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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3일 안산지청 '법철학 공부모임'에서 발표하였던 글입니다.
존 로크(John Locke) 사상의 재조명 - 혁명론, 소유권론, 관용론을 중심으로
로크를 왜 공부하는가?
존 로크(John Locke), 영국 근대의 대표적 사상가, 현대 리버럴리즘의 원조로 추앙되는 사상가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로크의 국민주권론, 사회계약론, 혁명론, 입헌정부론, 권력분립론, 소유권이론, 관용론 등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영국 명예혁명의 근거이론이 되었음은 물론, 이후 리버럴리즘의 역사 및 미국 리버럴리즘의 헌정질서를 형성하는 데에 이정표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거기서 그치고 맙니다. 그러한 내용들을 외우면 그것으로 ‘임무완수!’ 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단순한 암기가 재미있을 리 없고, 고민이 없는 암기에서 배움의 의미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에 서구의 학계에서는 수백년 간, 그리고 20세기에 들어 더욱 치열하게 연구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학문하는 사람들의 팔자 좋은 호사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들에게 로크는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로크의 사상은 현재 서구 헌정질서의 구성부분입니다. 로크에 대한 이해는 현재 자신들의 이해이고, 로크에 대한 고민은 자신들의 정체에 대한 고민이고, 로크에 대한 논란은 자신들의 미래에 관한 논란입니다.
그것은 그쪽 사람들 얘기이고, 우리의 얘기는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헌정질서는 서구의 그것을 계수한 것입니다. 해방 후 우리 역사는 서구식의 자유민주주의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고, 어느 덧 반세기 이상 우리의 것으로 발전시켜 왔고, 나아가 인류의 정신적, 사회적 유산으로 지켜 왔습니다. 우리 헌법질서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사상적으로 서구의 리버럴리즘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그리고 로크는 리버럴리즘의 ‘챔피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로크에 대한 고민과 공부,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미래와 우리 삶의 질서에 대한 성찰과 재구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도 많이 들어오고, 또 우리의 질서라고 당연시되어 온 리버럴리즘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무엇인지,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고 일컬어지는 로크의 사상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에 관하여 현재 서구 연구자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로크, 명예혁명
실제 로크는 영국의 시민혁명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그의 정치적 법사상적 저작들은 그의 실천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과연 로크의 구체적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막상 이러한 질문에 이르면 우리는 새삼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릇 모든 사상과 주장은 역사적 산물이고, 또 그 내용은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하고는 옳게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스키너(Quentin Skinner)라는 학자가 소위 맥락(context)적 이해라는 방법론을 주창하여 역사적 배경에 기초한 사상 이해라는 학풍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로크의 사상에 대하여도 진전된 연구들이 나오고 있고, 로크에 대한 이해가 더욱 풍성해지고 깊어지고 있습니다.
로크의 사상과 그의 인생은 영국 시민혁명, 즉 명예혁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또 그 명예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휘그당의 대표자 샤프츠베리 백작(애슐리)과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로크의 주요 정치철학, 법사상적 저작들, 예컨대 ‘통치론’, ‘관용에 관한 편지’는 바로 명예혁명 전후로 하여 영국의 새로운 헌정질서, 영국의 미래에 대한 로크의 신념이자 그 인생을 담은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의 글에 그 시대와 삶이 들어 있으며, 그 시대와 삶이 그의 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샤프츠베리 백작과 명예혁명 전야
로크의 사상과 삶을 알아보기 위하여 우리는 샤프츠베리 백작, 즉 애슐리에 대하여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앤써니 애슐리 쿠퍼(Anthony Ashley Cooper), 그는 찰스2세 때에 백작의 작위를 수여 받아 제1대 샤프츠베리 백작이 되었으며, 이후 명예혁명 전야에 혁명주체인 휘그당의 창시자가 되는 사람입니다. 흥미롭게도 명예혁명의 주역이 바로 그 혁명으로 종식을 고한 절대군주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던 것입니다.
샤프츠베리 백작은 다양하면서도 변화가 많은 정치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첫번째 시민혁명이자 보다 격렬하였던 혁명, 즉 청교도 혁명 당시 애슐리는 왕당파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의회군으로 전향하였으며, 크롬웰의 호국경 통치기간, 즉 공위(空位) 시기(찰스 1세가 처형되어 군주 자리가 비어 있던, 즉 형식상 ‘공화국’의 기간)에는 호국경의 추밀원(오늘날 내각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음)에서 복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크롬웰 사후, 군부의 지배에 반대하며, 1660년 왕정복고를 지지하였고, 마침내 찰스 2세를 네덜란드로부터 데려오는 12인의 의원 중의 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복위에 성공한 찰스 2세는 1661년 애슐리에게 ‘애슐리 경(Cooper Lord Ashley)’의 작위를 부여하고 하원 의원에서 상원 의원으로 옮기게 합니다. 이후 애슐리는 찰스 2세의 중요한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 1672년에는 샤프츠베리 백작 작위를 수여받고, 마침내 최고 권력인 Lord Chancellor(보통 대법관이라고 번역되는데, 이는 단지 사법부의 직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절대군주제 아래 입법/행정/사법을 모두 지휘하는 군주의 대리인, 즉 총리와 같은 지위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의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찰스 2세가 자기의 동생인 요크 공(제임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면서 찰스 2세와 샤프츠베리 백작의 우호적 관계는 끝나게 됩니다. 요크 공은 가톨릭 신자였으며, 잉글랜드를 프랑스와 같은 절대군주 국가로 바꾸려는 소신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크 공의 자손인 메리와 앤 두 공주는 모두 개신교(그 모친의 개신교를 이어받은 것임)여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으나, 요크 공이 1673년 가톨릭교의 여인과 재혼하면서 상황은 심각해졌습니다. 자칫하면 영국이 대대로 계속 가톨릭 국가로 남게 될 수도 있게 된 것이지요.
샤프츠베리 백작이 왕정복고에 앞장섰다고 하지만, 그것은 당시 종교에 대한 관용, 그리고 의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지(청교도 혁명 이후 크롬웰의 호국경 체제는 오히려 청교도 근본주의였으며, 또 의회를 배제하는 독재적 통치였던 것입니다. 또 당시에는 아직 의회가 새로운 통치의 주체가 될만큼 책임있는 기관으로 각인된 상태도 아니었기 때문에, 크롬웰 사후 영국은 크롬웰 잔존세력에 의한 군부 통치 혹은 왕정의 회복 중의 양자 택일의 국면에 처했던 것입니다.), 가톨릭의 불관용(지금은 가톨릭을 불관용의 종교라고 하면 터무니없는 얘기가 될 터이지만, 당시 이미 거의 대부분 국교회와 개신교도가 된 영국인들에게 가톨릭은 그러한 종교들을 박해하고 외국<로마 교황청, 스페인, 혹은 프랑스>에 영국을 팔아넘기려는 세력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을 옹호하고 절대군주제의 부활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청교도 혁명이라는 유혈 혁명으로 영국은 이미 개신교의 나라, 그리고 절대 권력을 용인하지 않는 입헌국가가 되었으며, 크롬웰 사후 통치권의 부재 속에서 군부통치를 방지하기 위하여 왕정복고를 하였을 따름인 것입니다. 즉 비록 왕정이 복고되었다고 하여도 군주의 지위는 예전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샤프츠베리 백작은 그러한 영국 헌정질서의 변화를 체화하고, 그것을 핵심적 정치적 정강으로 삼았고, 또 그를 위하여 정치생명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샤프츠베리 백작은은 찰스 2세의 동생, 즉 절대군주제 및 왕권신수설을 믿고, 교조적인 가톨릭 신자임을 자랑하였던 요크 공에게 왕위가 넘어 가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합니다. 그렇게 하여 샤프츠베리 백작은 찰스 2세의 총신에서 찰스 2세에 맞서는 야당 대표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즈음 샤프츠베리 백작을 대표로 하여 종교적 관용을 옹호하며 의회의 권한을 강조하는 야당 세력은 휘그당으로 불리게 되고, 국교회를 지지하며 그래도 군주의 권위를 존중하려는 여당 세력은 토리당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현대 정당정치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샤프츠베리 백작은 처음에는 찰스 2세에게 재혼을 통하여 새로운 후사를 얻을 것을 종용하기도 하고 서자들 가운데 장남인 몬머스(Monmouth)공을 적자로 선언하고 후계자로 삼을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찰스 2세와 갈등을 심화시킬 뿐이었습니다. 점차 정국의 갈등은 격화되어, 마침내 샤프츠베리 백작은 가톨릭 신자를 왕위계승에서 배제하는 배제법안(Exclusion Bill)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 배제법안은 단지 하나의 법률안이 아니라 군주의 권력에 대한 의회의 도전이었으며, 무력이 아니라 ‘합법적인 방법’에 의한 왕권 정지의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찰스 2세는 그에 맞서 의회를 해산해 버립니다.
이로써 영국 정치는 청교도 혁명 이후 다시 내란 혹은 혁명의 정국으로 빠져들게 되고, 배제법안의 관철에 실패한 샤프츠베리 백작은 반란죄로 기소됩니다. 법정투쟁을 통하여 일단 무죄 방면된 샤프츠베리 백작은 내란 음모와 관련하여 재차 기소될 위험에 처하고 결국 1682년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병세가 악화되어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후에 요크 공은 일단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하여 제임스 2세가 됩니다. 하지만, 그의 가톨릭적인 신조 그리고 고루한 절대군주제에 대한 과욕은 결국 가톨릭을 적으로 생각하였던 영국 국민들 그리고 입헌주의 원칙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의회의 벽을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제임스 2세가 계속하여 국교회마저 핍박하고 또 마침내 재혼한 가톨릭 왕비로부터 아들이 태어나면서, 토리당도 마침내 제임스 2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습니다. 휘그와 토리가 연합된 영국 의회의 초청에 의하여 네덜란드의 윌리엄 공이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침입하고, 영국 군대 세력마저 이반함으로써 제임스 2세는 그냥 도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샤프츠베리 백작은 이미 죽었지만, 그 사후 그의 정치적 신념, 휘그당의 원리가 역사적 승리를 거두게 된 셈이지요.
로크와 샤프츠베리 백작
1666년 우연한 기회에 로크를 만난 샤프츠베리 백작은 로크의 명민함과 과학적 식견(로크는 단지 철학과 정치사상에만 밝았던 것이 아니라 당시 옥스퍼드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던 의학과 자연과학의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에 감탄하여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자신의 주치의이자 정치특보와 같은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로크는 1667년부터 1675년까지 당대 정국의 핵심이었던 샤프츠베리 백작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또한 1668년 백작의 낭종 수술을 성공시켜 ‘생명의 은인’이 되기도 합니다.
로크는 백작의 정치적 문건들을 집필하면서 백작과 휘그의 정치적 운동, 즉 영국 입헌주의와 리버럴리즘의 역사 형성에 동참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동시에 백작의 정치적 비전에 영감을 받고 로크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변화시키고 성숙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선 로크는 1667년 ‘관용에 관한 에세이’를 작성하게 되는데, 이는 초기 로크의 국가주의적 성향에서 탈피하여 리버럴리즘 사상의 기초를 놓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의 변화는 샤프츠베리 백작의 관점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후 그 사상은 ‘관용에 관한 편지(1685년)’로 발전해 갑니다.
또한 로크는 샤프츠베리 백작이 아메리카 지역의 식민지 건설의 핵심인물이 되면서 아메리카 경영을 위한 원칙을 세우는 데에 기여하게 됩니다. 로크는 1668년 미국 식민지 건설을 위한 캐롤라이나 헌법(여기서 캐롤라이나 지방이라고 하는 것은 찰스 2세가 1665년 특허장을 발하여 자신의 충신 8명에게 식민지배를 허용한 지역으로 현재 미국 동남부의 거의 전 지역을 포괄합니다.)을 기초하게 됩니다. 백작이 로드 챈슬러에 취임한 후 로크는 1673년 무역과 식민농장건설 위원회(the Council on Trade and Plantations)의 비서가 됩니다. 나아가 로크는 선친으로부터 받은 유산을 그 식민무역(노예무역을 포함한)에 투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1674년 샤프츠베리 백작과 찰스 2세가 갈등 관계로 접어들고, 보수적인 댄비 내각이 들어서면서 백작과 로크는 모두 관직에서 실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백작은 마침내 찰스 2세와 보수당파에 맞서 격렬한 정치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1675년에 휘그당은 익명의 팜플렛을 발간하여 영국에 전제군주제의 도입에 대하여 맹렬한 비판을 전개합니다. 영국 상원(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상원이 최고 법원의 기능도 같이하여 왔습니다.)에서는 그 팜플렛 작성자를 처벌하기로 결의하였고, 그와 때를 맞추어 로크는 프랑스로 ‘급하게’ 떠납니다. 국내 로크 연구자들, 대표적으로 강정인 교수는 로크가 요양차 프랑스로 갔다고만 설명하고 있는데, 정치적 피신의 성격도 간과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후에 1678년 이른바 ‘교황의 음모’ 사건(영국의 가톨릭 세력들이 교황과 연계하여 찰스 2세를 시해하고, 동생 요크 공을 옹립하면서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고 교황에게 헌정하려 한다는)이 터지면서, 영국 국민들의 정서는 급격하게 반가톨릭적인 흐름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 사건은 비록 조작된 것이었지만, 그로 인한 국민 여론은 들끓게 됩니다. 그리고 수사가 시작되면서 샤프츠베리 백작은 최고 소추권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1679년 백작은 로크를 프랑스로부터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1680년 하원에서 가톨릭 교도를 왕위 승계에서 배제하려는 ‘배제법안’을 추진합니다.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로크의 통치론은 1688-89년 ‘명예혁명’의 시점이 아니라 바로 이즈음에 쓰여진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당시 토리당을 비롯한 왕당파는 절대군주제의 혈통에 의한 왕위 승계를 옹호하는 필머의 ‘가부장제론’을 내세웠던 것이고, 로크의 통치론은 그에 맞서 ‘사회계약론’과 ‘혁명론’를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투쟁에서 휘그와 샤프츠베리 백작은 바로 승리하지는 못합니다. 앞서 이미 언급한 대로 ‘배제법안’은 상원에서 부결되거나, 찰스 2세의 거듭된 의회 해산으로 좌절되고 맙니다. 그리고 백작은 반역죄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오고, 다시 무력에 의한 전복을 도모하다가 여의치 않게 되면서 1682년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크도 이어서 1683년 네덜란드로 떠나게 됩니다. 네덜란드에 간 이후에 로크는 그가 몸담고 있었던 옥스포드 대학에서 해직을 당하고, 이어서 반역자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로크는 당분간 가명을 쓰며 은둔 생활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명예혁명이 성공한 후, 로크는 공동 군주가 된 메리 2세와 같은 배로 귀국을 합니다.
로크의 국민주권론-저항론과 명예혁명
명예혁명은 영국 근대, 아니 서구 근대 리버럴리즘의 이정표와 같은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위대한 성취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예혁명에 대하여 그 ‘혁명적’ 성격은 대단치 않다, 아니 명예혁명은 단순한 궁정 쿠데타에 불과할 뿐 혁명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이렇게 되면 서구 민주주의, 리버럴리즘의 기점을 달리 잡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실 명예혁명은 그 자체로는 새로운 변혁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의회의 동의 없는 법률 개폐 금지, 국왕의 재판 관여 금지 및 새로운 법정을 신설 금지, 대권에 의한 세금 징수 금지, 평화시에 상비군 금지, 인민들의 방어를 위한 무장의 자유 허용, 의원 선거 개입 금지, 배심원 매수 금지, 가혹한 형벌이나 과다한 보석금을 부과 금지, 언론과 토론의 자유와 의회에서 의원들의 면책특권 등등 권리장전의 규정들은 사실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길게는 마그나 카르타 가깝게는 청교도 혁명 등에 이룩된 이른바 ‘전통적 헌법’에서 이미 확인되어 온 것들입니다. 명예혁명에 특유한 어떤 획기적인, ‘혁명’의 이름에 값할 수 있는 ‘진보’는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명예혁명의 ‘혁명적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2세의 축출과 새로운 통치권력의 수립의 성격에 대하여도 회의론이 대두하였습니다. 이는 권리장전의 ‘abdicated(퇴위)’라는 단어의 해석과 결부된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depose(폐위)’라는 단어에 비하여 약한 것이며, 나아가 명예혁명의 혁명적 성격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문제가 되는 권리장전의 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 the said late King James the Second having abdicated the government and the throne being thereby vacant ...”. 즉, ‘제임스 2세가 통치권을 방기하였으며, 그로써 왕위가 비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장 보수적으로 해석하면 명예혁명은 스스로 물러난 전왕을 대신하여 세습적 왕위 계승권자가 왕위를 계승할 뿐이라는 입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실제로 토리당에서는 윌리엄 공은 그 자신이 독립적으로 왕이 될 수는 없고, 단지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권자인 그 부인 메리의 부군으로써만 통치할 뿐이라는 주장도 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윌리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윌리엄과 메리의 공동통치(공동군주)의 형식으로 타협되었습니다.
이렇게 명예혁명의 ‘보수성’이 부각되면서, 로크의 ‘통치론’ 및 그의 정치철학과 법사상도 과연 그것이 얼마나 진보적인지, 즉 현대 서구 리버럴리즘, 자유민주주의적 진보의 원천에 값할 수 있는 것인지 회의가 대두하게 됩니다. 20세기 후반 로크 연구의 많은 부분은 그러한 입장 차이를 둘러싸고 진행되어 왔습니다.
먼저 엘리트주의적 정치철학자인 레오 슈트라우스(Leo Strauss)는 로크의 자연법론을 홉스와 다르지 않은, 기존의 기득권을 유지, 확대하고자 하는 쾌락주의 사상으로 평가하였으며, 반대로 진보적 리버럴리즘 및 사회주의 사상가인 맥퍼슨(C. B. Macpherson)은 로크를 이른바 ‘소유적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의 사상가로 규정하면서 그의 국민주권론은 결국 ‘자산계급의 기득권론’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버럴리즘의 대표자로서의 로크, 민주주의의 비조로서의 로크를 상실한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리버럴리즘과 민주주의의 출발을 다른 곳에서 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대사상가 로크를 보수적 기득권 옹호자로 규정해 버리는 것은 큰 손실이자 매우 아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로크의 저술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명예혁명의 ‘현상’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적 입헌주의의 근본 원리들에 대한 많은 교설들을 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로크의 진보적 성격을 다시 밝히려는 시도들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주된 흐름은 로크를 명예혁명(보수적인 것으로 평가되는)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래슬릿(Peter Laslett)과 애쉬크래프트(Richard Ashcraft)는 치밀한 고증과 분석을 통하여 로크의 ‘통치론’은 명예혁명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명예혁명 이전에 전제군주를 축출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래슬릿은 로크의 통치론이 ‘배제법안(Exclusion Bill)의 위기’ 당시에 쓰여진 것으로 보았고, 애쉬크래프트는 보다 정교하게, ‘통치론’의 두 번째 논문은 그 이후 보다 급진적인 내란 음모, 특히 ‘라이 하우스 음모(Rye House Plot)’와 관련한 정치적 상황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로써 명예혁명을 보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고 하여도 로크는 부정한 군주를 인민들이 폐위할 수 있다는 혁명의 사상가로 재정립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애쉬크래프트는 로크 국민주권론의 급진적 성격을 주창하였습니다. ‘배제법안’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애슐리와 로크는 광범위한 인민들 -상인, 수공업자까지 망라한-의 참여와 봉기에 의한 새로운 입헌질서를 꿈꾸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위치는 휘그 중에서 가장 왼쪽에 있으며, 거의 청교도 혁명 당시의 ‘수평파들(the Levellers)’(청교도 혁명 당시 크롬웰이 지도하는 의회군 세력 가운데 주로 하급병사를 주축으로 하여 보통선거를 주장하였던 이들)과 같은 차원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상유지로 만족한 명예혁명에 대하여 로크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고, 그에 항의하기 위하여 ‘통치론’을 출간하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로크를 명예혁명으로부터 분리시켜 로크를 ‘급진민주주의자’로 만들려는 시도는 역사적 맥락에 대한 충실한 해석이 아니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대표자는 슈워러(Lois G. Schwoerer) 우턴(David Wootton) 등입니다. 이들도 역시 치밀한 고증작업을 통하여 그리고 새로 발견된 로크의 글들에 의거하여 로크는 명예혁명과 분리될 수 없으며, 또 로크의 실제 사상은 급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얘기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로크는 명예혁명 전후에 윌리엄 공 측근 세력들과 계속적인 교분을 유지하였고, 또 명예혁명의 논리는 곧 로크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로크가 명예혁명의 현상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명예혁명에 대한 전폭적 지지자임은 분명하고, 또한 로크가 ‘통치론’을 출간한 것은 명예혁명의 현상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다 발전시키고 지지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나아가 이들은 로크가 명예혁명으로 소집된 공의회(Convention)의 대표성에 대하여 특별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으며, 선거원의 확대에 대하여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로크가 실제로 지향한 혁명의 상, 그리고 명예혁명에 대하여 기대하였던 것은 현대적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아니라 입헌적 원칙에 충실한 ‘구제도’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로크의 ‘진보성'이 부인되는 것은 아님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왕위를 차지할 것인지 대하여 로크는 메리를 배제하고 윌리엄의 단독 왕위를 주장합니다. 이는 그의 ‘통치론’의 서문에서도 명기되어 있습니다. 로크는 스튜어트 왕가의 세습원리를 배척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앞서 본 대로 메리의 승계를 주장한 토리의 입장은 물론이고, 명예혁명의 결과인 ‘공동 군주’의 형식보다도 훨씬 급진적인 태도입니다.
또한 로크는 명예혁명으로 소집된 공의회는 통상적 의회와 다른 제헌의회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의회가 일반적인 입법의회로 이행해 가자 무척 당혹스러워했습니다. 로크는 명예혁명을 통하여 보다 진보적인 새로운 권리장전을 원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종교의 자유, 관용의 원리는 필수적인 항목이 될 터인데, 실제로 1689년 제정된 ‘관용법(Toleration Act)에서의 종교의 자유의 범위는 로크가 희망한 것보다 훨씬 협소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명예혁명 시기에 로크는 충분히 진보적인 사상가였으며, 명예혁명이 보다 민주적이고 평등적인 이념에 따라 영국의 헌정질서를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는 명예혁명, 공의회, 윌리엄을 지지하였는데, 이는 로크의 보수성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분별력있는 진보, 신중한 진보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명예혁명 자체에 대하여도 그것이 새로운 특별한 진보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것은 그 보수성의 표현이라기보다 영국식 진보의 신중함을 뜻하는 것으로 봄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명예혁명은 그 자체로 이해하기보다 청교도 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즉 영국시민혁명의 진보적 성취를 안정화시키고 제도화시키는 차원으로 이해됨이 옳다고 봅니다. 청교도혁명은 군주제를 폐지하는 급진적인 정치실험을 하였지만, 아직 영국은 아니 세계는 그에 상응하는 민주적 질서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청교도 혁명은 오히려 호국경이라는 보다 강력한 권위적 체제로 귀결되었고, 그것은 다시 절대왕정의 복고라는 반작용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명예혁명은 그러한 시기에 군주제라는 형식은 유지하되, 그 실질을 바꾸는, 즉 입헌군주제의 질서를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크의 소유권 이론과 아메리카 식민지
소유권 이론 또한 로크 정치철학, 법사상의 핵심 이론 가운데 하나이며, 후세에 계속하여 재조명 받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그의 ‘노동이론(labor theory)’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이는 그로티우스와 푸펜도르프 등에 의하여 발전된 점유(사용)이론과 동의이론과 더불어 근대 개인주의적 사유재산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로크의 노동이론의 호소력은 매우 큽니다. 인간의 자유와 노동을 연결하여 노동의 결과물을 그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의 인격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인격(person)론’, 그리고 노동, 특히 토지의 경우 근면한 개간으로 그 생산력을 높인 경우 그 노력의 댓가를 인정해야 한다는 ‘업적주의’와 ‘공리주의적 유익(有益)론’은 우리의 직관에 부합합니다. 로크는 자신의 소유권론을 자연법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이후 자본주의 소유권 절대론을 뒷받침하는 주요한 축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듯 일견 자명하게 보이는 로크의 소유권 이론은 그 후에 다양한 평가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됩니다.
우선 노동에 근거한 자연권이라는 로크의 소유권론은 항상 자본주의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칫하면 노동의 주체, 즉 노동자들을 위한 이론으로 전용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로크의 노동이론이 리카아도와 마르크스를 거쳐 잉여노동론, 즉 자본주의 착취이론으로 발전한 사실은 그점을 잘 말해 줍니다. 노동이론-자연법론은 당시 유산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의 이론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데이비드 흄 등 18세기 영국의 주류 사상가들은 ‘노동-자연법적 소유권’론을 폐기합니다. 즉 소유권은 더 이상 자연법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실정법에 의한 인위적 권리이며, 그것도 노동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편익을 위한 것일 따름이라는 논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20세기에 와서도 로크의 소유권론은 정치철학 및 법철학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앞서 본 대로 슈트라우스는 로크 사상의 숨어 있는 본질은 유산계층의 (도덕성이 결여된) ‘쾌락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로크에 기초한 ‘천박한 자유주의’가 아니라 고대 희랍철학에 기초한 유덕한 엘리트주의를 추구하였습니다. 다른 한편 맥퍼슨은 로크의 사상을 ‘소유적 개인주의’라고 하여, 그 자유주의는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계급적 지배를 지향하는 사상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즉 로크가 말하는 사회계약론, 그리고 국민주권론에서의 ‘인민(people)’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 소유자’만을 대상으로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로크의 소유권론이 자유시장경제의 새로운 원천으로 이해되기도 하였습니다. 주지하듯이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로크의 소유권 이론에 근거하여 롤즈(John Rawls)의 복지국가 혹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의론에 맞서 ‘자본주의적 사적 자치론’이라고 할 수 있는 ‘권원이론(entitlement theory)’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특히 1980년대부터 로크의 소유권 이론에 대한 역사맥락적 연구가 쏟아지면서 새로운 관점이 제기되었습니다. 그 대표자는 역시 케임브리지 학파의 일원인 툴리(James Tully)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로크의 소유권이론을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것, 그리하여 로크의 소유권론을 이미 개인주의적 사유재산권의 완성된 형태에 관한 이론으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얘기합니다. 즉 로크의 이론과 문장들은 그 시대 상황에 맞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로크의 소유권론에는 단지 사소유권에 대한 정당화만이 아니라 사소유권의 한계, 즉 소유권에 대한 공동체적 제약도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로크의 근본 사상은 모든 이들의 보존(preservation)을 위한 것이며, 자산소유자의 자선(charity) 의무라는 사회적 제약이 오히려 근원적 윤리로 설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Tully는 ‘통치론’ 제5장에서 나오는 이른바 ‘여분의 제한(다른 사람도 이용할 수 있는 양을 남겨두어야 한다)’과 부패의 제한(자신이 다 활용하지 못하고 낭비되어 버리는 부분은 그의 소유권의 범위를 넘는 것이다)은 결국 재산의 공공성과 정부의 규제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로크의 이론은 배타적인 개인주의적 소유권론과는 거리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나아가 ‘통치론’의 제1론에서 로크는 ‘생존권(subsistence right)’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당시 아직 완전한 개인주의적 소유권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필요권(right of necessity)’ 등 공동체주의적 물권체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역사적 현실에 보다 잘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최근 들어 로크 소유권론에 대한 역사맥락적 연구는 새로운 지평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바로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에 관한 이론으로 새롭게 조명된 것입니다. Herman Lebovics와 Tully는 로크 ‘통치론’ 제5장 ‘소유권’ 부분은 영국의 사정과는 부합하지 않는 설명이 많고, 또 식민지 건설과 경영에 대한 샤프츠베리 백작과 로크의 직접적 관여를 거론하면서, 그것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영국 개척자들의 소유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이론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였습니다. 특히 Tully는 로크의 자연상태론은 결국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기존 체제를 해체시키고 그들의 토지 소유권을 박탈하는 이론이었으며, 로크의 전쟁론-노예론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영국의 물리적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에 이어서 Barbara Arneil은 치밀한 연구를 통하여 로크와 아메리카의 관계에 대하여 종합적인 연구를 내놓았습니다. Arneil은 그로티우스의 점유(사용)론이 당시 네덜란드의 해상 지배권과 동인도 회사 등 식민지 경영을 위한 이론이었듯이(그로티우스가 항해의 자유를 얘기한 것은 스페인 및 포르투갈과의 해상 경쟁에서 후발 주자로 나선 네덜란드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다는 구획을 나누어 점유할 수 없으므로 어느 국가에게 배타적으로 소유될 수 없고 모두에게 개방된 곳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크의 소유권론도 그런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rneil은 로크의 소유권이론을 Tully와 같이 비관적으로만 채색한 것은 아닙니다. Arneil은 로크의 노동이론은 한편으로는 원주민들이 제기할 수 있는 선점의 주장을 배척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농지를 개간함으로써 토지의 생산력을 증대시켜 신대륙을 문명화시키는 기독교의 이상에 기초한 것이라고 봅니다. 나아가 당시 아메리카(특히 남부지역)에서 영국과 대결을 펼치고 있던 스페인의 정복과 약탈의 식민 정책에 맞서 보다 합리적인 식민정책을 제시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Tully와 Arneil의 분석은 앞서 본 대로 로크는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에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에서 뒷받침됩니다. 이 역시 샤프츠베리 백작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찰스 2세는 1663년 지금의 조지아로부터 노스 캐롤라이나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총신(寵臣) 귀족들에게 하사하는 특허장을 발합니다(그 특허장은 1665년 지금의 플로리다 북부까지 포함하는 지역까지 확대 수정됩니다.). 이를 찰스(Charles)의 이름을 따 ‘캐롤라이나 지역(Carolina Province)’라고 부릅니다. 그 귀족 지주들의 실질적인 리더가 바로 샤프츠베리 백작이었던 것입니다. 로크는 그 캐롤라이나 지역의 통치를 위한 ‘Fundamental Constitution of the Carolinas’를 기초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여 로크의 소유권론은 식민지배의 이론이라는 역사적 혐의를 벗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서구 리버럴리즘의 태생적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로크의 소유권론은 ‘인격’과 ‘노동’의 요소를 새롭게 발견했다는 점에서, 즉 ‘소유권’의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윤리적 가치를 생각케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로소득이나 약탈이 아니라 개간과 노동을 강조한 것도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에 리버럴리즘적 ‘카트라인’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을지 않을까 합니다.
로크, 종교, 관용
로크 연구에 있어 관용에 대한 부분은 오랜 동안 큰 주의를 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로크의 정치철학, 법사상에 대한 주요한 저작은 ‘통치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관용에 대한 논의가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관용론은 로크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통치론’에 포함시키지 않고 별도로 저술되었다고 생각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로크의 주요 저술 가운데 제일 먼저 공간(公刊)된 것도 바로 ‘관용에 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입니다. 또한 관용에 관한 논의는 로크의 필생의 과제였습니다. 로크가 초기에 정치철학에 관한 쓴 글도 관용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가 최후까지 몰두한 일도 바로 관용 및 종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이라는 영국 시민혁명의 ‘폭풍기’에 종교는 핵심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단지 영국 내의 문제가 아니라 유럽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였습니다. 영국 시민혁명은 곧 영국의 내전이자 유럽의 국제전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샤프츠베리 백작이 찰스 2세와 결별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찰스 2세와 프랑스 루이 14세의 밀약설 때문입니다. 즉 찰스 2세가 프랑스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영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후에 단순한 유언비어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샤프츠베리 백작과 로크 그리고 영국 국교회를 비롯한 개신교도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공포였습니다. 그들에게 가톨릭으로의 회귀는 곧 ‘노예로의 전락’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가 아일랜드(당시 영국의 식민지로 있던)와 합세하여 영국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단순한 피해의식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가 다시 프랑스의 지원으로 아일랜드에 돌아와 군대를 조직하여 뒤늦은 전투를 감행하기도 하였습니다(물론 제임스 2세는 윌리엄의 군대에게 패하고 맙니다). 이러한 영국의 두려움은 일찍이 영국의 종교개혁(로마 가톨릭으로부터의 결별)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 당시 가톨릭 종주국이었던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공 때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1685년 프랑스 루이 14세는 종교적 관용의 상징이었던 ‘낭트칙령’을 무효화함으로써 유럽에 다시 종교전쟁의 암운을 드리웠습니다. 낭트칙령의 폐지와 프랑스 개신교인 위그도에 대한 박해는 주위의 개신교 국가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고, 실제로 수십만의 위그노들이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망명하여 유럽 전체의 긴장을 고조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미 보았듯이, 명예혁명의 핵심적 이슈였던 왕위 계승 논란도 결국은 종교의 문제였습니다. 명예혁명의 결과를 법령으로 제도화한 권리장전의 중요한 원칙은 바로 이후 왕위 계승자를 모두 개신교도로 규정한 것입니다. 명예혁명으로 소집된 ‘공의회’는 권리장전에 이어서 관용법(Toleration Act)를 발하였는데, 이는 영국 국교회만이 아니라 비국교회 개신교들에게도 기본적인 예배의 자유를 부여하지만, 가톨릭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물론 비국교 개신교 가운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유니테리언교 등에도 관용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명예혁명이 특별히 진보적인 ‘혁명적인’ 성과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영국 왕실을 개신교로 국한하고(영국 왕위 계승은 권리장전에서 메리와 앤 여왕 그리고 그 자손으로 규정된 데 이어서, 1701년 Settlement Act를 통하여 또 다른 개신교 왕족인 독일 하노버 가문으로 규정되었습니다. 그 하노버 왕가가 현재 영국의 왕실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관용법을 통하여 종교 자유의 원칙을 정한 것은 영국 및 유럽 헌정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와 양심의 자유는 단지 헌정제도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로크 자신의 삶의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로크의 종교성, 즉 그의 신앙이 무엇이며,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앞서 본 레오 슈트라우스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연구자들이 종교와 신에 대한 로크의 언급은 그저 ‘시늉’을 내는 것에 불과하고 로크는 기본적으로 세속적인 인간이며, 그것도 쾌락주의적 인간관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로크의 미출간 원고, 편지글들이 계속 발굴되고 공간되면서, 이제 로크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특히 현대 중요한 법철학자 중 한 사람인 왈드론(Jeremy Waldron)은 로크의 신앙은 단순히 그의 사생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로크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적 힘이었으며, 자유와 평등에 대한 로크의 신념은 그의 종교적 양심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여, 로크의 연구에서 소위 ‘종교적 선회(religious turn)’을 불러오기도 하였습니다.
독실한 그리고 평생 독신으로 삶을 영위해 간 로크는 신약 시편을 들으면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그에게서 신앙은 사회의 기초이자 그 인간됨의 근본이었던 것입니다. 로크에게 종교,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 신앙의 자유, 관용의 문제는 언제나 핵심적인 문제였으며, 또 모든 신앙적 양심을 존중하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국가는 그의 염원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적 관용에 대한 로크의 사상이 쉽게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관용에 대한 로크의 저술은 수 십 년에 걸쳐 계속되었으며, 또 그 내용은 상당한 변모를 겪습니다. 먼저 국가와 교회, 종교적 관용의 문제에 대하여 로크가 최초로 쓴 글은 흔히 ‘통치에 관한 두개의 소론(Two Tracts on Government)’으로 불리는 글입니다. 이는 로크가 1660-61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글에서 로크는 놀랍게도 권위주의 혹은 종교에 대한 국가 우월주의적 논리를 펼칩니다. 다만, 로크는 이 글의 출판을 희망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1667년에 쓴 ‘관용에 관한 에세이(Essay on Toleration)’에서 비로소 로크는 그의 특유한 관용론을 보여줍니다. 이 에세이에서 로크는 국가와 교회의 분리론, 즉 정신과 영혼의 문제들은 개인의 양심, 교회의 자율성에 전적으로 맡기고, 국가는 오직 그러한 자유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안녕만을 책임질 뿐이라는 그의 관용론의 대강을 제시해 놓았습니다.
이전 ‘통치에 관한 두 개의 소론’에서의 입장에 비하면 이는 극적인 변화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유발한 원인으로는 대체로 로크가 네덜란드 체류시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직접 목도한 체험 그리고 이후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핵심 교의로 삼은 샤프츠베리 백작과의 인연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의 변모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로크의 리버럴한 종교관이 계속 성숙하며 발전해 갔다고 보는 입장과 그와 정반대로 로크는 수미일관하게 국가적 질서를 중시하였다는 입장으로 대별됩니다. 최근에 밝혀진 대로 로크가 종교의 자유, 국가-교회의 분리를 중시한 신앙인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후자의 해석은 더 이상 근거가 없어 보입니다.
로크의 관용론은 1685년 말경에 라틴어로 쓰여진 ‘관용에 관한 편지(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에서 체계적인 모습으로 정리됩니다. 이는 그 해 프랑스에서 낭트 칙령이 폐지되면서 위그노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는 시점에 쓰여진 것이며, 종교적 소신을 같이 한 네덜란드의 종교 관용주의자 Limborch에게 보내는 서신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로크는 이글을 1689년 명예혁명 후 메리 여왕과 함께 귀국한 후 바로 출간합니다. 다른 저서들에 앞서 제일 먼저 대중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이 ‘관용에 관한 편지’의 핵심 내용은 앞의 ‘관용에 관한 에세이’와 다르지 않은데, 다만, 종교에 대한 박해와 신민의 자유를 침탈하는 통치자에 대한 저항의 논리가 추가되었고, ‘관용을 부정하는 종교’에 대하여는 관용을 할 수 없다는, 즉 가톨릭에 대한 전투적 입장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글을 폭정에 대한 혁명을 얘기한 ‘통치론’의 또 한 부분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후 로크는 (비국교회 개신교도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에 반대하는 영국 국교회 소속의 옥스포드 교수인 프로스트의 비판에 대응하여 ‘관용에 관한 편지’를 계속 쓰게 됩니다. 그것을 보통 제2편지, 제3편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4편지는 로크의 죽음으로 미완성에 그치게 됩니다. 제2편지 이후의 글은 모두 논쟁적인 성격의 것이고, 그 내용도 ‘관용에 관한 편지’에 다 나온 것이어서 보통 로크의 관용론을 얘기할 때는 ‘관용에 관한 편지’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관용에 관한 편지’는 현대 관용의 원리를 거의 완성해 놓았다고 할 만큼 치밀하고 명확합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 신앙의 다원성에 대한 입장은 현대적 관점에서도 여전히 큰 감동을 줍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또 다른 고전인 존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ty)’에 못지 않은 통찰력과 호소력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글에서 로크의 관용론은 가톨릭과 무신론자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명확합니다. 로크는 다른 종교들, 무슬림이나 유대교의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고, 개신교의 여러 종파들 유니테리언이나 퀘이커도 인정하면서 오직 가톨릭과 무신론은 부정하였던 것입니다.
종교와 양심의 자유에 대하여 그렇게 훌륭한 논거를 제시한 이가 어떻게 가톨릭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무신론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그 논거가 무엇이었을까? 로크는 당시 가톨릭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운동’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즉 첫째, ‘파문된 왕은 통치권을 상실한다’는 가톨릭의 논리는 곧 영국을 교황의 영토로 만들려는 논리이며, 둘째, 영국 법이 아니라 교황에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곧 반란을 사주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신론에 대한 부분은 로크에게 종교와 신앙은 한 인간과 사회의 근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무신론은 곧 모든 사회 질서와 인간에 대한 의무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로크의 관용론의 한계인 가톨릭과 무신론에 대한 불관용은 바로 후대 리버럴리즘의 신봉자들에게 곤혹스러운 부분이 됩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그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많은 이들은 그것을 역사적 상황의 탓으로 돌립니다. 앞서 본 대로 당시 상황은 일종의 ‘전쟁’, 즉 국제적 대결, 국내적 내란의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마샬(John Marshall)과 같은 이는 그에 대한 합리적 독해를 통해 로크의 리버럴리즘을 구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는 최근에 발굴된 로크의 글에 기초하여 로크의 원래 입장은 가톨릭에게도 원칙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로크는 가톨릭을 ‘내란의 정치’와 ‘순수한 신앙’로 구분하고, 전자인 경우는 허용될 수 없으며, 후자인 경우에는 다른 종교적 신념과 마찬가지로 관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로크의 정치적 멘토였던 샤프츠베리 백작도 애초에는 보편적 종교적 자유의 옹호자였습니다. 그는 명예혁명 전에 찰스 2세가 반포하려고 하였던 관용령(Declaration of Indulgence)(가톨릭교도 그리고 비국교회 개신교도의 형사처벌을 면제하려는 칙령)에 대하여 찬성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백작의 정치특보와 같았던 로크가 그와 다른 입장을 취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로크의 저서를 볼 때도, 마샬의 관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로크는 원칙적인 신앙의 자유를 말합니다. 내심의 영역은 물론이고 단순히 예배와 종교적 행사에 관한 한 절대적 자유를 인정합니다. 로크는 가톨릭이 성체성사(개신교에서 부정하는)의 자유도 긍정하고 있으며, 유대교가 신약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수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상숭배’는 종교적 불관용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종교적 견해의 차이의 최후의 심판관은 하나님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크는 소위 이단이라고 얘기되는 여러 종파들도 당연히 관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흔히 가톨릭에 대한 부분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을 보면 로크는 결코 ‘가톨릭’이라고 지칭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종교를 관용하지 않는 종교’라고 표현하면서 그 종교가 정치적으로 내란과 파괴를 종용하는 것이므로 관용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종교 그 자체의 자유와 종교의 정치적 자유를 구분하여 접근하였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마샬은 무신론의 경우에도 로크가 그것을 반대한 것은 무신론은 어떠한 약속도 덕목도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지 무신론이라는 신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즉 사회를 붕괴시키거나 파괴하는 범죄적 요인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샬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로크가 시암 왕국(태국)과 중국에 관한 기록을 접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즉 무신론의 국가도 존립이 가능하고 범죄율도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무신론에서도 인간적 윤리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마샬의 관점은 왈드론도 공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도가 비록 로크를 또 다시 시대착오적으로 만들고, ‘현대 이기주의’의 관점에서 활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로크의 문장들이 역사적 맥락에서 만들어졌다고 하여 반드시 그 역사에만 구속시킬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필자도 역사맥락적 해석에 전폭적인 지지자이지만, 그것은 그 사상의 ‘인간적 의미’를 보다 충실하게 이해하자는 것이지, 그것을 과거의 유물로 만들자는 것은 아닙니다.
로크가 ‘관용에 관한 서신’을 출간하던 시대, 유럽과 영국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은 전쟁상태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전쟁을 막 끝내고 그 결과를 제도화하는 시점에서 그 전쟁의 성과를 무로 돌리는 듯한 발언은 별로 현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로크가 가톨릭을 구체적으로 거명하지 않으면서 ‘내란을 사주하는 종교는 관용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 것은 당시 가톨릭의 자유에 대하여 얘기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니었을까, 로크가 정치적 지혜를 발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맺음말
20세기 민주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영국의 휘그 중심의 역사관, 즉 명예혁명으로부터 영국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기점을 잡으려고 하는 역사관에 중대한 도전이 제기됩니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19세기, 차아티스트 운동 이전까지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리버럴리즘은 19세기 후반 New Liberalism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를 지향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이전에 민주주의는 제한민주주의였으며, 그 이전의 자유주의는 유산자들의 자유를 의미할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명예혁명과 로크의 역사적 제한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로크의 국민주권-저항론은 오늘날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로크의 노동-소유권론의 계급적, 제국주의적 맥락도 인정해야 합니다. 로크의 관용론은 비관용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크의 사상은 가치롭습니다. 로크 사상의 역사적 맥락성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흐름 속에 놓여 있으며, 그 흐름의 방향을 추동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자유, 즉 양심의 자유, 관용의 가치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근대의 제 양상을 산출해 내는 수원지(水源池)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로크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종교였으며, 영국 시민혁명 자체가, 아니 유럽 근대 혁명의 역사가 사실 종교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리버럴리즘의 뿌리, 인권의 연원은, 옐리네크의 말대로,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리버럴리즘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정답을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리버럴리즘에 대한 고민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크의 사상과 그 역사가 그에 일조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참고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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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문헌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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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송규범, “명예혁명과 로크의 <정부론>”, 서양사론 제106호, 2010, 217-244 쪽
송규범, “존 로크의 관용론”, 서양사론 제78호, 2003, 81-109쪽
송규범, “<정부론> 저술과 관련한 몇 가지 쟁점, 영국연구 제18호, 2007, 125-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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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Wootton, John Locke and Richard Ashcraft's Revolutionary Politics , Political Studies, Vol. XL, No. 1, 1992, 79-98쪽.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교수님 제가 보낸 쪽지 혹시 보셨는지요?
앗, 쪽지요? 제가 쪽지는 잘 보지를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다음' 쪽지함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어딜가야 볼 수 있을까요?
정의란 무엇인가 책을 읽고 정리해본것을 카페를 통해 메일을 보낸것 같습니다. 도착하지 않았나요?
아, 이제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메일이었군요... 쟈스티스 님, 샌델의 정의론에 대한 좋은 요약 잘 보았습니다. 책 전체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고, 문장도 좋았습니다. 학점에 개의치 말고, 더욱 정진하시길....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 메일로 대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