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최근의 영화평이다.
이 영화평은 <유교>라는 주제어로 검색한 기사로 뜬 것이다. 그런데
본 기사에는 <유교>라는 개념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이 기사가 선택된 것은 <가족이기주의>라는 용어 때문이었다.
이 평론에서 보듯이 <가족이기주의>란 현대 미국문화가 지향하는 방향이다. <유교>의 사상 속에는 <가족이기주의>라는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양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현재까지 한국의 지식인들이 현대우리사회의 병폐로 지적하는 <유교적 가족주의>란 얼마나 잘못된 이해인지를 알 수 있다.
夏夷案者
<이상용의 영화보기>마이너리티 리포트
문화일보 07/25 08:26
필립 K 딕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마이너리티 리포트’ 는
미래 사회의 단면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래사회는 ‘프리크라임’이라 불리는 범죄 예방시스템을 통해 살인 발생률이 제로에 이른다. 그런데 소설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영화는 미래의 살해범으로 지목 된 영웅 앤더슨(톰 크루즈)의 노력을 통해 ‘프리크라임’ 시스
템이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끝맺어진다.
반면 소설은 모든 상황이 프리크라임의 예언 속에 들어있다고 설 명한다. 그러므로 시스템은 끝까지 신뢰를 얻고 유지된다. 딕의 주인공은 결코 영웅이 아니다. 그가 묘사한 앤더슨은 시스템 속 에서 허덕이는 불쌍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오락성을 감안한다면 결말의 차이는 충분히 감안할 수 있다. 문제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과 앤더슨이 시스템 을 수호하는 배경이다. 영화는 앤더슨이 6년 전 유괴된 아들 때 문에 ‘프리크라임’에 헌신했다고 설명한다. 원작은 이유가 없 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제기된 설정이 더 그럴 듯하지 않은가.
감정 적으로는 그렇지만 이성적으로는 소설이 더 논리적이다.
원작의 주인공 앤더슨은 ‘프리크라임’ 시스템을 만든 장본인이 지만 영화의 주인공은 시스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것은 달 리 말하자면, 영화 속 앤더슨은 아들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일에 헌신했지만
애초부터 시스템 자체를 신뢰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소설 속 앤더슨에게 시스템은 자식과 같다.
그는 시스템을 배신할 수 없는 처지이다.
현실은 소설에 가깝다. 현대인은 현대 메커니즘의 수호자를 자청 한다. 시스템은 우리들 스스로가 양육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범인(凡人)들에게도 영웅이 될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카프 카나 딕을 따르자면 영웅보다는 벌레인 ‘그레고리 잠자(‘변신 ’의 주인공)’가
되기 쉽다.
영화가 보여준 시스템의 문제는 보다 깊이 접근할 필요가 있다.
스필버그의 영웅이 수호하는 시스템은 궁극적으로 ‘가족’이다.
그런데 이 가족 속에는 타인을 향한 배려가 빠져 있다. 딕의 소 설은
가족이든 사회든 상관없이 시스템이면 동일한 것으로 취급 된다.
앤더슨 국장은 ‘프리크라임’시스템에 의해 범인으로 지목되는 순간 가장 먼저 직장 동료인 아내를 의심한다.
반면에 영화 속에서 앤더슨과 아내는 아들의 유괴 사건 이후 이 혼한
상태이며 영화가 진행되면서 가족은 통합된다. 사회의 시스 템은 파괴되고, 가족은 단결된다. 블록버스터가 되풀이하는 가족 이기주의이자 아이러니다.
/이상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