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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이단)들의 마지막
본문 / 벧후 2:17~22
베드로 후서 2장은 베드로 후서를 기록한 목적을 증명이나 하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의 특징이나 정체성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베드로 사도는 지금으로 말하면 거짓 이단으로부터 성도들과 교회를 보호하고 그리스도인으로 각 자의 삶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마지막 유언처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베드로의 대해서 한 쪽으로 치우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베드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을 만난 어부 출신이기 때문에 학문은 짧고, 성격은 다혈질이고, 그러다보니까 아무래도 급하고, 충동적이고,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짧기 때문에 행동을 먼저하고, 앞장서 나서기 좋아 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성격이 어느 한 장면에서 그대로 노출 됩니까?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에 온 사람 중에 말고의 귀를 칼로 쳐서 잘라 버리는 장면을 보면 이런 베드로의 성격을 단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인고로 베드로는 어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베드로가 가장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진수와 같은 신앙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결심 하며 열 두 제자의 수제자로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 해 주셨는데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맙니다. 이게 베드로의 대한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직접 쓴 베드로 전서와 베드로 후서를 보면 전혀 다른 베드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는 베드로가 교회와 성도들이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오는 핍박과 환란, 고난들을 어떤 신앙의 원리로 이겨내야 하는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때 인생을 흩어진 나그네로 비유하며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는 등의 주옥같은 말씀을 베드로가 전합니다. 또 우리가 지금 현재 보고 있는 베드로 후서는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빠지지 말라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올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마지막 온 힘을 다하며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의 진수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왔을까요?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는 말이 있듯이 베드로가 이렇게 사도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을 토해 내기 까지는 인고의 세월이 있었다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게 할 때 그 사람의 손을 마치 기계적으로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와 좌절, 인고의 세월을 거치며 체득한 삶을 경험하게 하고 그 삶을 반영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볼 때는 이런 성경기자의 정서를 함께 느끼지 못하면 그 말씀이 내 삶 속에 스며 들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 서를 읽을 때는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다시 만나서 이후 어떤 삶의 여정과 신앙의 여정을 겪어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 정작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죽으시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는 현실적으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기 잡는 일터로 떠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떤 계기로 다시 주님을 만나서 목숨 걸고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가고 베드로서를 기록했나요? 부활하신 주님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베드로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만나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낙심하여 고향에 내려가 연신 욕망의 헛그물질만 하며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주님이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고 배가 고파 지쳐 있는 베드로에게 손수 떡과 생선으로 아침을 준비 해 주신 그 주님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해 주시므로 과거에 주님을 버렸던 상처 나고 흠이 난 그 신앙과 삶이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베드로를 움직이기 했고 이후 30년 이상을 목회 현장에게 경험한 수많은 땀과 눈물과 기도들을 모으고 담아서 베드로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서를 볼 때 독자가 아무리 수 백 번을 읽어도 이런 베드로의 삶과 신앙의 정서가 나에게 없으면 그 말씀이 전해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가 말한 나그네 같은 고난의 인생여정을 어떻게 신앙으로 담아내느냐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순탄한 인생을 산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들 안 그런 척 하고 있는 것이지 사실 지금까지 살아온 고난의 여정을 이야기 하라고 하면 몇 칠을 다 해도 못할 것입니다. 나만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른 사람은 더한 삶을 살고 있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왜, 나만 그러느냐 하며 그 고난의 이유를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세상에서 찾는 사람은 그 수준의 인생 밖에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의 길을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한 것처럼 고난이 깊을수록 그 만큼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나고 그로 인해 인격이 변하고 삶이 변하고 신앙이 변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더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베드로가 이단에 빠지지 말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만 이 서신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머리와 이성으로는 가름할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점검하고 치료하라고 주신 것이지 어느 한 쪽만 보라고 주신 말씀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가짜가 성행할 때 가짜를 연구하면 이미 한 발 늦은 거라고 했습니다. 가짜가 성행할수록 진짜를 더 연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거짓 선지자라고 일컫는 이단들이 성도와 한국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올바로 서 있지 못했다는 증거이며 증상입니다. 말씀을 올바로 가르치고 올바로 배워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으면 어떤 이단의 유혹에 넘어갈 수 없고 오히려 우리의 신앙과 삶은 더 굳건해 집니다.
혹시 이런 병명을 들어 보셨습니까? ‘병원 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병을 낫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오히려 다른 병을 얻어서 나오는 것을 병원 병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5개 대형 병원 환자 중에 약 4%가 각종 세균에 감염되어 고치려는 병 외에 다른 병을 얻어서 나온다는 자료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은 병원은 더 할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깨통증이 있어서 병원에 갔습니다. 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은 전기 물리치료기로 통증을 완화 시킵니다. 그런데 물리 치료를 받다가 갑자기 호흡이 빨라지고 맥박이 불규칙한 것을 발견합니다. 결국은 부정맥 심박세동이란 병을 종합 병원에서 얻게 됩니다. 부정맥 약을 복용하는 중에 부작용으로 심각한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했고 그로 인해 다음날 혈압도 올라가게 됩니다. 의사는 불면증 부작용이 있는 약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무조건 혈압 약을 처방하며 고혈압 환자라는 병을 또 추가해 줍니다. 사실 불면증은 당뇨와 결탁하여 일시적으로 혈압상승을 가져왔는데 고혈압 환자로 그만 둔갑 시켜버린 겁니다. 당뇨와 불면증, 부정맥, 위장장애 등등을 받은 처방약들로 치명적인 간 기능 마비를 가져왔고 사망 선고까지 당할 뻔했다는 사례를 본적이 있는데 이게 모두 멀쩡한 사람을 병원에서 만들어낸 병이라는 겁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은 교회 안에도 병원 병처럼 교회 병이 있다는 겁니다. 교회에 와서 멍들고, 찢겨진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왔는데 오히려 상처를 받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의외로 많습니다. 저희 여동생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차라리 교회 안의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면 괜찮은데 큰 교회 직원으로 근무하다 보니까 이런 저런 별별 이야기를 다 듣게 됩니다. 당연히 좋은 이야기 보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심지어는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의 일거수를 알게 되더니 정죄하고, 비난하는 말을 저에게도 자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 병의 걸려 있을 때 신천지가 나타난 데려 간 겁니다. 사자나 맹수들이 들소를 먹이 감으로 정할 때는 병들고 약한 놈을 타깃으로 그놈만 공격해서 잡아먹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거짓 선지자로 일컫는 이단은 바로 이렇게 비난하는 교회 병에 걸린 성도나 특히 이제 막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한 약한 성도를 타깃으로 잡아갑니다. 마치 자신들만이 성경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며 무료 성경공부를 시키더니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공부를 통해서 교주 이만희씨를 만나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꼭 이단에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면 사람과의 관계도 건강하고 어떤 상황 어떤 일을 만나도 그걸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성경 말씀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말씀 되신 주님의 능력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고 쓴 베드로 후서가 총 세 장인데도 1장을 모두 할애해서 그렇게도 말씀 앞에 바로 서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런 거짓 이단들의 특징들을 알려 준 것입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본 말씀이 기억나실 줄 모르지만 저는 이런 이단들의 특징을 보면서 이게 꼭 이단들에게서만 나타나는 증상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면서 사실은 저를 포함해서 성도들 모두에게도 나타나는 증상들임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거짓 교사라고 일컫는 이단은 탐심으로 지여낸 말을 가지고 사람을 미혹해서 결국은 자기 배를 채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장해서 탐욕을 따라 마치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정체를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호색하고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탐욕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들의 마지막이 어떻다고 했나요? 저주의 자식들, 불의의 삯을 사랑하며 바른 길을 떠나 마치 불법을 일삼는 발람의 후예로 비유하며 멸망과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이들을 두 가지로 비유하며 마지막 22절에서는 두 가지 속담을 들어 개와 돼지와 같은 더러움에 속한 자들이라고 최종적으로 결론지어 말씀 해줍니다. 먼저 17절 말씀을 보시면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오,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는 꼭 이단들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고 내가 중심이 되어 살아가면 이런 허황된 인생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경고해 준 말씀입니다. ‘물 없는 샘‘이 어떤 표현인지 아십니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막을 걷습니다. 죽을 정도로 목이 말라도 조금만 더 가면 마실 물이 있는 샘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참고 견딥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샘에 도착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물이 하나도 없는 바짝 마른 샘입니다. 속은 겁니다. 얼마나 허무하고 절망감이 들겠습니까? 이게 이단들의 정체입니다. 마치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 같은 물을 준다고 해서 가 보았는데 나중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에서 자기 욕망대로 살아 갈 때 나중에 반드시 만나는 현상이 ’물 없는 샘’, 즉 허무한 인생의 끝을 만난다는 겁니다.
두 번째로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이단들의 정체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안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게 낀 안개도 햇빛이 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이게 거짓 선지자들의 정체이고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인생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뭔가 있는 듯해서 열심히 살긴 살았는데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빈껍데기 인생으로 마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향해 따라가지만 바람이 불고 햇빛이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안개처럼 인생은 이미 허무하게 다 지나가고 남은 건 빈 껍데기만 남으니 하나님과 말씀 앞에 바로 서 있으라는 베드로 사도의 권면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는 두 가지 속담을 사용하여 거짓 교사로 일컫는 이단들의 정체를 보여 주면서 교회와 성도는 결단코 이런 이들에게 미혹당하지 않도록 마지막 권면을 해 줍니다. 2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역시 이단들에게만 보여 지는 정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여 있지 못하고 세상에 휩싸여 정욕대로 정신없이 살아갈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지금이야 개를 마치 가족처럼 깨끗하게 집 안에서 반려 견으로 키우지만 옛날 시골에서는 개를 놓아 키우다 보니까 돌아다니면서 별거 다 주워 먹고 심지어는 사람의 똥도 먹습니다. 그러다가도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주워 먹는 게 개입니다. 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물로 씻어 주어도 자기가 싼 똥에 다시 드러누워 자기도 합니다. 이게 거짓 이단들에게서 나타나는 마지막 정체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뭘 말합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거룩한 성도로 세상에 나가 예수님처럼 살아가지 않고 옛 성품으로 다시 더러운 죄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돼지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런 거짓 된 세상에 유혹되지 않도록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 생활에 절대로 소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