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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7) 2023. 8. 13
내부의 위기를 극복하라
느헤미야4:7-11
<더욱 심해진 언어폭력>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이 실제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착수하는 것을 방해하던 적대자들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더욱 집요해졌습니다.
하나는, 더욱 심해진 조롱 섞인 언어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인 위협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산발랏은 먼저 더욱 유대인들을 비웃으면서 심한 말로 조롱하였습니다.
그의 조롱하는 말은 다섯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2). 유대인들은 ‘미약한 사람들’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2)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2). 외부의 도움 없이 너희들끼리 힘을 합해 성을 쌓는다고 견고하게 될 줄 아느냐.
3) “제사를 드리려는가”(2). 그 위에 올라가서 제사라도 드릴 요량이냐. 이것은 성벽이 아니라 돌로 된 작은 제단을 쌓는 것으로 폄훼하는 말입니다.
4)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2). 성벽이 무너진 지 거의 141년이 지나도록 쌓지 못했는데, 지금 하루 일한다고 완성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5)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2). 제대로 된 돌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조롱입니다.
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옆에 있던 도비아가 유대인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합니다.
“...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3).
말은 힘이 있습니다. 조롱하는 말을 들으면 화도 나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게 되고, 의욕이 사라집니다. 실제로 그들의 조롱은 유대인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대응하였을까요? 직접 항의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4) 하고 하소연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아가게 해 달라”(4)고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좌절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을 낙담시키는, 하나님의 대적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대적이니 하나님이 처리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적대자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해’ 성벽을 중수하였습니다. 결과, 성벽이 전부 연결되고 높이가 절반에 이르도록 쌓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공격 – 물리적인 위협>
자신들의 비웃음과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이 성벽의 복구해 나가자, 그들은 물리적인 공격을 계획합니다.
7~8절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 8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그 대적들도 점점 세력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동안 산발랏을 중심으로 하여 도비야와 게셈이 훼방하였습니다. ‘산발랏’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사마리아 지방의 유력한 지도자였습니다. ‘도비야’는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암몬 지방의 유력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게셈’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사람들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예루살렘 서쪽에 있던 ‘아스돗 사람들’이 함께 합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동서남북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벽 쌓는 일을 방해하고 나선 것입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냥 조롱하는 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끼리 연합군을 구성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8)며 구체적인 공격 계획을 세웠습니다.
<위기를 극복하라>
당연히 이 소문은 유다 백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의 조롱과 위협은 당연히 유다 백성들을 위축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성벽을 쌓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9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괜찮은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누룩), 유다 공동체 내부로부터 피하지 못할 위기가 닥쳤습니다(세 가지).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은 위기가 닥치기 때문입니다.
첫째, 육체의 한계에 부닥쳤습니다.
10절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그들은 성벽을 쌓는 일을 서둘렀습니다. 방해꾼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쉬지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육체적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힘이 다 빠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현실적인 한계입니다.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휴식의 시간이 보장되어야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휴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조를 짜서 교대로 일하게 해야 합니다. 절대적인(최소한의) 쉼과 휴식을 보장해 줌으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최근(7월 19일) 안타까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코스트코 하남점에서 카트 및 주차관리를 하던 30세의 직원이 더위 속에서 과로로 쓰러져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틀째 낮 최고기온이 33도를 기록해 폭염특보가 내려진 날이었습니다. A씨는 이날 매 시간 200대의 카트를 밀고 다니며 17㎞를 이동했다고 합니다(엄마에게 4만보 이상 걸었다고 문자). 쓰러진 A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내 숨졌습니다. 고용노동부 경기지청 광역중대재해수사과는 코스트코 하남점에 대해 중대재해법·산업안전보건법 등 법 위반 여부를 수사 중이라고 13일 밝혔습니다.
아직도 이런 후진국형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충분한 휴식과 최소한의 근로 환경은 보장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목회자와 성도들 모두)에게서도 조심해야 할 것은 육체의 피로에서 오는 탈진입니다.
위임하지 못하고, 혼자 감당하다가 탈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별히 열심을 내는 성도들 가운데, 봉사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지나치게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왜, 나만 힘들지”하는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적당한 쉼과 휴식이 필요합니다. 적당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몸 관리를 철저히 하여 탈진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쉬는 것을 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 쉬는 것도 주님의 일입니다.
둘째, 육체의 한계보다 더 큰 문제는 마음이 낙심하는 것입니다.
10절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자신들의 상황을 토로한 것입니다. 이 한 문장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마음이 낙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겠구나’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입니다. 단순히 육체의 피곤함이 문제였다면 "며칠 쉬면 다시 쌓을 수 있습니다"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고 말한 것은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낙심)는 뜻입니다.
한문으로 ‘낙심’(落心)은 “마음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더 이상이 의욕이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육체의 피로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마음이 낙심되어 있으면, 힘이 생겨도 의욕이 생기질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낙심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비전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낙심한다는 말은 ‘믿음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낙심은 전염력이 강합니다. 금방 옆 사람에게 전파됩니다. 함께 의욕이 상실됩니다. 결국, 전체 공동체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귀가 그의 졸개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인간들을 효과적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가”를 토론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처음에 한 졸개가 핍박이 최고의 무기라고 주장했습니다. “무조건 때려잡으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내 핍박은 효과적인 무기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물론 몇몇 사람들은 믿음을 포기하기도 하지만, 대다수 사람은 핍박을 받을수록 더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왔고, 그들의 믿음은 더 단단해졌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제기된 때문입니다.
다른 졸개가 유혹이 최고의 무기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유혹해서 타락하게 하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졸개가 “몇몇 사람은 넘어뜨릴 수 있는데, 그 후 오히려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거울삼아 경계하기 시작하더라”면서 유혹도 효율적인 무기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다른 졸개가 실패가 최고의 무기라고 소리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학업에 실패하고 사업에 실패하면 믿음이고 뭐고 다 포기하더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졸개가 “내가 아는 정말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실패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목표 설정을 잘못했다고 자성하고 더 기도하고 더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실패도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리는 최적의 무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의를 거듭하던 악마들은 마침내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낙심이었습니다. 핍박도, 유혹도, 실패도 우리를 꺾을 수 없습니다. 낙심하지만 않는다면요. 그러나 낙심하여 주저앉으면 그땐 끝장입니다.
마귀는 인간들로 하여금 ‘낙심’하게 하면 마귀의 뜻을 이룰 수 있음을 간파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초대교회 상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재림의 약속도 지연되고 있었고, 외부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각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낙심하지 말 것’을 수차례 권면하였습니다.
먼저 자신은 그 어떤 환란과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각 교회에 편지를 통해 낙심하지 말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살후3: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분명히 설명하여 주십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임계점’이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 있으시지요? 임계점이란 말은 "어떤 상태가 지속되다가 갑자기 확 바뀌는 시점"을 말합니다. 포트에서 물을 끓일 때, 처음부터 끓지 않습니다. 계속 열기를 가하지만 끓지 않다가 100도에 도달하면서 갑자기 끓기 시작합니다. 물은 98도나 99도에 끓지 않습니다. 단지 임계점인 100도에 도달해야 끓습니다.
나무를 부러뜨릴 때 힘을 가하면 굽기 시작하지만, 처음부터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구부러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부러지게 됩니다. 임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물이 끓지 않거나, 나무가 부러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임계점’을 기다리지 못하는 인내의 부족으로 성취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중도에 포기하는 것은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은 것을 불가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반드시 때가 온다”는 믿음을 갖고 인내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부흥하지 않는 시대에 목회하는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낙심하기 쉽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에는 다 꿈이 있습니다. 졸업하고, 개척하면 (자기가 목회하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으로 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부딪쳐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낙심하게 됩니다. 이런 때에 가져야 할 마음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 진정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낙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대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 주셨는데, 그분의 이름이 ‘보혜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즉, 성령 하나님은 ‘권고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성령님께 아뢰고, 교제하면’ 위로를 얻게 됩니다. 바라기는 ‘성령 안에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최후 승리의 기쁨으로 맛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그들은 두려워했습니다.
11절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적대자들의 말에 주눅이 들었습니다. 아직 그들이 쳐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레 겁을 먹은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담대함을 얻습니다.
수차례 말씀드리지만,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정탐을 나갔던 열두 지파의 대표 중, 10지파의 대표는 무엇을 보고 왔습니까? 거인족을 보았습니다. 철옹성 같은 성벽을 보았습니다. 스스로 ‘메뚜기’라고 비하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역사는 당신의 전능하심을 믿고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갈 때에, 예수님은 배의 뒤편에서 주무셨습니다(마 8장). 그때 바람이 불어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두려워 떨던 제자들은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하고 말했습니다. 잠에서 깨신 예수님은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풍랑만 바라보니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마 14장에 보면, 예수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제자들이 탄 배가 바람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는데, 예수님께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고 대답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습니다. 그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간 풍랑을 보니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느헤미야의 간증을 들었을 때는 힘이 생겼습니다.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함께하신다는 간증을 듣고 그 순간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던 눈이 ‘엉뚱한 곳’, 즉 적대자들을 향하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를 소망하는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공격해 대는 적대자들을 바라보면 낙심하게 되고,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복음성가 함께 부르기 - ‘주만 바라볼찌라’
<맺는 말씀 – 위기를 극복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벽을 쌓던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닥친 위기는, 오늘날 주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는 성도들에게 똑같이 다가오는 위기입니다.
‘탈진’을 조심하십시오.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위로자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려움’을 이겨내십시오.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볼 때 담대함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면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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