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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소통하기
심 귀 연
1. 나와 너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은 사물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다. 사람은 사물처럼 규정지어진 존재도 아니며, 식물처럼 생겨난 자리에 생겨난 그대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다. 그리고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고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살아가며 미래를 계획하여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또는 내 앞의 누군가에게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게 뭐냐고 한번 물어보자. 각자 자기 삶의 범위 안에서 겪은 경험을 이야기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외로움이다. 가난은 배고픔이며 추위다. 그러나 이렇게 지긋지긋한 가난도 외로움 앞에서는 두 손들고 사라지고 만다. 가난은 이겨낼 수 있지만, 외로움은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가난을 쉽게 이길 뿐 아니라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 마저 찾아낸다. 그러나 외로운 사람은 황제와 같은 풍요로운 삶 속에서도 견뎌내지 못한다. 외로워서 죽는 존재가 사람 외에 또 있을까?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라고 불리는 영화, 《케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홀로 남게 된 주인공은 배구공에게 윌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친구가 된다. 배구공 윌슨은 그의 친구이자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 윌슨을 잃은 것은 그와 함께 한 삶을 잃은 것이며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의미를 잃은 것이다. 만약 주인공이 윌슨을 잃은 채 구조마저 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또 다른 윌슨을 찾아내거나 또 다른 윌슨을 찾아내지 못한 채 배구공 윌슨을 따라 바다 속에 몸을 던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영화에서 보여지는 윌슨과 주인공의 관계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더불어 사는 존재임을 드러내준다. 또 다른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우리는 인간이 원천적으로는 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읽어낼 수 있다. 매트릭스는 가상공간이다.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기계들은 인간을 살려두기 위해 가상공간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존재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 가상현실에서 죽으면 실제로도 죽는다는 것이다. 두 영화는 인간의 존재의미가 생물학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에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다 요즘 TV에서는 은둔형 인간들에 대한 내용이 심심찮게 방송되고 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더불어 사는 존재임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고립한다. 그들의 고립은 타인을 부정하고 타인을 거부하는데서 비롯된다. 이들은 타인을 거부하면서 자신을 거부한다. 아무도 없는 가운데 나는 내가 될 수 없다. 내가 ‘내’가 되는 것은 타인을 통해서다. 만약 다른 것을 거부하지 않는 대신에 내가 어떤 것에 매몰되어 있다면, 나는 ‘나’를 느낄 수 있을까? 내가 <어떤 것>에 온전히 향해 있을 때 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나를 떼어내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있다고 하자. 그 순간 꽃과 나 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 그렇게 황홀지경에 빠진 내가 나로 돌아올 때는 불현듯 그 꽃의 아름다움에서 빠져 나와서 거리를 둘 때다. 거리를 두고 그것을 이해할 때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 ‘나’라고 하는 인간은 대상이나 타인들로 인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타인들과의 소통을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선인은 나를 버리고 무아지경에 빠지라고 하지만, 인간은 그런 식으로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외로울 때 인형이건 베개 건 그 어느 것에건 말을 걸고 싶어하지 않는가? 청소년시절에 일기를 써본 사람은 공감할 것이다. 일기장은 J나 Sunny 등의 이름을 가진 누군가에게 보내는 내 편지가 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 J나 Sunny는 바로 나 자신이다. 이렇게 우리는 가상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각인 시키려 할 뿐 아니라 나 자신마저 타인화하여 나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배구공이 아닌 실제 사람을 앞에 두고도 벽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얼마나 답답할까. 흔히들 사람이 살아가는 필수적 조건으로 의식주를 이야기하지만, ‘사람’으로 살기 위한 조건을 말하라면 ‘타인’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나를 인정받을 수 있는
2. 존재한다는 것과 소통한다는 것
인간도 동물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거부의 소리가 들린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너무나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는 동물과 같지 않다. 게다가 인간은 사유를 전달할 수 있는 복잡하고도 정밀한 언어 체계와 다양한 표현방법들을 가지고 있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생존을 위한 방법을 터득하는 일 외에 다른 행위를 하지 않지만,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말을 배우고 자신이 이해하는 다양한 것들을 표현하려하며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자 한다. 동물들은 자연의 위협에 저항하거나 보호받을 수 있도록 털이나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태어나며 그들의 손톱이나 이빨은 사냥한 먹이를 잘 먹을 수 있도록 발달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추위나 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만들어야하고 날카로운 손톱 대신에 도끼 날을 들어야 하며 먹이를 잘 먹기 위해 그것을 조리할 수 있는 다양한 조리도구를 만들어야한다. 이처럼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지만, 도구를 통해 생존을 넘어선 많은 활동을 한다.
인간들은 음식을 먹는 일 외에 먹는 행위를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들, 즉 음식 조리 방법, 조리도구사용법, 테이블 셋팅, 식사예절 등을 익힌다. 예를 들어 음식 조리 방법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조리 방법이 다른 것은 그 지역의 자연적 조건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이 살아가는 곳의 사람들과 연결고리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이다. 외부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걸치는 옷도 마찬가지다. 트레이닝 한 벌로 잠옷과 실내복 그리고 외출복을 동시에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부드러운 순면의 이음새가 없는 편한 잠옷을 입는다. 또 우리는 편안하게 손님맞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멋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잡다한 집안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실내복을 입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다양한 목적으로 만나기 위해 우리는 거기에 걸맞은 외출복을 선택한다. 우리에게는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해서만 집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필요성만 있다면 굳이 지금처럼 어떤 특별한 구조를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집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우리의 생존조건은 다른 사람과의 원만한 소통을 위한 조건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사람들이 다른 생물들과 구별되는 것은 생존을 위한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과 소통하기를 원하는데 있다. 나는 내 앞의 누군가에게 내가 본 것을 설명하기를 원하며 내가 설명한 것을 그가 이해하기를 바란다. 나를 이해하는 누군가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내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생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으로부터 나를 인정받는 여러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타인이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바로 소통을 통해서다. 다시 말해 ‘내’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너’와의 소통을 통해서다.
3. 소통의 방식 나는 타인과 더불어 존재한다. 하지만 타인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까? 우선 나는 내 눈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후 그것이 무엇인지 톡톡 만져도 보고 말도 걸어볼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어떤 반응을 보인다면 나는 그것과 소통을 시도할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소통을 통해서다. 소통이란 내 앞의 누군가와 내 생각을 교환하거나 내 느낌, 그리고 내가 이해한 것을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은 일차적으로 말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말만으로는 완벽하게 소통할 수가 없다. 말은 표현의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몸짓과 표정을 섞어가며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며 말의 의미를 보충하기도 한다. 그런데 말은 지속성이 없다. 인간이 전달 수단의 지속성을 추구하는 것은 영원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말은 내 앞의 누군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말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는다. 사람들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넘어 소통하고 싶어한다. 다행히 소통의 방법은 노래, 이야기, 무용, 영화, 그림 등 참으로 다양하다. 소통을 위한 여러 방식들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생겨난다. 특히 그림은 문자적 의미와 동시에 당대의 미에 대한 관점을 말해주는 훌륭한 수단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림은 개인과 개인의 소통이기도 하며 과거와 현대와의 미묘한 소통이기도 한다. 그림은 문자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개인이나 집단의 소망을 전달하고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고대 동굴벽화를 눈여겨보자. 구석기인들은 소망을 그림으로 그리는 동시에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의 사람들의 삶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먹을 것을 구하고 살 곳을 찾고 또 사나운 짐승이나 자연재해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으면 되는 시대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과제는 그러한 재난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부족을 지켜내는 것이다. 특히 아르놀트 하우저는 고대인들이 벽에 사나운 짐승을 그리고 그 짐승의 몸통에 화살을 꽂으면 실제로 그 짐승들이 몸에 화살을 맞은 채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대인들이 그림을 그렇게 사실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믿음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고 실현되기를 바랬으며 또 그것을 통해 부족의 다른 사람과 소통하려 했을 것이다. 부족을 지키려는 소망은 나를 지키려는 소망이며, 이러한 소망은 부족들 간에 깊이 소통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림은 그 시대가 가진 가치관과 삶의 모습 등을 매우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말처럼, 구석기인들이 사실적인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들이 감각하는 대로 보았기 때문이라면 그것으로도 우리는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구석기 이후의 사람들이 그들의 그림을 단순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 인지적 능력에 의해서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통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표현하는 세계는 그들이 사는 세계다. 그들의 표현방법은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그들의 방법으로 소통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의 라스코 동굴벽화 고대의 몇몇 조각품을 좀 더 살펴보자. 사람을 표현한 어떤 작품은 인체의 특정부분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 미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그림을 전체적으로 바라볼 때 사람과 사물과의 크기도 전혀 사실과 다르다. 이집트인들의 회화는 어떤가? 사람들의 몸통은 정면이면서 얼굴은 측면이며, 어떤 사람은 아주 크게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게 묘사되었다. 근거리와 원거리에 대한 구별도 없다. 위치나 크기는 그림 속의 인물이나 사물의 중요성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이집트인들은 그러한 질서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아닐까. 세월이 흐르면서 단축법이 사용되어 근거리와 원거리에 대한 묘사가 우리를 어느 정도는 만족시켜주지만, 우리는 여전히 어색함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원근법에 너무 많이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과 삶의 방식이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림은 미숙한 것으로 현대의 그림은 거부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의 소통에서의 불일치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소통의 방식 중에서 그림은 표현의 자유를 보다 많이 가진다. 그림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다. 글은 친절한 듯 하지만, 그 글이 기호가 되어버릴 경우, 그것의 해독은 심각하게 어려워진다. 그림은 보는 이의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아서 마치 불친절한 듯 보이지만, 보는 사람의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낸다. 우리가 어떤 그림을 보고서, ‘이것은 그림도 아니야’라는 말을 뱉거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을 때가 언제였을까를 생각해보자. 과학의 발전처럼 회화의 양식도 발전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회화적 양식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의 양식에 익숙해져 있을수록 오늘의 양식을 더욱 이해하기 힘들며 오늘의 미술 양식에 젖어 있을수록 새로운 양식에 대한 거부감은 훨씬 더 강하다.
중ㆍ고교 시절 우리들이 학교 미술시간에 배운 원근법이 하나의 미술법칙으로 자리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원근법은 인상파가 등장하면서 사실상 미술적 법칙으로서의 지리를 잃었다고 봐야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근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그림을 미숙한 그림이거나 난해한 그림이라고 단정짓는다. 인상파의 그림에 익숙해 있고 다른 어떤 작품보다 호감을 가지면서도 원근법이 마치 그림 그리기에서 지켜야할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여야할까? 물론 서양에서 인상파의 그림들이 처음부터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다. 인상파들에 대한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의 재미있는 반응은 지금보다 더욱 적극적이고 직접적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지니고 있던 우산으로 그들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그림 같지 않다고 판단된 그 그림들을 마구 찍어댔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 그림들은 손상되지 않도록 높이 걸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우리에게 인상파의 그림은 낯설지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까울수록 크게 그리고 멀수록 작게 그려야 사실적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진짜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볼 때 요즘의 그림들은 도무지 그림 같지 않다. 그림 속의 사물들은 때로는 측면이 정면과 함께 나란히 있기도 하고 숨겨져 있어야할 뒷면조차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어떻게 보면 그림의 기본을 모르는 사람이 그런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아이들의 그림이 이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내용은 어떤가? 아이들의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예를 들어 샤갈의 그림 속에서는 행복해 보이는 연인이 도시의 하늘위를 떠다니고 있으며, 자신이 살았던 그림 속 마을의 여기저기에는 말과 닭의 모습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피카소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을 화폭에 담았지만, 그녀들의 얼굴은 언뜻 보기에 괴기스럽기 조차하다. 그러나 우리가 한발 멀리 떨어져 시선을 전체에 두었을 때 여인은 그림 속에서 빠져 나와 마치 홀로그램처럼 우리 앞에 뚝 서 있다. 그의 유명한 바이올린도 한번 눈여겨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반듯한 모양의 바이올린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어떤 바이올리보다 친숙하다. 더욱이 지금은 이와 같은 회화적 양식 뿐 아니라 예술적 정의마저 논란이 되고 있다. 어떤 그림은 변기가 하나 달랑 그려져 있기도 하다. 도대체 이 그림을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 현대 화가들 중 몇몇의 작품들은 도저히 아름답지가 않다. 특히 젊은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섬뜩함마저도 있다. 그들의 작품에는 일상인이 기대하는 아름다움이 없다. 아름다움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회화는 순수한 예술적 시각에서보다는 인테리어적 효과를 우선시하는 경향마저 띠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사실화에 익숙해 있고 사진으로 찍은 듯하면서도 실제보다는 아름답게 묘사된 그림을 좋아한다. 우리의 의식에는 그림이란 실제와 다르지 않으면서도 실제보다 아름답게 그려져서 우리 앞에 놓여 있어야한다는 생각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양식을 접할 때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은 기존의 화가들이 제시한 양식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에 있어서는 거부감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새로운 것에 환호성을 지른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나간 것들에 많은 미련을 두지 않고 내던져 버린다. 그러나 정신적인 영역에 있어서 새로운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엄청나게 크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이해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과거의 것은 그보다 더 과거의 것에 비한다면 새로운 양식이다. 과거의 그 양식은 기존의 것에 대한 발전적 양식이었을 수도 있으며 때로는 기존의 것에 대해 반향인 것도 있다.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후자의 경우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가 익숙해 있던 것과 다르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불안요소가 된다. 회화의 양식은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사회가 변하고 사람들의 욕구가 변하며 소통방식도 변한다. 그림은 표현하는 사람의 개인적 욕구이기도 하지만 변화된 사회를 반영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다시 말해 회화의 역사는 소통의 역사다. 소통의 역사이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의 역사다. 소통으로서의 그림은 말이나 문자로 표현하지 못하는 다양한 세계를 표현한다. 그림은 주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생생한 역사의 기록을 담고 있으며, 신앙심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또는 자신이 이해한 세상을 표현해내기 위한 다양한 기법들을 개발하고 그것으로 표현해내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는 자는 자신의 세계를 그림을 통해 표현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들은 세상을 향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건 간에 그것은 각각의 시대가 지니고 있던 세계관과 철학을 보여준다. 그림은 어떤 개인의 세계를 그리고 그가 사는 세계를 단번에 이해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그림을 어떻게 읽어내는가에 달려있다. 4. 선과 색으로 이해하는 세상
우리는 말로 소통을 하고 글로 소통을 하고 이미지를 통해 소통을 한다. 말과 글과 이미지는 보다 정확한 소통을 위해 상호보완적으로 사용되어야한다. 죽은 이미지가 글이나 말을 통해서 되살아나듯, 글이나 말 또한 이미지를 통해 생기를 입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지를 보고, 글이나 말은 이미지에 생기를 준다. 우리가 보는 것은 내 앞에 드러난 사물들이거나 나와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이다. 글은 무엇을 묘사할까? 우리 눈과 마음에 보이는 것들이다. 글도 이미지도 결국 내 앞에 있는 것을 묘사하고 본다. 우리는 글이나 말을 통해서 이미지를 떠올리며 이미지를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한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미 말했듯이 그것은 어떤 표현방식보다 풍부하다. 그러나 때때로 이미지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숨기기도 한다. 글은 이미지에 비해 친절하다. 글은 우리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한다. 마치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이미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마티스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회화가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마티스는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이듯이 그의 작품에서 사물의 형태를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오로지 색만을 포착해내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선’이 ‘말’이라면 ‘색’은 ‘회화’이다. 미술사에서 선과 색의 논쟁이 시작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고전주의가 섬세한 선의 흐름을 통한 형태의 묘사에 가치를 두고 있을 때 새로운 화파들이 ‘색’을 들고 왔다. 그때가 17세기 바로크시대였다. 그 시대의 화가들은 회화에서 소묘가 전부로 이해되는 것에 대해 마땅찮아 했다. 소묘는 회화의 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색은 이미지 자체다. 회화는 글이 아니라 이미지다. 그러므로 회화의 본연의 모습은 선이 아닌 색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티스는 회화의 본 모습이 색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의 소재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완전히 무시한다. 그럼에도 마티스는 소묘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회화의 본 모습이 색이긴 하나, 소통과 이해는 그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얀 도화지에 선을 그어 형태를 그려낸다. 선으로 사물을 설명한다. 여기에 탁자가 있고 저기에 의자가 있다고 지시한다. 그런데 때로 선으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정확히 선을 그어서 표현했을 때, 이것이 아니다 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선으로 표현하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선으로 표현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선으로 그릴 수 없는 것을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려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것이 아니다. 다비드의 작품인 <마라의 죽음>을 떠올려보자. 그는 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다. 그는 그림을 통해서 당시의 혁명의 정당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은 경계를 분명하게 한다. 안과 밖, 이것과 저것, 그래서 선은 보여줄 수 있는 부분만 보여준다. 우리의 눈은 그것에 익숙해있다. 색을 추구하는 화가들은 선과 선 사이를 보려한다. 마치 글에서 행간을 읽으려하는 것과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선을 볼 때 우리는 세상의 한계를 본다. 세상의 끝을 본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경계지어진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과 선 사이의 세상은 무한하다. 색채화가들은 그 선과 선사이의 세상을 보여주려한 듯하다. 회화는 말로 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색채화가들은 색을 통해서 회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했다. 색은 형태를 소멸시키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선은 경계를 뚜렷이 한다는 점에서 글과 동일선상에 있다. 선과 글은 우리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또 그것은 의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과 글만을 통한 세상은 부분적인 세상이다. 우리가 드러난 선만을 보거나 드러난 글자만 본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은 그렇게 드러나 있는 세상일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여진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글과 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글을 읽기를 요구받는 것처럼 우리는 색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기를 요구받는다. 색은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이것’이며, ‘저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물 속에 담긴 세계를 보여준다. 저기 햇빛을 쬐며 앉은 여인은 홍옥 같은 뺨을 가져야하지만, 그것은 우리 머리 속에서 그려진 여인이다. 여인은 홍옥 같은 뺨을 가지지 않는다. 여인의 뺨은 초록빛에 의해 파랗고 땅빛을 받아 고동색을 띈다. 색은 그 여인에서 만들어진 형태를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그 연인이 발하고 있는 빛을 표현한다. 여인의 얼굴빛은 늘 같지 않다. 장소와 시간과 분위기에 따라 여인의 뺨은 색을 달리한다. 그리고 그 색들이 그 여인을 생동케 한다. 그곳에 앉아있을 그 여인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여기에 그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와 그녀를 그리고 나를 서로를 연관짓지 않고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어떤 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색은 그러한 관계를 보여준다. 색은 그녀나 그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또는 그녀는 어떤 존재인가? 단지 있다는 것으로는 그 또는 그녀의 존재가 이해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녀를 모습으로 말투로 그녀가 누군인지 알아내려할 것이다. 또는 그녀의 주변환경에 따라 그녀를 판단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아니라 내 존재마저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을 남에게 이해시키는 가장 소중한 방법을 익힌 사람들이 화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뭉크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원초적 멜랑꼴리를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글로도 표현하였다. 우리는 뭉크의 글만 읽어도 그의 고뇌를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접하게 되면 잠시동안이나마 충격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우리는 뭉크 자신이 썼던 글로써 뭉크에 쉽게 접근한 듯하지만, 그의 그림을 함께 접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정서를 같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그의 그림 <절규>를 보자. 우리는 거기서 그의 절규를 이해한다. 다리 위를 걷고 있는 사람이 두려움에 휩싸여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절규다. 그의 그림은 온통 검정 색과 붉은 색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색들은 이리저리 어울려 새로운 색을 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색들의 어울림은 굉장한 소리들을 내뱉고 있다. 그가 글 속에서 자분자분 자신을 표현한 그런 소리들이 아니다. 미칠 듯이 터져나오는 괴로움이나 두려움, 그리고 한없이 꺼져가는 우울함이 가득하다. 고흐는 어떤가? 그의 그림은 마치 새로운 표현기법을 고안한 듯이 꿈틀거리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의 그림은 그가 본 세상이며 그 자신이다. 천경자를 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를 전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 그녀를 안 것 같았다. 그녀를 한번도 만난 적도 없고, 개인 생활에 대해 아는 바도 없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은 그녀를 통째로 내게 보여준 것 같았다. 그녀는 그녀의 그림 속에서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5. 그 또는 그녀를 이해하자.
아무 것도 모른 채 전시회를 둘러보는 것과 사전에 정보를 손에 쥐고 전시회를 둘러보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그런 까닭에 전시회를 관람할 계획을 가지고 나면 나름의 공부를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때로는 잠시 착각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교과서나 여타 경로들을 통해서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작품을 보러갈 때인데, 이 때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작가나 그의 작품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따로 공부를 하지 않고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무작정 가고 보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세계는 전시회장을 방문하는 딱 그 만큼이다. 우리의 지식은 전혀 확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알고 있는 그림을 만났을 때 반가움을 확인하는 정도이며, 그 화가의 작품 몇을 더 익히는 정도겠다. 하지만 가끔씩은 충동적으로 전시회장을 찾는 경우가 있다. 충동적으로 전시회장을 찾는 경우는 사전에 그 전시회에 대한 지식이 없다.
최근 로댕 갤러리에서 열린 She's like a rainbow/Color&Fashion 전시를 예로 들어보자. 이 전시는 패션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패션의 흐름을 색의 흐름을 통해서 읽어보고자 하는 취지에서 마련한 것이다. 그들이 밝히고 있듯이 색이란 패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일뿐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적 현상을 반영하는 복합적인 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람자 모두가 그러한 이해를 모두 가지고 그곳을 방문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학생들의 초대를 받거나 관련된 사람들이 관람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테지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전시장을 방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연히 전시장을 방문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시에 대해 어떠한 지식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이 전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따라 이해 할 것이다. 특히 색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그러하다. 파란색은 남자색으로 분홍색은 여자 색으로 규정하는 일반적인 경향으로 인해 한때는 푸른색이 여성적인 색으로 간주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지도 모른다. 붉은 색이 정열을 뜻하여 장군들의 군복에 쓰여졌다는 말에서는 나폴레옹을 떠올리고 우리 나라 장수들의 옷을 떠올림으로써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서양적 색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누렇게 변해버린 하얀 색 옷에서 소박함이나 슬픔보다는 순수함과 화려함 그리고 신비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전시작품들에 대해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하고 작품들을 본다면 오래되고 낡은 것들에서 느껴지는 느낌들 즉 부서질 듯 바삭거리는 느낌으로 또는 눅눅한 느낌 그대로 바라 볼 것이다. 전시된 작품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으나, 그것들이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들 즉 크리스천 디올이나 샤넬의 옷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우리의 느낌은 좀 더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들의 옷을 직접 보았다는 것에 어떤 특별한 느낌을 받으면서 만족해할지도 모른다. 좀 더 기대한다면 전시된 옷들이 무슨 무슨 영화에서 어떤 배우가 입고 나왔더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그 옷들이 그 당시에 유명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볼 것이다. 그런 경우에 그 작품들은 회상의 계기로서 작용할 수는 있으나 그 작품에서 생명의 빛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행히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작품들을 통해 과거와의 소통을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 앞에는 그 옷을 입은 여인들의 모습이 아련거릴 것이고 오래되어 누래진 실밥들에서 그녀들의 영혼들이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타인과 더불어 존재할 수 있듯, 나의 현재는 과거와의 소통을 통해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그를 이해하고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그와 그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은 과거를 품고 현재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과의 소통을 통하여 과거를 재현하고 현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나는 나를 이해하고 너를 이해하며 그를 이해하고 그녀를 이해할 것이다.
첫댓글 글자 포인트를 좀 키우지요. 지금 이 글자는 8포인트도 안됩니다. 키울 수 있다면 먼저 실은 글들도 다 포인트를 좀 올렸으면 합니다.
^^..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