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다. 전쟁에 내보낸 4형제 가운데 3명의 전사통지서를 받아야 하는 어느 어머니를 위해 미군 당국이 적진에 남겨진 막내 라이언 일병을 구해 고향에 돌려보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관객을 압도하는 잔혹하고 사실적인 전투 장면 때문에 전 세계 영화팬을 전율케 했던 이 영화는 영웅적 전투를 그리는 그동안의 전쟁 서사물과 달리 미국 군대의 휴머니즘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한 차례 살육전쟁이 치러진 후 일등병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대위가 지휘하는 8명의 특공대가 투입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마침내 특공대는 사투 끝에 임무를 완수하고 모두 장렬하게 전사한다.
미군의 휴머니즘이 모순에 부딪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햇병아리 병사 1명을 살리기 위해 8명의 군인을 적진에 몰아넣는다. 이것이 과연 휴머니즘인가.
라이언 일병이 그 어머니에게 소중한 자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8명의 특공대원도 그들의 부모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한 어머니의 위안을 위해 여덟 명 어머니의 가슴을 찢는 ‘군대식’ 휴머니즘은 오히려 미군의 도덕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했다.
부시 대통령이 사과는 했지만
영화 속의 미군 휴머니즘이 그렇다면 현실에서는어떨까.
월드컵이 한창이던 지난 6월,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길을 가던 두 명의 여중생이 이동중이던 미군의 장갑차에 치여 압사했다. 이 사건은 월드컵의 열기에 치여 뒤늦게 알려졌지만 미군의 변명과 계속된 고압적인 자세가 유족들을 화나게 했다. 영화같은 휴머니즘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해도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설사 잘못이 없다고 해도 쫓아가 사과하고 위로해야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정서다. 그런데 미군은 최소한의 예의와 그 도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미 군사재판은 사건과 관련한 사병들에게 무죄평결을 내리고 그들의 전역을 허락했다.
미군 궤도차량의 관제병과 운전병에 대한 무죄평결이후 반미시위가 수위를 더하고 있다. 마침내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유족과 시민단체는 그의 사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의 사과내용이 지난 2000년 7월3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주일미군의 여중생 성추행사건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한 사죄행태와 비교해볼때 훨씬 미흡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성추행 사건은 당시 오키나와 주둔 미군 책임자와 총영사, 클린턴 대통령의 사과에 이어 피의자였던 미군 해병에게 징역 2년형 선고 및 급여 지급 보류, 2계급 강등의 중징계 조치로 마무리 됐었다.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은 사건이 일어난지 한달도 안된 시점에 일본 총리에게 직접 유감의 뜻을 전달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사건 발생 5개월만에 그것도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사과의 뜻을 밝혀왔다.
SOFA 개정해야
미국은 5만 명의 젊은이를 이 땅에서 잃은 전통적인 우방국이다. 그리고 주한 미군은 한미 양국 공통의 안보이해 및 전략적 이익을 지켜주는 안전판이다. 그런 그들에게 한국의 시민들이 왜 화가 났는지를 미국은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번 사태는 미국측의 상황인식이 너무 안이해서 결과를 키웠다.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라이언 일병구하기’처럼 자국 군인만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식 사고와 해명, 재판진행 등을 계속 고집함으로써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어리석은 일을 자초했다. 그러나 이번 반미시위의 본질적인 이유는 이런 문제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한 규정을 없애자는 것이다. 만일 1차 재판관할권이 미국이 아닌 한국측에 넘겨줬다면 무죄가 나올 수 있을까.
이제 시대도 변했고 한반도를 에워싸고 국제정세도 변했다. 타국에서 근무를 하는 미군측의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이제 SOFA를 현실에 맞게 개정할 때가 됐다.
그런데 정말로 화가 나는 것은 우리 정부다. 불행한 일이지만 정부로서는 이런 사태가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핑계김에 적극적인 외교롤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유영선 문화기획단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