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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운동에서 귀일원의 역할과 과제
이용교
(광주대학교 교수, 복지평론가)
1. 서론
귀일원 창설 6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아울러 이러한 뜻 깊은 자리에서 “복지운동에서 귀일원의 역할과 과제”라는 주제 발표를 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 한국 사회복지 역사에서 이현필 선생이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100년을 넘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맨발의 성자” 혹은 “한국의 성 프란체스코”로 일컬어지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뜻을 이어받는 사람들의 모임이 동광원가족이고, 동광원수도회가 귀일원을 운영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단편적인 지식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복지학과 대학생이 배우는 사회복지역사 교재 어느 쪽에도 이현필 선생이나 귀일원의 역할은 언급되지 않았고, 광주 전남에 있는 대학교에서도 이현필 선생의 업적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몇 분의 학자들이 광주전남의 사회복지역사를 정리하면서 이현필 선생의 업적을 정리하고, 당시 함께 일했던 분들의 업적을 기린 문헌을 남겼습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 건국 60년이 되도록 한국 사회복지에 깊은 영향을 준 어르신들의 업적을 정리하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이 글을 통해서 복지운동에서 이현필 선생의 업적과 귀일원의 역할을 다루고자 합니다. 이현필 선생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별도로 다루기에 이 글에서는 가급적 한국 복지운동에서 귀일원의 역할과 과제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합니다.
복지운동에서 귀일원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역사적으로 정리될 수 있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는 이미 답이 있다고 봅니다. 귀일원의 역할은 이현필 선생의 뜻을 이어가고, 귀일원의 과제는 그 뜻을 새롭게 해석하여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발제자가 보는 귀일원의 역할과 과제는 소외된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복지, 주민과 함께 감사하는 복지, 세계인과 더불어 기도하는 복지입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 소외된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복지
귀일원을 창설한 이현필 선생은 가장 소외된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복지를 하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1948년 여순사건으로 고아들이 생기자 1949년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 청소골에 초가삼간을 매입하여 고아 8명을 제자 김준호 선생과 정귀주 집사에게 돌보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귀일원이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게 된 계기입니다. 고아들이 더 늘어나자, 1950년 1월 목포에서 고아원(목포공생원)을 운영하던 윤치호 선생의 제안으로 광주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70명이 모여 고아원 ‘동광원’을 설립 운영키로 하였습니다. 이후 동광원은 6.25를 거치면서 원아가 600여명에 이르게 됩니다. 전쟁 속에서 가장 고통 받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은 이현필 선생과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복지는 이현필 선생이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한 생애와 일치했습니다. 동광원을 설립할 때, 광주 YMCA 총무였던 정인세 선생이 원장직을 맡아 운영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망설이고 있던 차에 이현필 선생이 야고보서 제1장 제27절을 쪽지에 적어 주셨다는 일화는 매우 상징성이 큽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 하느니라”라는 말씀은 동광원의 역할과 동역자의 자세에 대해서 명쾌하게 제시합니다.
이현필 선생은 전쟁 중에 고아를 돌보는데 그치지 않았고, 1951년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 소반바위 밑에서 벙어리 수도생활을 하던 중 정인세 원장에게 필답으로 “귀일원(歸一園)이라는 이름과 곧 나가서 광주역을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 따뜻하게 대접하고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이 운동은 귀일원 운동입니다. 반드시 시행하십시오”라고 적어주셨습니다.
이에 정인세 원장은 말씀에 따라 오갈 데 없이 광주 시내를 배회하면서 광주역, 광주공원, 광주천 다리 밑에서 사는 고아, 과부, 걸인,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보았으며, 방림동 밤나무골로 데려와 대접하고 하룻밤씩 재워 보냈으며, 일부 공동체 가족들은 광주천에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십시일반(十匙 一飯) 운동과 일작 운동(一勺 運動)을 하며 사회복지사업의 기반을 구축하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폐결핵 환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해방 직후만 하더라도 보건의료수준이 낮아서 폐결핵은 불치병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전염성 때문에 폐결핵을 앓은 사람은 마을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산골짜기 등에서 숨어서 사는 형편이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1956년에 서울YMCA 현동완 총무의 후원을 받아 무등산으로 올라가는 산수동 골짝에 폐결핵 환자를 수용하는 송등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오갈 곳 없는 환자 30여 명을 수용하고 무등산장 삼밭실을 중심으로 은거 생활하고 있는 환자들과 함께 보살핀 것입니다.
폐결핵은 이현필 선생과도 매우 인연이 깊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결핵환자를 간호하다 자신도 폐병에 걸렸으나 시련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투병생활 중 병세가 악화되자 제중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때가 1956년이니 산수동에 송등원을 설립한 것은 병원에서 퇴원하신 직후이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송등원을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폐결핵 등 중병에 걸리고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불쌍한 환자들을 심방 전도하며, 제중병원 의료봉사대를 초청하여 치료를 받게 해주셨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결핵으로 큰 고생을 하셨고, 결핵으로 인하여 사망하신 것입니다. 이현필 선생의 뜻은 동광원과 귀일원을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귀일원’은 하나님 사랑을 증거하는 단체로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 되어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알고 들어와 하룻밤이라도 쉬어갈 수 있도록 돌보며 한 가족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자”는 의미로 지은 것입니다. 1949년 동광원수도공동체가 터를 잡았던 광주시 남구 방림동(현 봉선동)에 1965년에 ‘귀일원’을 설립, 장애인을 돌보며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귀일원의 역사는 한국 사회복지 역사의 축소판이고, 한국 장애인복지의 금자탑입니다. 귀일원은 1965년 2월 24일 광주YMCA의 총무인 정인세 선생의 주관 하에 “불구폐질자” 보호목적으로 보건사회부로부터 “재단법인 귀일원” 설립신청허가(보사부 제696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초대 이사장으로 오북환 님이 취임하였고, 9월 10일 귀일원은 정원 20명의 “불구폐질자 보호시설인가”(전남사회 제58호)를 받았습니다. 당시 법인은 중앙정부 소관 부처의 허가사항이었고, 복지시설은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서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회복지법인이 별도로 없었고, 뜻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재단법인을 만들어서 사회복지사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재단법인 귀일원을 “사회복지법인 귀일원”(보사 제530호)으로 변경한 것은 1977년 9월 26일이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할 일은 귀일원은 “불구폐질자 보호시설”이었다는 점입니다. 1965년에는 장애인복지법이 없었고, 불구폐질자 보호시설은 아동복리법의 적용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 장애인복지시설은 물론이고, 한부모가족복지시설(모자원)조차도 아동복리법의 적용을 받았습니다. 1976년 12월 3일 귀일원의 명칭은 “사회복지시설 귀일원”(전남 제4호)으로 바뀌고, 정원 75명의 시설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귀일원은 1979년 11월 26일에 보건복지부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지금의 귀일민들레집의 자비반(남자 생활관)을 신축하고, 1985년 5월 2일 불구폐질자 수용시설인 귀일원을 정신장애자 수용보호시설로 변경허가(광주 제12호)를 받으면서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불구폐질자라는 다양한 종류의 장애인을 좀 더 특화시켜서 정신장애인의 생활, 재활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정신장애인 수용시설인 귀일원은 1999년 10월 6일 귀일정신요양원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고, 현재 정신보건법 제1조의 규정에 의한 무의무탁 정신장애자들이 요양, 재활치료를 통하여 자활능력을 기르며 새 삶을 추구하도록 협력함을 그 목적으로 합니다. 정원 120명에 현원이 110명인데, 이는 2001년 12월 17일 정원 170명을 120명으로 변경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회복지시설이 정원을 늘리려고 할 때, 과감히 그 인원을 줄여서 보다 인간다운 서비스를 지향하였습니다.
이러한 명칭의 변경은 정신보건법의 제정으로 정신장애인에 관한 사항이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정신요양시설로 변경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도적 변화는 명칭뿐만 아니라, 정신장애인에 대한 복지와 의료서비스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귀일정신요양원은 2000년 2월 29일에 “1999년도 전국 최우수 정신질환자 요양시설”로 선정되어 보건복지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이어서 “2000년도 전국 우수 정신질환자 요양시설”, “2002도 전국정신요양시설평가 최우수 정신요양시설로 선정”되었습니다. 귀일정신요양원은 2005년 2월에 Pre-Group Home을 운영하였고, 2006년 2월에 “2005년도 전국정신요양시설평가 우수정신요양시설”로 선정되었으며, 2006년 10월 1일에는 법인차원의 “귀일원중장기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현재 귀일정신요양원과 귀일민들레집은 “통합지원서비스체계확립을 위한 시범사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관을 평가할 때마다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정신요양시설로 선정된 것은 귀일정신요양원이 생활인에게 입소에서 퇴소까지 통합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귀일원은 장애인의 특성을 섬세하게 고려하여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당초 불구폐질자 보호시설인 귀일원에 속했던 귀일민들레집을 1999년 10월 1일에 “정신지체장애인 생활시설”(남구 99-1호)로 독립시켜서 정원 64명으로 개원한 것은 기존 불구폐질자를 정신질환자와 정신지체장애인으로 분류해서 그 특성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2001년 12월 29일에 정신지체장애인 생활시설인 귀일민들레집은 장애인생활시설(남구 제2000-5호)로 변경되었습니다. 귀일민들레집은 장애인복지법 제1조의 규정에 의한 무의무탁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요양, 재활치료를 통하여 자활능력을 기르며 새 삶을 추구하도록 협력함을 그 목적으로 하고, 현재 정원 90명에 82명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을 지적 장애인에게 한정시키지 않고 모든 장애인으로 확장하였으며, 장애인들이 개인별 특성과 장애정도를 고려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학습하도록 돕는 일상생활서비스를 제공하고, 아울러 의료재활, 교육재활, 사회재활, 직업재활을 통해서 가급적 스스로 살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귀일원이 장애인복지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2004년 2월 5일에 장애인 작업활동시설인 귀일향기일굼터를 신고(남구 제2004-1호)한 것입니다. 귀일향기일굼터는 정원 30명으로 개원하였는데, 이곳은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보호적인 환경에서 직업재활에 필요한 각종 진단, 치료, 교육, 훈련을 실시하여 잔재능력을 개발하고 직업재활의 가능성을 부여함으로서 취업을 통한 자립기반 조성과 더불어 궁극적으로 사회통합을 이루고자합니다. 따라서 주요 사업은 장애인의 직업진단과 평가, 직업재활 교육과 훈련, 생산활동(허브화분, 압화, 허브비누, 허브차), 허브까페운영, 허브농장운영, 개인별 소질개발 프로그램, 여가활동 등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귀일원의 사회복지활동은 한국 사회복지시설의 변화와 장애인복지의 발전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은 장애인의 수용 보호에 만족하지 않고, 이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장애의 유형과 수준에 따른 개별화된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국가와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사회복지시설 평가 때마다 전국에서 최우수기관으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는 귀일원이 이현필 선생의 뜻을 이어 받아서 소외된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복지를 실천하였기 때문입니다.
귀일원이 사회복지시설로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생활자의 시설 입소에서 퇴소까지 통합적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그치지 않고, 입소에서 사망까지 전생애복지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출생에서 사망까지 전생애 복지를 추구하면 더욱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입소에서 퇴소까지 뿐만 아니라 퇴소후 사후관리를 철저히 하여 사망시까지 전생애 복지를 추구해야 합니다. 또한 사회복지시설에서 생활한 사람들에게는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외면받는 경우가 많기에 사망 후 영혼의 안식을 추구하는 복지를 제안합니다. 돌아가신 후에 제삿밥조차 대접받지 못한 영혼을 위한 복지까지 추구하면 귀일원의 정신은 완성될 것입니다.
3. 주민과 함께 감사하는 복지
귀일원은 지난 60년 동안 소외된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복지를 매우 성공적으로 펼쳤습니다. 1965년에 귀일원을 설립한 이후 이현필 선생의 제자들은 동광원 공동체를 유지하면서 불구폐질자, 정신질환자, 지적(정신지체)장애인, 중증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을 운영하여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기관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아울러 이현필 선생의 뜻을 생각할 때, 귀일원은 주민과 함께 감사하는 복지를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귀일원은 정신질환자와 장애인을 위한 생활시설에서 이용시설로 사업의 영역을 확장시켰고, 생활보호에서 직업재활로 서비스를 혁신시켰지만, 진정한 복지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이현필 선생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이현필 선생은 1951년 전쟁으로 온 국민이 환란에 빠졌을 때, ‘귀일원’이란 이름과 함께 귀일원이 누구를 위해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광주역을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은 보호자가 없거나 있어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요보호대상자”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하룻밤이라도 따뜻하게 제공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노숙인에게 식사를 제공하거나 잠자리를 제공하는 수준의 복지가 아니라, 가장 어려운 상황에 있는 주민을 섬기는 복지를 하자는 뜻입니다. 이현필 선생은 그 방법으로 “십시일반”과 같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한수저의 곡식을 항아리에 저축해서 다른 사람과 나누자는 “일작운동”(一勺 運動)이야말로 평범한 시민도 실천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이현필 선생이 꿈꾸는 복지는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진정한 의미의 복지운동인 “시민과 함께 꿈꾸는 복지공동체”이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만날 때 “하룻밤이라도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성경에 나온 착한 사마리아인의 실천과 비슷합니다. 귀일원이 지향해야 할 복지는 시설의 경계를 넘어서서 주민과 함께 감사하는 복지실천입니다. 이러한 본보기는 이미 이현필 선생이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결핵환자를 돌보다가 결핵에 걸리셨지만, 그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결핵환자를 위하여 송등원을 설립하는데 그치지 않고 숨어사는 결핵환자를 산중으로 찾아가서 심방전도하였고, 제중병원 의료봉사대를 초청하여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끼리 협동조합을 조직해 공동생활로 협력하며 산에 유실수를 심을 것을 권장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서로 돕고 의지하여 바르게 살 것을 권장하는 농촌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꿈꾼 복지는 시설복지를 넘어서서 복지시설을 기반으로 하여 지역 자체를 복지공동체로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지역을 복지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 이현필 선생은 늘 새로운 자원을 개발했습니다. 본인이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광원 가족들 등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동참하도록 하였습니다. 시설의 설립 등 좀 더 큰돈이 필요할 때에는 후원자를 발굴하고, 지역사회 인사들을 참여시켰습니다.
1949년 수도공동체가 광주시 남구 방림동 밤나무골에 집을 지을 때에는 부지 100평을 김판용 집사로부터 희사받았고, 서울YMCA 현동완 총무의 희사금으로 집을 지어 이주하였습니다. 1949년에 여순사건으로 생긴 고아를 돌보기 위해서 화순군 도암면 봉하리 청소골에 초가삼간을 매입하여 고아 8명을 돌볼 때에는 김상욱씨로부터 8만원을 희사받았습니다. 1956년에 폐결핵 환자들을 수용하는 송등원을 설립할 때에는 현동완 총무의 후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물질적인 후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가 가진 각종 자원을 활용하여 지역복지를 실천하였습니다. 송등원을 설립하고 무등산에 은거하는 폐결핵 환자들을 돌볼 때에는 제중병원 원장 고허번(H. A. Codington) 선교사와 의료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시 제중병원은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 가족들의 특별한 후원기관이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폐결핵으로 제중병원에 입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원장 고허번 선교사의 정성어린 치료를 받으며 두 사람 사이에 영적 교제가 깊어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동광원공동체 가족이 제중병원 간호보조원, 미화부, 매점 운영 등을 10여 년 간 맡으며 협력하였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복지시설을 설치하여 운영하는데 그치지 않고, 복지공동체 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것은 동광원 설립과정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고아들이 늘어나자 1950년 1월 목포에서 고아원(목포공생원)을 운영하던 윤치호 선생의 제안으로 광주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한 70명이 모여 고아원 ‘동광원’을 설립한 것은 단순히 사회복지시설을 설치한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10여명 미만의 이사들만 있어도 시설을 만들 수 있는데, 뜻을 같이한 70명이 모여서 동광원을 만든 것은 복지공동체를 지향한 사건이었습니다. 동광원 고아들을 광주 황금동 적산가옥에서 수도공동체 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돌보다가, 6․25 전쟁 후에는 남자들은 광주 지산동에서, 여자들은 양림동에서 600여 명까지 돌보았습니다. 동광원 운영에 정부와 외국 원조단체의 지원과 상무대 미군의 도움이 컸지만, 한 시설에서 600여명의 아동을 돌볼 수 있었던 것은 동광원이 단순한 복지시설이 아니었고, 수도공동체이기에 가능했습니다.
귀일원이 창립 60주년을 넘어 백년과 천년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을 데려다 따뜻하게 대접하여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향해야 합니다. 귀일원은 어려운 이웃이 시설에 들어온 후에 돌보는 것이 아니라, 거리로 나아가서 어려운 이웃을 발굴하여 꼭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방식을 적극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거리를 헤매는 사람은 단순히 길거리에만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꼭 필요한 복지정보를 주는 것도 따뜻한 하룻밤을 제공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십시일반과 일작운동과 같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복지의 본보기를 제시했습니다. 따라서 귀일원은 주민에게 복지의식을 심어주고, 생활 속에서 복지를 실천하도록 교육시켜야 할 것입니다. 귀일원은 1999년 후원회가 조직된 이래로 후원회원 꾸준히 늘어나서 2008년 현재 등록된 회원은 1,275명이고 입금하는 회원은 635명입니다. 2007년 한 해 동안 후원액수는 106,343천원입니다. 이는 광주지역의 다른 사회복지시설에 비교할 때 많은 수치이지만, 꽃동네 등에 비교할 때 매우 적은 수치입니다. 복지에 뜻을 가진 사람들을 발굴하여 이들에게 후원할 기회를 주고, 자원봉사활동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복지실천입니다. 귀일원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위한 봉사와 후원을 넘어서서 지역사회의 장애인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복지를 더욱 개발해야 합니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도움은 생계, 의료, 교육, 직업재활에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장애인을 삶의 전 영역에서 부당한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주민에게 장애인차별금지법을 홍보하여 무엇이 장애인 차별인지를 인식시키며, 일상생활 속에서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고 배려하는 생활양식을 갖추도록 교육시키는 것은 귀일원이 해야 할 중요한 사업입니다.
귀일원은 찾아가는 복지를 해야 하고, 주민과 함께 복지를 실천하면서 감사하는 복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장애인과 그 가족에게 꼭 필요한 사항을 상담하고 고충을 해결하도록 돕는 일, 정보를 수집하여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일은 크게 품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자원봉사자를 발굴하여 이들을 훈련시켜서 이들에게 복지상담, 복지교육을 하도록 하면 됩니다. 사회복지사, 의사, 변호사 등 전문가에게 의뢰할 일도 있지만, 시민들이 조금만 관심을 갖고 기초교육을 받으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주민과 함께 감사하는 복지는 직업의 종류만큼이나 많으므로 그중에서 귀일원이 잘 할 수 있는 것부터 실천하기 바랍니다.
4. 세계인과 더불어 기도하는 복지
이현필 선생은 광주YMCA 최흥종 목사, 정인세 총무, 서울YMCA 현동완 총무 등 기독계 인사와 깊은 교류를 갖고 지냈지만, 모든 기독교인에게 늘 환영받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 가족들은 “맨발, 탁발, 남루한 모습 때문에” 환영보다는 경계의 대상이 되어 기독교노회로부터 이단시 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동광원 가족들은 이현필 선생의 말씀을 듣고 가정을 버리고 아이들과 함께 산중에 들어와 순결을 중시하고 세상을 등지고 삶으로써 금욕주의자 또는 산중파로 불렸습니다. 이현필 선생의 순결 생활로 부인 황홍윤 여사가 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동광원 가족들과 함께 산 일화만 보더라도 순결을 중시한 삶이 가족과 주변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이해받기 어려웠는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 가족들이 이단시 되자, 당시 엄두섭 목사는 동광원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보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는 동광원이 교회 조직에 참여하고 있지 않을 뿐 한국적 영성을 지닌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수도공동체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자아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순수한 수도공동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현필 선생을 “맨발, 탁발, 남루한 모습으로 죄인 됨과 약한 자임을 고백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그리스도를 본으로 사신 분이었다”고 말하고, 저서에서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맨발의 성자”로 기술하였습니다. 엄두섭 목사에 의해서 이현필 선생은 “한국의 성 프란체스코, 맨발의 성자”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당초 이현필 선생과 그를 따르는 공동체는 특별한 이름조차 없었고, 이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서 동광원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이 동광원 사람들 혹은 동광원 가족이라고 부르면서 동광원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기독교동광원수도회는 귀일원을 통해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복지를 실천하였고, 주민과 함께 감사하는 복지를 실천하였습니다. 이제 귀일원을 이끌고 있는 기독교동광원수도회의 남은 과제는 세계인과 더불어 기도하는 복지입니다.
이현필 선생이 1938년에 결혼하고, 1940년에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결혼한 것을 후회하며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에 들어가 영성기도 생활을 할 때, 스승 이세종 선생은 “파라, 파라, 깊이 파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이현필 선생은 성경을 깊이 파 진리로 조성되고 성숙되어 온전하고 완전한 하나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평생 동안 성경공부를 하였고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1932~1934년에는 광주 어비손(Gordon W. Avison) 농업학교에서 강순명 전도사가 이끄는 ‘독신전도단’에 가입하여 3촌(농촌, 어촌, 산촌) 전도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오늘날 동광원의 뿌리가 된 모든 활동은 성경공부와 전도로 요약됩니다. 1943년에 전북 남원읍 삼일목공소 오북환 집사 댁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드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성경 강해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1944년에 남원 지리산 자락 서리내와 갈보리에서 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남원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때에 이현필 선생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모습에 감화를 받은 신도들이 한명 두명 모이기 시작, 우리나라 기독교 사상 최초의 수도공동체를 이룬 것입니다. 오북환 집사도 삼일목공소를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공동체에 들어와 정신적 지도자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46년 제자들과 광주에 와서 광주YMCA를 중심으로 설교와 생활지도를 하였고, 1947년에는 남원 수지면 지리산 골짝 서리내(仙人來)에서 집단으로 소년 소녀 14명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후일 광주, 화순 도암에서도 성경을 가르쳤으며, 경기도 벽제 계명산에서는 1기에 10명 내외를 1년씩 5기에 걸쳐 오북환 장로가 강사를 맡아 교육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공부와 전도활동이 바로 오늘날 기독교동광원수도회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이현필 선생은 성경공부와 전도활동이라면 광주, 화순, 남원, 벽제, 서울 등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49년 수도공동체가 방림동 밤나무골에 터를 잡은 이후 매년 수양회를 열었습니다. 이때 주요 강사는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하신 다석 유영모 선생, 서울YMCA 현동완 총무, 광주YMCA 최흥종 목사 등이었습니다.
동광원은 1947년 남원에서 시작한 수도공동체로 1948년 광주로 이주해 있다가, 1980년 정인세 선생의 주관으로 공동체가 최초로 태동되었던 전북 남원군 대산면 운교리의 토지 147,400㎡를 매입, 교회와 집을 짓고 이전하면서 동광원 본원이 확고하게 재정립 되었습니다. 동광원은 매년 1월에 ‘공동체 가족 총회’를 갖고, 8월에는 동광원에서 생활하다가 속세로 나가 생활하는 가족들의 공동체 모임인 ‘삼온회’ 회원과 함께 ‘하계 수양회’를 열고 있습니다. 동광원 가족들은 이 행사들을 통해 이현필 선생의 거룩한 뜻과 동광원 설립 정신, 그리고 박해와 굶주림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겪었던 고난의 일들을 되새기며 오직 하나님에 속한 사람의 삶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동광원 가족은 일생을 결혼하지 않고 순결을 지키며 동광원 분원과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에서 불우한 이웃을 돌보거나 일하다가, 나이 들어 활동할 수 없게 되면 본원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공동묘지에 안장됩니다.
이현필 선생 사후 45여년간 동광원은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을 통해서 선생의 뜻을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한때 그 가족이 220여명에 이르렀지만, 현재는 동광원에 40명, 귀일원에 26명을 합하여 총 66명의 가족이 생활한다는 것이 위기입니다. 동광원의 위기는 이현필 선생을 직접 뵙고 따르던 분들의 상당수는 돌아가셨고, 일부는 속세로 나갔으며 새로운 사람이 거의 충원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샘에 비유하면 고인 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새 물이 바닥에서 샘솟지 않았습니다.
귀일원을 이끌고 있는 동광원수도회가 해야 할 긴급한 과제는 이현필 선생이 이세종 선생으로부터 배웠던 “파라 파라 또 파라”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이 땅에서 누군가는 사회복지법인을 만들어서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할 수 있지만, 이현필 선생의 뜻을 잇는 동광원 가족은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현재 사회복지법인 귀일원 산하에 귀일정신요양원, 귀일민들레집, 귀일향기일굼터 3개 시설에 장애인 240여 명과 종사자 60여 명이 생활하고 있는데, 이현필 선생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동광원수도회가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일은 귀일원을 운영하는 것을 넘어서서 세계인과 더불어 기도하는 복지의 상을 개척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전쟁중에 고아를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선명회”는 이미 국제월드비전으로 발전했고, 월드비전은 전 세계의 고통 받는 아동과 주민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월드비전도 ‘사랑의 빵’을 통해서 세계적인 모금기관으로 발전했고, ‘사랑의 쌀’을 통해서 북한 주민과 동포애를 나누었습니다. 동광원수도회는 이현필 선생이 했던 바로 그 방식대로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대회를 개최하며, 매년 수양회를 보다 개방적 체계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이현필 선생은 수많은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했습니다. 동광원과 귀일원을 이끈 오북환 원장, 김준호 원장, 정인세 원장, 새마을중앙연수원 김준 원장 등이 그들이었고, 귀일원을 운영했던 역대 원장이 그의 제자들입니다. 이현필 선생은 여성인재를 육성하는데도 힘썼는데, 그 전통은 여성들만의 수도처인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에 있는 계명산 분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귀일원과 동광원수도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현필 선생이 추구했던 “주민과 더불어 기도하는 복지”를 더욱 활기차게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동광원수도회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서 동광원의 인재 양성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현재 동광원 가족이 66명으로 귀일원의 종사자 60여명보다 많지만, 동광원가족 양성을 등한시 한다면 세월의 흐름 속에 동광원은 역사 속에서 희미해질 것입니다. 먼 훗날에도 귀일원은 이현필 선생과 동광원 가족들의 뜻을 새기겠지만, 그 뜻이 퇴색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동광원수도회와 귀일원은 기도하는 복지의 원형을 이현필 선생의 활동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현필 선생은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광주, 전남, 전북, 서울, 경기 등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하였습니다. 교통이 매우 불편시절을 고려할 때 이현필 선생의 행동반경은 오늘날 광주, 평양, 하노이, 울람바토르에 해당될만한 거리입니다. 기독교동광원수도회와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은 세계를 향해 열린 지구촌 복지를 추구해야 합니다.
귀일원은 사회복지에 뜻이 있고 전문성이 있는 직원을 뽑을 것이 아니라, 이현필 선생의 뜻을 알고 이를 공감하면서도 사회복지에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양성해서 이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또한 시민을 대상으로 성경학교를 열고, 시민을 대상으로 동광아카데미를 기획하여 동광원의 정신으로 체화된 사람을 양성한 후에 이들을 채용해야 할 것입니다. 귀일원 직원을 위해서도 매년 1회 이상 동광원수양회를 개최하여 이현필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심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불교계에서 숭산 스님은 외국인 제자를 많이 키운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숭산 스님은 영어를 썩 잘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일찍이 한국 불교를 외국에 전파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외국인 포교활동을 한 결과 오늘날 현각 스님과 같은 출중한 제자를 배출시킨 것입니다.
동광원수도회도 광주, 남원, 화순, 벽제의 틀을 벗어나서 세계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나라는 한국처럼 동족상잔의 경험을 갖고 한국인이 아픔을 준 베트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현필 선생은 전쟁 속에서 고아와 불구폐질자를 돌보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전쟁의 경험을 가진 나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에 동광원 가족을 파견하여 아동복지시설을 만들고 장애인복지사업을 실시함으로서 지구촌 주민과 더불어 기도하는 복지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평생 동안 순결하게 살겠다는 동광원의 가족을 찾기 어렵다면, 동광원의 취지에 공감하는 재가 가족을 키우는 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기독인에게 복지의식을 심어주고, 생활 속에서 복지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치는 동광아카데미 혹은 귀일아카데미를 개최하여 십시일반의 복지를 구현해야 합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누구나 뜻만 있으면 사회복지사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광원수도회가 추구하는 복지를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2008년 7월 1일부터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이 도입되어 봉사보다는 수가를 생각하면서 복지를 실천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보다는 수지를 먼저 생각해야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할 수 있는 시대로 바뀔 때, 소외된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복지, 주민과 함께 감사하는 복지, 지구촌 주민과 더불어 기도하는 복지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보다 철저한 복지교육이 절실합니다.
이제 동광원과 귀일원은 240여명 장애인을 위한 복지를 넘어서야 합니다. 대한민국 200만명 장애인을 위한 복지, 장애인과 그 가족을 위한 복지, 대한민국을 넘어서서 지구촌 주민과 더불어 기도하는 복지를 지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귀일원을 이끌고 있는 동광원수도회는 젊은 인재를 양성해서 지구촌 곳곳에 파견해야 할 것입니다.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했다는 영광을 뒤로 하고 지구촌 복지를 위하여 뛰어야 합니다.
세계로 나서기 전에 이미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과 귀화한 한국인을 위한 복지를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먼저 이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이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며, 배움의 기회를 주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이들과 함께 지구촌의 복지공동체를 꿈꾸고, 인터넷을 통하여 복지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이미 광주는 아시아문화 중심도시를 꿈꾸고 있으므로, 광주에 기반을 둔 동광원수도회와 귀일원은 아시아복지 중심도시를 꿈꾸어도 좋겠습니다. 세계인과 더불어 기도하는 복지는 그 내용이 무궁무진합니다. 여러분이 가장 잘 할 수 있고, 꼭 해야 할 일부터 시작하면 세계인은 더불어 기도할 것입니다. 이현필 선생의 삶을, 귀일원의 정신을 세계인과 더불어 펼치기 바랍니다.
[최종안 작성 2008년 8월 2일]
참고문헌
강용복(2007), 정신장애인 요양시설 통합지원체계의 효과성에 관한 연구, 광주대학교 사회복지전문대학원.
귀일원(2008), 성자 이현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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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두섭 엮음(1993), 순결의 길 초월의 길, 은성.
이용교(1993), 이야기 사회복지, 은평천사원 출판부.
이용교(1998), 시설과 복지, 은평천사원 출판부.
이윤구(2007), 사랑의 빵을 들고 땅 끝까지, 아름다운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