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의식이 깨인다. 분명 깨였는데 아직도 잠속에 있는 듯 마음이 고요하다. 창밖은 아직 짙은 어둠속에 있다. 왜일까. 어둠의 틈 사이로 무연히 유년시절의 내가 모습을 드러낸다. 심장 속 깊은 곳에 묻혀있던 오래된 삽화들이 하나, 둘 희미하게 모습을 갖춘다.
흙 담벼락이 보이고 그 앞에 서 있는 석류나무가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만개한 주황빛의 석류꽃, 그리고 우물이 보인다. 흙담, 석류나무 그리고 우물 그것은 고향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다.
어린 시절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있으면 나는 가만히 우물을 들여다보고는 했다. ‘야아’ 하고 소리치면 소리는 미묘한 울림을 가지고 공명했다. 그리고 이내 고요해졌다. 우물은 깊었고 깊은 만큼 무서운 곳이었다. 혹시 잘못하여 저 곳에 빠져버린다면 가족들은 나를 찾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이 항상 궁금했다.
한번 쯤 그 곳으로 내려가 차가운 물을 직접 만져보고 싶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물속의 고요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는지 몰랐다. 바람조차 접근할 수 없는 곳, 오직 두레박만이 접촉 할 수 있는 곳에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상하게 어린 시절부터 그런 고요가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이 새벽의 고요가 그 시절의 고요를 불러온 모양이다.
부모님이 처음 우물을 팔 때 아무리 땅을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땅속 깊은 곳에 있는 암반을 만나 버렸다. 샘이 있다는 확신도 점점 희미해져갔다. 물을 찾아 시작한 공사였으니 멈출 수도 없었다. 암반을 제거하기 위해 화약이 두 번 설치되었다. 그것을 터트릴 때 집터가 들썩했다. 그 만큼 어렵고 큰 공사였다.
마침내 암반 밑에 있던 샘을 찾아내었다. 샘은 빛이 들어가지 않는 깊은 곳에 있었다. 위에서 바라보면 까만 원판처럼 보였다. 샘 주위로 동그랗게 돌을 쌓아 올렸다. 하늘을 향해 뻗은 동굴처럼 둥근 돌이 차곡차곡 쌓여 허공과 연결이 되었다. 드디어 우물이 만들어졌다. 우물 속 돌은 파란 이끼를 키웠고 파란 이끼는 점점 까맣게 변해갔다. 그렇게 이끼를 품은 돌은 화석처럼 샘을 지켰다.
우물담보다 키가 커지면서부터 목이 마르면 직접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던지고는 했다. 두레박과 함께 밧줄이 주루룩 흘러내렸고 일 초, 이 초······, 짧지 않은 시간의 흐른 후 ‘찰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와 함께 까만 샘물이 두레박주위로 동그란 파문을 만들었다.
나는 작은 손으로 밧줄을 당겨 올렸다. 여린 팔뚝 힘으로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길었던 것일까. 꿀꺽꿀꺽 목마름을 해결하고도 두레박의 물은 넉넉했다. 이상하게 물이 달았고 깊은 만큼 시원했다. 나는 마시고 남은 물을 석류나무에 뿌렸다. 마르지 않는 샘이 있으니 물은 흔하고 흔했다. 무엇보다 물을 긷는 일이 놀이처럼 재미있었다.
한 겨울에도 우물은 얼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겨울은 혹독했다. 함박눈도 자주 내렸다. 목화솜만한 눈송이가 옅은 바람 속에 분분히 허공을 날아다니고는 했다. 그리고 천지간은 이내 하얗게 변해갔다. 좁은 골목길에 쌓인 눈이 무릎까지 오기도 했다. 고향의 겨울하면 하얀 풍경이 먼저 생각나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수도는 얼어서 사용할 수 없었다.
시골에서 집에 우물을 둔다는 것은 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름이 되면 이웃은 자주 우리 집 우물을 찾았다. 미숫가루를, 국수를 시원하게 먹기 위해서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시원한 물은 귀했다. 물론 집집마다 수도가 있었고 동네 입구에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우물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 우물의 청량함을 따라오지 못했던 것이다.
시골 풍경이 그러하듯 집집마다 흔하게 오리나 닭을 길렀다. 닭과 달리 오리란 녀석은 물을 좋아해서 자주 우물가를 서성거렸다. 햇살은 하얗게 빛났고 석류꽃은 만개했으며 우물가의 하얀 오리들은 꽥꽥 울음을 울었다. 그 풍경 속에서 자주 샘을 들여다보던 작은 아이는 키를 더 키웠고 커진 키만큼 샘을 들여다보지 않는 시간이 흔해졌다. 급기야 그 아슴푸레한 풍경을 모두 놓아두고 도시로 터를 옮겨버렸다.
도시에서는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머리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져 갔고 우물이, 우물가에서 놀던 오리가, 석류나무가 삶속에서 자연스레 퇴색되어갔다. 어느 날 부터는 잊는 줄도 모르고 까맣게 잊혀졌다. 신기한 것은 많은 것이 변했어도 여전히 고향 소식을 듣는다. 집성촌이던 고향이웃은 대부분 일가 할아버지였고 아재였고 같은 항렬을 가진 언니 오빠 혹은 친구였다. 그러니 집안에 잔치나 장례식이 있으면 자연스레 소식이 묻혀왔다.
고향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고향집 우물이 떠올랐다. 물이 흔해지고 냉장고가 사시사철 돌아가는 요즘도 우물 샘을 길어먹을까. 우물담은 어떤 모습으로 늙어 있을까. 아득히 깊었던 샘은 또 얼마나 낮아졌을까. 우물을 지키던 석류나무는 지금도 흙 담벼락을 의지한 채 붉은 열매를 알알이 매달고 서 있을까.
안타깝게도 고향집 우물 소식은 들을 길이 없다. 고향집에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고향집을 샀던 일가친척도 모두 고향을 떠나 도시로 혹은 멀고 먼 하늘나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다만 샘을 감싸고 있는 돌은 여전히 까만 물이끼를 품고 늙어가고 있을 것이라 상상할 뿐이다.
유년의 삶이 담겨 있는 곳, 흐린 날이면 물비린내와 흙 비린내를 함께 풍기던 고향집 우물가. 그곳은 내 삶의 근원적 그리움이 박제되어 있다.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 그곳에서 두레박에 물을 길어 마시던 어렸던 내가 눈에 밟힌다.
첫댓글 시골에서 우물 있는 집이 정말 부러운 시절이
있었죠.
저는 양동이로 이웃집 우물물을 날랐어요.
소희작가님 유년이 풍요로웠나봐요.
우물이 있는 것만으로도 제겐 그래요. ㅎ
우물 고향집, 가족들....많이 그립죠.
잘 읽었습니다.
시골집은 측담이 높았고 대청이 있고 우물이 있는 집이었어요.
한때는 대청이 그리웠고 우물이 그리웠고...그러다 이제는 모두 잊어버리고 산답니다. 그래도 그런 동화같았던 어린시절이 있었다는 것에 지금은 감사하답니다^^댓글 감사해요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