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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명은 도군(道君). 족보명은 홍욱(鴻昱). 휘는 추(樞). 법명은 규(奎). 법호는 정산(鼎山). 법훈은 종사. 소태산대종사의 상수제자(上首弟子)로, 소태산 열반 후 법통을 이은 원불교 후계 종법사이며, 개벽계성(開闢繼聖)으로 받든다. 1900년 8월 4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서 부친 벽조(久山宋碧照)와 모친 이운외(準陀圓李雲外)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7년(원기2) 스승을 찾아 전라도를 탐방하고 있을 때, 대각(大覺)을 이루고 제도(濟度)사업에 나선 소태산이 전북 정읍으로 그를 찾아가 만나고, 제자로 맞아들여 수위단 중앙단원에 임명했다.
정산은 법인성사(法認聖事)를 이루고 소태산의 봉래산 주석기에 함께하여 교법제정에 보필하며, 새 회상의 초창역사인 《불법연구회창건사(佛法硏究會創建史)》를 집필하고, 소태산의 명을 받들어 《정전》 편수에 주력하며,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이 열반에 들자 법통을 계승했다. 일제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교단을 지키고, 해방 후 〈교헌(敎憲)〉을 제정하며, 정식교명인 ‘원불교(圓佛敎)’를 천하에 선포했다. 〈대종사성비명(大宗師聖碑銘〉을 찬술하여 소태산 주세성자(主世聖者)로 보는 대종사관을 확립했다. 1961년(원기46) 1월 삼동윤리(三同倫理)를 설하고, 이듬해인 1962년(원기47) 1월 24일 열반에 들었다.
정산은 유시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국량이 넓으며 기상이 화청(和淸)하므로 사람들로부터 선동(仙童)으로 불렸다. 매사에 생각이 깊고 호생(好生)의 덕과 함께 행동에는 결단력이 있었다. 8세 된 1907년 가문의 전통에 의해 조부 훈동(薰動)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재질이 뛰어났다. 이어 영남 거유(巨儒)인 송준필(恭山宋浚弼)의 서당에 나아가 사서삼경을 비롯한 사대부의 학문을 수습하여 영남유학의 학맥을 계승했다. 9세되던 1908년 《통감(通鑑)》을 공부하다가 그는 ‘남아로 세상에 태어나서 한 나라를 바로잡는 큰 인물이 되지 못한다면 어찌 그를 일러 대장부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으며, 장부의 일대사(一大事)와 큰 경륜을 묻고 배울만한 스승 만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리고 11세된 1910년 사서를 공부하다가 ‘내 민족을 구하고 세계를 바로잡는 큰 일꾼이 되어야 겠다’는 웅지(雄志)와 스승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거처하는 방에 옛 성현과 영웅들의 명패(名牌)를 봉안하고 스승을 만나게 하여 달라는 기도를 시작했다. 12세 된 1911년에는 한시로 ‘지상에 있는 만물은 너와 내가 없고 천하의 백성은 높고 낮음이 있지 않다. 유연의 용기는 일시적인 용기에 지나지 않으니 문무를 겸전하기가 어찌 어렵지 아니하랴(地輪萬物無彼此 天下非民有尊卑 劉淵卽是一時勇 文武兼全豈不難)’라는 글을 지어 선비들을 놀라게 했다.
13세되던 1912년 경북 성주군 금수면 광산리의 여청운(中陀圓呂淸雲)과 결혼하지만 스승을 찾고 구도하는 뜻을 뚜렷하게 가지며, 유학으로는 세상을 건질 수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구세경륜을 찾으며 《동경대전》 등을 통독했다. 15세되던 1914년 2월 은거 수도하는 여처사(呂處士)를 찾아 가야산을 방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대신 두 수도인을 만나서 함께 3개월간 머물며 기도 수행했다. 18세인 1917년(원기2) 4월 가야산에서 증산교파의 수도인을 만나 하룻밤 정좌하여 주문수행을 하고, 그들로부터 전라도에 있는 송찬오(宋贊五, 후일 법명은 赤壁)를 찾아가면 스승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말을 듣는다.
부모에게 평소에 가졌던 뜻을 밝히고 초당을 마련하여 반년간 수련하고, 부친의 도움을 받아 스승을 찾아나섰다. 송찬오를 만나고 정읍을 방문하여, 당시 지하종교운동을 통해 차천자(車天子)로 불리던 보천교(普天敎)의 교주 차경석(車京石)을 만났으나, 대화에서 도덕의 정론을 들어볼 수 없음에 실망했다. 강일순(甑山姜一淳)의 생가를 찾아 여식인 순임(華恩堂姜舜任)에게서 부친이 간직했던 수련서 《정심요결(正心要訣)》을 얻었으며,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불공하러 온 김해운(莖陀圓金海運)의 간청으로 전북 정읍 북면 화해리로 옮겨 기도하며 수련을 계속했다.
김해운은 그를 세계 만국ㆍ만민의 일을 알고 걱정하는 ‘만국양반’이라 불렀는데, 여러 가지 이적과 적중하는 예언에 감복했다고 한다. 당시 교단창업을 시작하여 수위단 조직을 하던 소태산은 1918년(원기3) 친히 정읍 화해리를 찾아 정산을 만나 천하사를 논하니 이를 ‘화해제우(花海際遇)’라 부른다. 정산은 소태산에게서 도덕의 정론을 듣고 그동안 답답하던 흉금이 툭 트이며 탄탄대로가 환히 열리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큰 절을 올렸다. 소태산의 제의로 형제의 의를 맺고 후일을 기약했는데, 약속한 7월에 그를 영접하러 온 김광선을 따라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룡리의 영산성지를 찾아 소태산과 재회했다.
방언공사를 하던 판국을 보며 정산은 전날 맺은 형제의 언약을 파하고 스승으로 모실 것을 발원했다. 이를 받아들인 소태산이 그동안 비워두었던 수위단 중앙에 그를 임명하니(《정산종사법어》 기연편1), 가장 젊은 나이로 구인제자의 수장이 된다. 이후 고향에 편지를 보내 전후 사정을 전하자 부친이 영광을 찾아 소태산을 뵙고 제자가 된 다음, 정산이 20세되던 1919년(원기4) 전 가족을 이끌고 영광으로 이사했다. 4월 방언공사를 마친 후, 4월 26일부터 소태산을 모시고 단원들과 함께 혈인서천(血印誓天)의 기도를 올려 8월 21일 법인성사를 이루며, 이를 통해 세계공명(世界公名)으로 법명과 법호를 받았다.
이해 8월 봉래산 행가를 계획하던 소태산은 그를 월명암의 백학명(白鶴鳴, 불명 啓宗)선사에게 보내니 백학명은 그에게 명안(明眼)이라는 불명을 주며, 소태산이 봉래산의 실상사 근처 초당에 주석한 후에도 그는 월명암에 머물며 초당을 내왕했다. 백학명은 그에게 불학(佛學) 연구를 위해 중국유학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교단창업에 매진할 것을 소태산에게 고하고 교리강령(敎理綱領) 등 교법제정을 보필했다. 23세되던 1922년(원기7) 12월 아우 송도성(主山宋道性)이 소태산 문하에 출가했고, 25세되던 1924년(원기9) 8월 조부의 치상(治喪)을 마친 부친(송벽조)도 출가했다.
이해 4월에 전북 익산의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가 열리는데 조력하고, 8월경부터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에 중앙총부 건설에 참여했으며, 전무출신 공동생활을 함께 시작하여 9월 교정원 총무부장으로 교단의 제도마련에 임했다. 28세되던 1927년(원기12) 서울교당 교무, 이듬해인 29세되던 1928년(원기13) 창립 제1대 1회 기념총회 준비원으로 역할했고, 총회에서는 유공인 3등과 정식특신부로 사정되었다. 이해에 영산지부장에 임하여 후진양성과 성지장엄사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33세되던 1932년(원기17) 7월에 깨달음의 노래 ‘원각가(圓覺歌)’를 발표했다(《월말통신》 제38호).
34세되던 1933년(원기18)에 교정원 교무부장, 35세되던 1934년(원기19) 교정원장에 부임했다. 36세되던 1935년(원기20) 8월에 소태산의 법설수필 ‘천지의 식(識)을 말씀하심’(《회보》 제11호)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발표하고, 37세되던 1936년(원기21) 다시 영산지부장 겸 교감으로 옮긴 뒤, 12월 《불설멸의경(佛說滅義經)》의 번역(《회보》 제20호)을 비롯한 불경의 번역과 해의를 발표했다. 38세되던 1937(원기22)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창립 제1대 1회인 12년간의 교단사를 정리한 《불법연구회창건사》를 발표하여(《회보》 제26호~제37호) 원불교교사의 초석을 마련했다.
43세되던 1942년(원기27) 《정전》이 편수되는 과정에서 중앙총부 교감, 44세 되던 1943년(원기28) 교정원 총무부장에 임하여 이를 주관했다. 같은 해 6월 1일 스승인 소태산이 열반에 들자, 법통을 이어 종법사 위에 올라 소태산 만년의 교리서인 《불교정전》1권에 이어 연원경전인 불조(佛祖)의 요전(要典)을 결집한 《불교정전》2ㆍ3권과 《근행법(勤行法)》 등의 교서를 갖추었다. 교단해산과 황도불교화(皇道佛敎化)를 획책하는 일제의 회유와 강압을 거부하며 성업(聖業)유지에 힘써 마침내 46세되던 1945년(원기30) 8ㆍ15광복을 맞이하며, 《불교정전》 1권 가운데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첨부된 양대은(兩大恩) 등의 내용을 삭제한 ‘개쇄본’을 마련했다.
정산은 교단적인 힘을 기울여 일제치하의 만주와 일본 등에 있다가 돌아오는 전재동포를 구제하기 위해 서울ㆍ부산ㆍ익산 등에 ‘귀환 전재동포 구호소’를 설치하고 식사ㆍ의복ㆍ숙소제공 및 응급치료 등의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중앙총부 등에 야학원을 개설하여 한글을 교육하고, 전국 교당에 하달하여 일제히 문맹퇴지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10월 《건국론》을 저술하여 건국의 강령을 밝히고 국력을 배양하는 등의 방법을 제시했다. 47세되던 1946년(원기31) 5월 소태산의 유지를 받들어 전문적 교역자양성 기관으로 중앙총부 경내에 유일학림을 개설하고, 49세되던 1948년(원기33) 1월 16일 ‘재단법인 원불교’의 등록인가를 받으며, 그해 4월 26일 〈원불교교헌〉을 통과시킨 다음, 27일 ‘원불교(圓佛敎)’라는 정식 교명을 천하에 선포했다.
그해 11월에는 서울 한남동에 서울보화원을 설립했다. 50세인 1949년(원기34) 4월 25일 중앙총부 영모원 송림 안에 ‘대종사성탑(大宗師聖塔)’을 조성하여 열반 당시 일제의 압력에 의하여 익산 금강리 공동묘역에 간이탑을 조성하여 안치했던 소태산의 유해를 옮겨 봉안하고, 26일 중앙교의회에서 ‘대종사주 성업봉찬회’(회장 이공주)를 조직했다. 같은 달 원광사를 발족하고, 7월에 1940년 일제의 핍박에 의해 폐간한 지관지 《회보》에 대신하여 월간 《원광》을 발행했으며, 이에 법설 ‘백범선생 서거에 대하여’를 싣는 등 많은 법설을 발표했다.
한국전쟁과 함께 북한군에게 중앙총부를 점령 당하지만, 피난하지 않고 대중을 은신시키고 살피면서 어려움을 이겨냈다. 전쟁으로 성업봉찬사업기간을 연기한 가운데, 52세되던 1951년(원기36) 6월 유일학림 중등부를 개편하여 익산에 원광중학교(교장 박장식)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9월 학림 전문부를 개편하여 원광대학(학장 박광전) 설치를 인가받고 53세 되던 1952년(원기47)에 개교하여 원불교 개교정신에 의한 교육 사업을 전개하며, 《예전》 임시판을 편수했다. 같은 해 중앙총부에 신룡양로원을 개설했고, 54세되던 1953년(원기38) 4월 26일에 ‘제1대성업봉찬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제1대 전체교도의 공부ㆍ사업ㆍ원성적 내역을 발표했는데, 전체교도는 32만여 명, 전무출신 260여 명, 전국 교당 50여 개소, 기관 18개소를 밝히고 있다. 이날 ‘대종사성비’를 건립했는데, 정산이 비문인 〈원각성존소태산대종사비명병서(圓覺聖尊少太山大宗師碑銘幷序)〉를 찬술하여 성업계승을 다짐했다. 같은 해 5월 이리시로부터 이리보육원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전주양로원ㆍ동래수양원 등을 개설하여 사회복지시설의 터전을 마련한다. 55세되던 1954년(원기39) 겨울에는 《정심요결》을 산보(刪補)하고 장(章)을 나누어 《수심정경(修心正經)》이라 이름붙여 간행하여 중앙선원에서 강의했는데, 이는 전통종교의 가르침을 보조경전으로 삼아나가기 위한 편수작업의 일환이었다.
56세되던 1955년(원기40) 1월에 중앙선원ㆍ동산선원ㆍ영산선원의 3대선원의 설립을 공고하고, 5월 북일진료소를 설립했다. 8월 ‘정관평 재방언 추진위원회’(위원장 송혜환)를 조직하고, 소태산 당대에 언답을 막아 옥토를 마련했던 제1차 방언역사 터에 이어 재방언공사를 추진했는데, 이 공사는 정산이 57세 되던 1956년(원기41) 4월 착수하여 61세되던 1960년(원기45)에 완공했다. 이에 2만7천여 평의 새로운 언답을 얻게 되니, 제1차의 언답과 합쳐 총 5만3천여 평의 논에서 나오는 수익은 교역자 양성기금으로 사용하며 성지장엄사업을 추진하게 했다.
이 기간 중에 소태산의 탄생지ㆍ대각터 등을 매입하여 영산성지의 개발에 착수했으며, 이를 조직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영산성지 개척공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1956년 5월에는 소태산의 언행록인 ‘대종경편수위원회’를 발족시키고, 58세되던 1957년(원기42) 10월에는 익산에 동화병원을 개설했으며, 59세되던 1958년(원기43) 5월에 교서편수기관으로 중앙총부에 정화사를 발족시켜, 각종 교서편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62세되던 1961년(원기46)에는 예비교무를 양성하기 위한 은산육영재단과 전무출신의 치료와 요양을 위한 법은재단을 설립했다.
같은 해 4월 26일 정산은 회갑경축식에서 하나의 세계를 이룩할 기본강령이 되는 ‘삼동윤리(同源道理ㆍ同氣連契ㆍ同拓事業)’를 제창했다. 이는 소태산의 일원대도에 바탕한 대세계주의이념으로, ‘한울안 한이치에 한집안 한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로 풀이된다. 병환 중이던 같은 해 12월에는 4대경륜인 ‘교재정비(敎材整備)ㆍ기관확립(機關確立)ㆍ정교동심(政敎同心)ㆍ달본명근(達本明根)’을 강조하고, 63세되던 1962년(원기47) 삼동윤리를 전법게송으로 발표한 후, 1월 24일 열반에 드니 법랍은 45년이다. 슬하의 영봉ㆍ순봉이 전무출신했다.
정산은 도저한 학문을 갖추고 활발한 저술활동에 계속했으며, 종법사 재위 중에는 많은 설법을 베풀어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저술에는 《불법연구회창건사》ㆍ《건국론》ㆍ《세전(世典)》ㆍ《예전》 등의 찬술서와 《수심정경》ㆍ《금강경》 등의 편ㆍ역서, ‘사람의 열반시를 당하여 영혼천도하는 법설’ 등의 소태산 법문수필, 〈일원상에 대하여〉 등의 논설, ‘원각가’ 등의 시가, ‘충효열(忠孝烈)에 대하여’ 등의 법설이 있다. 1972년 정화사에서 간행한 《정산종사법어》는 제1부 《세전》과, 법문 등 언행을 결집한 제2부 《법어》를 합본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들 저술에 나타나지만, 그가 만년에 전력을 다해 추진해 온 9종교서의 대부분에도 직접 간접으로 그 영향이 투영되어 있다. 이들의 일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회상관(會上觀):교단이 석가모니불 영산회상을 계승한 주세회상(主世會上)임을 선언한다. 그는 “옛날 영산회상이 열린 후 정법(正法)과 상법(像法)을 지내고 계법(季法)시대에 들어와서 바른 도가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이 세상에 편만하며 정신이 세력을 잃고 물질이 천하를 지배하여 생령(生靈)의 고해(苦海)가 날로 증심(增深)했나니 이것이 곧 구주(救主)이신 대종사께서 다시 이 세상에 출현하시게 된 기연(機緣)이다”(〈대종사성비명〉)라 하여, 소태산의 출현이 원시반본(原始返本)하는 원리에 따라 정법회상을 건설하기 위한 기연이라 본다. 이를 ‘중성공회(衆聖共會)’ㆍ‘법륜부전 불일중휘(法輪復轉 佛日重輝)’ 등으로 표현했다.
이는 소태산이 “우리가 건설할 회상은 과거에도 보지 못했고 미래에도 보기 어려운 큰 회상이라, 그러한 회상을 건설하자면 그 법을 제정할 때에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 문명 세계가 열리게 하며, 동(動)과 정(靜)이 골라 맞아서 공부와 사업이 병진되게 하고, 모든 교법을 두루 통합하여 한 덩어리 한집안을 만들어 서로 넘나들고 화하게 하여야”(《대종경》 서품8) 한다는 교설을 구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② 대종사관(大宗師觀):새 회상관과 관련된 주세불관(主世佛觀)이다. 그는 소태산을 ‘광겁종성(曠劫種聖)’ㆍ‘집군성이대성(集群聖而大成)’ㆍ‘구주(救主)’ㆍ‘주세성자(主世聖者)’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산은 ‘과거에 모든 부처님이 많이 지나가셨으나 우리 대종사의 교법처럼 원만한 교법은 전무후무’하다 했고, 그 이유를 첫째는 일원상의 진리를 모신 점, 둘째 사은의 큰 윤리를 밝힌 점, 셋째 신통이적을 말하지 않고 인도상요법으로 주체삼은 점(《정산종사법어》 기연편11)이라고 밝힌다.
③ 국가관:외국의 침략에 의해 생민이 고통받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아 국가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있다. 그는 건국의 요지를 “정신으로써 근본을 삼고, 정치와 교육으로써 줄기를 삼고, 국방ㆍ건설ㆍ경제로써 가지와 잎을 삼고, 진화의 도로써 그 결과를 얻어서 영원한 세상에 뿌리 깊은 국력을 잘 배양하자는 것”(《정산종사법어》 국운편4)이라 밝힌다.
④ 세계관:삼동윤리관이라 할 수 있다. 한 기운을 연한 세계인류가 개척해 나갈 사업은 평화에 있으므로, 모든 종교 모든 사상이 한 일꾼으로 이를 달성해 나가자고 주창했다.
⑤ 역사관:정산은 역사를 세상의 거울로 보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일의 흥망성쇠가 다 이 역사에 나타나는 까닭이기 때문”이며, “역사를 보는 이가 다만 문자에 의지하여 지명이나 인명이나 연대만 보고 잘 기억하는 것으로 능히 역사의 진면(眞面)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없나니, 반드시 그때의 대세와, 그 주인공의 심정과, 그 법도(法度)조직과, 그 실행경로를 잘 해득하여야만 능히 역사의 진면을 볼 수 있고, 내외를 다 비치는 거울이 될 것”(《원불교교사》 서설)이라고 했다.
소태산은 문하에 입참한 정산을 보고 “내가 만나려던 사람을 만났으니 우리의 대사는 이제 결정이 났도다”(〈정산종사성탑명〉)라 하고, 정산에 대하여 범인(凡人)의 지량으로 능히 측량될 사람이 아니라고 한 다음, “그의 형제를 만난 후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한 일과 두 번 시켜 본 일이 없었노라. 그러므로 나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이 되고 그들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 되었나니라”(《대종경》 신성품18)고 인정하고 있다.
대산종사는 〈정산종사성탑명〉에서 “정산종사는 한없는 세상을 통하여 대종사를 받들고 제생의세(濟生醫世)의 대업을 운전하실 제 신의(信義)는 고금을 일관하시고 경륜(經綸)은 우주를 관통하시며 시국의 만난(萬難)중에서도 대도를 이어받아 드러내시고 흉흉한 세도인심 속에서도 대자재비로 모든 생령을 두루 안아 길러주시며, 새 질서를 갈망하는 세계를 향하여 일원세계 건설의 큰길을 높이 외쳐 주셨으니 후래 제자로서 묵묵히 우러러 뵈올 때에 대종사는 하늘이요 태양이시라면 정산종사는 땅이요 명월이시며 대종사는 우리의 정신을 낳아주신 영부(靈父)시라면 정산종사는 그 정신을 길러 주신 법모(法母)시라”고 밝히고 있다.
안병욱은 정산에 대해 ‘내가 이 세상에서 본 가장 좋은 얼굴’이라 했고, 또 ‘얼마나 정성껏 수양의 생활을 쌓았기에 저와 같이 화열과 인자가 넘치는 얼굴이 되었을까’(《정산종사법어》 근실편33)라고 했다. 〈梁賢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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