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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6) 2022. 7. 24
성령의 열매(6) - 양선
갈5:22-23, 갈6:9-10
오늘 우리가 살펴본 성령의 열매는 여섯 번째 열매인 ‘양선’입니다.
‘양선’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아닙니다. 한자어로 풀이하면, ‘어질 량’(良)자와 ‘착할 선’(善), 즉 성격이나 몸가짐이 ‘어질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원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양선이란 헬라어로 "아가도쉬네"(ἀϓάθωσύνη)인데 영어(NIV. KJV)로는 goodnes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곧 ‘착함’이나 ‘선행’이라고 해석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이 ‘양선’의 열매를 강조한 본문이 갈6:7-10입니다.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 선을 행하라
‘선’은 사랑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선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나는 착하다고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상대적 평가).
지난 주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우상혁 선수가 은메달을 땄다는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참 우리나라는 인구 수도 적은데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탄생하는 나라인 듯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한계치가 있습니다. 기준이 높아지면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들이 행해야 할 ‘선의 기준’을 분명히 제시하셨습니다.
마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기준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온전하심’입니다. 기준이 너무 높습니다. 부담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양성의 열매’ 역시 성령의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본래 사람의 성품이 악하다고 증언합니다.
롬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성품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단순한 ‘영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실존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에만 생겨나고 맺히는 열매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양선’의 열매를 요구하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 그 목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롬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는 악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아니 악을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복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베풀어 악을 행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의 이야기 속에 나옵니다. 다윗은 두 번씩이나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을 살려 준 다윗 - 삼상24:1-22>
자신의 왕위를 다윗에게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사울은 다윗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다윗이 ‘엔게디’라는 곳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알려줍니다. 사울은 무려 3천 명의 특공대를 동원하여,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용변을 보고 싶어졌습니다. 주변을 보니 길 가 양의 우리 근처에 굴이 있어 홀로 그 굴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마침 그 굴 깊은 곳에 다윗의 일행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사울이 나간 후에 다윗도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부릅니다. 사울이 돌아보자, 다윗은 먼저 엎드려 절을 합니다. 왕 앞에 예의를 갖춥니다.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당당히 사울을 조롱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합니다.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11)
사울은 자신의 옷자락이 잘라 나간 것을 확인한 후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하고 말합니다. 그동안 사울은 다윗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새의 아들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울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였는데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합니다. 다윗의 선한 행동은 사울의 회개를 불러왔습니다. 회개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받으니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과 더불어 순종할 힘도 생겼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한 가지 다짐을 받습니다. 네가 왕이 되더라도 “너는 내 후손을 끊지 말고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까지 합니다. 다윗이 맹세하자 사울은 철수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변화가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울을 살려준 다윗 - 삼상26:1-12>
얼마 후 십 광야의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알려줍니다. 아마 이 사람은 지난번에도 다윗의 위치를 사울에게 고한 자였을 것입니다(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사람 - 특별한 보상을 노리고). 어떤 사람이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고 밀고를 해 온 것입니다. 이 사람의 행동은 사울의 잔잔하던 마음에 돌을 던졌습니다. 절제하던 마음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사울의 마음에 다시 다윗을 죽일 충동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사울이 이 사람의 충동질에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맹세한 것을 기억하고, 또 다윗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고, 그를 야단치고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의 꼬임에 넘어갔습니다.
사울은 또다시 3,000명의 정예의 군사들을 선별하여 다윗을 추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잡으러 다시 출동한 것을 안 다윗은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의 진영의 위치를 확인한 후, 밤중에 몰래 사울의 진영 안으로 침투합니다. 다윗은 군대장관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 안으로 잠입하여 들어갔습니다. 들어가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3,000명의 군사가 모두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입니다(12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다윗과 아비새는 쉽게 진영의 중앙으로 침투해 사울의 자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창을 머리 곁 땅에 꽂은 채로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아비새는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번에도 사울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유는 지난번과 같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사울의 머리 곁에 꽂혀있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 멀리 서서 사울 왕을 부릅니다. 그리고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고 확인해 보라고 말을 합니다. 사울은 지난밤에 자신의 머리맡에 있던 창과 물병이 다윗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을 또다시 죽이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다시 회개합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다윗을 “내 아들 다윗아”라고 부르며 “내가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합니다. 다시는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결국, 이 일 후에 사울은 죽을 때까지 다시는 다윗을 보지 못합니다.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악을 행하는 사울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2. 낙심하지 말라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하는 사람의 문제는 낙심입니다. 나는 선을 행하지만, 상대는 금방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사울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는 처음 다윗이 자신의 옷자락만 베었을 때, 감동했습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거짓으로 연기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는 진짜로 다윗의 태도에 감동했고, 그의 이름을 울면서 불렀으며, 진짜로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겠다는 마음을 품고 고백한 것입니다. 문제는 지속성입니다. 다시 옛 생각,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다윗을 추적합니다.
두 번째 다윗이 사울을 살려 주었을 때, 사울은 다윗을 자신에게 돌아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 왕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완전히 변화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선을 베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세상은 우리의 선의를 왜곡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만만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인간들을 효과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가를 토론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한 악마는 핍박이 최고의 무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악마가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핍박은 효과적인 무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핍박을 받을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더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왔고 그들의 믿음은 더 순결해 졌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악마가 유혹이 최고의 무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악마가 그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유혹으로 넘어진 후, 오히려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거울삼아 더욱 무장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한 악마가 실패가 최고의 무기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학업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면, 믿음이고 뭐고 다 포기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악마가 내가 아는 정말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실패하자 저들의 기도가 부족했다고 믿음이 부족했다고 목적 설정을 잘못했다고 자성하고 더 기도하고 더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그는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회의를 거듭하던 악마들은 마침내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낙심이었습니다. 한문으로도 ‘낙심’(落心)은 “마음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더 이상이 의욕이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인간들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면, 마귀의 뜻을 이룰 수 있음을 간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핍박도, 유혹도, 실패도 우리를 꺾을 수 없습니다. 낙심하지만 않는다면요. 그러나 낙심하여 주저앉으면 그땐 끝장입니다. 낙심한다는 말은 곧 ‘믿음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임계점’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시지요? 임계점이란 말은 "어떤 상태가 지속되다가 갑자기 확 바뀌는 시점"을 말합니다. 포트에서 물을 끓일 때, 처음부터 끓지 않습니다. 계속 열기를 가하지만 끓지 않다가 100도에 도달하면서 갑자기 끓기 시작합니다. 물은 98도나 99도에 끓지 않습니다. 단지 임계점인 100도에 도달해야 끓습니다. 임계점에 도달하기 전에 포기하거나 낙심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3.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신앙고백 – 공의와 신실함을 따라 갚으시는 하나님>
다윗은 사울 왕에게 자신이 선을 베푼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말은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삼상26:23-24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24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다윗의 고백 속에 ‘다윗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공의의 신실함을 따라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왕의 생명을 귀중히 여겼으니 여호와께서 내 생명도 귀중히 여기셔서 나를 모든 환난에서 구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행실을 저울에 달 듯 정확히 달아보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는 실수가 없습니다. 오판이 없습니다. 모든 행위대로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다윗의 이 믿음은 현실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그 모든 환란에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낙심하지 않고 ‘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계2:23)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욱>
바울은 선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갈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여기에서 ‘믿음의 가정들’은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를 말합니다.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해야 하지만, 왜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팔이 안으로 굽듯 우리끼리만 잘해 보자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것은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것은 ‘구호’만의 사랑에 머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온 인류를 사랑합니다!’라고 했을 때, 그 말은 좋은 구호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천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부터 착한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아무에게도 착한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작은 일’부터, ‘가까운 사람들’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가까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거창한 구호를 외치면 그 진정성에 의문이 생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그러나‘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가이드를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씀 -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우리는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엡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충만히 보내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내 옛사람이 그대로 살아있고, 내 악한 옛날 습관이 그대로 남아있는 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온전한 다스림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양선’ 즉 ‘선함’이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착한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먼저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눈빛에서, 표정에서, 말과 행동을 통해서, 착함이 자연스럽게 스미어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그 착함으로 악을 이겨 내십시오. 이를 위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를 착한 사람으로 새롭게 빚으시고, 우리를 통하여 좋은 가정, 좋은 기업, 좋은 교회, 좋은 사회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앞으로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양선’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 내가 속한 공동체를 선하게 만들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