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로메로는 무덤 속에서 걸어나와 살아 있는 인간들의 살과 내장을 뜯어먹는 무시무시한 좀비들의 습격을 스크린에 창안해 역사상 가장 어둡고 잔인한 공포영화의 스펙터클을 연출한 장본인이었다. 장엄하고 불편한 파멸의 스펙터클을 연출한 그는 평생 B급 영화의 대담하고 비타협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1970년대의 미국영화는 전통적인 장르의 쇠퇴기이자 수정주의 장르의 융성기였다. 이제 사람들은 서부극으로 대표되는 선악의 영웅담과 권선징악에 관심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과 히피 운동으로 촉발된, 사회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이념적 위기감은 전통적인 장르 해석에 불을 지폈다. 반영웅이 유행했고 해피 엔딩보다는 언해피 엔딩이 영화의 유행이 됐다. 어떤 내용도 명확한 결말보다는 모호한 결말 쪽으로 흘렀으며 화합보다는 붕괴에 방점이 실렸다. 너도나도 장르의 해체에 몰두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여겼고 파괴와 자멸의 스펙터클이 대중 영화의 흐름이 됐다. 역사상 두 번 다시 되풀이되기 힘든 흐름이 생겨난 것이다.
조지 로메로는 공포영화 장르에서 좀비들을 등장시켜 만든 ‘시체 3부작’으로 파괴와 자멸의 스펙터클이 유행이었던 시대에 가장 독특한 행보를 남겼다. 시체들이 살아 일어나 창백한 얼굴로 로봇처럼 걸으며 인간들을 아귀처럼 물어뜯는 이른바 좀비의 존재는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과 외계인과 이웃집 청년으로 계보를 이어온 공포영화 속 괴물의 존재를 또다른 차원으로 옮겨놓았다. 좀비는 당신의 아빠, 엄마, 오빠, 누나, 남동생, 여동생이 될 수도 있었다. 어제까지 한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정을 나누던 식구가 그 다음날 미친 강아지처럼 이를 드러내며 당신에게 덤벼든다고 생각해보라. 좀비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괴물이었다. 초자연적인 귀신도, 어떤 살인마도 이 좀비에 필적하지 못했다. 영원히 죽지 않고 만족을 모르는 흡혈귀처럼 끝까지 인간 먹이를 찾아 헤매는 영생불사의 악귀 같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공포 영화계의 샘 페킨파
조지 로메로의 공포영화는 인간들의 피가 낭자하게 스크린에 비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좀비들이 살아 있는 인간의 살을 뜯어먹고 내장을 헤집으며 가공할 식인 잔치를 벌인다. 피와 내장 더미에서 서로 한 점이라도 더 먹으려고 북새통을 이루는 이 좀비 영화의 하드 고어적 폭력의 수사학이 너무 지독해 조지 로메로는 곧 ‘공포 영화계의 샘 페킨파’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도 동시대의 다른 감독처럼 폭력이야말로 현대의 인간 조건을 묘사하기 위한 가장 직접적이고 적확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좀비 영화에서 서로 살을 뜯어먹으며 연명하고 늘 굶주려 있는 좀비들은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와 사회 조건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다. 성찰이라기보다는 오감을 자극하는 이 직접적인 비유법을 통해 로메로는 당대의 가장 정치적인 영화감독의 위치로 떠올랐다.
1940년 뉴욕 태생인 로메로는 열네 살 때부터 단편영화를 찍었고 카네기멜론연구소에서 미술과 연극과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학교를 그만두고 텔레비전 방송국에 취직했다. 장편영화를 찍고 싶었던 로메로는 광고 연출로 번 돈을 모아 1968년 연출뿐만 아니라 공동 각본, 편집, 촬영을 겸한 저예산 장편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을 완성했다. 베트남 전쟁이 수렁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시점에서 나온 이 영화는 7만 달러의 제작비로 펜실베이니아의 어느 농장에서 촬영한 흑백 영화다. 이 영화는 기독교적 종말론에 기초한 악마주의의 그림자를 완전히 거둬내고 말 그대로 서로 먹어 치우기 위해 안달인 가족 관계에 대한 비통하고 공격적인 묘사로 일관한다. 성조기가 휘날리는 어느 묘지를 방문한 남매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연례 행사로 죽은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지만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하다. 오빠는 껄렁한 태도로 이 연례 행사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어서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으면 하는 심정이 역력한 여동생은 시무룩한 모습이다. 오빠와 여동생 사이에도 별다른 애정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오빠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익숙한 태도로 괴물 흉내를 내며 여동생을 괴롭힌다. 그때 한 좀비가 무덤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걸어나와 이들 남매를 공격한다. 오빠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 훗날 영화의 대단원에서 살아남은 여동생을 공격하는 좀비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바로 그때 죽은 오빠다. 그는 여동생의 몸을 먹어 치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관습을 창의적으로 뒤바꿔놓았다. 이 영화에서 정상인과 괴물의 구분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때까지 미국 공포영화의 역사는 곧 괴물이 바깥에서 내부로 서서히 옮겨오는 과정의 역사이기도 했다. 1930~40년대의 미국 공포영화, <프랑켄슈타인> <캣 피플> <잃어버린 영혼의 섬> 등은 유럽이나 원주민 문화가 배경이었고 50년대에는 외계인 괴물이 나오는 SF 공포영화가 유행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싸이코>(1961) 이후에 공포영화의 무대는 미국 사회의 내부로 옮겨왔고 그때부터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 근교에 괴물이 출몰하면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일을 다룬 공포영화가 늘어났다. 공포영화의 이런 괴물 이미지에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파괴적인 힘이 숨어 있었다. 인간 의식에서 억지로 걸러진 것이 무의식에 저장돼 있다가 나중에 꿈이나 일상생활에서의 히스테리컬한 행동 따위로 어떤 식으로든 되돌아오는 이 현상을 '억압된 것의 귀환'이란 말로 표현한 프로이트의 논법을 빌려, 평단에선 공포영화의 괴물을 주류 사회에서 억눌린 것이 상징적으로 환치돼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를테면 1970년대의 저예산 공포영화의 대표작인 토브 후퍼의 <텍사스 살인마>에 등장하는, 톱을 마구 휘두르는 무자비한 괴물 살인자 가족은 가부장제 사회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 괴물 가족은 모두 남자들로 이뤄져 있고 '기괴하고 무섭게 생긴 집'에 살고 있다. 그것은 이 영화의 희생자들인, 히피풍의 젊은이들의 미래를 짓누르는 미국 사회의 과거의 무게라는 것이다.
좀비들이 몰려온다, 빠져나갈 수 없다
공포영화는 극도의 문화적 위기감과 절망에 시달렸던 1970년대의 미국을 가장 잘 반영했던 장르였다. 전통적으로 통합적인 가치를 의심받지 않았던 사회와 가족의 공동체적 선의 기준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가족 내부에서부터 파멸해가는 자멸극을 살육의 스펙터클로 옮긴 이 장르에서 좌파 비평 진영은 오히려 희망을 봤다. 조지 로메로는 이 살육의 공포영화 장르에 새로운 어휘를 추가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좀비에게 물리면 곧 좀비가 돼서 인간들을 공격하는 구조로 로메로는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의 경계를 간단하게 무너뜨린다. 좀비는 문명 사회의 필수 규범으로 예찬받는 사랑과 우애와 친절 따위의 감정이 완전히 사라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반문명적인 괴물이다. 족보도 계통도 없는 이 괴물의 존재는 문명 사회의 핵인 가부장 핵가족의 복판에 뛰어들어 아비규환의 지옥도를 연출하게 된다. 좀비들이 설치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기이한 스펙터클은 가부장 사회와 가족 내부의 갈등과 긴장이 직접적인 폭력을 매개로 폭발한 것이다. 비평가 로빈 우드의 말을 빌리면 ‘살아난 시체들(좀비)은 가부장 제도의 관습에 따라 구조화된 과거의 법통이 억누르는, 미국 사회 내부의 억눌린 갈등과 긴장을 대표’한다. 공포를 자아내는 이 영화 속 좀비들은 모범적인 중산층 가정의 뿌리에서 나와 마침내 그 가정으로 되돌아가 파멸시킨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여동생조차도 좀비가 돼 어머니를 죽인다. 인간들이 좀비들의 습격을 받으면서 서로 싸우고 죽이다가 끝을 맺는 식인주의 모티프의 끝은 미국 핵가족의 장렬한 붕괴로 맺음된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졌는데도 매 화면마다 공포를 자아내는 스펙터클의 힘은 압도적이다. 쳐다보기도 싫은 좀비들이 떼로 몰려오는 상황은 바퀴벌레의 습격만큼이나 비위 상할 뿐만 아니라 저항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무력감을 안겨준다. 조지 로메로 스스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자신의 영화 중 가장 무서울 것이라고 자평했다. “좀비들이 계속 몰려온다. 하나를 죽이면 둘이 온다.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때, 로메로는 이 영화 속의 좀비들을 통해 보수적인 정부의 권위에 이끌려 허우적대는 당시의 미국 대중을 비유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로메로와 함께 썼던 존 루소의 말에 따르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의 좀비들은 미국의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한다. 그들은 시체나 다름없다. 미국의 권력 기관이 강제로 떠넘긴 역할에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베트남에 끌려가고 또 그것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남아 있는 자들에게서 조지 로메로와 존 루소는 죽음의 메타포를 읽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보기에 따라 더 확장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품고 있다. 생존이라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대변하는 이 영화의 중산층 백인들은 좀비들보다 더 위협적일 만큼 사악한 존재들이다. 사실, 그들의 반윤리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이기적 행동은 바깥에서 몰려드는 좀비들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좋게 묘사된 인물인 흑인 주인공은 선한 가치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 죽는데 그의 죽음을 담는 화면은 당시 미국 남부에서 흔히 벌어졌던, 린치당해 죽어 있는 흑인의 모습을 찍은 기록 사진과 유사한 구도로 연출됐다. 로메로는 이 영화를 통해 미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핵가족의 가치와 그 핵가족의 선한 이미지를 선전하고 있는 미국 중산층 백인의 이념을 한데 묶어 파괴하고 있다.
이후 좀비의 상징적 용례는 시체 3부작의 후속편에서 조금씩 달라진다. 1978년에 만들어져 5천5백만 달러의 수익을 거둔 흥행작 <이블 헌터>(원제 <시체의 새벽>)의 주무대는 쇼핑 센터이며 등장인물들이 일치단결해 좀비들을 무찌르는, 비교적 통쾌한 결말로 나아가는 이 영화의 주제는 소비주의다. 이 영화의 좀비들은 강박적으로 소비에 매달리는 미국 사회의 물신주의에 대한 상징적 환치물이다. 쇼핑 센터는 물질이 최고의 선임을 주장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심장이며 이곳에서 좀비들은 스스로 왜 그런지도 모르는 채 자동으로 프로그래밍된 인형들처럼 백화점 내부를 배회하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스스로의 욕망에 취해 게걸스레 이곳저곳을 배회하며 눈에 띄는 대로 사냥감을 먹어 치우는 데 열중하는 그들의 이미지에서 영화는 맹목적이고 이기적이며 심지어 폭력적인 미국 대중 소비 사회의 악몽 같은 이면을 들춰내 비유한다.
‘시체 3부작’의 대미, <죽음의 날>
‘시체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죽음의 날>(1985)이 개봉한 것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패권적인 미국의 기세가 절정이던 1985년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베트남 시대의 미국을 빙 둘러 묘사했고 <이블 헌터>가 소비 자본주의 사회 미국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죽음의 날>은 구 소련과 군비 경쟁을 벌이며 미국지상주의를 외치던 레이건 시대의 미국을 혐오하는 분위기를 담고 있다. 좀비들이 세상에 창궐하자 일부 과학자들이 좀비들을 처치할 방법을 궁리한다. 과학자들은 문명과 관용을 대변하지만 이들은 무자비하고 무식하고 성차별적인 성향의 군인들에게 끌려다니며 갖은 욕을 다 본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진정한 가해자가 좀비들이 아니라 그들을 잔인하게 처치하려고 혈안이 돼 있는 군인들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고 과학자와 좀비는 군국주의 체제의 가련한 희생양처럼 보인다. 물론 거기에는 레이건 시대의 미국 군국주의에 대한 깊은 회의가 깔려 있다. 조지 로메로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의 밑바탕에 깔린 비판은 사람들이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닿지 않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구원이나 공존을 위한 길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악마가 야단법석을 떨게 놔둔다.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시체 3부작의 두 전작에 비해 <죽음의 날>은 상대적으로 응집력은 떨어지지만 그것은 또한 수정주의 공포영화 장르의 시대가 이미 한 페이지를 넘긴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메로의 작품 목록에는 흥행작도 꽤 거론되지만 그의 경력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연출이 여의치 않으면 로메로는 텔레비전 드라마 연출로 돈을 벌어 영화계로 유턴했다. 로메로의 전성기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말까지였으나 그 이후에도 로메로는 항상 흥미로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었다. 1981년 작 <나이트라이더스>는 아서왕의 설화를 빌려 말 대신 오토바이를 타고 싸움을 벌이는 기사들의 얘기를 찍은 것이고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크립쇼>(1982)는 킹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 중에서 최상급의 작품으로 평가받을 뿐만 아니라 흥행도 좋았다. 로메로는 여전히 컬트 영화 감독으로 대접받았고 가끔 그는 더 편안한 형식으로 대중에게 다가서려 했다. 로메로의 영화 중 상대적으로 피가 덜 나오는 영화 <사투>(1988)는 피의 스펙터클보다는 서서히 관객의 심장을 옥죄는 심리극 스타일로 연출됐다. 과학자 제프리는 원숭이에게 인간 뇌의 혈청을 주사하는 실험을 한다. 그의 목적은 동물의 지능을 급속도로 진화시키는 것이었지만 친구 앨런이 사고로 몸을 전혀 쓰지 못하게 되자 암컷 원숭이 엘라를 그에게 선물로 준다. 원숭이 엘라는 앨런의 헌신적인 보조자가 되지만 곧 엘라는 주인인 앨런과 사랑에 빠지고 불구의 몸 때문에 세상만사를 삐딱하게 보는 앨런의 감정까지 물려받아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앨런은 엘라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고도의 육체적 능력과 인간의 지능과 맞먹는 머리를 지닌 원숭이 엘라와 힘든 싸움을 벌이게 된다.
제프리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 의지의 화신이자 현대판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는 자기가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과학의 가치 때문에 가장 처참한 희생자가 된다. <사투>는 고전적인 공포영화의 주제로 곧잘 등장했던 제프리의 운명을 묘사하는 것 외에 원숭이가 끼어든 한 가족의 비극에 더 초점을 맞춘다. 사고로 불구가 된 앨런에게 편집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어머니와 잘못된 결혼 생활 때문에 히스테리로 뭉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간호사 매리안과 팜므 파탈의 동물판인 악녀 원숭이 엘라가 벌이는 이전투구의 자살극은 지켜보는 것 그 자체가 악몽이다. 원숭이 엘라가 매개하는 것은 앨런의 가족과 그 주변 관계에 이미 내재하고 있던 불화의 폭발이다. 엘라의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처럼 그들은 모두 서로 해코지할 준비를 마음속에 갖추고 있었다. 원숭이 엘라는 그들의 마음에 화약을 지른 것이다.
삶을 가깝게 모방하는 폭력
조지 로메로는 좀비들과 인간들의 무지막지한 싸움과 사지 절단이 난무하는 지옥의 풍경을 영화에 담아 명예를 얻었고 공포영화의 사회적 지위도 올려놓았지만 그의 비타협적 B급 영화 체질은 늘 그를 힘들게 했다. “난 적은 예산으로 영화를 만들 길을 따라왔다. B급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이라도 찾아가겠다.” 비디오 시장이 새로 생겨난 1980년대 이후에도 로메로는 신작이 1억 달러를 벌어들이지 못하면 어쩌나 근심에 싸인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변하지 않는 체질을 부담스러워했다. 로메로는 더 자주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지만 영화 산업의 현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존 포드 감독은 230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난 10편 조금 넘는 영화를 만들었다. 대다수 영화감독은 일생에 15편 내지 20편의 영화를 만들면 행복할 것이다. 나는 다르게 살고 싶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조지 로메로는 스스로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색깔을 지닌 영화를 찍었다. 그런데도 그가 상대적으로 더 불편한 위치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것은 그가 공포영화 감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사람들에게 늘 폭력적인 현실, 그것도 매우 불편한 폭력적 현실을 일깨웠다. 로메로는 자신의 영화가 <람보>의 폭력 묘사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공포영화의 폭력은 ‘순수한 환상에 가까운 폭력’이었다. 그것은 삶을 가깝게 모방하고 삶의 문제를 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로메로는 베트남 시대에서 레이건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렌즈를 사용해 당대의 미국 사회를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으로 논평했다. 로메로를 통해, 그리고 웨스 크레이븐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통해 현대 공포영화는 지성이 없는 장르라고 천대받았던 영역을 벗어나 당대 사회를 비추는 가장 흥미로운 악몽의 거울이 됐다. |
첫댓글 놀라운 발전일세~~~이 여백의 미라니......
좀비 영화의 시초를 닦은 <나는 전설이다>라는 책이 가까운 과거에 국내에 소개됐다지,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