월19일 창성(昌城)에서 순절(殉節) 하였으나 향년 53세였다. 이 전투에서 순절한 공의 머리를 공의 말이 물고 본제(本第)에 돌아왔다. 비록 짐승이긴 하지만 의리(義理)로 주인에게 보은(報恩) 하였으니 어찌 장하다 아니하리오.공묘는 충청남도 청양 수석리 화치 광대곡 간좌원(靑陽 水石里 化峙 廣大谷 艮坐原)이다.배위 숙인 용인 이씨(淑人 龍仁 李氏)는 생남(生男)의 따님으로 효종 7년 (1656) 6월22일에 졸하니 청양군 대치면 시전리 자좌(靑陽郡 大峙面 枾田里 子坐) 에 초장(初葬) 한후 328년이 지난 이제 지령(地靈)이 좋지 않아 1984년 9월15일공묘에 합조(合兆) 되었다.묘표(墓表)는 1984년 가을 전주인 이선기 찬(全州人 李瑄基 撰)으로 세웠다, 공주 계룡산 동학사 숙청전 충신묘(公州 溪龍山 東鶴寺 肅淸殿 忠臣廟)에 향사되었다. 공묘 백호하(白虎下)에 강절의마(剛節義馬)를 장(葬)하고 비석을 세웠으며 마총(馬塚)에도 제사를 지낸다. 아들은 군수 후유(郡守 後愈) 이다.세향일 음 10월7일 . 承旨公(韓 正 則)(승지공 한 정 칙)1602~1662 20세 공의 자는 자평(子平)이다. 집의공 적(執義公 適)의 아들이요 승지공 언윤(承旨公 彦胤)의 손자로서 일찍이 한학(漢學)을 수학(修學)하고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후진(後進) 교육에 임하고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이때에 남양태수(南陽太守) 윤계동(尹棨同)과 더불어 의병(義兵) 일으키일을 논하고 따라서 종군(從軍) 하였다. 전란(戰亂)이 평정(平定) 된후에 관직에 나갈 기회가 없이 졸하니 나라에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參贊官)을 증 하였다. 본래 묘비(墓碑)가 있었으나 연유(緣由)모르게 없어졌고(전란으로 인하여 훼실된 것을 추정) 현재는 문관석(文官石)과 상석(床石)이 있을뿐이다. 배위 전주 이씨(配位 全州李氏)는 경기도 고양시 관산동 선영에 안장 되었고 시향은 음 10월9일이다. 계배 용인 이씨(繼配 龍仁 李氏)는 공과 합폄이다. 승지공과 배위 용인 이씨 시향(時享)은 음 10월5일이다.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맏아들 서성군 전(西城君 전)과 진사 위(進士 위), 승지 순(承旨 순),인데 승지공은 숙부(叔父) 사과공 (司果公)이칙(彛則)에 계후(系后) 하였다. 贊成公 (韓 有 良)(찬성공 한 유 량) 선조 36년(1603)~효종7년(1656) 20세 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문신으로 자(子)는 상오(相五)이다. 부사공 경생(府使公 慶生)의 아들이며 첨정공 응문(僉正公 應文)의 손자이고 안양공 종손(安襄公 終孫)의 5대손이니 선조 36년(1603)생이다. 음사(蔭仕)로한성,함흥판관(漢城,咸興判官),정산현감(定山縣監),천안옥천군수,(天安.沃川君守)청주진관(淸州鎭管),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고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있었으며 변(變)을 들은 즉시 병사(兵士)를 점검하여 직산행영(稷山行營)으로 달려가니 새벽이었다.방백 정세규(方伯 鄭世規)가 놀라고 기뻐하여 정산(定山:靑陽)은 기호(畿湖)에서 중한곳이라 바로 읍(邑)에 돌아가 수비(守備)케하니 공은 관아(官衙)에 돌아와 의병(義兵)을 규합(糾合)하고 격문(激文)을 금읍(近邑)에 보내어 경계(警戒)를 엄히 하였으므로 정산지구(定山地區)만은 힘입어 홀로 온전(穩全) 하였다.공은 인조11년(1633)부터1637년까지 정산현감(定山縣監) 재임중 선정(善政) 하니 백성(百姓) 들이 바위벼랑을 깍아 송덕(松德) 글을 새겨 놓았다.효종7년(1658) 5월 8일 54세로 졸하였으며 뒤에 사자(四子)가 보사훈(保社勳)이 됨으로 통정대부 이조참의(通政大夫 吏曹參議)에 증직 되고 영조 32년(1756)인경왕후(仁敬王后)의 외조(外祖)이기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세자이사 오위도총부 도총관(世子貳師 五衛都摠府 都摠管)을 특증하다.배위(配位) 증 정경부인 덕수 이씨(贈 貞敬夫人 德水 李氏)는 증 이판 경현(贈 吏判 景憲)의 따님이고 아들은증 승지 태유(贈 承旨 泰愈),부사 두유(府使 斗愈),참군 제유(參軍 濟愈),보사훈 기유(保四勳 起愈) 이다.공의 배 증 정경부인 덕수이씨 (配 贈 貞敬夫人 德水 李氏)는 숙종10년(1684) 8월28일 졸하니 경기도 과천 광명리 백학동 사좌(京畿道 果川 光明里 巳坐)에 안장(安葬) 하였는데 석의(石儀)가 있으며 소재 이이명 묘비 찬(疏齋 李이命 墓碑 撰) 이었는데 도시계획에 따라 1987년 삼계면 홍곡리 용부동 선영 후록 묘좌(三溪面 鴻谷里 龍釜洞 先塋 後麓 卯坐)에 이장(移葬) 하였으며 묘비(墓碑)가 있다.(愼追齊)전라북도 남원시 대정동 촌후세향일 음 10월15일. 한 두 유(韓 斗 愈)1632(인조 10)∼1679(숙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중명(仲明). 유량(有良)의 아들이다.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의친(懿親)으로 재랑(齋郎)·봉사·종부시주부·호조좌랑을 역임하고 진안현감이 되었다. 이곳에서 특별히 정치를 잘하여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하였다.그뒤 김천군수에 제수되었는데, 그곳에서 치적을 쌓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뒤에 이천·풍덕의 수령으로 옮겨졌으나, 그 고을 백성들이 계속 김천에 머물러 줄 것을 진정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節度使公 (韓 範 錫)(절도사공 한 범 석) 현종 13년(1672)~영조19년(1743) 공은 조선 후기(後期)의 무신이다. 자는 성뢰(聖賚)이고,도위공 영세(都尉公 塋世)의 아들이며 승지공 시회(承旨公 時賄)의 손자이며 문정공 계희(文靖公 繼禧)의 8대손이다.어머니는증 정부인 전의 이씨(贈 貞夫人 全義 李氏)로 의험(義험)의 따님이다. 공은 현종13년(1672) 11월25일생이다. 숙종 21년(1695)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통어사(統禦使)등을 거쳐 부총관이되고 용호대장(龍虎大將)이 되었다.서해의해적들이 심양(瀋陽)과요동 사이에 출몰하여 변방지역을 노략질 하자 이것은 조선 북쪽변경지역에도 걱정거리라 하여 여기에 대비할 인물을 선발 할 때 무관들중에 제1인자로 뽑혔다. 적의 정세를 잘 탐지한 다음 청나라에 보고 하여 공을 세우고 귀국하여 제주목사가 되었다.이때마침 흉년이 들어 섬의 주민들이 굶주리게 되자, 관청의 곡식을주선해서 진휼(賑恤) 하였고 나쁜병이 나돌자 서울에서 약을 구해 병을 퇴치 하였다. 섬주민들은 운혜에 감사하며 송덕비를 세웠고 왕은 공로를 치하 하였다.경종(景宗)2년(1722) 나주토포사(羅州討捕史)로 있다가 영흥부사로 옮겼으며1724년 경상 좌수사가 되었다.영조(英祖)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안성에 모인적을 무찔러 난을 평정하고 민심을 안정 시켰다.1732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부임 하였으나,3년에 한번 순점(巡點)하는 규율을 어기고 매점 순점 하였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이듬해 경상우 병마절도사,황해도병마절도사등을 역임 하였다.영조19년(1743) 6월8일 72세로 졸하였다. 관(官)에서 장사(葬事)를내리고 제문(祭文)을 사 하였다. 배위 정부인 김해 허씨(配位 貞夫人 金海 許氏)는 정(錠)의 따님이다. 아들은 백원(伯瑗),전,규,용,이다 공을 내동면 율곡리 안산경좌(柰洞面 栗谷里 案山庚坐)에 안장(安葬) 하였다.참찬 곽도(參贊 郭도)가 비문(碑文)을찬(撰)하고 후손(後孫)응복(應復)이 가장(家狀)을 찾하였으며 지석(誌石)을 묻었다. 공의묘는 경상남도 진주시 신안동 선영하 건좌(慶尙南道 晉州市 新安洞 先塋下 乾坐)이다.공의 배 정부인 김해허씨(配 貞夫人 金海 許氏)는 영조3년(1727) 3월 8일 졸함에 신안동 선영하 건좌(新安洞 先塋下 乾坐)에 안장 하였는데 지석을 묻었다. 永將公(韓 德 文)(영장공 한 덕 문) 선조(1578)~인조5년(1627) 공은 조선 중기(中期)의 무신이다.자는 성재(聖哉)요,언당(彦棠)의 아들이다.1593년(선조26) 조정에서 군대를 모으느 방편으로 무과를 빈설(頻設)하자,16세 나이로 종형(從兄) 억류(億留)와 함께 무과에 급제하고 싸움터로 나갔다.왜란이 끝난뒤 공로를 인정받아 수문장(守門將),훈련원 봉사를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북역장(北營將)으로 안주산성에서 청나라군대를 막았는데,힘껏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 되자 좌영장(左營將) 개천군수 장돈(張暾),훈련원 봉사 김언수(金彦守),함응수(咸應守)등12인과 함께 스스로 불길속으로뛰어들어 순절 하였다. 숙종7년(1681) 승지 정유악(鄭維岳)의 주청에 의하여 정묘호란이 당시 안주성에서 순절한 충신들을 위한 충민사(忠愍祠가 설립되자,그는 그곳 동무(東無)에 배향되고 이듬해 훈련원 정에 추증 되었다. 병사공(韓 흥 보)(병사공 한 흥 보) ?~태종10년(1410) 조선초기의 무신,1402(태종2)대호군으로서 동북면지명마사에 서용되고,1408년 경원등처병마사 겸 경원부사(慶源等處兵馬使 兼 慶源府使)에 임명되었다.1410년 여진족의올적합(兀狄哈),김문내(金文乃),갈다개(葛多介),등이 오도리(吾都里),올량합(兀良哈)등과 결탁하여,갑병(甲兵)300여명을 이끌고 경원부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병마사로서 나아가 싸웠으나 패하여 전사 하였다.태종이 그의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부의(賻義)로 쌀과 콩 40석,종이 100권을 하사 하였다. 譯官 (韓 潤 寶)(역관 한 윤 보) 생몰년 미상, 조선중기의 역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이러나자 조정에서는 7월에 예조판서 윤근수(尹根壽)와 공조판서 한응인(韓應寅), 이어서 8월에는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하였는데 그때마다 통역관으로 동행 하였다, 그해 평양 탈환전에서 패전한 명장(明將) 조승훈(祖承訓)이 귀국하여 패전의 책임을 조선측에 전가하메 이의 진상을해명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갔다. 이 때 명나라의 순안어사(巡按御史)가 조선군사들이 왜적에게 투항하여 명군에게 작전상 차질을 주었으며, 명군의 군량과마두(馬豆)를 제데로 공급하지 않아 인마(人馬)를 죽도록 한데 대하여 힐책 하였다.이에 대하여 그느 그동안의 곡절을 겸허하게 해명하여 명나라 조정에서 조승훈의 보고가 허위임을 납득하게 하여 조선측의 큰 걱정거리를 해결 하였다.1593년(선조26) 2월 접반사(接伴使) 한응인 8월에는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역관으로 또다시 명나라에 다녀 왔으며,1598년에는 명장 진린(陳璘)의 차비역관(差備驛官)이 되었다. 임진왜란중 우리나라에 원병온 명군과의 외교관계 에 역관으로 큰 공헌을 하였다. 淸城君 (韓 淑 昌)(청성군 한 숙 창) 1526~1604 19세 공의 자는 언방(彦邦)이요,군수공(郡守公) 충손(忠遜)의 아들이요, 승지공(承旨公) 문송(文松)의 손자이다.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公臣)으로병조판서청성군(兵曹判書淸城君)에 증작(贈爵) 되었으나 전해오는 유사(遺事)가 없으니 고증할 사료(史料)가 없어 약기(略記)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공이 선조 37년(1604)에 수 79세에 별세(別世) 하니 선영(先塋)에 안장 되었다.공의 본래(本來) 묘는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 소만부락(小滿部落) 뒤산 축좌(丑坐)이었으나 도시개발로 현재의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 산23번지에 천묘(遷墓)하여 양위(兩位) 합폄하고 묘비(墓碑)와 문관석(文官石)은 구표석(舊表石)을 옮겨온 것이며 묘(墓)의 호석(護石)과 상석(床石)은 신설이다. 시향(時享) 음 10월10일 공(公)의 배위(配位) 산소(山所)는 평남 영원(平南 永遠)에 공의 고위 묘하(考位 墓下) 이다. 庶尹公(韓 山+律)(서윤공 한 율)선조26년(1593)~인조14년(1636)공은 조선조 문신으로 자는 우첨(于瞻)이요 호는 송월당(松月堂)이다.판관공(判官公:師聖)의 아들로공안공 치인(恭安公:致仁)의 7대손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慶州金氏)니 참의공 위(參議公 偉)의 따님이다. 인조2년(1624)생원,진사 두시험에 합격하여 조상의덕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현령(縣令: 종5품),군수(軍守),등을 역임 하였고 동왕14년(1636) 한성부 서윤(庶尹)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 조선조16대 인조14년 청나라 침입으로 일어난 난리, 청의 태조이 직접10만대군을 이끌고 침략함)으로 조정은 한때 남한 산성으로 피신 하였는데, 공은 문신 임에도 남한산성을 지키기위해 무장(武裝)을 하고 용감 하게 적과 싸우니 오랑케도 감히 무서워서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이와같이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니 조정에서는 공의 충성을 기려 병조 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배위는 증 정부인 의령 남씨(宜寧 南氏)이니 판서(判書:以賢)의 따님이다. 슬하에3남3녀를 낳고 부실 에서3남2녀를낳았다. 韓 承 貞(한 승 정)1478(성종 9)∼1534(중종 2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성지(成之). 아버지는 한성부판관 사무(士武)이며, 어머니는 현감 변보(邊保)의 딸이다.이심원(李深源)의 문인이다.1507년(중종 2) 진사가 되고, 151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을 거쳐 정언·전라도사·장령 등을 지냈다. 당시의 권신 김안로(金安老)와 동문이었으나, 김안로가 세도를 부리자 절교하였고, 지평으로 있을 때는 김안로를 탄핵하여 크게 미움을 받았다.그뒤 장악원정·사복시정을 거쳐, 대사간으로 특진된 뒤 예조참의를 지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세가인 김안로에게 아부를 하였으나 교제를 끊을 만큼 청렴하였으며, 죽은 뒤 집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몇 권의 책뿐일 만큼 청빈하였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