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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자들 :스승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여러분과 함께 염불을 준비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여러분도 기쁘세요?
제자들 :기쁩니다!
선생님 :잘 됐군요. 염불을 하시는 것이 기쁘다면 큰 돈을 벌 것이 확실합니다.
제자들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깨달음이 빠르니 여러분 모두 젊어질 것입니다.
제자들 :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 여러분 모두 젊어질 것입니다.
제자들 :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하하하! 네, 즐거우면 된 겁니다. 한번 웃으면 10년이 어려지니 우리 모두 하루 종일 웃어서 한 살 아기로 돌아갑니다. 그럼 오늘은 여러분이 준비를 하나 합시다. 여러분의 앉은 자세를 바로잡으십시오.
불교에서 말하는 염불은 그냥 듣기에는 종교행위의 하나로만 보여집니다. 물론 불교신자가 아닌 분들은 염불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연구하고 경험을 하면 염불이 하나의 수행방법으로 우리의 몸과 정신에 큰 도움을 주는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제가 밴쿠버에 돌아오니 특히 다정하게 느껴져서 너무 기쁘군요. (박수)
이런 특별한 날에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염불법을 학습하고 염송할 것입니다. 이것은 약칭으로 염불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염송에 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왜 염불을 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막연히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나는 건강하고 싶다. 나는 장수하고 싶다. 또는 나는 어떤 염원을 실현하고 싶다. 이렇게 염불을 하면 부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 이러한 막연한 느낌도 맞습니다.
더욱 합리적이고 더욱 과학적인 해석은 없을까요? 우리는 왜 염불을 하는 걸까요? 나는 오늘 이곳에서 여러분과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며칠 동안 나의 이런 느낌을 정리해 보고 이러한 생각으로 준비를 해서 여러분과 교류할 것입니다. 내가 이야기를 할 때 모르는 부분이 있더라도 먼저 질문은 하지 않기로 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천천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하루의 시간을 들여 이것을 확실히 말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제자들 : 좋습니다!
상사님 : 대선사이자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당시 인연을 맺은 제자들에게 많은 지식과 개념을 전해주셨습니다. 그 중에는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이치를 전수하고 수행의 방법을 배우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즉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고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매우 큰 지혜로 고통을 대략 8개로 나누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생 팔고(八苦)라고 부릅니다. 8은 숫자로, 8가지 고뇌를 말합니다.
생(生) ∙ 노(老) ∙병(病) ∙ 사 (死)는 출생 때의 고통, 나이가 든 후의 고통, 병이 들어서의 고통, 죽음의 고통을 말합니다. 생로병사가 즐겁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 있으면 손 좀 들어 보십시오. 병이 들었을 때 “와! 신난다! 나 드디어 병들었네. 으하하.” 이렇게 말하는 사람 있습니까? 혹시 있다면 정신병자겠지요. 이런 사람도 정신이 들고나면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괴로울 것입니다. 정신의 병은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즉 일종의 극히 괴로운 정신적 착각 속에서 고통을 즐거움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진짜 고통입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이를 가리켜 4고(四苦) 라고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고통 네 가지는 무엇일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4고(四苦) 는 생로병사입니다. 이 네 가지 고통이 가리키는 것은 육체적 삶의 정체성입니다.
또 다른 고통 4가지는 애(愛), 원(怨), 구(求), 오온(五蘊) 입니다.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실 겁니다. 애(愛)는 무엇을 말할까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져야 하는 고통, 즉 애별리고(愛別離苦)를 말합니다. 원증회(怨憎會)는 원한의 원(怨)과 증오한다는 증(憎)으로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원한 가진 사람과는 반드시 만난다는 고통입니다. 구부득(求不得)의 고통, 즉 구부득고(求不得苦)는 일곱 번째 고통으로, 갖고 싶은 물건을 얻기가 어려운 고통입니다. 여덟번 째 고통은 오온성고(五蘊盛苦)입니다. 불교 경문에서 말하는 ‘오온(五蘊)’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천천히 분석해보도록 합시다. 이 네 가지 고통, 즉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는 정신적인 부분에 속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생로병사는 생리적 부분에 속하며 삶 전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분류를 해 놓으면 좀더 쉽게 학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업을 하는 목적은 왜 염불을 해야 하는지를 토론하기 위해서 입니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왜 염불을 해야 하는지와 필연적 관계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에 대해서 부처님과 성인들의 가르침이나 말씀을 공부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이러한 고통을 줄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4고, 즉 생로병사는 학습을 통해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매우 깨달음이 큰 철학가 중에 죽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2백 살까지 살아있는 분 이 자리에 있습니까? 당연히 없을 것입니다. 2천 살은 더욱 불가능합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필연적입니다.
생로병사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먼저 태어남부터 봅시다. 나의 경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머님 아버님이 나를 낳아준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선택할 기회가 없었다는 겁니다. 지금 와서 나는 세상에 나오기 싫은데 왜 나를 낳았느냐고 항의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나는 이미 태어나 버렸으니까요. 우리는 태어남부터 피동적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의 그 고통을 성인이 된 다음에는 잊지만 어머님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떨까요?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힘듭니다. 한 가난한 가정의 아버지라면 옛날에도 힘들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아버지는 부인이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근심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해야 아이를 잘 기를까? 교육은 어떻게 시킬까? 어떻게 사랑해줘야 할까? 돈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으니 그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은 더욱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이 될 수 밖에요. 경제적인 압박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어머니는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정신적인 압박은 물론이고 생리적, 신체적인 압박이 너무 큽니다. 잉태하는 날부터 임신기간 내내 어머니는 태아를 염두에 둔 생활을 합니다. 평소에는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음식도 사먹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뱃속의 아이, 미래의 자녀를 위해서입니다. 자주 화를 내던 사람도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화를 참을 줄 압니다. 여름이 되면 수영을 즐기던 여성도 조심하느라 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많은 행동에서 스스로 제약을 가합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압니다. 아이를 낳은 후에는 어떨까요? 극도의 피로가 뒤따릅니다. 밤마다 제대로 잠을 못 자고 아기를 보살핍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잠을 잘 때도 마치 봉황새처럼 편한 자세로 잤을 겁니다. 심지어 다리를 벽에 올리고 자기도 하는 등 자유자재의 자세를 취합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긴 다음부터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자다가 자기 몸으로 아기를 누르지는 않나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는 이불을 덮지 않아도 되지만 아기는 보살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여성이 아이를 낳기 전에 아가씨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나약한 면이 많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야 비로소 여인으로 변하고 진정한 어머니로 변합니다. 그때 이 어머니의 박애와 관용, 보살피는 마음으로 타인을 배려할 수 알게 됩니다. 따라서 아이를 낳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우며 낳은 다음에도 어머니는 고생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태어난 아이 자신은 어떨까요? 아이에게도 고통은 마찬가지로 찾아옵니다. 많은 영아들이 어려서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어머니가 아이를 줄줄이 낳아도 생존율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열명을 낳으면 다섯 명의 아이가 사망했고 적게 잡아도 서너 명의 아이가 요절했습니다. 13명을 낳아 13명 모두 살아남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이를 많이 낳지만 제대로 기르지 못합니다. 열악한 건강상태와 질병이 아이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따라서 태어남의 고통은 매우 크며, 우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늙어서의 고통입니다. 세월을 막을 없으며 지구의 회전을 멈추게 할 수도 없습니다. 지구가 회전하는 것을 잊게 한다는 노래가 있는데 이는 불가능합니다. 지구는 무척 똑똑해서 한번도 그 움직임을 잊어본 적이 없이 계속 돌아갑니다. 지구가 움직임을 멈춘다면 전세게 사람들이 죽음에서 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 이러한 자연의 규칙은 계속 앞을 향해 발전해나가야 합니다. 인류는 노화를 막을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몸의 각종 기능과 능력이 생각에서부터 내장까지에 이르는 모든 신체가 다 노화하고 퇴화하므로 행동이 불편해집니다, 날마다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며 누군가 보살펴줘야 합니다. 많은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나이가 들어서의 고통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늙음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며 우리는 두 눈을 뜨고도 자신이 늙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질병의 고통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죽는 순간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병에 걸려보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면 누구나 병이 들기 마련입니다. 병은 고통을 부릅니다. 심지어 병으로 인해 일찍 죽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사망합니다. 즉 노년기가 되기도 전에 영아부터 청년, 내지 중년까지 정상적인 인생이라면 한창 좋은 시절에 갑자기 병이 들어 사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병 자체가 사람을 고통 속에 살게 하며, 사람을 일찍 사망하게도 합니다.
네 번째는 죽음의 고통입니다. 그 고통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요. 죽음의 과정은 아직 죽어보지 않아서 경험한 바는 없지만 죽음이 무척 고통스럽다는 것을 믿습니다. 죽을 때 고통을 안 느끼게 할 어떤 물건이나 약물을 발명해서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럽지 않다고 해도 심리적인 고통은 극에 달할 것입니다. 삶의 애착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살고 싶지,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원인으로 인해 당신은 죽음을 직면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 가장 아끼는 자식, 가장 공경하고 사랑하는 부모님과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합니다. 당신의 육체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해도 심리적인, 정신적인 괴로움은 그야말로 심합니다. 네, 생로병사 중 어느 것 하나 받아들이기 쉬운 것은 없습니다.
네 가지 고통은 정신적인 경지이며, 정신적 인지 영역에 속합니다. 학습을 통해 그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습니다. 앞에 말한 생로병사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간단히 말해 나는 생로병사 네 가지 고통 중에서 한가지를 공략하여 들어가면 어떤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질병입니다. 생로병사 중 세 번째인 병은 손을 써서 공략하면 인생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서부터 손을 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가장 기본적이며, 시간의 흐름으로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로 사람은 언젠가 죽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사람에게 정해준 연령은 1백살 정도입니다. 각종 질병과 원인, 각종 문제로 인해 대부분은1백 살이 되기 전에 사망합니다. 그렇다면 질병에서부터 손을 써야 하는데 어떻게 써야 할까요? 그래서 질병을 초래하는 원인, 즉 질병이 어떻게 해서 오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마치 의사처럼 우리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 싶다면 그 병의 원인부터 알아봐야 합니다. 그 첫 번째 원인은 행위입니다. 이 행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거의 모든 행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음식, 주거와 생활환경, 작업환경, 직업의 종류와 상황 등, 그리고 여러분의 생활습관 내지 장기적인 피로 등등……, 많은 행위가 있습니다. 볼 수 있는 것으로는 생리적인 행위가 있으며, 이런 것들이 모두 질병의 원인이 됩니다. 음식이 어떻게 병을 불러오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음식을 함부로 먹으면 병이 들지 않겠어요? 밥을 아무렇게나 먹으면 위장병이 걸리고 음식을 잘 못 먹으면 식중독에 걸리는 것 아닙니까? 해산물을 잘못 먹었다가는 알레르기가 발생하고 복어를 잘못 먹었다가는 그 독으로 사망합니다. 그렇다면 자기는 채식을 하니 중독되지 건강할거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채식하는 사람은 병에 걸립니까, 안 걸립니까? 말해보세요. 마찬가지로 병에 걸립니다. 식물을 잘 모르면서 먹었다가는 마찬가지로 중독되어 죽거나 알레르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겨울에 수박을 먹으면 알레르기 현상이 나타납니다. 게를 먹으면 알레르기가 나타나는 사람도 있으며 누구나 특정 식품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각자의 상태와 심한 정도에 따라 어떤 사람은 느낌이 없거나 어떤 경우에는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이 알레르기인지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음식이라는 문제만 봐도 많은 구체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세부적인 것은 제쳐두고 이런 행위로 인한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음식만 보아도 그러는데 생활습관에는 모든 우리의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나는 생활습관에 일부러 게으름을 추가해보았습니다. 게으름도 질병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 고향 마을에 한 게으른 부인이 살았습니다. 이 부인은 보통 게으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부인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려면 외지에 나가 돈을 벌어와야 했습니다. 이번에 떠나면 짧으면 석 달, 길면 다섯 달이나 있어야 돌아올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자기가 없는 사이에 게으른 부인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커다란 전병을 구웠습니다. 그리고는 가운데 구멍을 뚫어 부인의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돌아와 보니 부인이 굶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부인은 전병의 앞 부분만 먹고 게을러서 뒤에 있는 부분을 돌려먹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고향에서 유명합니다. 마을 어귀에는 커다란 전병을 목에 두르고 앞 부분만 먹은 모습의 게으른 부인의 조각상이 서있습니다. 게으름으로 병이 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것도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심하게 말입니다. 운동을 해야 할 때 운동하지 않고, 그렇지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먹지 않고 세수나 목욕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정상적인 생활이나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한다면 병에 걸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의 여러 면에서 주의를 해야 합니다. 모든 면이 병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이 행위는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집니다. 방금 말한 것은 생리적 행위에 속합니다. 신체적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정신적 행위입니다. 정신적 행위는 사유(思惟), 사고를 말합니다. 정신적 행위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팔고(八苦) 중 뒤에 나오는 4고(四苦)가 있습니다. 이 4고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애별리고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묻는다면 간단하게 말해 사랑을 탐내는 것입니다. 원증회는 4고 가운데 두 번째로, 성낼 ‘진(嗔)’, 즉 증오하는 행위입니다. 증오에는 많은 행위가 있습니다. 여러 다양한 심리적 행위로 증오를 형성하며 질투, 원한으로 인한 살인 같은 행위를 저지릅니다. 따라서 질투는 가장 쉽게 원한을 형성합니다.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구부득, 즉 7번째 고통으로 나중 4고 중 3번째 고통이며, 정신적인 부분 중 세 번째 입니다. 구부득고는 간단해서 여러분도 금방 알아들으셨을 것입니다. 구부득고는 어떤 고통에 속할까요? 그것은 욕심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오온성고(五蘊盛苦) 또는 오온치고(五蘊熾苦)가 있습니다. 성(盛), 또는 치(熾)는 매우 강렬하고 왕성한 것을 말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가 이것을 조금만 이해해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잘 이해하면 고통에서 멀리멀리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학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오온은 첫 번째 색(色)이라고 하고 두 번째는 수(受) , 상(想), 행(行) 식(識) 입니다. 색은 어떤 것을 말할까요? 그것은 모든 물질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물질의 세계에는 빛, 등불, 목소리, 생각이나 집, 육체, 의복, 안경, 시계, 반지, 보석, 종이 같은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이 중에는 정신적인 부분도 포함되며, 재색명리(財色名利) 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관리가 되기를 탐하고 재물을 탐하며 색을 탐하고, 먹는 것을 탐하고, 음악을 탐하고, 작은 애완동물을 탐하며, 아름다운 머리 스타일을 탐하고 화장품을 탐합니다. 건강을 탐하는 것도 있습니다. 매일 등산을 가며 특히 등산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욕심(貪)입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다이어트가 필요하지만 지나친 다이어트도 욕심입니다. 지나친 다이어트는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적당한 다이어트로 적당한 몸매를 유지해야 합니다. 뭐든 지나치면 집착을 부르고 새로운 고통을 가져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정확한 포지션을 어떻게 잡느냐, 가장 적당한 정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이것은 우리의 지혜로 생각해내야 합니다.
우리는 관리가 되기를 탐합니다. 색수상행식의 수는 받아들이는 느낌입니다. 우리들이 악수를 하며 아이는 엄마, 아빠와 스킨십을 원합니다. 혹자는 이것을 피부의 갈망이라고 부릅니다. 사춘기가 되면 이성친구를 원하고 피부접촉을 원합니다. 그밖에 오관(五官)의 느낌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은 더 많이 보고 싶고, 좋아하는 경치를 보면 매우 마음에 들어 합니다. 듣기 좋고 아름다운 소리를 듣기 위해 집착합니다. 좋은 향을 맡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면 그 냄새를 맡고 싶어집니다. 입으로는 맛 좋은 액체를 맛보면 그것을 더 많이 마시고 싶습니다. 맛 좋은 음식을 맛보면 더 많이 먹고 싶어집니다. 심지어 마음 속으로 방금 말한 어떤 느낌을 오관으로 전해지는 느낌입니다. 순전히 오관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심도 있는 변화를 진행합니다. 여러분이 그 아름다운 느낌을 가진 다음에는 즐거운 느낌과 향유하는 느낌이 생깁니다. 즉 이러한 느낌을 더 높여 집착과 탐욕으로 변화시켜 하나의 새로운 요구와 수량을 생성하게 됩니다. 이는 곧 원래 오관의 느낌을 더욱 승화시킵니다. 이것을 수의 부분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어떻다고 생각하고 그가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말은 종합적인 것입니다. 걸음걸이나 의복의 색깔, 의복의 디자인이나 몸에 어울리는 느낌, 그의 걸음 뒤에 발산하는 냄새, 표정의 느낌, 몸에서 발산하는 냄새, 말을 할 때 엿보이는 지식, 말을 할 때의 목소리, 에티켓 등, 종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집안 식구들이 그 사람에 대해 묻습니다. “그 사람 어때?” “괜찮은 것 같아요.” 또는 “그에게 반감을 느껴요.” 같은 대답은 종합적인 느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전체적으로 상대에 대해 종합해보고 답안을 내놓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느낌은 종합적인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오관과 심리에만 그칠까요? 그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즉 더욱 세밀하고 깊은 특별한 느낌입니다. 이런 느낌은 사람의 건강과 정서, 나아가 결정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오온 가운데 두 번째, 즉, 색, 수, 상, 행, 식 중의 수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 편한 자세로 앉아서 들어주시면 됩니다. 아예 드러눕지만 않으면 됩니다. 정상적인 자세로 앉은 다음 비록 정식으로 좌선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속에 반드시 좋은 점이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마음을 편히 가지고 몸은 조용히 정좌하여 주면 여러분의 건강과 즐거움, 깨달음에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오온 가운데 세 번째는 상입니다. 상은 사상과 사고입니다. 옛날 사람과 옛날의 물건은 이를 마음에 귀속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훌륭하다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 훌륭하다는 의미입니다. 동서양은 이러한 언어를 이용해 당신의 마음이 훌륭하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따라서 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유입니다. 우리 모두의 사유는 모두 상으로 결정됩니다. 또는 거의 모든 행위가 상으로 결정됩니다. 특히 고뇌와 쾌락은 확실히 정서의 변화이며, 상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이 중요하기 대문에 모든 복잡한 현상을 발생시켰습니다. 따라서 오히려 설명하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당신이 이해한다면 그 것으로 족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행위에는 방금 말한 심리적 행위와 신체의 행위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것을 먹었으며 어떤 음악을 들었다. 이것은 생리적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심리적 행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방금 말한 상(想) 부분 입니다. 나는 오랜 친구를 그리워하고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오늘 어떤 음식을 먹고 싶다. 좋은 직업을 갖고 싶다. 일요일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헬스를 하고 싶다. 참선 수행을 하고 싶다. 이런 것은 모두 상(想)으로 행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상(想) 부분은 두 개의 측면으로 나누며 상(想)을 통해 생리적 행위를 형성하고 새로운 심리적 행위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식(識)입니다. 지식의 식(識)인데 나는 이 글자를 두 자의 단어 즉 인지(認知)로 정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괜찮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 개념은 호감입니다. 당신은 기회가 되면 그와 접촉을 더 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지입니다. 어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이 집은 음식 맛이 별로야” 라고 인지하고 평가해버리면 다음에 이 음식점을 피하고 다른 음식점을 선택하게 됩니다.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걸까요? 그것은 인지 때문입니다. 오온 중 마지막인 ‘식(識)’의 부분 때문이며 식별, 확정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좋고 나쁨만 인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고 나쁘다는 개념은 명확하고 확실한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치관, 희열, 좋고 나쁨, 많고 적음 등 각종 상황을 포함한 세간의 모든 행위를 인지하고 확정합니다. 이러한 오온은 사람과 세계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행위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 오온을 필연(必然)이라고 합니다. 삶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이 오온을 연구할 때, 우리가 아무렇게나 팽개칠 수 없으며 필연적이고 우리의 모든 시점의 존재감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고관이 되기보다는 장사를 하고 싶다거나, 나는 사장이 되기 싫으니 직원을 하겠다라는 선택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오온의 필연적 현상입니다. 이것은 모두 오온에 속합니다.
그럼 오온이 성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오온이 강렬하여 삶 전체에 대한 느낌이 강렬한 것을 가리킵니다. 나는 이 물질 세계에 대한 느낌이 강렬하다. 나는 이런 음악을 특히 좋아한다. 이런 경우 오온이 성하다고 합니다. 음악에 대한 느낌이 강하다.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 이것은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이 강렬하거나, 그 수요가 강렬한 것입니다. 물론 자신을 바쳐 봉사하는 것도 오온이 성하다고 하며. 물질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느낌이 강렬합니다.
불교의 개념에서 보면 이러한 느낌이라는 것은 옅어질 수 있습니다. 성(盛)이 강렬하다면 강렬한 것도 병을 부를 수 있습니다. 오온의 개념을 소개하는 이유는 8중 가장 마지막 부분이며, 인생의 모든 느낌과 세계에 대한 인지를 종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렬함이 병을 일으킨다면 강렬함이 지나쳐서 고통이 올 것입니다. 가령 오늘 관리가 되고 말겠다고 결심하거나, 오늘 커다란 이상을 품는다거나, 가령 오늘 학생인데 장차 대학의 총장이 되기를 꿈꾼다면 당신은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일할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든 못 이루든, 이 과정은 고통스럽기도 하고 즐거움도 있을 것이며, 심지어 이 일 때문에 더 일찍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계는 하나로 구성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근본적인 구성성분을 인식하고 이 세계는 원래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존재하며, 세상의 존재는 4대 원소로 구성된다고 하셨습니다. 4대 원소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입니다. 훗날의 불교, 특히 티베트에 전래된 불교에서는 지화풍수식을 인지라고 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유식과 인지는 4대 또는 5대 요소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이것이 5대 요소입니다. 우리가 더 세분해서 말하면 많은 원소들이 있습니다. 이 세계를 인식하고, 지구를 인식하며 공기 중, 물 속, 나아가 지구라는 땅과 돌에서 얼마나 많은 종류의 물질이 존재할까요? 여러분 말해줄 수 있나요? 대략적으로 말하면 됩니다. 1만종 정도가 되나요? 1만종에 달합니까? 여러분 아세요? 나도 모릅니다. 3만종이든 20만종이든 그것은 결국 제한된 세분된 물질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4대 원소는 물질세계를 나눈 4대 유형으로 이 세계를 구성합니다. 이 세계의 자연환경 중 산과 산의 형상도 다릅니다. 중국인이 황색 피부를 가졌다고 해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면 얼굴 생김새와 손금이 모두 다릅니다. 세밀한 차이지만 조금씩 다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모든 형태가 있는 세계는 4대 원소로 구성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연이 있어 모인다고 합니다. 이 인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인과(因果)와 계승으로 당신을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인연은 인과로 확정되고 구성됩니다. 따라서 당신은 당신으로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한날 한시에 같은 병원에서 태어나 같은 이름을 지었어도 두 사람의 운명은 각각 다릅니다. 똑같이 생긴 쌍둥이는 마음은 쉽게 소통이 되지만 운명은 각자 다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그의 인과관계입니다. 이 인과관계는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었을까요? 아! 이것은 정말 수 천 가닥 수 만 갈래가 있어서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더 깊이 들어가기로 합시다. 우리가 색에 집착하는 것, 즉 유형의 추구는 결국 텅 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자비, 박애, 해치지 않음을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생명, 피가 흐르는 생명도 4대 원소로 구성되고 인연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사람이고, 어머니고, 아버지이며, 당신이 이 아들을 낳았다. 또는 두 사람의 결합 등등은 다중의 인연으로 이루어져 두 사람이 결합할 필연성을 구성한 것입니다. 오늘 당신이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와 당신 사이에는 일종의 필연적인 모자, 부자관계의 필연성이 있습니다. 인연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말해봅니다. 부처님의 시대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젊은 어머니가 죽은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어린데 죽어 어머니는 몹시 괴로워했습니다. 부처님, 석가모니불을 찾아 호소했습니다. “부처님은 지혜롭고 법력이 무한하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이 아이를 다시 살려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지혜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알았다. 마을에 가서 쌀을 얻어오면 아이를 살려주겠다. 그러나 조건이 하나 있다. 쌀을 얻어오는 집에 대대로 죽은 사람이 없어야 한다. ”
아이 어머니는 마을의 어떤 집에 가서 물었습니다.
“말씀 좀 묻겠는데 댁의 집안에 대대로 죽은 사람이 있었나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당연히 있었지. 우리 아버지께서 얼마 전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소. 증조할아버지는 하도 오래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다오.”
“아, 그렇군요.”
아이 어머니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물었지만 한결같이 비슷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찾아갔다. 쌀은 얻지 못한 채였다. 집안에 대대로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집집마다 모두 죽은 사람이 있는데 네 집이라고 죽지 않을 수 있느냐?”
“안돼요. 나는 우리 아기를 너무 사랑합니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느냐? 당신처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식을 사랑한다. 그러나 죽음과 사랑하고 안하고는 관계가 없다. 아무리 아끼고 사랑해도 죽을 수 있으며, 사랑하지 않아도 죽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가 죽었다고 너무 집착하지 말아라. 가슴이 아프겠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실 부처님께는 이 엄마에게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 가 쌀을 얻어오라고 하셨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현실과 변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직시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났으면 언젠가 죽게 마련입니다. 다른 생명에도 이런 섭리가 통할까요? 여러분 함께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웁니다. 강아지를 키우다가 병이 들거나 늙어서 죽으면 결국 더 키우지 않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개를 키운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키우지 않는 거죠? 전에 키우던 개가 죽었는데 너무 슬퍼서 더 이상 안 키운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오늘 존재하는 지구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찰나에 생겼다가 어느 날엔가는 소멸하게 됩니다. 소멸했다고 영원이 없어질까요? 아닙니다. 다시 탄생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종이, 플라스틱, 유리, 돌멩이, 시멘트, 옷감 같은 물질이 더럽혀지고 낡고 고장나면 회수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만드는 것을 귀찮다고 하지만 사실 거의 모든 물건을 회수해서 재가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종이는 회수하여 재가공한 후 원래의 그 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종이는 종이의 역할을 해냅니다 원래의 것은 아니지만 재생해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영원한 소멸과 절대적인 소멸은 없으며 절대적인 죽음도 없습니다. 물론 사람 또는 생명에 영혼이 있다는 설은 육체라는 인과로 구성된 가상입니다. 오늘날 당신이 사람이라면 내세에는 강아지로 태어날 수도 있으며 양이나 이리 늑대로도 태어날 수 있습니다. 즉 전생에 사람이었다고 내세에도 사람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전생에 영수의 아버지였는데 내세에는 영수의 손자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천천히 알아봅시다. 따라서 이 세계는 지 (地), 수(水), 화(火), 풍 (風)으로 이루어진 위에 식(識), 또는 공식(空識)이라는 개념, 즉 정신과 영혼의 부분이 더해졌습니다. 여기에 시공, 인과의 개념이 더해져 오늘은 당신이 되었다가 내일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면서 돌고 도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온 가운데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너무 집착하거나 과도하게 강성해지면 고통이 오기 쉽습니다. 때로는 모든 명리와 느낌에 대한 집착을 줄여야 합니다. 수행과 참선, 불교 수행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불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오온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최소한 상(想)에 속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상(想)을 너무 깊이 하면 새로운 고통이 출현합니다. 상(想)이 너무 깊으면 병이 나기 쉽죠. 생각하는 것 자체로도 병이 들 수 있겠죠? 우리들이 모두 알고 있는 상(想)으로 생기는 병에는 무엇이 있는지 말해볼까요?
처음 떠오르는 것은 상사병 아닌가요? 설마 상사병 하나뿐 이겠습니까? 상, 무엇이 상인지 다시 설명해보겠습니다. 사고는 결코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확정을 하기 위한 생각을 사고라고 합니다. 질투는 사고로 유발한 것일까요? 증오는 사고의 결과일까요? 맞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상은 살인을 할 수도 있고 상은 자신을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상은 당신으로 하여금 물건을 사러 가게 할 수도,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있으며, 당신을 망하게도, 이 세상을 망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원흉 히틀러도 상으로 인해 끔찍한 행위를 저질러 세계를 삼키고 유태인을 멸종시키려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에 죽어갔습니까? 상의 결과로 인과관계의 죄과가 형성됩니다. 따라서 강렬한 오은의 뒤에는 커다란 고통과 번뇌가 뒤따르는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는 자신의 정신을 어떻게 승화시켜 오온의 상을 넘어서 이것을 인식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은 널리 보면 인연을 종합한 하나의 상(象)입니다. 이 상(象)은 마치 모래 위의 성과 같아서 집착을 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가령 어떤 여성이 아이를 낳지 못해 시어머니로부터 늘 걱정을 듣는다고 속상해 합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당신을 욕해도 소용없습니다. 혹시 시어머니가 전생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었는지 압니까? 당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데 낳으려고 집착해서 낳았다고 칩시다. 당신 아이가 장차 당신 생각대로 따라줄 것 같습니까? 정말 그렇게 다 잘될까요? 그것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도 그것을 얻겠다고 집착하면 어느 날 그것을 얻게 된 다음에 행복할까요? 행복은 그 순간에만 그칠 것입니다. 그 순간은 1~2초면 금방 지나가고 그만입니다. 이 수업에 참여하는 여러분 중에서 큰 돈을 벌고 싶어하는 분들, 돈을 벌었을 때 정말 행복했습니까? 물론 한 푼도 없는 것보다는, 삶을 영위할 밥 먹을 돈도 없을 때에 비하면 확실히 즐거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단 그런 생활에 습관이 되었을 때 처음과 같은 기쁨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벌써 전에 없어졌을 겁니다.
나는 한 가정의 사람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댁의 아이는 남방 출신이었는데 비싼 고급 해산물만 고집했습니다. 내가 홍콩에 가자 그들은 반가워하며 나를 식당에 초대했습니다. 계속 사양했지만 결국은 함께 식사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이 가족은 7~8세 아이에게 식사 주문을 시켰습니다. 와! 그 아이가 주문할 때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듯 술술 음식 이름이 나왔습니다. 무슨 어떤 생선의 혀 볶은 것 한 접시도 주문했습니다. 고래고기의 혀라면 한 접시가 금방 나오겠죠. 하지만 그 아이가 주문한 것은 보통 생선의 혀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요리가 완성되려면 얼마나 많은 물고기를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듣고 있던 나는 물었습니다.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농담 아닌데요. 아프리카 고래 중 어떤 종류는 그렇게 해서 먹는답니다”
“아프리카에도 고래가 있니? 넌 정말 음식에 조예가 깊구나.”
이때 아이 어머니가 나섰습니다.
“대단하죠. 상사님, 우리아이는 어릴 때부터 귀하게만 자라서 아무렇게나 시킨 요리는 먹지도 않는답니다.”
결국 아이는 그렇게 시킨 요리가 나오자 한두 입 먹고는 더 이상 입에 대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늘 주방장이 바뀐 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아아, 그 아이가 앞으로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생활할지 걱정이 됩니다. 다른 요리사가 해온 요리도 그 사이에 입맛이 바뀌었다며 먹지 않고 짜증만 냈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요리에 그토록 까다로운 주문을 해가면서 말입니다. 다섯 접시의 요리 값은 무려 1만 홍콩달러나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남은 생을 빈털터리 걸인으로 살아가거나 현실도피로 살아가겠지요. 그렇지 않고 계속 이런 생활을 한다면 그 죄과가 실로 너무 큽니다.
이런 개념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평가하고 어떤 사건과 사람, 그 정도에 따라 사례를 분석하고 마음 속의 균형점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는 우리가 인연의 종합이라는 하나의 인식을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오늘날 집착하는 모든 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 봅시다. 당신은 돈을 벌겠다고 집착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가 고급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집착합니다. 당신의 아이는 별 느낌이 없으며 자기가 이렇게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돈 잘 버는 아버지가 아이와 음식점에 가서 물만두를 시켰습니다. 이 정도도 훌륭한 음식이지만 물론 사치스러운 음식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먹지를 않습니다. 아버지가 주문한 음식을 손도 대지 않자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합니다.
“아들아 너 지금 여덟 살이지? 아빠는 너만할 때 순전히 들판에서 나물 캐먹고 나무껍질을 벗겨먹고 나무에 올라가 나뭇잎을 따서 먹었단다.”
아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습니다.
“와, 아빤 정말 럭셔리하셨네요.”
(일동 웃음)
허허, 아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난……,내가 너무 고생을 했다고 말한 건데 너는 어째서 그걸 럭셔리하다고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그 아버지는 당신이 어릴 때 먹은 음식이 오늘 식당에서 시킨 음식보다 비싸다는 사실을 모른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고생해서 벌어온 돈으로 아이가 편하게 살게 해주니 아이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거친 음식을 먹고 황량한 곳에 가서 산다고 해도 아이는 그것을 유행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5~6년 전, 밴쿠버 다운타운에 가서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나는 사놓고 아끼느라 입지도 않던 옷과 많은 옷들을 모아 차 하나 가득 싣고 큰 눈이 오는 데 두 제자와 함께 노숙자들에게 나눠주러 갔습니다. 여러분, 불쌍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옷을 보내주세요. 그날 나는 스스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되어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준다고 생각하니 마냥 흐뭇했습니다. 어떤 공덕이나 칭찬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라 조그만 자선을 베풀 뿐입니다.
길거리에 나가 작은 천막을 치고 있는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옷을 드립니다!”
그러나 상대는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옷을 드립니다!”
“당신 누구요?”
“내가 누군지 모를 겁니다. 당신처럼 노숙하는 분들에게 옷을 드리러 왔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습니다.
“필요 없소.”
그러더니 작은 천막을 내려버렸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옷을 드리러 왔는데 사양 말고 받으세요. 돈 달라는 것도 아니니까요.”
나의 이 말에 상대는 마지못해 물었습니다.
“어떤 메이커요?”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함께 간 영어를 잘하는 제자가 그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분은 우리 스승님이신데 좋은 마음으로 옷을 주러 온 거라오.”
“나는 옷 부족하지 않아요.”
“왜 이런데 사는 거요?”
“집이 답답해서요.”
결국 그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그가 입은 옷은 우리가 가지고 간 옷 한 트럭을 합친 것 보다 비싼 명품 옷이었습니다. 제자로부터 설명을 들은 나는 몸을 돌려 돌아왔습니다. 그날 따라 집으로 가는 길까지 잃고 헤맸습니다. 허허, 머리가 멍해진 거죠. 아무튼 그날은 비교적 부유한 거지를 만난 거라고 치고 진짜 가난한 거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번에는 머리를 짜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알아본 결과 그들이 뭐라고 말한 줄 아십니까? 옷은 필요 없다는 겁니다. 밴쿠버의 걸인은 옷이 필요 없답니다. 그럼 먹는 거? 그들은 맥도날드 햄버거를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햄버거 한 상자를 사서 아침 일찍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당연히 배고프지 않겠어요? 아침에 그것에 가보니 마약중독자와 노숙자들이 잔뜩 있었습니다. 옷도 무척 남루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햄버거 드립니다.”
그 들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와! 하나 주세요.”
그 사람이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난 치즈 안 들어간 것을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햄버거 종류를 댔습니다.
“그건 안 가져 왔는데요.”
“그럼 됐어요.”
이런 사람들을 걸인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정말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렸습니다.
당신의 자녀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때로는 당신이 베푸는 조그만 선심이나 사랑에 대해 이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돌아오는 반응이 뜻밖의 것일 때도 있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녀라고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것도 고통입니다. 이것은 전생의 업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매우 고통을 겪었기에 내세에는, 아니 내세가 아닌 미래에는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온에 대한 수요가 너무 강하면 비록 성공을 하더라도 다음 대에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전《반야심경(般若心經)》 에서 말하는 ‘공불이색(空不異色), 색불이공(色不異空)’ 즉 공은 형상과 다름없고 물질이 공과 다름없다는 가르침을 되새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인식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까? 이러한 ‘비어있음(空)’과 ‘있음(有)’는 상호 생성관계 입니다. 따라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통한다는 ‘호통유무 (互通有無)’는 불교의 ‘공불이색, 색불이공’입니다. 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즉시색 (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비우는 것이 있는 것이며,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표현하기가 쉽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발전한 것입니다. 조금만 이해해도 고통에서 멀어집니다.
질병의 근원으로 가장 큰 것이 행위입니다. 생리적 행위든 심리적 행위든, 행위로 인해 생기는 병입니다. 집착이나 건강하지 않은 생활, 건강하지 않은 생활습관이 질병을 일으킵니다. 두 번째로 큰 질병의 원인을 말하기 전에 첫 번째 원인을 기억해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행위가 질병을 일으킨다.”
질병을 일으키는 두 번째 원인은 유전입니다. 두 분의 수행자에게 묻겠습니다. 조상 때부터 몇 대를 내려왔습니까? 이 질문은 아무래도 기존 불제자님들께 해야겠네요. 새로 오신 분들은 이런 질문에 울음이라도 터뜨릴까 걱정입니다. 자, 조상 때부터 몇 대 후손입니까, 7대입니까, 아니면 8대 후손입니까?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네! 정답이었습니다.”
이분은 과학을 연구하는 분입니다. 이 질문에 모른다는 대답이 나왔네요. 당신의 조상이 인류가 시작될 때부터 계산에서 수십 만 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인류 이전에 만약에 원숭이였다면, 원숭이 이전에 돼지였다면, 돼지 이전에 개미였다면…….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당신의 조상이 개구리 이전의 올챙이였다고 하더라도 거슬러 오르다 보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수한 대를 이어왔기에 유전의 시간을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남녀 조상이 결합해 한 아이를 낳았고, 그는 또 우리 조상이 되어 다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낳고 낳아 우리는 몇 대를 이어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 역대 조상 중 정신병을 앓았던 조상을 없을 까요? 뇌혈전은요? 심장병은요? 간암은요? 벙어리나 귀머거리, 맹인은 없었을까요? 이런 병에 걸린 조상이 있다면 손을 들어주세요. 당신이 손을 들 때는 조상을 대표해서 드는 겁니까 아니면 스스로 드는 겁니까? 이것은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조상을 대표해서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조상 중 맹인이 있었다면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얘야, 함부로 손을 들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집안에 웬만한 장애인은 다 나왔다고 말이다.”
당신이 이런 과정과 모든 유전이라는 개념을 알 때 당신은 자기에게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늘이 공평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누군가 “난 마음씨가 고약하게 태어났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전생에 사람이 아니었으며, 돼지 중에도 멍청한 돼지었습니다. 착한 일을 하고 이 생에는 어렵게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눈 하나가 없는 것도, 그것도 마음의 눈 하나가 없는 것 정도는 정상입니다. 그래도 돼지보다는 이미 등급이 훨씬 높아졌으니까요. 마땅히 만족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역사를 안다면 스스로 흡족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계승과 유전자의 계승을 이해하면 이러한 DNA 염색체가 유전되는 것을 알 때 당신은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조상 중 두 종류로 내용을 나누어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는 역대 조상이 수십 만 년 내려오면서 모든 병을 다 걸려보았습니다. 오늘날 당신이 내 말을 들은 것 만으로 이미 복이 있는 것입니다. 맹목적으로 “아, 복이 있구나.”이런 뜻이 아닙니다.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사람이기까지 합니다. 나는 돼지와 대화를 시도해 본 적이 있는데 돼지는 내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 기쁩니다. 들고 보고, 말하고 움직이고 일할 수 있으며,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서 무척 행복합니다.
잠시 실업자가 되었다고 고통스러워 하지 마십시오. 가지고 있는 주식이나 집값이 떨어진다고 슬퍼 마십시오,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아니면 이가 툭 튀어나왔거나 얼굴에 반점이 있다고 슬퍼 마십시오. 당신은 이미 훌륭합니다. 노인 요양원에 가서 보면 당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많은 장애인센터에 가보면 당신은 행복해서 죽을 지경일겁니다. 그래요.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고 계십니까? 과거에 몰랐을 때는 어머니 아버지가 이렇게 낳아준 것에 불만을 가졌겠네요. 그러니까 오늘 이 점을 알고 나서 부모님께 감사하게 될 겁니다. 조상들은 어떤 병도 다 걸려보았는데 당신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니까 만족할 수 밖에요. 이것을 생리적 방면이라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어떤 직업도 다 거쳐보았습니다. 군인, 백정, 기와공, 목수, 이발사에 강도, 살인범까지 안 해 본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우리 조상은 그런 것은 안 해 봤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말 그렇다면 당신 조상은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원숭이라면 나무를 오를 줄만 알잖아요. 안 그래요? 돼지라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를 겁니다. 짐승이 아닌 사람이라면 어떤 업종, 어떤 직업에라도 종사했을 겁니다. 그 직업은 농민이었을 수도 있고, 그냥 걸인이라고 해도 하나의 직업은 있습니다. 즉, 역대 조상 들이 수십 만년의 생명시기를 거치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을까요? 그 중에는 남을 해치는 짓도 많이 했하고 나쁜 생각으로 수십 만 명을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조상이 집을 짓는 직업에 종사했다면 불량 건축자재를 써서 조그만 지진에도 집이 무너져 사람을 죽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리사도 나쁜 마음을 먹고 보복 심리에 음식에 독을 타 사람을 해쳤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든지 그런 일을 했을 겁니다. 역대 조상 중 위로 10대까지 거슬러 모두 좋은 일만 했다면 당신은 지금보다 훨씬 훌륭할 것입니다.
다행히 그런 나쁜 일은 지금 세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특정한 생활관념이나 어떤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런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이런 현상은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이때 자신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에 질투심이 있는 사람 있습니까? 자기만 대단하다고 오만한 사람 있습니까? 욕심을 가진 사람 있습니까? 이른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어떤 것을 얻고자 집착하는 사람 있습니까? 있다면 이것도 죄과가 됩니다. 즉 여러분 조상들의 행위와 직업, 심성으로 표현해내는 남에게 해가 되는, 악의적인 행위로 인해 오늘날의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다리가 늘 아픈데 다친 적도 없고 공을 차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차 사고가 난 적도 없는데 왜 다리가 늘 아픈 걸까요? 왜 허리가 늘 아플까요? 심장은 왜 불편할까요? 왜 이가 아플까요? 이는 본인이 가진 병의 유전인자 이외에, 조상이 좋은 일을 했는지 나쁜 일을 했는지의 유전적 요인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조상의 유전은 숫자로 계산해 봅시다. 1대 조상이 가지고 있던 1이라는 유전자를 2대 조상에게 줄 때도 여전히 1일까요? 숫자는 3이 될 것입니다. 3대 조상은 아마 9로 변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곱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맞습니다. 업장은 곱셈법으로 계산합니다. 게다가 내가 방금한 계산법보다 훨씬 클지도 모릅니다. 이런 계산법으로 여러분에게 유전되어 오늘날 우리의 건강과 정서, 경제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
아이를 낳았을 때 그 아이의 운명, 건강상태가 나와 같았습니까? 같았습니까? 같지 않았죠. 이것도 이러한 유전의 유전자이며 이 유전의 선으로 유전된 것입니다. 당신의 아이와 당신의 각종 상황이 모두 달랐습니까? 당신의 유전자에 더해서 아이를 만들어낸 것은 부부 두 사람의 공과(功過)와 죄업, 건강상황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아이를 창조해낸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는 당신의 자식이지만 이미 하나만 유전된 것이 아닙니다. 당신 아이로 태어나는 순간 유전자는 3이 될 수도 있고 1.5가 될 수도 있으며, 8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그의 건강상황과 운명이 관련되는 거지요.
유전되는 이DNA중 건강 상태와 운명은 나라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다음 세대의 운명을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도 부처님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의 큰 진리로 이 거시적인 개념을 제시하고 이 수수께끼를 풀어주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구게(四句偈)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생의 인과를 알고 싶다면 지금 당하는 일을 보며, 내세의 일을 알고 싶다면 지금 하는 일을 보라.” 이러한 인과관계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건강상태와 운명을 유전으로 받았습니다. 우리의 아이는 왜 나와 같지 않을까요? 그것은 당신의 공덕, 공과, 업장, 건강, 선악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당신의 DNA 염색체를 따라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인 개념을 주장하며 자신의 DNA에는 정신적인 잘잘못과 선악의 부분이 어떻게 전달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것은 가능합니다. 우리의 세포는 전파 신호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DNA 염색체는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습니다. 너무 작고, 너무 미약하며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잘못, 정서는 모두 이 DNN에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하며 우리의 이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 드립니다. 마음을 착하게 가지고 착한 이념을 가지면 착한 행동과 착한 결과가 뒤따릅니다. 아시겠습니까? 우리의 조상에서 우리에 이르기까지, 내지는 후손에 이르기까지 조상의 유전자로부터 계승하는 숫자는 변화합니다. 일단 세상을 떠나면 조상이 됩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면 그분들도 조상입니다.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도 그분들은 당신의 조상입니다. 따라서 업장의 계승은 필연적입니다. 이순간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또는 한 달 내내 설사를 한다든가 배가 아프고 몇 년 동안 치통에 시달리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당신의 DNA에 유전되며, 이는 필연적입니다. 출생과 관련된 의사들은 불임 부부에게 늘 건강한 아이를 낳고 싶으면 반드시 주의하라고 합니다. 담배나 술을 멀리하고 마약을 금지는 등 생활방식에 주의하고, 정신적으로는 도박을 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라 라는 등의 주의사항이 뒤따릅니다. 건강한 아이를 갖기 위해 낳기 전의 몇 달 동안, 반년, 1~2년 동안 이런 건강한 생활의 행위와 건강한 심리적 행위는 태아에게 모두 긍정적 작용을 합니다. 일생 동안 선악의 표현은 훨씬 더 클 것이므로 DNA는 반드시 유전됩니다. 반드시!
우리는 이런 이치를 알고 어떻게 해야 우리의 고통을 변화시킬 것인지 착한 마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먼저 인과론이라는 규칙을 인정하고 인지해야 합니다. 인생의 좋고 나쁜 운명, 건강 상태 등 모든 것을 우리는 하나의 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인생중의 좋고 나쁨은 자신이 창조할 수 있습니다. 좀 촌스러운 표현이지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사구게(四句偈)를 한 번 더 반복합시다. “전생의 인과를 알고 싶다면 지금 당하는 일을 보며, 내세의 일을 알고 싶다면 지금 하는 일을 보라.” 이러한 개념은 매우 이성적이지 않습니까? 결코 미신이 아닙니다.
장차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싶으면 많은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고 도와야 하겠지요? 돈을 벌고 싶다면 좋은 제품을 만들고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일도 열심히 하고 기술도 좋으면 실패를 할 확률이 낮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너무 교활하지 않아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가늘고 길게 가는 것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갑자기 돈을 번 벼락부자는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과의 개념을 반드시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일종의 에너지나 힘이 생깁니다. 그 힘을 불교나 힌두교에서 업장이라 부릅니다. 업장의 생성은 인과론의 개념에서 비롯됩니다. 업장은 곧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이치입니다. 내가 콩을 심었으면 당연히 콩이 나며 심은 데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선을 심으면 공덕을 쌓고, 자비를 심으면 평안하고 길하며 부귀와 여유를 누립니다. 큰 도리는 간단하면서도 심오합니다.
이제 종합해보면 마음은 곧 의식이며 사유(思惟)이며, 선한 업장과 악한 업장의 주도자입니다. 많은 생각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복잡한 심정과 좋고 나쁜 행위는 마음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해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염불을 왜 해야 할까요? 인과론과 유전, 업장의 계승, 유전이 된 다음까지 말씀 드리고 다시 오늘의 주제, ‘왜 염불을 해야 하는가’의 화두로 돌아왔습니다. 착한 마음, 악한 생각이 필연적인 업장을 가져온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업장은 종합적인 힘입니다. 업장에는 좋고 나쁨, 차고 따뜻함 같은 모든 작용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오늘 가지고 있는 이러한 신체, 개인적인 인생의 운명은 우리 역대 조상들의 행위로 인한 업장이 계속 유전되어 왔습니다. 역대 조상들이 끊임없이 업장을 더해왔기에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운명이 있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 나아가 이번 생애 전체를 통해 번뇌와 고통에 시달리며, 그 대부분은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고통입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 깨달음을 얻은 많은 수행자, 그리고 부처님께서 우리를 교화하시고 우리의 운명을 변화시킬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사구게는 이를 확실히 제시했습니다. 우리가 미래의 선악의 결과를 알고 창조하고 싶다면 지금 이순간 마음에서 우러나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즉 당신의 선한 마음인지, 악한마음인지, 자비와 관용을 베풀지 교활한 소인배가 될지는 마음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의 역사와 역대 조상의 계승 내용을 바꿀 수 있을까요? 조상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역대 조상 중 당신의 부모와 조부모들은 아직 생존해있을 수도 있지만 그 윗대 조상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들과 우리는 이미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업장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약사불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약사불은 부처님이므로 비범하신 분이며 그냥 일반적인 생명이나 일반인의 힘이 아닌 초인적인 힘과 극히 강한 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약사불을 염송하는 것일까요? 다른 부처님은 안되나요? 됩니다. 단지 경문에서 이르듯이 약사불께서는 원래 하나의 염원을 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중생이 완벽하고 행복하며 건강한 인생을 얻도록 도와주시는 염원입니다. 그래서 좀더 목적에 가깝게 부처님의 가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힘의 가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착한 마음을 발심(發心)하며 진심으로 부처님께 청하십시오. 이 기도의 개념은 당신 마음속에서 진심으로 할수록 강한 작용을 발휘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착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우리의 DNA를 바꿀 수 있을까요? 이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작용은 우리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에 비해 훨씬 미미하고 역부족입니다. 즉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이 역량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효과를 얻기 위해 발심(發心)하고 그 신호의 역량으로 부처님께 이 부분을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작용은 고속으로 가는 기차의 스위치를 누른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발심(發心)이 곧 그 스위치입니다. 수십 톤이나 되는 그 기차는 한번 탄력을 받으면 빠른 속도로 달려갈 것입니다. 우리의 발심(發心)이 중요합니다. 그 이치는 매우 간단합니다. 자시의 발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발심의 작용은 하나의 스위치고 하나의 기관입니다. 목적은 부처님께 있습니다. 우리 일반인이 이해하는 하나의 거대한 신령의 힘처럼 우리는 부처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얻어낼까요? 그것은 마음을 다해 진지할수록, 선한 발심과 자비심을 가지며, 정성을 다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염송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나날이 걸려야 도달할까요? 나는 하루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역대 유전이래 이러한 악업의 힘도 매우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 앞에 하나의 시멘트 벽이 놓여있어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는 것과 같아서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합니다. 벽이 아무리 무겁고 두꺼워도, 더 많은 시간과 더 강한 힘으로 이것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치 하나의 망치로 계속 두드려 마침내 그것을 말끔히 치우는 것처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오늘날 부처님의 힘 안에서 그 속도는 천 배, 만 배, 백만 배로 늘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업장은 두껍고 단단해서 시간을 들여야만 부처님을 감화시키고 부처님의 힘 안에서 점차 그것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발심이 강할수록 부처님께 향한 감응력도 강하며 마지막에는 우리의 건강상태와 질병 회복, 나아가 좋은 운까지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이나 만사 형통, 평안 등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도움을 받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지금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을 배우자는 목적이고 나아가 그 힘이 어느 정도 축적되면 우리의 운명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조상 역대의 유전과 우리가 과거에 한 모든 일들의 인과관계가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현재를 바꿀 수 있을까요? 현재와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 그리고 내일, 다음달, 내년, 그리고 내후년의 운명을 바꿀 수 있으며, 우리의 후손, 자녀와 가족, 그리고 인류의 내세의 운명도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발심과 선한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께 우리를 변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발원으로 기도하기에 우리의 미래와 내세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세는 하나의 진정한 행복과 완벽한 인생으로 창조한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내세는 사람이 아니 이 우주에서 더 높은 생명의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곧 깨달음, 성취, 이룸입니다. 도한 우리가 알고 있는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육도(六度)의 문을 초탈할 수 잇습니다. 육도는 사람과 축생의 도라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자세한 말씀은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진푸티상사님의 말씀이 맞죠? 자세하게 말씀드릴 시간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육도(六度) 안에 있으면 좋지 않습니다. 욕망과 고뇌가 있습니다.
육도를 초월한 개념은 하나의 명사만 알면 됩니다. 더 많아도 모를 것입니다. 행복과 건강, 완벽함을 얻고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세간에는 절대적인 영원함은 없으며 상대적인 영원함만 있습니다. 내세를 말하려면 지금 생을 잘 가꿔야 내세에 사람이 아닌 천국의 사람으로 태어나 6만년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 또한 급이 낮은 천국의 삶입니다. 공덕이 더 크고 힘이 더 강하며, 더 높은 경지는 360만년을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영원토록 젊게 150만년을 청춘 시기로 살 수 있으니, 아! 얼마나 좋습니까! 가고 싶은 곳은 어디나 갈 수 있으며 영원토록 늙지 않고 총을 쏘아도 죽지 않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게다가 고통도, 질병도, 번뇌도 없답니다. 지나친 탐욕도 없으며 하고 싶은 것은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 되는 것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진정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힘들게 동분서주하지 않으면 밥도 먹을 수 없습니다. 캐나다 정부가 지원을 해주고 있다지만 당신에게는 먹을 것도 부족하고 살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상태를 초월하여 천국의 사람과 천국지상의 존재가 된다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갖춰져 있으니까요. 자동차를 탄다면 가장 좋은 것을, 말을 타도 가장 멋진 말을 타는 등, 없는 것이 없습니다. 달러를 갖고 싶다면 몇 톤을 가져도 됩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달러는 아마 통용되지 않을 걸요.
이는 좀더 초월한 개념이며 우리는 이를 반드시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염송을 한 다음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적이 발생하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 기적이라는 것이 다리가 아팠는데 이틀 동안 부처님께 염불을 드리니 괜찮아졌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다리가 정말 안 아프게 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통증에 시달리지만 돈은 많이 벌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이혼하려고 했다가 부부 사이가 다시 좋아지기도 하고, 결혼 상대자를 찾고 싶었는데 소원을 이루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허허허, 얼마나 좋습니까! 내가 얻고 싶은 것을 부처님과 거대한 신께 당신의 좋은 것을 다 바치고 합리적으로 잘되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지 쓸데없는 것을 잘되게 해달라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아도는 것은 당신에게 번뇌만을 가져다 줄 분입니다. 적당한 좋은 선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 다 이해 되셨습니까? 다 되신 모양이네요. 네,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