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월 29일 새벽,
겨울바다를 보기 위해, 노대도가 보고 싶어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바다랑호를 탔다.
이번 설 연휴를 1월 29일부터 2월 6일까지로 정해 놓은 터여서,
설날 당일인 2월 3일까지는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여행이었다.
집에는 29일부터 2박 3일 예정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남부터미널에서 28일 11시 30분 심야버스를 탄 것이므로 3박 4일이라고 해야 옳다.
통영행 버스를 타면 난 늘 아이가 된다.
며칠을 손꼽아 기다리던 소풍가는 날,
와르르 몰려 탄 버스가 출발하고 그 때부터 버스 안은 초롱눈빛들이 반짝반짝 가득했었다.
차창밖을 보며 마냥 신이 났던 그 어린시절 그 느낌으로...
노대도를 향해 가던 중 비진도 근방에서는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카페 회원님들께 근하신년 카드 대신 고향사진을 바칩니다.
노대도에 대한 나의 애절함은 아랑곳 않고 바다는 청명한 날씨를 허락하지 않았다.
4미터에 가까운 파도와 영하 8~9도의 추위, 그리고 강원도 전방근무시절 맛 본 북풍한설...
노대에 도착하니 물이 모두 얼어 보일러 동파 염려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통영지역에서 영하 9도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드디어 바다랑호가 노대도로 진입을 시작하였다.
이 날은 삼천포 장날이어서 바다랑은 욕지를 들렀다가 탄항과 하노대를 거쳐 상노대와 산등,그리고 두미 쪽으로 향한다.
저 너머 상리에서 탄항가는 길이 보인다.
저 길은 노대도에서 차량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완공된 지 얼마되지 않았다.
저 길이 있기 전, 노대사람들은 탄항에서 산길을 따라 힘든 걸음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배로 다녔을테고...
저 길로 탄항과 상리마을은 예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 되었을 것이다.
노대에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시골길이 있다.
오솔길이 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늘 양지녁이 있는, 그런 길이...
시골길은 절절이 보고픈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준다.
노대도 시골길은 '그리움의 회색빛 그늘'이라는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따듯한 양지녁이 되어줄 것이다.
.
상노대와 하노대 사이 물길.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저 갯바위는 낚시꾼들에게 포인트 중 포인트'라고 했다.
이 곳에서 50대로 보이는 말없는 동네 아저씨는 학꽁치 한 자루를 건져 올렸다.
나는 밤새 그 추운 바람을 맞아가며 기껏 볼락만 건졌는데...
낚싯대만 드리우면 볼락은 한꺼번에 서너 마리 줄줄이 올라왔다. 마치 줄줄이 쏘시지처럼...
귀찮아서 버리려고 하다가,
서른 마리의 볼락을 머리 자르고 내장 꺼내고 지느러미 손봐서 두 개의 라면과 함께 냄비에 넣었다.
추위의 기승만큼 -전결- 펄펄 끓였다.
그리고 마구 먹었다. 소주 안주로... 어, 이것 보아라- 그래도 의외로 맛은 좋았다.
제대로 잡으려고 마음 먹었으면 아마도 2~3백 마리는 잡았을 수도 있었다.
다음 날 저 위의 포인트에서 학꽁치를 잡은 분이 하시는 말,
"아이구 서울양반. 볼락은 비늘만 손보고 머리와 내장 채 그대로 구워 먹으면 최고요"
그 옆에 있던 아주머니 거드는 말이 더 한심하다는 투였다.
"머리가 얼추 반인데, 그거 떼고 내장 긁어내면 뭐가 남소? 머리, 내장을 씹어먹으면 올매나 고소한데..."
어이구 무식한게 죄다. 무식함은 역사를 바꿀 만큼의 큰 죄다.
저 밖은 파도로 난리가 났는데 이곳은 잔잔함만 흐른다.
포근하다.
어릴 적 겨울. 추운 날 학교 갔다 돌아온 자식의 언 손을 입으로 호호 불어주시던 어머니,
바람이 숭숭 지나다닐 것 같은 스웨터를 훌쩍 펼쳐 꼭 안아 주시던 어머니의 그 품속 같은 곳이다.
바다랑호는 우리를 이곳에 하선시키고 다음 기정지를 향해 떠났다.
바다랑호에서 내린 우리는 상노대와 하노대 사이 물이 드나드는 곳 옆,
저 집(정 봉성 씨 집)에 짐을 맡기고 바로 산을 타려 했는데 아침 먹고 가라, 고 난리셨다.
배 고프면 안 된다고...
어르신(정봉성 씨 아버님)은 마치 나를 친동생, 조카 대하듯 해 주신다.
그래서 내 고향은 노대다.(... 어이구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니, 노대는 내 고향같은 곳이다.
사실 이 추운 겨울에 바다,
그리고 굳이 노대도를 찾은 이유는 작년 시월에 산등마을과 깃대봉 풍경을 놓쳤기 때문이다.
그 때, 통영시내와 노대 도착 전까지 마구 찍어대서 밧데리가 없었다.
밧데리를 잔뜩 준비한 나는 마치 활통에 활을 꽉 채운 궁수처럼 풍경사냥에 의기양양했다.
샹륙하자마자 바로 산을 타고 산등마을과 깃대봉으로 향해야 할 만큼 기세가 등등했다.
......
어르신 말을 안 듣고 바로 산을 탔으면
아마 허기 때문에 되돌아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깃대봉 산행은 더욱 꿈도 못꿀 일이었다.
허기를 다독이고 단독군장차림에 산행을 시작했다.
산으로 향하는 올망졸망 마을길을 가자면 가장 먼저 대하는 노대교회.
그 위로 까치 한 마리가 나를 맞았다.
저 친구도 아마 노대 태생일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 것을 보면...
노대마을은 길마다 돌로 쌓아 땅을 일군 흔적들로 가득하다.
집도 밭도 축사도 모두 돌을 쌓아 만든 것이다.
여려웠던 시절, 이 좁디 좁은 섬땅을 한뼘이라도 더 만들어 일구어야 했을 것이다.
그 시절, 어르신들의 노고 덕분에 정겨움이 있는 고즈넉한 담장들이 있다.
우리 마음을 포근하게 하는 돌담길이다.
한국의 전형적인, 정이 듬뿍 흐르는 고향풍경이 여기 노대도에 있다.
학교를 향해 언덕을 오르는 중 어느 집 뒤를 돌아, 가파른 밭 위에서 본 상노대마을.
작년 시월에 왔을 때 이곳부터 사진을 찍지 못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아담하고 포근한 풍경을 놓쳤으니 김치 없는 식사를 한 느낌이었지...
늘 부족한 듯 살아가는 것이 도시생활이고 세상살이라 하지만, 노대에 살면 마음만은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나머지 부족한 것들은 노대도, 자연이 줄 것 같았다.
노대의 어느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도 그랬다.
"노대에 살면 한달 내내 돈 한푼 없이도 살 때가 있는기라. 묵는 것이야 바다와 땅에 다 있다 아이가."
노대분교 정문으로 오르는 계단.
이 계단을 오르며 묵찌빠, 가위바위보 계단오르기, 많이오르기, 빨리오르기. 등 갖은 놀이들을 했으리라.
이 계단에 '까르르' 빛바랜 함박웃음이 지금도 오르고 구르고 있다.
산 바로 밑. 대부분의 주민들이 다녔을 노대분교.
까만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뛰어 놀던 아이들의 천진한 흑백사진이 지금 이곳에서 스쳐 지나간다.
학교를 지나 오십 미터 쯤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상리마을에서 제일 높은 마천루를 만나게 된다.
작년 시월에 이곳에 오를 때 가뿐 숨과 흐르는 땀을 말끔이 씻어주던 그곳이다.
불어주던 바람이, 정지된 시간이, 시원한 광경이...
그리고 그 언덕을 지나면 나타나는 상노대도 서측 해안.
이곳도 바로 밑에 보이는 곳은 "무슨 자리"라고 불리우는 낚시꾼들의 포인트가 있다.
이곳 포인트도 많이 알려진 곳이다.
가파른 길이 끝나면 시작되는 오솔길. 이곳에 오는 젊은 쌍은 반드시 잉꼬가 될 것이다.
오솔길의 호젓함이 사랑과 낭만, 그리고 추억을 줄 것이다.
이 한적한 오솔길은 마을주민들이 일일이 풀을 베고 돌을 치워서 닦아 놓은 길이다.
평평한 오솔길이 끝나는 지점까지 동백나무가 이어져 정겨움을 더 해주고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의 거창한 화려함도, 오카야마 고라쿠엔 정원의 역사적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노대의 오솔길은 소담한 정이 있는 곳이다.
잘 생긴 사람은 여러 번 보면 질리고, 수수하게 생긴 사람도 보면 볼수록 정이 가듯,
노대의 오솔길은 늘 보아도 정이 가는 수수한 고향의 정원이다.
노대 북쪽 산마루에서 본 산등마을.
노대도에서 바람이 가장 많은 곳이다.
마을까지 경사도가 상당하다.
산등마을까지 갔다가 다시 이 언덕으로 오를 때는 숨 고르기를 몇 차례 해야 한다.
그래도 꼭 이 코스를 걸어야 노대도를 갖다온 느낌이 든다.
건강한 남자의 걸음으로 이십 분 정도의 거리인데,
데이트를 즐기며 느긋함을 느끼며 걸어도 삼십 분 정도이니 걸을 만 하다.
산등마을 포구.
이곳 방파제는 물때가 맞으면 대물잔치가 벌어지는 유명한 곳이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주말이 되면 전국의 다이버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거칠열도.
거칠열도는 안거칠도, 밖거칠도, 실거칠도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열도다.
산등마을 방파제 끝에서 보면 아름답게 보인다.
더 좋은 포토 포인트는 옛 마을회관 마당이다.
그곳에서 보면 한 눈에 열도가 보인다.
이 사진은 마을 한 가운데서 찍은 것인데, 이 사진을 올린 이유는 옛 마을회관에서 찍은 사진을 망쳤기 때문이다.
거칠도도 낚시 포인트다. 2~3명 정도 야영이 가능한 곳이라고 한다.
산등포구에 떠 있는 작은 어선이 새악시처럼 예쁘다.
산에서 산등마을로 내려오며 바라본 풍경 중에 유난히 작은 배 한 척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람이 몹시 불었는데도,
작은 배가 있는 산등포구는 동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산등마을 포구 왼쪽에 있는 갯바위.
이곳은 욕지 전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유명한 갯바위 포인트라고 한다.
특히 감성돔이 잘 잡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초보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산등마을은 바람이 많아 파도도 많다.
방파제에서 경험치를 쌓은 후 가능한 곳이다.
산등마을을 둘러보고 깃대봉으로 향했다.
깃대봉 가는 길은 없다.
정글 속으로 헤쳐 나가면 모든 곳이 다 길이기는 하겠지만, 이곳은 염소를 키우는 곳이라 조심해야 한다.
남자 둘이 가면 딱 좋다. 여성들이 가기에는 뭐시기하다. 온통 가시덤불길이기 때문이다.
내 뒤를 따르는 사내놈 하나도 무슨 애로사항이 있는지 "애구애구" 연신 낑낑 댔다.
깃대봉 8부 능선에서 하노대가 가장 잘 보였다.
그런데 오래된 자동 카메라에, 보잘 것 없는 실력에, 날씨 마저 희뿌연하여 하노대가 그저그렇다.
없는 길 만들어가며, 가시덤불을 온몸으로 제쳐가며 드디어 깃대봉 정상에 올랐다.
아, 노대도 !
깃대봉에서 본 탄항마을, 그 너머로 펼쳐진 옥빛 바다.
멀리 보이는 막도, 우도, 그리고 연화열도.
저 바다를 누가 비단결이라고 했던가.
아니다. 노대도 깃대봉에서 보는 바다는 그냥 '노대바다'다.
어떤 표현으로 비유할 수 있는 바다가 아니다.
그런 노대도 깃대봉에는 애석하게도 그 흔한 전망대가 없다.
누구 볼까 아까워 없는 것인지, 감추어진 비경이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이 아름다운 풍경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깃대봉에서 본 사이도.
날씨 좋은 날,
전문사진작가가 만약 이 풍경을 보고 카메라에 담았다면 아마 몇 백호 짜리 인화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깃대봉에서 마을로 하산하는 경로를 탄항마을 쪽으로 잡았다.
깃대봉에서 탄항마을로 가는 직선코스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무들이 빽빽했고,
길이랄 수 있는 그런 흔적도 없고,
웬만하면 없는 길을 내며 가보려 하겠는데, 그런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럴 땐 그저 정상에서 파악된 능선을 따라 가는 것이 상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도 몇 미터도 못 가 후회의 길이 되었다.
오를 때처럼 잔가지를 꺽어가며, 가시덤불을 제치고, 큰 나무 밑둥을 엎드려 지나가며
데굴데굴 구르듯이 내려왔다.
결국 하산의 기쁨을 온몸에 난 상처와 맞바꾸었다.
상리에서 탄항가는 길 중간 쯤, 언덕배기로 내려왔다.
작년에 완공된 상리에서 탄항마을로 가는 콘크리트 도로.
이 도로를 따라 가자면 전망대 같은 언덕이 있다.
언덕너머로 가는 길에는 절경이 여러 곳에 있다.
전문작가들이 본다면 필시 작품 몇 점이 나올 만한 그런 곳이다.
탄항에 도착하니 뱃가죽과 등짝이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허기는 사람을 뻔뻔하게 한다.
탄항마을회관 골목으로 들어서자 허리굽은 할메 한 분이 외지인 행색의 나를 보며 도시에서는 없는 인삿말을 건넸다.
"누요? 어디서 오는 사람인교?"
누요? 이 말은 내 집에 들어오는 타인에게 하는 말인것 같은데, 이 동네가 다 이 할메 땅인가?
어디서 오는 사람 ? 이 말도 그렇고...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예, 서울에서 이 마을 구경하러 온 사람입니다. 마을이 참 아름답고 좋네요"
"그렇지요, 좋지요? 내는 평생 살아도 여가 그리 좋십니다. 밥은 묵었소?"
어이구 할머니 적시에 한 건 하셨습니다. 배와 등이 너무 사랑하는가 봅니다... 만,
"예 할머니. 물이나 좀 주실랍니까?"
주둥이가 무거운 건지 아니면 내숭인지, 왜 말이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인지. 으이그 등신...
"들어오소. 내 집에서 조금 쉬다 가소"
할메 한 마디 말씀에 감사하다는 말이 몇 번이고 입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누요? 어디서 오는 사람인교? 는 반갑소. 인사합시다, 라는 말씀인 것을 그제야 느꼈다.
사람은 뻔뻔하기에 살아간다.
그 집으로 들어가자 당장에 커피를 내어 오셨다. 그리고 할메는 다시 물었다.
"점심 묵었소? 밥 내올까요?"
이 쯤에서 뻔뻔함의 진실을 감추는 것도 실례인지라,
"할머니, 우리 라면 좀 주실랍니까?"
이 보소. 정말 뻔뻔하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골라서 요구한다.
하산 후에 흘렸던 땀으로 한기를 느끼던 참인지라 내장에서 라면을 요구했다.
"그라지요"
바로 양은냄비에 물을 끓이고 라면 넣고 상 차리더니, 진수성찬이 나왔다.
라면에 빠알간 김치 한 대접, 나에게 그 보다 더 나은 진수성찬은 없었다.
라면은 내 입과 위장이 느낄 틈도 없을 정도로 속으로 들어갔다. 국물 한 모금 남김없이.
할메는 또 무엇을 내놓으셨다.
쌀튀김강정. 겨우내 심심한 입을 달래려 배타고 장에 가서 사온 것일 텐데...
먹어도 되는 것인지. 그래도 아스락거리며 먹었다.
할메과자는 사는, 살아온, 살아갈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 말 저 말 하다보니, 청상과부로 살아 온 세월이 길었던 분이었다.
지금은 언니와, 같은 과부인, 함께 노로를 위로하며 서로 의지하며 사신다 했다.
난 알 수 없는 눈물이 나왔다. 왜, 누가 불쌍해서, 무엇이 서러워...
"할머니, 다음에... 봄에 다시 올 테니, 그 때 다시 와도 뭐라 하지 않을 거지요?"
"아이고 또 오겄나? 그래도 오면 꼭 우리 집에 오소"
이쯤되면 조카가 이모집에 온 것이나 무엇이 다를까.
다시 상리마을로 돌아오는 길, 난 아무 말이나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땅을 보며 터덜터덜 걸었다.
실연으로 어쩔 줄 모르는 사춘기 소년의 마음처럼 찔끔,
머리가 멍하게 정지된 그런 느낌으로 걸었다.
상리로 돌아 온 후 한참을 아무 움직임 없이 방파제에 앉아 먼, 파도치는 먼 바다를 바라 보았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있는 것인데, 파도는 바람을 만들 수 있을까?
사람들은 파도로 바람을 만들려, 많이도 만들어냈었다.
까르르르 - 갈메기가 멍한 나를 깨웠다.
저 놈도 고향은 땅일 텐데,
먹이가 필요하면 아래로 내려오는데, 잠 잘 때도 내려와 잘 것이고...
상리마을 어느 집.
잘 손질하여 빨랫줄에 걸어둔 생선 말리는 풍경이 너무 정겨워 나도 모르게 주거침입을 하고 말았다.
가을걷이가 끝난 어느 농가의 한적한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더미처럼 더 없이 정겹다.
그 집 위에서 본 노대분교.
나른한 오후에 나른한 눈꺼풀로 찍은 것이다.
아이들은 없다. 시간이 흐른 그림자들이 있다.
그날 저녁.
하노대 한 켠으로 해가 뉘엇거리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해가 짧다고 하는데, 바다의 해는 길디길다.
하루종일,
섬 곳곳 다 돌아다니고 이야깃거리 다 퍼내고 감상할 것 다 해도 남은 해가 있었다.
그래도 해는 어김없이 저 바다 뒤로, 아래로 어둠 뒤로 돌아 앉았다.
자연은 거스름이 없어 좋다.
이곳 저녁놀은 장관이라던데 내 감상적 게으름으로 그 아름다운 광경을 놓치고 말았다.
노대의 밤, 적막.
그래도 띄엄띄엄 어느 집에서 나오는 불빛과 가로등에서 발하는 몇몇 빛줄기는 외로움을 면하게 했다.
오늘따라, 겨울바다여서인지 오후부터 외로움이 따라 다녔다.
여차.
소주 한 잔 들이킬 안주를 잡으려 밤낚시를 시작했다.
이놈들, 사람의 기분을 눈치 챘는지 안주거리 최고인 전갱이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내 머리 속에는 '별로'인 볼락만 연신 입질을 했다. 사람 약 올리듯이.
낚싯대 드리우면 바로 입질이고 몇 마리 씩 대로대롱 올라왔다.
젠장 마을 어느 분은 학꽁치를 자루로 잡아 오던데, 원... 원
그렇게 잡히는 볼락을 라면에 넣어 한 병을 하였다. 또 취하였다. 싸늘하게 취하였다.
어제 이별을 고했던 해는 어김없이 하노대 근처에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 없어졌었냐고 항변하듯 당당히 바다, 섬사이로 올라왔다.
노대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노대의 하루는 작은 섬에서 시작한다.
저녁, 해는 바다를 잉태시키고,
아침, 해는 바다에 섬을 낳게 했다.
그렇게 많은, 켜켜이 오랜 세월을, 어김없이...
상노대도의 아침풍경.
조용하다.
어느 바다처럼 비릿한 냄새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더 상쾌하다.
노대도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짐을 정리하여 상노대 선착장으로 나왔다.
8시 40분에 도착할 바다랑을 기다리기 위해,
조금 남은 시간, 노대를 더 둘러보기 위해 한 시간 일찍 봉성씨 집을 나왔다.
이제 서을로 가면 언제 다시 노대를 볼 것인가...
며칠 정 든 마을 골목길을 여기저기 살펴 보았다.
따뜻한 양지에 축~ 팔자 편 고양이도, 빨랫줄에 깔끔하게 걸어놓은 생선들도,
나를 반기던 까치도, 저 위 아이들의 함박웃음이 지나가던 학교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하던 깃대봉도 그대로였다.
그래야지.
내가 다시 노대도를 찾을 때까지 그대로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어야지.
알았지? 노대도.
그렇게 노대도와 이별을 했다.
왜 그렇게 마음이 아렸던 것인지.
이번 노대도 여행은 아픈 추억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누가 무어라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랬던 것인지...
멀리 노대도를 보내며,
아들을 군대에 보낼 때 느꼈던 그런 애절함과 아쉬움.
첫댓글 먼저 백수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말을 드립니다..
새해에도 좋은 사진10002 올려주시고.
잠깐이나마 엄마품속같은 고향에 잠겨 쉬었다 갑니다..
저희 회사의 설연휴가 29일부터여서,
29일 밤에 서울에서 출발해서 30일 아침에 노대에 도착했습니다.
일전에 노대에 갔을 때 산등마을과 깃대봉에서 보는 풍경을 찍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밧데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마음껏 찍어 올립니다.
서울에 31일 밤에 도착해서 사진을 먼저 올리고 천천히 사진이야기를 써서 올릴 생각입니다.
고향이 그리운 분들을 생각해서... 고향이란 늘 가슴 저리게 그리운 곳이지요.
저에게도 노대는 이제 고향같은 곳입니다.
보내주신 연하장 ~~잘~~보았습니다, 눈물나게 그리운 고향의 풍경도~~~~
눈만감으면 그곳이삼삼히 떠오르고.....몽땅 평겨치고 가고픈마음이 뭉클거립니다,
백수님께 감사드리면서~~~한편으론 무척 부끄럽습니다, 노대출신의 한사람으로
빠쁘다는 핑계로 고향한번 찿지 않았다는것~~~ 노대에게 참으로 죄송하지요~~~~
노대도가 고향이 아니신듯 한데 정말 노대도를 사랑하시는것 같읍니다.
멀리서나마 박수를 보냅니다.
네, 노대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깃대봉에 전망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위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있는 곳인데 말이죠.
깃대봉 가는 길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몇몇분들이 추진했던 것으로 아는데...
2010년7월30일 상노대정상 깃대봉 산행중길이없어 도중하차........
어린시절 엄청나게 오르내린 깃대봉......백수님은 아무리낙엽떨어진
겨울이지만 길이없는대.....깃대봉아래 탄향마을 확실합니다
고향에서태어나고 자란.저보다월등합니다 고향풍경좋습니다 깃대봉~길~
전망대~~~서명운동.....시청에 민원.....동의합니다....?.
네, 어느 쪽으로도 올라가는 길이 없습니다.
학교 언덕길을 넘어 오솔길 초입에서 오르기 시작했는데 7부능선 위부터는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온몸을 가시넝쿨이 감쌀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내려와서 획인하니 온몸이 가시였습니다.
더구나 깃대봉 정상에서 상리와 탄항 중간 코스로 능선을 따라 하산을 했는데 거의 구르다시피해서 내려왔습니다.
아무튼 경치는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었습니다.
방갑습니다 카페지기입니다
이렇게 노대를 사랑하시는 분을 만나니 참 반갑고 좋네요
멀리서나마 노대를 더욱더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시는 마음 참 감사히 받겟습니다
다음에 노대도 오실때 저에게 먼저 알려주시면 감사할게요 ㅎㅎ
혹시 압니까 ?? 회라도 한접시 대접할지요 ㅎㅎ
감사합니다.
꼭 그럴게요.
이번에산등에입소했읍니다카페지기님잘부탁드립니다김봉준
아~ 자세한 설명과 사진 환상입니다 지금 오솔길 걷고있습니다 노대에 묻혀 살고파라
네, 저도 노대도를 한바퀴 돌면서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백수님 너무 반가워요? 언제 노대에 방문 일정 있으심 연락주십시요 꼭 만나뵙고 싶어요/ 저는 경산 진량에 살구요전번은 011-542-6000 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사실 올 봄에 욕지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욕지도에서 노대를 바라보았습니다.
가을에 노대를 한 번 더 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나질 않네요.
만약에,
갈 수 있는 시간이 나면 꼭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저역시 가족과함게 몇주전 욕지도에 3박 하였습니다 새천년 전망대에서 일출보고 노대도 거칠리도 두미도 전망을 봤습니다 좋았습니다 백수님 동선을 우연히 제가 뒤따라가는듯 합니다 좀 이상하넹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