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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7) 2024. 7. 31
요압과 시므이의 최후
왕상2:26-46
요압과 시므이를 제거하라는 다윗의 유언을 받은 솔로몬은 마음의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에게도 합당한 명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그 빌미를 ‘아도니야’가 주게 됩니다. 본래 아도니아는 다윗의 유언에는 없던 인물입니다. 그가 반란에 실패한 후 성막의 제단 뿔을 잡았을 때, 솔로문은 조건을 걸고 아도니야를 집으로 보내줍니다. 그 조건은 ‘조용히 지내라’는 것입니다.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1:52)라는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이스라엘의 왕권이 본래 자신의 것이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기회를 노리던 그는 나름 묘수를 찾아내었습니다. 선왕 다윗의 후처 가운데 가장 젊고 아름다운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으면 자신이 지위가 선왕의 반열로 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찾아가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맞도록 솔로몬에게 부탁해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과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밧세바는 선한 마음으로 그의 요구를 솔로몬에게 부탁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의 부탁이 자신의 왕권에 대한 도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거절하면서, 급기야 브나야를 시켜 아도니야를 죽임으로 후환을 없애 버립니다.
<아비아달의 추방>
그리고 이것을 기회로, 내친김에 아도니야를 적극 지지했던 사람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제사장 아비아달이었습니다.
26-27절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이로되 네가 내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아버지가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 27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아비아달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아히멜렉의 아들입니다. 오래전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하기 전에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가서 도움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21:1-9). 아히멜렉은 다윗 일행에게 진설병을 제공하면서 그동안 성소에 보관해오던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그 일이 사울 왕에게 알려졌고, 결국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제사장 85명이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삼상22:18).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바로 아비아달이었습니다.
아비아달은 곧장 다윗에게 도망했고, 다윗이 왕위에 오른 이후 사독과 함께 하나님의 궤를 책임지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삼하8:17). 제사장 아비아달은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대상 15:11-15)와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당하여 피난할 때(삼하 15:24-29) 법궤를 맡아 책임짐으로써 다윗을 도운 적이 있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모든 환난을 받았고, 모든 힘든 시기를 겪어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윗의 말년에 그는 아도니야의 반역에 가담하였습니다. 이는 마땅히 죽을 죄이지만,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과 오랜 인연을 생각해서 그를 죽이지는 않고 두 가지 징계를 내립니다.
하나는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하는 것입니다(26). ‘아나돗’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고을로 제사장의 성읍입니다(수 21:18, 대상 6:60).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5.6km 정도의 거리로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부친 힐기야의 고향이기도 합니다(렘 1:1). 고향으로 가라는 말은 더 이상 정치적인 활동을 금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사장의 직분을 박탈하는 것입니다(27).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는 직분은 왕이 주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제사장 직분을 파면한다’는 뜻은 더 이상 그 직분을 가지고 공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뜻입니다(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왕에 대항하여 계속 반역을 모의함으로써 스스로 제사장직으로부터 이탈하였다고 보아야 함). 그리고 이미 아비아달의 나이가 80세가량의 노령이었으므로, 이를 자연스러운 은퇴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이러한 징계가 엘리의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27절b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본래 제사장은 아론의 후계들이 맡게 되어 있습니다.
아론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그 중 나답과 아비후는 잘못된 분향 사건으로 인해 일찍 죽었기 때문에(레 10:1~2),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후손들이 제사장 자격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간음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을 때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함으로(범죄한 그들을 죽임),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대제사장의 직분을 잇도록 하셨습니다(민25:1~13).
그러나 가나안 정착 후 사사 시대를 거치는 동안,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후손으로 이어지던 제사장 후손이 단절되고 대신 이다말의 후손들이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다말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엘리 제사장입니다. 엘리는 사사 시대 말기에서 이스라엘의 왕정 시기로 전환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에 활동하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그들이 악행을 저지르자 하나님께서 익명의 선지자를 통하여 죄악으로 말미암아 엘리 가문의 제사장직이 폐하여질 것이라는 예언을 합니다(삼상 2:27-36). 그런데 바로 아비아달이 이다말 계열인 엘리의 집안이었기에 열왕기 저자는 아비아달의 제사장직 파면 사건을 그 예언의 성취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엘르아살 계열인 사독이 대제사장직을 맡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제사장직이 엘르아살 계통으로 완전히 일원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역사의 시종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섭리 주관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요압의 숙청>
아도니야가 숙청된 데 이어서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을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요압은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28-29절 “그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 그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으니 이는 그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따랐음이더라/ 29 어떤 사람이 솔로몬 왕에게 아뢰되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곁에 있나이다 솔로몬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며 이르되 너는 가서 그를 치라.”
아비아달이 고향으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요압은 다음은 자기 차례일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전례를 기억하고는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요압의 경우는 아도니아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출 21:13~14의 규례에 의하면, 제단을 도피처로 삼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에 국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압은 다윗의 뜻을 정면 거스려 자기의 야욕과 복수심으로 이스라엘의 두 장수 아브넬(이스보셋의 장수)과 아마사(압살롬의 장수)를 죽였던 것입니다(삼하 3:23-27, 20:4-10). 이런 명백한 살인자는 성소의 보호 규정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압이 제단 뿔을 잡은 행위는 별 효과가 없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요압을 죽이러 간 브나야는 이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30~31절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그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그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아뢰어 이르되 요압이 이리 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 31 왕이 이르되 그의 말과 같이 하여 그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솔로몬 왕의 명령을 받은 브나야가 요압을 죽이러 가지만, ‘여기에서 죽겠다’라고 하면서 강력하게 저항하는 요압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돌아옵니다. 아마도 브나야가 신성한 성소에서 피 흘리기를 주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단호히 “그의 말과 같이 하여 그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32~34절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아버지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33 그들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집과 그의 왕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34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그를 쳐 죽이매 그가 광야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솔로몬은 요압이 행한 악행을 자세히 알려줍니다. 브나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그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요압이 다윗 왕 모르게 독단적으로 아브넬과 아마사를 살해했기에, 그 죄값은 그의 머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아무리 제단 뿔을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요압을 죽인다고 해도 아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정당성을 부여받은 브나야는 그 길로 가서 즉시 요압을 쳐서 죽입니다. 강제로 끌고 나와서 처형했는지, 아니면 제단 뿔을 잡은 채로 처형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이로써 다윗의 첫 번째 유언을 이루어 드립니다.
<새로운 인사>
이렇게 아비아달을 쫓아내고, 요압을 죽인 후에 솔로몬은 새롭게 인사를 합니다.
35절 “왕이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요압을 대신하여 군사령관으로 삼고 또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
브나야는 시위 대장에서 군대 장관으로 영전된 것이며, 사독은 명실공히 단독 대제사장으로 지위가 격상된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세워진 사독 계열의 제사장직은 후대로 계속 이어져,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에도 성전의 관리와 제사장 직무를 담당했습니다(사두개인).
<시므이의 숙청>
이제 남은 사람은 시므이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어찌 된 일인지 시므이를 서둘러서 처리하지 않습니다.
36~38절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37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38 시므이가 왕께 대답하되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리하겠나이다 하고 이에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무니라.”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고 명합니다. 일종의 주거 제한 조치입니다(‘가택 연금’이 아니라 ‘도시 연금’). 그리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고 경고합니다. 기드론 시내는 유다 지파의 베냐민 지파의 영토를 구분짓는 예루살렘 동편의 경계천(境界川)입니다(우기의 폭우 때를 제외하곤 거의 물이 흐르지 않는 시내, 곧 '와디'이다). 이 시내 건너편에 시므이의 본 거주지인 '바후림'이 있습니다(삼하 15:23). 그는 베냐민 지파에서는 큰 영향력을 가진 지도급 인사였습니다. 즉, 베냐민 지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차단하여 반란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시므이도 ‘이 말씀이 좋다’면서 동의합니다. 하긴 살려만 주는 것이 어디입니까? 물론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닙니다. 시므이는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한 3년쯤 지났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39~46절 “삼 년 후에 시므이의 두 종이 가드 왕 마아가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도망하여 간지라 어떤 사람이 시므이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종이 가드에 있나이다/ 40 시므이가 그 종을 찾으려고 일어나 그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가드로 가서 아기스에게 나아가 그의 종을 가드에서 데려왔더니/ 41 시므이가 예루살렘에서부터 가드에 갔다가 돌아온 일을 어떤 사람이 솔로몬에게 말한지라/ 42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내가 너에게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게 하고 경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밖으로 나가서 어디든지 가는 날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도 내게 말하기를 내가 들은 말씀이 좋으니이다 하였거늘/ 43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두고 한 맹세와 내가 네게 이른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느냐/ 44 왕이 또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네 마음으로 아는 모든 악 곧 내 아버지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45 그러나 솔로몬 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왕위는 영원히 여호와 앞에서 견고히 서리라 하고/ 46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령하매 그가 나가서 시므이를 치니 그가 죽은지라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
시므이의 두 종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친 것입니다. ‘가드’는 블레셋의 5대 성읍 중 하나(삼상 21:10,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이스라엘과는 대체로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아기스'는 가드 왕을 지칭하는 보편적 명칭, 다윗을 보호해준 아기스는 50년 전 사람). 아마도 두 종은 주인 시므이에게는 주거 제한 명령이 떨어진 상태이므로, 자신들을 쫓아오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도망친 것 같습니다.
시므이는 그 종을 찾으려고 직접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떠나’ 가드로 갑니다.
왜 이런 판단을 했을까요? '가드'는 그 위치상 기드론 시내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곳이므로(37절), 어쩌면 시므이는 별 탈 없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도망한 노예를 되찾는 것은 주인의 당연한 권리였습니다. 그 자체로서는 합법적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명령의 방점은 “예루살렘에서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36)는 것이었습니다(44절).
시므이가 자신의 약속에 대해 철저한 사람이었다면, 예루살렘을 벗어나 가드까지 먼 길을 여행하기 전에 먼저 왕의 허락을 요청했어야 옳았습니다. 만일 그러한 절차를 밟았다면, 시므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도망간 종을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솔로몬의 은혜를 가볍게 여겼고 맹세를 소홀히 함으로써, 스스로 망하는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의 입장에서 보면, 시므이의 행동은 단순히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를 만나러 갔기 때문입니다. 시므이는 단순히 아기스 왕과 교섭하여 종들을 되찾으려 의도였겠으나, 솔로몬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모든 행동은 충분히 정치적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즉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 망명으로 오해할 수도 있고, 블레셋과 손을 잡고 반란을 시도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행적은 솔로몬 왕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즉시 시므이를 소환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뿐 아니라 예전 자신의 아버지 다윗 왕에게 저지른 죄를 물어 그를 처형합니다. 결국, 시므이는 브나야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정치적인 유언을 모두 완수하였습니다(요압과 시므이).
<배우는 교훈>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배웁니다.
첫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아비아달의 제사장직 파면은 겉으로는 아비아달의 반역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여호와께서 엘리의 집에 하신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삼상3:11~14).
민23:19(발람의 말이지만 진리)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사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사55:11, 히6:17).
구원의 약속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영생).
둘째, 고의로 짓는 죄는 결국 자기 머리로 돌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요압이 성막 앞의 제단 뿔을 잡았지만, 그의 행위가 그를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고의적으로 살인을 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그들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33절)고 선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핑계로 죄를 짓는 일에 무감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분노, 질투), 죄를 짓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깨닫는 자신의 죄를 깨닫는 사람이 받은 은혜가 큼을 설교하였습니다(롬5: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죄에 거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롬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12:17~21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살전5:21~23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셋째, 용서받은 은혜를 날마다 반복하여 기억하여야 합니다.
시므이는 솔로몬에게 받은 은혜를 불과 3년 만에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느슨하게 여겼습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한 약속이나 결단에 느슨해지기 마련입니다(작심삼일).
그래서 신앙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매일 새롭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5:15(십계명 중 안식일 계명)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15: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
사44: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신약 성경에도 기억의 중요성은 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딤후2:8(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살후2:5(거짓 선지자 경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행20:31(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세상은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선물과 같은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우리의 주홍빛 같은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깨끗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되새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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