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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역의 사도세자와 정조의 유적
출발(07:20) → 용주사(10:30~11:10) → 융건릉(11:20~12:30) → 점심(한우설곰탕 12:30∼13:30)→ 수원성(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연무대 행궁 등 14:00~16:30) → 창성사 진각국사 부도비(16:30∼16:50) → 노송지대(17:00~17:10)→ 지지대비(17:20∼17:30)→대구도착(20:30)
1. 용주사(龍珠寺)
융건릉을 왼쪽에 두고 빠져나오면 불과 1.7km 거리에 숲으로 둘러싸인 용주사가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태안읍 송산리지만 융건릉을 모신 화산 뒤쪽인 북쪽 기슭이다. 이곳엔 본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었다. 고려 광종 21년 (970)에는 우리나라에는 최초로 수륙재를 개설하는 등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호란으로 소실된 채 숲속에 묻혀 있었다. 조선의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크게 다시 짓고 (1790) 원찰로 삼으니 용주사의 구석구석에 효심이 어려있다.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이 되기까지는 당대의 고승 보경당(寶鏡堂)의 숨은 의지가 있었다. 보경스님은 융릉의 이장지를 찾아다니는 정조를 만나기 위해 가까운 대황리에 모물며 『부모은중경』을 설하고, 이 너머에 능지가 있다고 진언했던 것이다. 정조는 『부모은중경』설법에 깊이 감동을 받았고, 보경스님은 용주사 중창의 도총섭을 맡아 4년 만에 불사를 완성했다. 전국에서 들어온 시주가 만 냥이 넘었으며, 145칸을 갖춘 대찰의 면모였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니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했다고 전한다.
예술적 안목이 뛰어난 정조는 ‘우리나라 근세의 신필’이라 일컫는 당대의 화원 김홍도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 김홍도는 정조가 하사한 『부모은중경』을 그림으로 그렸으며, 이를 목판에 새겼으니 오늘날까지 용주사의 상징으로 전해온다. 김홍도의 감독하에 조성된 대웅전 후불탱화는 우리나라 최초로 탱화에 서양화기법을 도입한 예가 되었다. 이 탱화를 두고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이렇게 극찬하고 있다. “조선 정조는 용주사를 창건하고 단원 김홍도에게 불전의 탱화를 그리게 하니, 더 이상 보충할 데가 없이 정교하여 가히 입신의 경지에 든듯 묘하다.” 대웅전 뒤 시방칠등각 내벽에도 3폭의 불화가 있는데, 그 중 가운데 것이 김홍도의 친필로 전해지고 있다. 김홍도는 그림도 뛰어나거니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화원이어서 서로의 뜻이 썩 잘 교감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절 어귀에 이르면 연풍교(連豊橋)가 있는데, 그 주변의 자연석에는 ‘到此門來 莫存知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문에 이르러선 마음을 허공과 같이 비우라’는 말이다. 일주문 대신일까. 매표소에서 천왕문 자리까지 큼직한 선돌들이 양 옆에서 호위하며 방문객을 맞는데 보기 드문 일이다. 조선 후기의 문화적 변화가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왕궁의 법도가 영향을 주었는지 용주사는 특별하고 진기한 사찰구조를 이루고 있다. 사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궁궐의 대문처럼 보이는 삼문각이 놓여 있고, 그 양 옆으론 마치 사대붓집 행랑채와 같은 건물이 길게 전면을 차지하고 있다. 절기마다 찾아오는 임금의 행차에 필요한 사용처였는지 모른다. 행랑채 왼쪽 옆으로는 정조가 심었다는 회양나무가 수령 200여년을 자랑하며 푸르게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 264호이다.
삼문을 들어서면 왕궁에서나 이름붙이는 ‘천보루(天寶樓)’가 관가의 건물처럼 웅장하게 막아서고, 천보루 앞에 작은 선탁 한 기가 가람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게 이상스럽다. 탑이 대웅전 앞이 아닌 누각 앞에 놓여 특별한 시선을 받는다. 천보루를 머리 위에 이고 계단을 오르게 되는데, 이 계단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 원형 표면에 비운문(飛雲紋), 북모양의 막음돌에 삼태극과 모란문양을 새겨 멋을 부렸다.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어서 진기하다. 그 계단을 밟고 대웅전 앞에 들어서면 또 하나의 기이한 장면이 펼쳐진다. 대웅전을 정면으로 탑이 놓여야 할 자리에 마치 왕릉의 참도와 같은 길이 똑바로 놓여있다. 이는 굳이 당시의 마당구조와 지금까지 이어졌다고는 볼 수 없겠으나 이 절의 특별한 구조와 어울려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천보루는 누각의 바깥쪽이름이고 앞쪽에는 홍제루(弘濟樓)의 편액이 붙어있다. 누 양 옆으로는 요사 건물을 틈 없이 맞춰 이어 대웅전을 향해 U형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주변만 넓게 트여 있는 것이다. 노전과 극락전이 대웅전 양 옆에 직각으로 서 있다. 그 밖의 여러 전각들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며 대칭·비대칭 구조를 자연스레 연출하고 있다. 이는 한국 건축물의 특성이어서, 잘 보존된 조선시대 사찰을 만나보는 좋은 예이다.
그 밖에도 용주사는 눈여겨볼 거리가 많다. 국보 제120호인 동종이 있고,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제11호와 제12호인 금동향로와 청동향로를 보관하고 있다. 대웅보전 편액이 정조의 친필이며, 용주사 창건문·상량문도 정조가 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용주사 창건기 상하권도 경건한 필체로 직접 쓴 것으로 전해져 우리를 더욱 숙연케 한다. 아버지의 진혼을 위해 그리도 극진했던 것이다. 다만 일반인이 대면해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아 아쉬움이 크다.
* 범종
용주사 범종은 고려시대 초기 범종으로 우리나라 범종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종 윗면에는 신라 종 양식에서 보이는 음통과 종뉴를 갖추고 있는데, 음통이 유난히 크고 용허리로 힘겹게 종몸을 끌어올리고 있다. 종몸에는 위아래로 문양대를 갖추고, 반원과 당초문이 새겨져 있다. 종 중심부엔 연화문과 와문으로 장식한 당좌와 비천상이 사방에 돌려가며 조각되어 있다. 비천상은 앞뒤로 배치되어 있고, 좌우로는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한 삼존상이 안치되어있어 지금까지의 고려시대 범종과는 특별히 차별화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당좌는 8엽의 연꽃잎을 가운데 두고 와문을 이어 원형을 형성하고 있다. 연주문 안에 보상당초문을 새긴 아래띠도 주목을 끈다.
종몸과 종뉴가 보기 드물에 거친 편이나 전체적인 구성이나 형식으로보아 고려 초기의 범종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높이 144cm, 지름 87cm이다. 종신에 음각으로 새긴 명문은 후대에 새긴 것이다.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어있다.
* 불설『부모은중경판』
『부모은중경』은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높은가를,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한 불교경전이다. 부모의 은혜를 열 가지로 제시하고, 보은의 어려움을 여덟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보은의 방법으로는 남에게 베풀며 진리를 실현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요 덕이지만, 불효를 저지르면 영락없이 아비무간지옥에 떨어지고 만다는 대승경전의 내용이다. 정조는 이를 억울하게 이승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고 추효하기 위해 1796년 목판에 새겼다.
현재 용주사에 보존돼 있는 경판은 모두 세 종류 85매이다. 동판 7매는 변상도, 석판 24매는 한역경문, 목판 54매는 한역·국역경문·변상도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목판 54매는 정조 20년(1796)에 제작한 것이고, 동판과 석판은 1802년 순조가 하사한 것이다. 정조 때 만든 21점의 변상도는 매우 정교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필법과 인물의 배치 등으로 보아 당시 용주사에 내려와 있던 도화서원 김홍도의 작품이 확실해 보인다. 정조는 당대의 화원으로 김홍도를 가장 아끼고 총애했으며, 그림에 관한 한 모든 것을 김홍도와 의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더욱 김홍도의 작품이라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정조는 단원 김홍도에게 『부모은중경』과 탱화를 그리게 하면서 그에 앞서 7일간의 기도를 시켰다고 한다. 그만큼 정정을 쏟았고 가피력을 믿었던 것이다. 용주사의 상징으로 알려진 『부모은중경』판은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융건릉(隆健陵)
수원에서 안중 가는 길로, 다신 융건릉을 향한다. 좁으면서 꼬불꼬불한 길과 주변에 늘어선 짙푸른 나뭇잎들, 함께 따라붙는 들판이 시골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융건릉은 장조(莊祖)와 경의왕후(敬懿王后)를 합장해 모신 융릉과, 그의 아들 정조(正祖)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합장릉인 건릉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사적 제 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효성스러운 왕을 꼽으라면 단연 정조일 것이다. 수원 화성일대가 온통 효심의 고장이 된 데는 사도제자(思悼世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해 오면서부터지만, 기실 그 언저리엔 슬픈 역사가 강물처럼 고여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28세의 막 피어난 꽃 같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생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아버지 영조에 의해서 당쟁의 희생물로.
정조의 나이 불과 열 살에 한맺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왕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무엇이든 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일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남아 있는 한 정조 자신은 반역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온전한 복권을 위해서 온갖 노력과 눈물겨운 효심을 바쳤으니, 그것은 곧 자신이 반역자의 대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그리고 영조의 눈을 어둡게 했던, 세자를 비운의 왕자로 몰고 간 당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사 건설을 위해 화성 천도를 꿈꾸었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능은 본디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량포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 기슭에 있었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곧바로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蔣獻)이라 추상하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에서 영우원(永祐園)으로 바꿨다. 정조 13년(1789) 현재의 화성으로 이장해오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다시 능호를 융릉으로 올렸다. 따라서 묘호도 장종(莊宗)에서 장조로 바뀌었고, 의황제(懿皇帝)로 추존했다. 따라서 어머니의 존호도 경의왕후에서 의황후(懿皇后)로 올랐다.
정조는 한 해에 몇 차례씩 아버지의 능참길에 오르는데, 때때로 눈물짓고 통곡하기를 그치지 못했다고 한다. 죽어서는 끝내 아버지 곁에 ane혔다. 갸륵한 효성이란 어느 시대 누구에게 들어도 훈훈한 미담이지만 정조의 효성은 깊은 슬픔을 동반한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융건릉의 능역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그 길로 얼마 안가 두갈래 길을 만난다. 오른쪽으로 가면 융릉이고, 왼쪽으로 가면 건릉에 닿는다.
1) 융릉(隆陵)
융릉은 후에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이며 『한중록』의 저자인 경의왕후의 합장릉이다. 장조가 죽은 뒤 아버지인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린 시호가 사도세자이다. 융릉은 본래 동대문 밖 배봉산에 있었는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1789년에 현재의 위치인 화성군 화산으로 이장했다.
묘내수(墓內水)가 흐르는 금천교를 지나면 시원스레 묘역이 열리면서 융릉 안내문을 옆에 둔 홍살문과 정자각, 능선이 차례로 올려다보인다. 홍살문을 넘어 참도에 들어서면 정자각 정면 길과 바로 옆으로 한 단 낮게 턱이 져 있다. 윗단의 길은 ‘참도’라 하는데 왕이 걷는 길이고 대신들은 그 아랫길에 읍하고 걷는다. 그런데 다른 능과는 달리 박석을 깐 자리가 유난히 넓다. 정조의 건릉도 마찬가지인데, 정자각과 직선거리 외엔 잔디를 심는 게 보통인 것이다. 왼쪽으론 제사청이었을 건물터가 주춧돌로 남아 있다.
비각에는 두 개의 비가 서 있다. ‘朝鮮國思悼蔣獻世子顯陵園’과 ‘大韓蔣祖懿皇帝隆陵獻敬懿王后附左’라 쓰인 비이다. 능의 주인이 여러 번 추존을 거쳤으며 합장릉임을 알 수 있다. 정자각을 지나 왼쪽으로 올라가면 화려한 병풍석과 꽃봉오리 인석을 두른 봉분이 눈길을 끈다. 찬찬히 살펴보면 석물 하나하나에 깃들인 정성이 예사롭지 않다. 난간석은 없으나 병풍석엔 목단과 연화문을 번갈아 새겼고, 인석에는 탐스런 잎받침 위에 꽃봉오리가 사방으로 둘려 있다. 이 꽃봉오리에 방향을 표시하는 문자가 새겨져 있어 매우 특이하다.
능 앞의 장명등은 조선 전기에 유행하던 팔각장명등인데 다리에는 구름무늬가 섬세하고, 대석에는 둥근 원 안에 매·난·국을 조각한 점 또한 퍽 이채롭다. 정조가 추존된 왕임에도 무인석이 서 있고, 문인석은 둘 다 금관을 썼다. 이는 영릉(세종릉) 천장 때 폐지키로 했던 묘제(墓制)가 되살아난 것이고, 추존왕의 봉분에는 거의 두르지 않는 병풍석을 두른 것도 특별한 예우이다. 그토록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으니 정조가 아버지를 생각함이 얼마나 극진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행히 석물들의 크기가 작고 조촐해 소박해 보이지만, 그 가운데 화려한 게 융릉이고 보면 이 또한 고수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석물과 마찬가지로 망주석에 조각된 뛰노는 다람쥐가 사실적이다. 합장릉은 보통 상석을 둘을 놓아 그 표시로 삼는데, 여기 융릉은 합장능이면서 상석은 하나를 놓았다. 자칫 단릉으로 오해하기 쉽다.
2)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
세상에는 비극의 주인공도 많고 그 사연도 제각각이다. 왕조의 비극과 권력의 비정함을 상징하는 마의태자와 단종이 역사에 회자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지만, 아무려나 사도세자의 비극이 그만 못하랴. 28세의 꿈같은 목숨이 뒤주에 갇혀 당쟁의 제물이 되었으니 말이다. 사도세자란 영조가 아들 장헌세자를 땅에 묻고 나서야 후회하며 붙여준 시호이다. 죽은 세자를 생각하며 슬퍼한다는 뜻이다.
장헌세자는 영조 11년(1735) 1월 11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영빈 이씨, 이름은 선(愃), 자는 윤관(允寬)이다. 이복형이 있었으나 세자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요절했고, 장헌세자는 2세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3세에 『효경』을, 7세에 『동몽선습』을 마치고 문자와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줄 만큼 영특했다. 게다가 효심과 도량, 덕을 겸비하여 장차 왕세자가 될 기량이 넉넉했다. 영조의 나이 마흔에 얻은 외아들이니 사랑이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 영특함의 도가 지나쳤을까. 세자의 나이 10세에 벌써 당시 집권세력인 노론의 처사를 비판할 만큼 정치적 성숙도를 보였으니 노론을 불안케 했다. 영조의 전왕 경종은 후사가 없는데다 신병이 많았다. 이에 노론의 사인방으로 불리는 김창집, 이건명, 이이명, 조태채등의 주장에 따라 영조는 세자로 책봉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론에서 시기상조론을 들고 있어나 노론의 4대신을 4흉으로 몰아세워 극형에 처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이 신임사화이다. 생명의 위협속에서 겨우 헤어나 왕위에 오른 영조는 신임사화를 일으켰던 소론을 쫒아내고 자신을 옹립했던 노론의 의리를 정당화했다. 이것을 신임의리라 한다.
영조가 비록 정치적 평정을 이루려 탕평책을 쓰기는 하였으나 영조는 어떻든 노론의 옹립에 의해 왕이 되었고, 이에 반대한 소론을 쫓아내지 않았던가. 여기에는 어린 장헌세자를 거두어주던 소론계의 한 궁녀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강하게 심어준 정치적 호소가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하는 사가도 있으나, 어쨌든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총명한 세자는 어느새 아버지 영조의 정치가 옳지 않다는 생각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현 집권세력인 노론에게 ‘내버려두면 위험한 인물’로 낙인 찍힌 장헌세자, 비극의 운명은 그렇게 시작된다.
세자가 부왕을 대신하여 정무에 임하자 가시처럼 경계하기 시작한 측은 노론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숙위 문씨 등이었다. 이들은 드디어 세자의 행동에 무고를 하기에 이른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문란한 행동을 일삼는다는 것이었다. 자연 영조의 꾸지람이 잦았고, 부자 사이게 갈등이 일기 시작했다. 세자에 대한 모함은 줄기찼으며,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는 사이에 세자는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세자가 부왕 모르게 관서지방을 순행하고 돌아온 것은 1761년, 윤재겸 등이 상소를 올려 동행했던 관리들이 모두 파직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운명의 5월 13일, 세자의 행동이 부덕하다며 정순왕후와 그 아비 김한구, 같은 파인 홍계회 등이 상소를 올린데다 문소의(文昭儀) 이간책에 영조는 격분하고 만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고 끝내 뒤주에 가두어 죽게 했다. “한번만 살려 달라”는 절규에 찬 몸부림도, 어머니 영빈 이씨와 이제 열 살된 아들 정조의 간곡한 애원도 모두 외면당한 채 뒤주에 갇힌 지 8일만에 세자는 죽었다. 1762년 5월 21일, 이것이 임오참변이다. 영조는 중량포 배봉산에 아들을 묻고나서야 비정했던 자신의 처사를 크게 후회하고 친히 나가 곡을 하며 제주를 했다고 전한다. 묘호를 수은묘, 시호를 사도라 내렸다. 왕세자가 이지경까지 이른 사건은 순전히 노론·소론과 남인·소론간의 당파와 권력의 유지·쟁취에서 비롯되었다. 권력의 비정하고 매몰참을 어디에 비하랴.
역사는 여기서 영조의 성격이 우유부단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영조 역시 슬픈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언제 어떻게 정쟁의 제물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영조는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에게서 태어났다. 영조는 서자로서 받아야 하는 차별과 콤플렉스를 과연 얼마나 극복할 수 있었을까. 뛰어난 능력으로도 극복하지 못했던 게 타고난 신분의 벽이었는지 모른다. 사도세자 역시 후궁의 아들만 아니었던들 역사는 반전되었을지 모른다.
장헌세자빈에 책봉된 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다. 헌데 얄궂은 게 운명인가.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사위인 세자가 살해되는 과정을 시종 지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노론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참담하게 지켜볼 수 밖에, 다만 어린 세손인 정조를 위해 사가로 피신을 나가 있곤 했다. 마지못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혜경궁 홍씨에게 설상가상으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조에게 10세에 죽은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의 승통을 잇게 한 것이다.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은 것인데, 혜경궁 홍씨는 어이없이 아들마저 빼앗기고 가슴을 에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장헌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이 된 홍씨는 정조가 즉위하며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올랐다. 이때부터 혜경궁 홍씨로 더 널리 알려진 그는 순조 15년 12월 15일 81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융릉에 묻혔다.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경의왕후에서 의황후가 되었다. 혜경궁 홍씨는 남편 장헌세자의 기막힌 운명과 자신의 한많은 일생을 자서전적 소설로 남겼으니 우리나라 궁중문학의 백미인 『한중록』이다
3) 건릉(健陵)
건릉은 융릉 서쪽으로 두 언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조선후기의 문예부흥을 이룩한 조선 제 22대 왕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가 합장된 능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운명을 그리도 아파하며 자주 능행길에 올랐던 정도는 어느 날 채제공에게 “내가 죽거든 현륭원(융릉의 이전이름) 근처에 묻어주오” 했던 부탁이 이루어져 아버지 곁에 묻힌 것이다.
능역 입구에서 융릉까지는 거리는 가까운 편이지만 건릉은 소나무와 갈참나무 숲으로 꽤 걸어 들어간다. 도시 근교에서 이만큼 한적한 길을 만나기란 능역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어렵다. 애당초 건릉은 정조의 유언에 따라 융릉 동쪽 언덕에 모셔 졌는데, 그 자리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설이 자주 거론됐다. 길지를 물색하던 중 순조 21년(1821) 3월 9일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여기로 이장하면서 합장했다.
정조의 시호는 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순조가 즉위하면서 묘호를 정종(正宗)으로 했다가 광무 3년(1899) 12월 19일 정조로,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했다. 효의왕후는 좌참판에서 영의정으로 승직된 김시묵의 딸로 영조 38년에 세손빈으로 책봉된다.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극진히 섬기는 등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곧고 공사가 분명하여 어떤 공물도 사가로 내보낸 적이 없다. 일생을 근검 정결하여 여러 차례 존호가 올려졌으나 번번이 거절했다고 한다. 효의왕후는 소생없이 49세에 남편 정조와 사별하고, 순조 21년 (1821) 3월 9일 창경궁 자경전에서 춘추 69세로 승하했다. 효의왕후는 남편의 묘호에 따라서 후에 선황후가 되었다.
건릉에 들어서면 구도가 분위기가 융릉과 매우 흡사함을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의 규범화된 구조 이외의 것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가 융릉보다 잘 정돈되어 있지만, 박석이 양 옆으로 넓게 깔린 게 비슷하다. 당연히 곧게 깔린 참도가 끝나는 지점쯤에 정자각이 있고, 그 오른쪽에 비석이 서 있다.
건릉의 봉분은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난간 석주에 문자로 십이지를 표시했는데, 방향 안내를 위한 것이다. 그 점말고는 거의 융릉의 예를 따랐다. 합장릉인데 상석은 하나를 놓았다. 팔각장명들은 둥근 향로와 같은 기단부 위로 잘록한 허리에 안상이, 상석에는 면마다 둥근 원을 그리고 매·난·국을 새겨넣었다. 두툼한 지붕돌 등 영락없이 융릉을 가꾼 사람의 솜씨인 듯하다. 문·무인석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한결 여유가 있어 뵌다. 그리고 여느 왕릉과 같은 상석과 석마2쌍, 망주선 1쌍 수라청, 망료위, 표석 등과 봉분 뒤로 3면에 곡장이 둘러쳐져 있다.
4) 조선후기 르네상스의 주역 정조
정조는 영조 28년(1752) 9월 22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맏아들로, 이름은 산(祘), 자의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기상이 늠름하고 체상이 특이하며 성품이 곧고 영특하여 할아버지 영조는 물론 종묘사직을 이을 기대주로 촉망받는다. 정조는 나이 일곱 살에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불과 열 살에 아버지의 쓰라린 죽음을 목격한다. 아버지를 잃고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었다가 영조가 승하하고 1776년에 왕위에 오른다.
정조는 이후 세수 49세(1800년)의 젊은 나이로 승하할 때까지 불꽃 같은 삶을 정치에 바친다. 정조가 재위한 25년의 조선 역사는 문예부흥기로 찬란히 빛난다. 어린 날의 상처와 한을 무던히도 감내하며 갸륵한 효성과 치적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정조는 영조 이전부터 조성되어온 당쟁의 혼란 속에서 아버지 장헌세자를 잃고 왕위에 올랐으니 위험요소는 언제나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영조의 탕평책도 점차 빛을 잃어 가고, 오랜 권력의 단맛에서 헤어나지 못한 무리들에게 영특한 정조는 더할 나위 없이 성가신 존재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갖은 계략으로 정조의 신변을 위협하고 회유와 유혹의 손길을 거두지 못했다. 다행히 정조의 곁에는 홍국영·서명선 같은 이가 있어 위험을 모면하곤 했다.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정조의 첫 사업은 규장각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한 정조는 규장각에 어제(御製)를 봉안하고 신하들과 더불어 토론정치·연구정치를 구현하자는 것이었으며, 인재 등용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이었다. 정사에 일일이 간섭하며 철천지 원수를 삼고 있는 내척과 외척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을 바로 새우기 위한 일차적인 혁신기구가 규장각이었다.
정조는 후에 세손시절을 회상하며 토로한 바 있다. “옷을 벗지도 못한 채 잠자리에 든 것이 몇 달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이제 생각하니 그 고독하고 불안했던 지난날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초정(初政)에 이르러 척리로서 바르지 못한 자를 숙청하여 사직의 기틀을 바로잡자는 것이 나의 고심사였으며 문득 ‘척환(戚宦)’ 두 자만 보면 이에서 신물이 났다.” (강만길, 「문예부흥의 영주 정조」)
등극 초기를 넘어선 정조의 정치는 눈부시게 문예부흥기를 이루어갔다. 규장각에는 정유자(丁酉字)를 비롯한 주조활자와 목활자 80여 만 자를 만들어 비치하고 도서간행에 착수하는 등 규장각의 규모와 역할이 크게 확대 되었다. 소장 도서는 3만 권이 넘었고, 규장도서 목록인 『동국문헌비고』를 비롯한 전대에 이룩한 문물제도의 보완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속오의례』『국조보감』『대전통편』등 많은 저작들이 새로 편찬 발간된다.
우문지치(右文之治), 작성지화(作成之化)를 2대 슬로건으로 내건 규장각에는 인재가 모여들었다. 정조는 규장각의 검서관직 네 명을 모두 서민출신으로 등용하고, 숙종이래 실각한 남인을 등용하는 등 남북·노소론의 당파에 구애없이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개혁적인 지식인을 등용했다. 이는 영조대에 시작, 거의 실패한 거나 다름없는 탕평책을 수습 계승하는 일이기도 했고, 혁신정치와 왕권강화를 갈망하는 정조의 속내이기도 했다. 여북하면 정조 자신의 집무실을 蕩蕩平平室이라 이름했을까.
정조 원년에 규장각 제학이 되고 수원성 축성의 총책임을 맡았던 체제공과 역시 수원성 축성에 거중기를 비롯해 과학기술을 도입했던 정약용은 남인이었으며, 언제나 바른 정견을 제시했던 박지원, 박제가 등은 노론계 실학자였다. 그와 같이 정조는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고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며 특색을 장려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정조는 장용영(壯勇營) 설치, 형정(刑政) 개혁, 천세력 제정, 노비추쇄법 폐지, 궁차징세법 폐지 등 수많은 치적을 남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눈물을 솟구치곤했다. 더구나 양주 배봉산의 아버지 묘소에 나가보면 생죽음을 창졸간에 마련한 묘소여서 여간 초라한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늘 가슴속 여한으로 품고 있는데, 금성위 박명원이 정조의 뜻을 헤아려 상소를 올렸다. 지세가 불길하니 천도함이 옳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정조는 서둘러 화성군 화산으로 원침을 이장하매 사도세자는 비로소 당신의 아들이 정성들여 마련한 만년유택에 안장되었다. 정조는 또 융릉에서 가까운 용주사를 크게 중수해 원찰로 삼고 당대의 화원 김홍도에게 불화를 그리게 한다. 하여 우리는 수원 일대에서 그립고 존경할 만한 이들의 문화적 체취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정조의 수원 능행길은 민심을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어가에서 내려 도로변에서 직접 서민의 애환과 호소를 귀담아 들었으며, 민의를 광범하게 수용하려 노력했다. 개혁 정치의 걸림돌인 보수 세력을 의식하고 더욱 민심을 끌어안으려는 몸짓이었다. 정조는 새로운 개혁과 왕권의 강화를 꿈꾸며 수원성을 쌓았으나, 미처 그 꿈을 다 펴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했다. 세수 49세로. 갑작스러운 정조의 죽음에 대해 사가들은 독살설의 실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3. 수원성
수원 시내 한복판을 광범위하게 점하고 있는 수원성은 우리나라 성곽문화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성곽의 장점만을 흡수해 완벽하게 건설된 도시 성곽이며, 세계 최초의 계획된 신도시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조 18년(1794) 2월에 시작하여 2년 6개월 만에 완공을 이룬 수원성은 당대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기술을 집약시켰던 것이다.
조선의 성은 임진왜란(1592)을 맞아 무참히 허물어 져버렸다. 이에 성곽의 방어 체제와 능력에 대한 고민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때 재상을 지냈던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전쟁이 끝나자『징비록』을 작성하여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과 치성을 갖춰져야 함”을 거듭 역설했다. 이 말은 훗날 수원성을 쌓는 데 크게 반영되었다.
본래 수원의 행정청은 지금의 수원에서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성군 태안면 송산리의 화산 아래 있었다. 정조는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수원읍과 민가들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팔달산 아래 지금의 수원으로 옮기고 읍명을 화성(華城)이라 했다. 정조는 곧 화성 축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행궁을 설치하는 등 화성성역(華城城役)이라 부르는 신도시 건설이 무르익어갔다. 이에 정조는 일찍이 유성룡이 제시했던 설과 유형원·강항·조중봉, 그리고 실학의 대성자 정약용이 주창한 성설(城說)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는다. 실학사상이 크게 영향을 미친 대역사였다.
남인의 영수이자 정조 개혁정치의 참모였던 번암 체제공이 성역의 총지휘를 맡고, 다산 정약용이 축성의 모든 과정을 계획 감독했다. 특히 정약용의 발명품인 활차와 거중기가 매우 쓸모 있게 사용됐다. 요즘의 크레인에 해당하는 거중기는 40여 근의 힘으로 2만 5천근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공사기간이 이전에 비해 5분에 1이 단축되었다. 우리나라 과학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이다.
성곽에 벽돌을 사용한 것도 수원성이 처음인데, 돌과 벽돌을 적절히 교차시켜 쌓았다. 팔달산에 둘러싸인 계곡과 지형의 고저·굴곡에 따라 두른 성벽은 지금 보아도 아름답다. 넓은 평지의 시가지를 포용했고, 산성의 방어기능을 이 읍성에 결합했다. 상공업을 장려해 정치·상업적 기능까지 갖추었으며, 실용성과 합리적인 구조·구조물을 과학적으로 치밀하게 배치하는 등 수원성은 이때까지의 건축문화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이었다. 게다가 우아하면서도 장엄한 면모가 일품이다.
사대문 밖에는 이중으로 적을 차단할 수 있는 아담한 옹성을 설치했는데, 이는 서울 동대문에만 있는 구조물이다. 사대문엔 또 구멍이 5개 뚫린 물탱크[五星池]를 두어 적이 불을 지를 때를 대비해 물을 담아두었다. 사대문 사이에 암문(暗門) 4개, 수문(水門) 2개, 적대(敵臺) 4개, 공심돈(空心墩) 3개, 봉돈(烽墩) 1개, 포루(砲樓) 5개, 장대(將臺) 2개, 각루(角樓) 4개, 포루(飽樓) 5개 등 다양한 구조물을 치밀하고 규모있게 배치하였으며, 성내에는 행궁을 마련해 임금이 머물 수 있는 제반 시설도 모자람 없이 갖추었다.
그리하여 인가라곤 겨우 5~6호에 지나지 않았던, 200년 전의 광막한 벌판이었던 수원은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했고, 사통팔달의 교중 중심지로 성장했다. 정조는 성곽이 완성되자 화성 축성공사의 전말을 소상히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케 했다. 그렇게 작성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따르면 축성 역사에 동원된 공장은 1,280명, 연 동원 일수는 37만 6,342일, 축성에 사용된 벽돌은 모두 69만 5,000장이었다. 당시 동원된 공장들에게 생활보장이 넉넉히 될 만큼의 임금이 지불된 사실도 여기서 밝혀지고 있다. 『화성성역의궤』에서 계획, 도제, 의식, 동원된 인력과 경비, 사용된 기계 등 축성의 전말과 당시의 모든 상황을 소상히 알 수 있다. 따라서 『화성성역의궤』는 경제를 비롯한 당시의 사회형편을 연구하고 성역을 보수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많이 파손된 성곽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화성역의궤』를 참고했기에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팔달문에서 동남각루 사이의 일부와 행궁이 복원되지 못했으나 수원성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수원성 축성은 정조의 효성에서 비롯된 결단이긴 했지만, 기실 정조는 개혁정치의 이상을 새로운 도시 수원에서 펼치고 실현하며 마무리 짓고자 했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노론벽파의 세력을 탕평책과 규장각 설치만으로는 약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수원성이 완성된 이듬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땅에 다시는 정조와 같은 현명한 왕이 출현하지 않았고, 조선은 다시 혼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수원성 역시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나 그 아름다운 자태만은 변함이 없다. 누구나 한나절만 할애한다면 유서깊은 수원성을 둘러보며 정조의 이상과 꿈의 일면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수원성은 사적 제3호이다.
* 성문(城門)
성문은 성곽내외를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이다. 전시에는 적의 첫째 목표가 되지만, 평시에는 성곽의 외관을 돋보이게 하는 아름다운 의장 기능을 한다. 수원성은 북쪽에 장안문(長安門), 남쪽에 팔달문(八達門), 동쪽에 창룡문(蒼龍門), 서쪽에 화서문(華西門)이 있다. 그 중 수원성을 대표하는 성문이 장안문과 팔달문이다. 규모도 크거니와 홍예위의 누(樓)가 2층의 높직한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어 화려하고 장중하다. 창룡문과 화서문은 아담한 단층이다. 네 곳의 성문은 모두 안팎으로 아치형의 홍예문을 이룬다. 홍예에는 두 짝의 나무문에 철엽(鐵葉)을 대고 커다란 빗장을 질렀다. 홍예 위에는 불이 나거나 적이 불을 질렀을 때 얼른 끌 수 있도록 물을 준비해 두는 물탱크가 있다. 구멍이 5개 뚫렸다 해서 오성지라 한다. 2층에는 멀리 적의 동태를 조망할 수 있는 누각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 밖으로는 본 성문에서 약 6보쯤 떨어진 곳에 좌우로 반원형의 자그마한 옹성을 쌓고, 다시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된 적대(敵臺)가 있어 웅장한 분위기가 더하다. 옹성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모습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적대와 함께 성문을 향해 다가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장소이다. 수원성의 옹성은 서울의 동대문 다음으로 시도되었고, 장안문은 옹성을 제외한다면 서울의 남대문과 흡사하다. 수원 성문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것이 장안문과 팔달문인데, 그 중에서도 장안문은 수원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1)팔달문
팔달문은 수원성의 남문이다. 이어지던 성벽이 끊긴 채 큰길 네거리에 서울 남대문처럼 고립되어 서 있는데, 그림같이 아름답고 우람하다. 본디 성벽이 이어지고 좌우에 적대가 있었으나 팔달문은 워낙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 복원하지 않았다. 석축의 홍예 위에 2층으로 지붕을 올렸고, 처마가 한데 모아지는 듯한 형식의 우진각지붕의 문루가 있다. 문루 주변으론 여장을 둘러쌓았고 전면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마련했다. 원래 적대가 있었으나 복원하지 않았다.
팔달문은 특히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같은데, 문루의 네 귀에 높은 기둥이 없는 것이 다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문의 홍예는 높이가 3.17m 너비 3.56m이다. 장안문과 함께 수원시의 상징으로 꼽히는 웅장한 건축물이다. 해마다 10월이면 화홍문화제가 열리는데 이때 특히 팔달문은 불야성을 이룬다. 장안동에 있고, 보물 제402호이다. 팔달문 2층 누각에는 육중한 동종이 있다. 본래 조선 숙종 13년 (1687) 화성 만의사(萬義寺)에서 조성해 봉안했던 종인데 언제 어떤 경로로 이곳에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전통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는 이 종은 전체적인 비례와 구조가 조화로워 안정감이 있다. 용의 꼬리가 휘감고 있는 음통과 종뉴, 종신의 상단은 활짝 핀 꽃으로 장식하였고, 중대로 내려오면서 풀무늬의 유곽과 연꽃을 쥐고 있는 4구의 보살상을 배치하고 명문을 새겼다. 하대는 연화당초문을 둘렀다. 전체적으로 이와 같은 범종양식은 17세기 후반 유행하던 것인데, 팔달문 범종이 그 모양새를 잘 갖추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이다.
2)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문이다. 장안동에 있고, 보물 제403호이다. 옹성을 비롯한 화서문의 모든 시설과 규모는 동쪽의 창룡문과 거의 같은 구조와 형식이다. 홍예문 위에 단층의 누각이 있고, 바깥쪽으로 평여장을 쌓았는데 소재는 벽돌이다. 문 안쪽으로 수문청이 있고, 바깥으론 벽돌로 쌓은 반원형의 옹성이 있으며, 총혈 19개, 사혈 9개가 뚫려 있다.
공심돈은 수원성에서만 볼 수 있는 원거리 초소이다. 성벽보다 높은 2층으로 된 망루여서 특이하다. 동그스름한 원통형에 촘촘히 벽돌로 쌓고 누각을 세웠는데, 내부는 3층 구조에 나선형으로 되어 있다. 층마다 총안과 포혈이 바깥을 향해 뚫려 있다. 목조 누각인 위층에도 총안이 뚫려 있어 먼 거리에서부터 가까운 거리까지 한꺼번에 적을 감시하고 방어할 수 있다. 공심돈은 생김새를 본떠 일명 소라각이라 부르기도 했다.
3)장안문
장안문은 수원성의 북문이면서 정문에 해당하고, 수원의 관문이면서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수원시의 상징이다. 팔달문과 함께 수원성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히는 화려하고 장엄한 건축물이다. 홍예문의 높이는 3.8m, 너비 3.6m, 두께 7.9m이다. 2층으로 된 누각은 위풍이 당당하다. 문루는 정면 10칸 측면 5칸으로 매우 크고 우람한 편이다. 장안문을 이중으로 감싸고 있는 외성은 북옹성이다. 축성 당시에는 문루가 없었으나 나중에 세웠다. 옹성은 벽돌로 쌓았고, 높이는 6.6m, 둘레는 67.5m이며, 좌우에 적대를 두었다. 장안동에 있다. 사적 제3호이다.
4)창룡문
동 1포루를 지나 성벽을 따라가면 수원성의 동문인 창룡문이 서 있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 제3호이다. 한국전쟁때 문루와 홍예가 크게 손상을 입었는데 1975년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창룡문은 안팎의 홍예 규모가 서로 다른 것이 특이하다. 내홍예의 높이는 4.8m인데, 외홍예의 높이는 4.5m이다. 너비도 그만큼 차이가 난다. 문루는 내외 3포에 2익공의 단층 건물이고, 정면 4.9m에 협문이 있다. 창룡문의 외성으로 동옹성이 있는데, 한쪽이 열려있는 특이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동옹성의 높이는 2.9m, 둘레는 17.2m이고, 총안 14개가 나있다. 창룡문의 왼쪽으론 서울과 오산간의 산업도로로 이어지는 큰길이 나 있고, 그 길을 건너면 연무대와 탁 트인 푸른 잔디밭의 활터가 보인다.
*서장대
일명 화성장대인 서장대는 수원성에서 가장 높은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수원성의 총지휘본부이다. 서장대에선 성안을 한눈에 훤히 볼 수 있고, 백리 내의 모든 동정을 살필 수 있어 총지휘가 가능했다. 여기서 쇠뇌를 발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2층 누각으로 지은 서장대는 독특한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조선 정조의 친필 편액이 있었으며 뒤에는 노대, 옆에는 군무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누각만 남아 있다. 1층은 3칸의 정방형 평면이고 모두 비어 있다. 바깥에는 둥근 기둥 12개를 세우고 팔모의 화강석 주초로 받쳤다. 위층에는 1칸의 방이 있는데 사면에 교창을 내고 판자를 깔았다. 본래 군무소 건물은 서쪽 2칸은 온돌이고 동쪽 1칸은 판자를 깔았으나 군무소는 복원되지 않았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 제3호이다.
* 서포루(西砲樓)와 서포루(西飽樓)
서포루(西砲樓)는 수원성곽 서장대 북쪽으로 약 200m 거리에 있는 성곽 시설물이다. 성 몸에 凸 모양을 붙여 치성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지었는데, 포(飽)의 높이와 같다. 화포를 감춰두고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발사하게 되어 있는 시설물로 중무장한 요새에 속한다.
서포루는 지대석 위에 3량의 벽돌집을 지었는데, 삼영(三楹)은 성밖으로 물렸다. 외면의 아래 너비 6.36m, 위쪽의 줄어든 너비 5.15m, 좌우의 아래 너비 7.27m 위의 줄어든 너비 6.67m이다. 외면 지대위에 대포혈 2개를 뚫었고, 좌우면에 3개의 포혈을 두었으며, 위로는 차츰 벽돌을 오므려가며 쌓고 총안 15개를 놓았다.
서포루(西飽樓)는 성곽의 서장대 남쪽 202m지점에 있는 시설물이다. 치성 위에 지은 집을 포(飽)라 하는데, 아군을 엄폐시켜 적이 못 보게 하는 곳이다. 치성은 성 밖으로 6.91m를 물렸으며, 외면 너비는 9.1m이다. 현안(懸眼) 하나를 뚫었고, 관자를 깔아 누를 만들었다. 아래 위에 방안 총혈 19개, 누혈 11개를 뚫어놓았다. 성 밖 3면에는 짐승 얼굴을 그린 판문을 만들고, 활과 총쏘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 제3호이다.
* 서북각루
화서문의 남쪽 173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3칸인데, 모두 판자를 깔고 사면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모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안(箭眼)을 뚫어놓았는데, 안에는 꽃그림을 그려 치장하였으니 멋들어진 정서의 연출이다. 적을 감시하는 긴장 속에서도 여유를 찾으라는 뜻이리라. 안에는 서남쪽 1칸을 떼어 사다리를 놓았으며, 북쪽으로 누상에 이르게 했다. 동남쪽 1칸은 별도로 설치하여 숙직하는 군사가 머물게 되어 있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 제3호이다. 일명 화양루(華陽樓)인 서남각루는 서남암문에서 남쪽으로 길게 연결되어 높은 벼랑에 우뚝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내부 1칸이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 제3호이다.
5) 화홍문(華虹門)
수원성 북쪽 수문 화홍문이 기다리고 있다. 무지개 모양의 7칸 홍예다리는 안양 만안교와 함께 우리나라 홍예다리 가운데 가장 긴 것 중 하나이다. 그 위에 세운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문은 바깥쪽을 향해 포루처럼 사용한다. 화홍문 위 좌우에는 돌로 만든 해태가 팔각기둥 위에 다소곳이 앉아 고개를 외로 틀고 있는데, 다른 문에서는 볼 수 없는 귀엽고 특별한 조형물이다.
광교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이곳 북수문의 7개 홍예를 지나는 것을 칠간수(七澗水)라 부른다. 물줄기는 7개 홍예 사이를 폭포수처럼 빠져나가 수원성 한복판을 가로질러 남수문으로 빠진다. 정조는 수원팔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을 꼽으면서 이곳의 맑은 폭포수가 옥같이 부서지는 장관을 즐겼다고 전한다. 60여 년 전만 해도 널찍한 개천의 폭에 큼직한 바위들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잘 아낙들의 빨래터로 이용되곤 했다 하나, 지금은 성벽처럼 높이 둑이 쌓아져 있고 흐르는 물은 아름다운 홍예가 무색할 정도로 오염과 악취가 심하다. 장안동에 있으며, 사적 제3호이다.
*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방화수류정은 화홍문 동쪽 높은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한국의 건축미와 정자문화를 맘껏 자랑하는 정교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정자이다. 동북각루라고도 불리는 이 정자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때 학자이며 시인인 정명도의 시 “운담풍경근오천 방화수류과전천 雲淡風輕近午天 訪花隨柳過前川 (구름개어 맑은 바람 부는 한낮 / 꽃 찾아 나선 길 버드나무 따라 앞 개울가를 지나네)”에서 딴 것이라 전한다. 정자에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이 쓴 정자 이름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는 높고 경사진 지형을 재주껏 이용해 지어서 공중에 떠 있는 듯 아련하다. 꾸밈없이 자연스러운데다가 앙증맞다 할만큼 작지만 그 자태가 단아하면서도 활달하다. 좁은 공간을 활용하느라 정자의 모양도 격식에 구애됨 없이 지었는데, 특히 마루 한쪽이 좁게 비어져 나가게 놓여 있어 재미나다. 도합 십육각형인데 적당한 곳에서 각을 이루었으니, 이런 마루는 방화수류정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듯하다. 채벽은 십자형으로 꾸몄으며 단조로움을 피해 독특한 무늬를 가미했다. 정자 아래로는 둥그런 용연지를 꾸몄다. 거기에 용머리 바위가 있어 용연지라 불렀다고 전하는데, 현재 용머리 형상은 없다. 용연지 한가운데로는 자그마한 녹색지대의 섬을 만들었다. 연지 주변과 연지 안의 섬에는 푸른 잔디, 휘늘어진 능수버들, 잔향나무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눈맛도 싱그럽거니와, 연지에 비친 방화수류정과 숲 그림자가 매우 고와 운치를 더하고 왼쪽의 화홍문과도 어울려 절묘한 승경을 이룬다.
방화수류정은 전시에는 적군 감시와 방어 기능을 갖추었으나, 평시에는 휴식공간으로 중요하게 여겼음직하다. 아름다운 건축미와 공간 활용, 자연스런 조화로 보아 설계자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정자는 각루의 군사적 기능보다는 호화로운 운치와 풍류를 논하는 정자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건축미로 보나 예술적 가치로 보나 조선 후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인데, 용연지 밖으로는 굳센 철책이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어 아쉽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 제3호이다.
6) 연무대와 활터
사방이 담장에 둘러싸인, 제법 위엄이 있어 보이는 집 한 채를 만난다. 솟을 삼문에 정면 5칸인 잘생긴 기와집인데, 수원성 동쪽 군사들을 지휘하던 훈련장으로 동장대라고도 한다. 연병장의 지휘본부다. 빈 터에 누각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 수원성을 복원하면서 주변의 담장과 석축계단을 옛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 제3호이다.
연무대 옆 성벽 밖으로는 넓은 활터가 있다. 정조도 활쏘기를 매우 즐겼다고 하며, 요즘은 궁술을 아끼는 수원시민들이 심신을 단련하고 있다. 화살촉을 나르는 ‘화살 케이블카’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요즘 사람들 발상이요, 솜씨일 터여서 눈길을 끈다. 그 활터가 끝나는 지점의 성벽에는 동북공심돈이 자리잡고 있다. 커다란 둥근 집 위에 누각을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물이다. 곱게 쌓은 벽돌벽에 예외없이 여러 개의 총구가 뚫려 있으나 삼엄한 기(氣)라고는 없어 이상스러울 정도이다.
7) 봉돈
성의 동쪽에 있는 재래식 통신시설이다. 성을 지키고 행궁을 보호하는 시설물로 성곽보다 훨씬 높이 쌓아 5개의 커다란 연기통을 내었다. 사방 어디서든 볼 수 있어 신속히 정보 전달의 임무가 수행되도록 신호를 보내는 곳이다. 성곽 밖으로는 5.5m나 돌출시켜 여러 개의 총구를 두었다. 외벽 아래는 돌로 쌓고 중간부터는 벽돌로 쌓았다. 내벽은 거의 벽돌로 쌓고 층단을 두었으며, 위쪽으론 화덕을 두고 아래에는 온돌방을 설치해 교대 근무자가 쉴 수 있게 배려했다. 평상시엔 맨 남쪽 화두만 사용한다. 저녁마다 횃불을 올리면 동쪽의 용인 석성산 봉수에서 신호를 보내오고, 서쪽으로는 수원 홍천대의 바닷가 봉수와 연결되었다. 수원성의 봉돈은 현존하는 가장 발달된 봉화시설인데, 그 모습이 여간 장관이 아니다. 장안동에 있고, 사적 제3호이다.
8) 행궁터와 낙남헌·화령전
정조 20년(1796) 팔달산 동쪽 기슭에 행궁을 건립하였다. 행궁의 기능은 보통 셋으로 분류한다. 전란을 피하기 위해 머무는 경우와, 지방의 능에 참배하러 갈 때, 잠시 휴양삼아 지방으로 나들이할 경우 왕이 머무는 곳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에 거동하는 일이 잦았고, 마침내 수원성을 축조케 되었으니 행궁을 짓는 일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곳에서 효율적으로 국사를 돌볼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완성된 행궁은 약 570칸 정도의 대규모 건물이었다. 가정집의 본채격인 정당·봉수당이 69칸, 내당의 복내당이 67칸, 정문 격인 신풍루가 27칸, 서리청·집사청이 3칸 등 요소요소에 전각들이 넉넉했다. 엄밀히 말하면, 수원행궁은 사도세자의 능참길에 들르는 행궁이라기보다 정조와 수원유수 등이 정무를 보는 건물에 다름 아니었다. 더불어 장차 정조의 개혁정치가 빛을 발할 곳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곧 이승을 하직하고 말았으니 조선시대의 마지막 현왕(賢王)은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 짧았다. 20세기를 맞아 수원행궁터에 들어선 것은 서양식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다. 1910년 무렵이다. 자혜의원은 그 뒤 도립병원으로 바뀌었고, 차츰 관공서와 민가가 들어서 수원행궁은 자취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현재 행궁터에 남아 있는 건물은 낙남헌뿐이다. 신풍동 신풍초등학교운동장 끝에 있는 낙남헌은 당시 봉수당 북쪽에 있던 정면 5칸 측면 4칸집인데, 초익공양식의 팔작지붕집이다. 그나마 일부가 소실되었고, 벽체와 내부는 개조했다. 신풍동에있고, 경기도 기념물 제65호이다. 화령전은 신풍초등학교 후문 앞에 있다. 순조가 부왕인 정조의 어진(御眞)을 모시고 부왕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조선 말까지 수원유수와 판관들이 관리했고, 해마다 제향을 드렸다. 정조의 어진은 일제시대를 겪으며 창덕궁으로 옮겨 보관했는데, 그 무렵에 그만 분실되고 말았다. 1992년 수원사에서 새로이 복원하여 봉헌하고 있다. 사적 제115호이다.
4. 창성사(彰聖寺) 진각국사(眞覺國師) 부도비
연무대를 둘러보고 아래로 내려오면 진각국사 부도비가 있다. 광교산 중턱의 창성사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물 제14호이다. 수원 광교산 골짜기에는 고려 초까지만 해도 89개 암자가 세워져 고승들을 배출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화엄종 사찰이던 창성사는 광교산에 있었으나 언제 창건되고 폐사 되었는지 알 수가 없고, 지금 창성사터엔 법성사가 세워져 여린 기운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수원도호부 불우조」에 “광교산에 창성사가 있다. 이색이 지은 고려 승 천희(千熙)의 비명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1799년에 제작된 『범우고』에 “예전에 폐사가 된 것을 이제 수리한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무슨 이유였는지 스러졌던 절이 잠시 회복기에 들었다가 다시 흔적 없이 폐사가 되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장성사터’ 표지판이 서 있는 광교산엔 지금도 장대석과 주춧돌, 계단석 등의 석편들이 나뒹굴고 있다. 인근 마을까지 창성사터에 속할 만큼 퍽 너른 절이었다고 하는데, 진각국사 부도비가 언제 어떻게 지금의 매향동으로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 이 부도비와 가까이 있었을 부도는 아직도 간 곳을 모른다.
부도비의 주인은 진각국사 천희스님(1307∼1382)이다. 비문 내용을 살펴보면 스님은 고려 충렬왕 33년(1307) 흥해(지금의 포항시 홍해읍)에서 태어나 13세에 화엄종 반룡사 주지 일비(一非)대사를 은사로 출가한다. 덕천사·부인사·개태사 등에 머물며 수행에 힘쓰다가 쉰이 넘은 늦은 나이로 중국 유학을 떠났다. 2년뒤인 1366년 원나라 성안사 만봉스님에게서 가사와 선봉(禪棒)을 물려받는다. 예로부터 가사와 선봉의 전수는 심법(心法)을 내리물림한다는 징표로 전해오고 있다.
고려에 돌아온 천희스님이 치악산에 머물 때인 1347년,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 ‘國師大華嚴宗禪敎都摠攝’에 봉하고 인장과 법의를 내렸다. 국사 자리에 오른 천희스님은 선승과 학승의 면모를 두루 갖춘 분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수원시 매향동에 있는 진각국사 부도비는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비좌를 마련, 장방형의 홈을 파고 비신을 얹었다. 그 위에 지붕돌을 얹은 일반적인 형식인데, 별다른 조식없이 소박한 비로 남아 있다. 비좌는 1단의 굄뿐이고 지붕돌의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부도비는 스님 입적 다음해인 1386년(우왕 12)에 세웠다. 천희스님의 이력에 비해 매우 단조롭고 소박하다.
비문은 이색(李穡)이 짓고, 각은 승려 혜잠(惠岑)이 하였으나 글씨를 쓴 사람은 마모가 심해 판독이 안 된다. 서체는 구양순체에 근거를 두기는 하였으나 붓의 힘이 굳세지 못하고 금석문의 풍모가 거의 사라진 투박한 면을 보이고 있다.
5. 지지대비(遲遲臺碑)와 노송지대
조선 순조 7년(1807) 화성어사 신현(申絢)이 정조의 갸륵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가 지지대비이다. 정조가 융릉에 참배하러 갈 때 이 고개에 오르면 화산의 장헌세자릉이 빤히 보이는데 발길은 더디기만 했다. 정조는 그때마다 “왜 이리 더디냐”고 역정을 냈다 하니 한달음에 달려가 부왕을 뵙고 싶어했음이 역력하다. 참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으레 이 고개에서 이르러 화산릉을 돌아보며 못내 발길 돌리기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해서 이 고개를 느릴 지(遲)자를 겹쳐써 지지대고개로 불렀다는 훈훈한 일화가 전한다. 지지대란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때 ‘遲遲吾行也’라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 지지대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이다.
지지대고개 정상에서부터 예전 경수국도를 따라 약 5km구간에 낙락장송이 줄지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1789년 4월 정조가 융릉의 식목관에게 돈 천냥을 주어 능참 때 지나는 이 길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남에 대부분 고사했고 지금은 130여 그루의 낙락장송이 길목을 지키며 시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그나마 남은 소나무들마저 해를 거듭할수록 힘겨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견뎌낼 수 없는 대기 오염 탓이라. 봄가을로 영양주사를 맞으며 근근이 버티고 있는 나무도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이다.
수원 천도를 이루지 못한 정조는 한 달에 20여 차례나 융릉에 거동했다고 전하는데 그 횟수의 사실 여부는 의심스럽다. 서울에서 화성이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닐뿐더러, 당시의 교통사정을 감안한다면 더욱 의문이 간다. 어찌 되었든 정조의 효심어린 일화가 이 노송지대에도 서려 있다. 소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주기를 바라고 있던 노송지대에 어느 때 송충이가 들끓었다. 정조는 주민에게 상금을 내리고 잡게 했음에도 송충이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왕릉 행차길에 신하에게 일러 송충이를 잡아 오게 했다. 정조는 송충이를 깨물면서 진노했다. “네가 아무리 미물일망정 어찌 내가 가꾸는 솔잎을 갉아먹느냐!” 그러자 솔잎을 갉아 먹던 송충이들이 일시에 땅바닥에 떨어져 죽었다는 감동적인 일화이다. 수원시는 현재 노송이 서 있는 10m 이내를 보호구역으로 제한하고 있다.
수원문화재단 031-290-3625
용주사 031-221-6987
융건릉 031-223-8364
한우설곰탕 031-223-3275
송희준(觀善書堂 당장)
Come September(9월이 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