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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자들이 버린 머릿돌
본문 / 벧전 2:1~10
베드로 전서는 베드로가 흩어져 있는 나그네, 즉 예수를 믿음으로 오는 여러 시험과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그 위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조금만 참고 인내하면 좋은 일과 좋은 때가 온다는 막연한 위로가 아니었음을 베드로 전서 1장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오히려 시험과 고난은 우리가 지금 현재 받아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이 세상으로부터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며 보호라고 했습니다. 결국 베드로 사도가 1장에서 주제로 강조하고 싶었던 말씀은 하나님이 이루어 내신 구원의 내용이 어떤 것 인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얻은 것이고,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세상의 보이는 죽은 소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하늘에 간직된 유업을 위해 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산 소망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이 산 소망은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우리에게까지 전해 진 것이고 이 구원의 전 과정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간섭과 사랑이었으면 하늘에 천사들도 살펴보고자 했다고 베드로 사도는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은 완전한 구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실제 삶 속에서 이 구원의 완성을 위해 우리가 직접 만들어 가야할 부분도 있다고 크게 두 가지로 권면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뜨겁게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행함의 신앙을 위해서는 때가 되고 시간이 되고 여유가 있을 때 하면 이미 늦은 것이기 때문에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종말 신앙을 가지고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서 베드로는 단호한 어조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자세로 이 두 가지를 행하라고 명령어로 권면했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의 2장에서도 이 말씀을 합니다. 먼저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그렇죠! 구원의 이르도록 자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지요. 1장에서는 이 구원을 이루어 가기 위해 ‘거룩하라!’, ‘사랑하라!’ 라고 권면했다면 2장을 시작하면서는 ‘버리라!’, ‘사모하라!’ 라는 두 개의 명령어를 사용합니다.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악독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의 말이고 사모해야 할 것은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먹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구원은 이미 받았지만 점차 성장하여 만들어지고 완성되어져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게 저와 여러분들이 시험과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성장하고 만들어서 완성시키는 하나님의 위로라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어떻게만 생각하나요? 힘들고 어려울 때에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안아 주시며 모든 아픔과 어려움을 해결 해 주시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분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다른 신앙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이유는 그 구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아무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를 걸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과 시련 등의 아픔과 고난을 통해서 그 구원을 완성해 가도록 부르셨다고 말씀해 줍니다. 구원을 받아 예수 믿고 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본문 4절 말씀의 시작이 그 말씀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버린바 된 산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는 이 세상에서 무병장수하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서 건강하게 아무 근심 없이 잘 사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이런 문제들이 다 해결 된다면 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겠냐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믿었더니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으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라고 말씀 해 준 것입니다. 또 이후 8절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라고 말씀해 주는데 이 말은 반대로 해석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부딪치는 돌이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실제적으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고 내가 취하여 얻고 싶은 것은 예수님은 죄다 하지 말라고 하니 걸러 넘어지는 돌, 부딪치는 돌이 됩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이 부딪치는 돌이고 걸러 넘어지게 하는 돌이 될 수 있다는 걸 말입니다. 왜요? 경제적인 이익이나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오히려 예수님이 올무와 덫이 되어 실족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 ‘걸려 넘어지다’는 말은 원어로 ‘스칸달론’ 이라는 올무, 함정, 덫 이라는 말에서 나온 동사입니다. 영어 스캔들이라는 말이 ‘스칸달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연예인 등의 어떤 공인들이 누구와 연루되어 만나거나 불륜이 발각이 되면 스캔들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만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목적을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어 내는 수단으로만 예수를 믿으면 덫에 걸려 실족해서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 믿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더니 변한 것은 없고 더 힘들고 되는 일도 없고 하다보니까 오히려 예수 믿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올무가 되더라는 겁니다. 차라리 예수님을 몰라 버렸다면 마음의 부담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그저 할 수 없이 띄엄띄엄 나옵니다. 왜, 그렇다고요? 예수를 내 이익과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믿으면 그렇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마11:6절에서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을 때 세상적인 가치로만 믿으면 예수님이 산돌이 아니라 오히려 걸러 넘어지게 바위가 되는 쓸모없는 돌입니다. 물론 누구든지 처음에는 예수님을 자기중심적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만나면 하나님 중심으로 변해 가야 합니다. 조금씩 성장해 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고 변해가는 과정 중인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더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목숨 걸로 따라 다녔습니까? 이적과 기적을 베푸니까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져가고 성장하도록 말씀을 먹이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친히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하니까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다 예수님을 떠나 버렸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배부르게 할 것을 위하여 나를 믿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나를 믿고 나를 먹고 나를 마시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고는 십자가 위해서 죽으시니까 자기 살길 찾으러 고향으로 일터로 세상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베드로가 그 당사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30년 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고 성장해서 지금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권면의 말씀이 4절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라”라고 명령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후 5절 말씀을 보니까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뿌림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해 주신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5절에 너희도 산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 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집은 성전을 말합니다. 구약의 성전은 불안전한 성전이었습니다. 오직 제사장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 대신 짐승의 피를 뿌려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불안전한 제사를 십자가 위해서 친히 피를 내시며 죽으시므로 가운데 휘장이 둘로 갈라져 이제는 모든 사람이 직접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신령한 집, 곧 성전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말씀이 고전 3:10~17, 고후 6:16, 엡 2:20~22, 딤전 3:15, 히 3:2~6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엡 2:20~21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특히 이 말씀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단어가 ‘연결’과 ‘함께’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신 목적은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시험과 시련 등의 고난과 고통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성장하고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도록 거룩한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고 베드로는 말씀해 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서로 만나야 합니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사람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없는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그게 어찌 사람입니까? 짐승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은 사람끼리 부데 겨야 자기의 못된 성격, 모난 부분들이 나타나고 그 과정에서 사람을 통해서 모난 성격이 다듬어지고 둥글둥글 해져 갑니다. 그래서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서로 기대면서 사이사이 살아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성장해 갑니다. 그래서 연결해서 함께 지어가야 한다고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에 말씀해 준 겁니다.
이게 오늘날 가시적인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나 성전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교회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들 자신이 성전이고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함께 연결되어 지어져 가는 성전들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은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 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때 소리가 날까요? 아무 일 없이 만들어질까요? 구약의 성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를 알면 우리 삶의 성전, 신앙의 성전이 어떻게 지어여 가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왕상6:7절 말씀을 보시면 “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소리가 나지 않기 위해서는 성전 밖에서 모든 성전 재료들은 정확하게 자르고 다듬고 깎았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는 그대로 맞추기만 했습니다. 이게 솔로몬의 성전 건축법이었습니다. 이게 오늘날 궁극적인 교회의 그림 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지상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시끄럽습니다. 소리가 납니다. 이게 정상일까요? 정상이 아닐까요? 정상입니다. 교회는 소리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데 매 순간 소리가 나고 넘어지고 깨지고 부숴 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6절 말씀을 보시면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원래 일반 건축법은 집을 다 짓고 그 건물 앞에 준공표지판으로 머릿돌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당시 히브리인들의 건축법은 그 반대였습니다. 집을 지을 때는 모퉁이 돌을 먼저 세우고 거기에 맞게 다듬고 깎아서 하나하나 맞춰가며 집을 지어갔습니다. 서로 연결하고 함께 지어간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퉁이 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맞게 깎이고 다듬어지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인 성전으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게 더 다듬어지고 깨트려져서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상의 교회도 저와 여러분 안에 있는 성전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필요 없는 돌이라고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목 박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필요 없다고 버린 그 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무엇이 되었다고요? 보배로운 산돌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모퉁이 돌을 아무 쓸모없다고 버립니다. 왜요? 단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자기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님이 올무가 되고 덫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버린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믿는 자들이 세워가야 할 신령한 집의 모퉁이 돌로 삼았습니다. 보배로운 산돌로 삼았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산돌이십니까? 건축자들이 버린 돌입니까? 아니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입니까? 9~10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입은 자니라.” 성도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면서 이제는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위해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사도 베드로는 말씀해 줍니까?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성전이며 교회인 저와 여러분들은 이 어둔 세상을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도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깎고 다듬어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가고 있음을 믿으시고 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