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김씨(본래 금씨)가 무씨라는 말이 있다.
처음부터 신라와 가야의 시작에 관한 고민이 있어 지금에서야 풀렸는데 신라는 143년, 가야는 162년에 시작된 셈이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성한왕(聖漢王)의 성은 사마(司馬)씨로 그 근거는 신라 금속공예 연구 상의 기록인 계림(鷄林), 계룡(鷄龍), 백계(白鷄), 금궤(金櫃) 등이 그 증거인데, 여기서 흰색과 닭은 오행 상 금(金), 방향 상 서쪽에 해당되는 데다 금궤는 서쪽에서 왔다는 의미가 있기에 사마씨의 이주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성한왕의 원래 성이 사마(司馬)씨임을 증명하는 단서를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인용한 신라 금속공예 연구에서 확보되었기에 그렇게 정한 상태였고, 신라 김씨의 오행 속성을 보자면 금(金)에 해당되기에 우리가 아는 김(金)씨는 오행 상 목(木)이라 여기서 이를 증언할 수 밖에 없었다.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首露王 : 144~199)의 본명은 무청예(武靑裔)로 그의 아버지는 일명 이비가지(夷毗訶之)이라 불려진 무비간(武毘幹), 형이 이진아시왕 무주일(武朱日)로 변한(가야)은 사실 상 무(武)씨들의 근거지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가야 김씨는 구지봉(龜旨峰)에서 발현되었다고 하는데 구지봉의 구(龜)는 거북, 거북은 오행 상 수(水)에 해당되기에 유력시되는 부분이 무씨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야 김씨의 오행 속성 상 수(水)에 해당되기 때문에 무(武)씨임을 확증했기에 그 증거는 무씨 사당 화상석 부분들이라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군현 설치 뒤 사마씨, 무씨들이 남하 이주하여 성씨를 공통적으로 김(金)으로 사용되었지만 오행 상 근본이 서로 다르기에 이를 여기서 증명하게 된 셈이다.
따라서 신라 김씨는 사마씨, 가야 김씨는 무씨인 셈으로 중국의 김씨는 원래 저거(沮渠)씨라 신라 김씨, 가야 김씨와 무관한 부분에 해당된다. 이 글을 쓴 나는 신라 김씨지만 그 시조 성한왕이 사마씨이기 때문에 사마황백(司馬皇柏 : 1982~)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시인한다는 뜻으로 작성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오행 상 신라 김씨는 금(金), 가야 김씨는 수(水)이기에 이 사실을 증언할 뿐이나 다른 의도나 악의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이상 여기서 증언했으니 더 이상의 변명을 하지 않겠다. 근본을 알았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이유로 그런 것이니 양해바란다. 옮겨온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고령현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을 뿐, “(고령현은) 본래 대가야국이다. …시조는 이진아시왕(伊珍阿舅王)인데, 그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대 5백20년이다.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살펴보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말도 있다.
진(秦)과 한(漢)의 정권이 계속되면서 산동성의 동이족(金씨족)들은 그들의 본향이었던 만주와 한반도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그 중의 일부가 바로 AD 42년에 금관(金冠)으로 들어와 가야를 세운 수로(首露) 왕과 신라의 金씨계 왕족이었다.
가야와 낙랑군 : 가야의 여러 나라가 처음 등장했던 것은 남해안지역입니다. 남해안에서 가야의 소국들이 먼저 성립했던 것은 바닷길을 통해 철기를 비롯한 선진문물이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108년에 한(漢-한무제)은 위만조선(고조선)을 멸하고 한사군을 설치했습니다. 남해안지역과 낙랑군의 교류는 가야사의 시작을 보장하였습니다. 『삼국지』는 한(韓)의 소국들이 계절마다 낙랑군에 왕래하여 인장과 의관을 받은 자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합니다. 가야 소국의 군장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겁니다. 진한의 군장이었던 염사치는 변한포(弁韓布) 15,000필을 낙랑군에 가져 갔습니다. 변한은 가야입니다. 등장기의 가야가 낙랑군과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증거가 됩니다.
가야는 변진(弁辰) 또는 변한(弁韓)으로 불리웠던 12국이 발전하여 여섯 가야가 되고 이들이 뭉쳐서 연맹체를 형성하여, 구야, 가라, 가량, 가락 등으로 불리웠으며, 문헌기록에는 加耶, 伽耶, 伽倻, 狗邪, 加羅, 加良, 駕洛, 伽落로 표기되었으며, 때로는 임나(任那)로도 지칭되었다. 이러한 "가야"의 의미에 대해서는 "갓나라"를 뜻한다거나, 일족(一族) 동족 (同族)을 뜻하는 滿洲語에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가야 - - - 가락"은 삼국사기(三國史記 本紀 奈解尼師今 14年條)에는 가락국加羅國으로,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勿稽子傳)에는 가라국阿羅國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五伽耶條)에는 阿羅伽耶로 표기되고 있으며, 가야의 한 소국을 지칭하는 경우에도 삼국 사기(三國史記 本紀 脫解尼師今 卽位年)에는 金官國으로,삼국사기의 다른 부분(三國史記 雜志3<地理1>金海小京條)에는 金官國을 伽落國 또는 伽耶라고도 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사용례(使用例)로 볼 때 금관국(金官國)은 가야 제소국(諸小國)중의 하나를 말할 때의 지칭이고, 가락국이나 가야는 금관국이 제소국의 연맹장 또는 맹주국의 위치에 있었을 때의 호칭이라고 생각 된다. 변한12국이 6가야로, 6가야가 다시 가야연맹을 형성하였던 점을 통해서, 국(國)과 가야가 같은 사용례를 보이거나, 가야가 가야지역 제소국 연맹의 뜻으로 사용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가야}란 연맹(聯盟)이나 국(國)의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본다.
지금 남아 있는 가야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기록은, A.D.3세기 후엽의 {三國志} 魏志 東夷傳 韓傳이고, 다음은 A.D.414년 에 세운 {廣開土大王陵碑} 2면의 10년 경자(庚子)년조 이며, 이 외에 {宋書} 倭國傳, {南齊書}, {梁書}, {翰苑}, {通典} 新羅傳, {日本書紀}, {新撰姓氏錄}, {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國輿地勝覽} 및 各種地理志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 가야에 관해서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A.D.1275~1308)의 "가락국기"와 { 삼국사기}(A.D.1145)의 단편적인 기록 및 {日本書紀}(A.D.720) 등 이다.
출처 : http://lotus.silla.ac.kr/%7Ecbahn/kah988.htm
한민족과 중국 한족의 역사를 말할 때 북방의 동이족들인 흉노족과 선비족과 거란족과 말갈족(여진족)과 몽고족의 역사를 빼면 말이 안된다. 사실 대륙에서 한족의 역사가 차지하는 부분은 아주 작은 것이다. 그리고 한족들이 말하는 한족이나 중국의 역사도 괜찮은 대목은 대부분 동이족인 북방민족들의 것이고 한족의 본류는 고조선의 환웅천황 시절부터 섬기며 조공을 바쳐오던 민족이며 지금도 자세히 알아보면 중국의 현 정권 내에도 대부분 한족이 아닌 55개의 소수민족들이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리라 여긴다.
무씨 사당에는 단군신화가 그려져 있다.
무씨사 : 은(殷)왕 무정(武丁)의 후손인 무영(武榮)의 묘로 AD 147년 세운 것. 후석실에 단군신화가 그려져 있슴.
우리는 가상현에 있다는 무씨사(武氏祠)를 찾을 계획이었음으로 그와 함께 가상으로 향했다. 무씨사는 은(殷)왕 무정(武丁)의 후손인 무영(武榮)의 묘로 AD 147년 세운 것인데 그 사당의 벽에 가득하게 붙여진 화상석들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다. 무씨사의 거의 모든 화상석은 중국 고대의 전설과 신화를 새겨 놓은 것이었는데 우리가 찾는 그림(단군신화)은 후석실의 제3석에 있었다.
제일 위층에는 말을 탄 사내가 그 신하들을 이끌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달리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경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둘째 층에는 한 사람이 구름 위의 수레에 앉아 있고 사람들이 그 수레를 끌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굴복하고 있다. 이는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를 대동하고 내려왔다는 기록을 연상하게 했다. 셋째 층에도 사람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고있는데 그 끝에 곰과 호랑이가 서로 다투고 있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넷째 층에는 반대로 쓰러진 호랑이를 둘러맨 사람들이 서쪽으로 떠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는 분명히 곰과 호랑이의 싸움에서 호랑이가 졌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은 왕조(상 왕조) 수도 : 은허. 기원전 1600년 경에 건국



산동성과 산동반도는 본래 고조선 강역으로서 동이족들이 오랫동안 거주해 온 지역이며 임해부(김해부)가 근처에 있고, 장보고가 활동했던 청해진도 사실은 완도 청해진이 아닌 산둥성에 있었으며 지금도 산둥성에는 장보고기념관이 있다. 무씨 사당도 산동성에 있으며, 바로 안쪽의 은나라도 동이족이 세운나라다. 한반도의 김해는 김수로왕이 허황옥을 만난 곳이 아니며 현재 경남 김해의 수로왕능도 방향이나 위치 및 주변 환경이 옛 문헌에 적힌 내용과 거의 맞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경남 김해는 원래 이름이 금성이었다가 금영으로 바뀐 후 지금의 김해로 바뀐 곳이다. 수로왕이 건국할 때에는 경남 김해는 김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한반도에 금성이라는 지역이 세 곳 있는데, 경주와 김해와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이었다. 금성이란 임금이 사는 도시에만 붙이는 이름이다.
경남 김해는 가야의 가짜 왕도 : http://blog.daum.net/pbhlove2552/12979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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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중국 산둥성(山东省) 스다오시(石岛市) 적산법화원에서 방문객들이 장보고기념관을 관람하고 있다. 스다오 적산 기슭에 위치한 적산법화원은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에 의해 세워진 대표적인 사찰로 당시 산둥 제일의 규모를 자랑했고 재당 신라인 결속의 중심지였으며, 현재의 적산법화원은 9세기에 파손된 것을 1988년에 중건한 것이다. /아시아뉴스통신=유지현 기자 |
중국 산동 무씨사 화상석은
환웅님의 민족 대이동을 기록한 역사기록화
한나라 시대 중국 산동 무씨사 화상석은 환웅님(동이족=金씨족)의 민족 대이동을 기록한 역사기록화이다. 여러분은 무씨사 화상석(武氏祠 畵像石)에 대해서 아십니까? 무씨사(武氏祠)는 간단히 설명하자면 중국 산동성에 있는 사당으로 무씨(武氏) 가문들의 사당(祠堂)이며 한나라 시기에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 무씨 가문의 유래가 어떤지 아십니까? 기원전 2333년. 만주에 고조선이 세워진 후 고조선 사람들이 중국쪽으로 가서 황하 문명을 지도하며 중국 한족들에게 우수한 문명을 전해줬는데. 중국에 진출한 우리 사람들은 중국인들에게 동이(東夷) 즉 동방의 의로운 사람들이라 불리며 산동성 하남성 양자강 이남 등 중원의 동쪽 지역에 광활히 분포하여 동이 문명을 세웠습니다.
후에 이 동이 문명이 세운 은(殷)나라가 중국 한족들의 주(周)나라에 망하고 은나라의 왕족들은 한족들에게 개돼지 취급받으며 식민 통치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한족들은 동이(東夷)를 동쪽의 오랑캐란 말로 변질시켜버렸습니다. 무씨 가문은 그 망한 은나라 왕족(동이)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주나라를 거쳐 진나라와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숨죽이며 살다가 자신들의 사당에 자신들의 근원의 역사를 그림으로 그려 후세에 남겼는데. 사당에 들어가보면 동이족 역대 제왕도가 그려져 있으며 자신 스스로 은나라의 후손이라 말하고 군자의 나라 고조선으로 가고 싶다고 말한 공자(孔子)의 행적에 대해서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당에는 우리민족 역사 반만년의 최대의 타임 캡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환웅이동도(桓雄移動圖)입니다. 중국역사라는 것 자체가 金씨족(동이족 성씨)과 한족들의 패권다툼인 셈이다.



금씨족(김씨족)은 본래 은나라를 세운 동이족이다. 그러나 주나라에게 왕조를 뺏긴 뒤 주나라에서 진나라를 거쳐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금씨를 무씨로 바꿔 사용한듯하다. 그러므로 동이족인 환웅(금씨=김씨) 무리의 이동도가 무씨(본래 금씨=김씨)의 조상묘인 무상사의 화상석에 자신들의 조상(금씨)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금씨족의 문화의 특징은 황금문화가 발달하였다는 것이며, 그들이 지나간 곳엔 황금유물들이 남아 있다. 금관이 금씨 문화의 작품인듯하다. 그리고 금씨가 김씨로 변경된 것은 이씨 조선왕조에 의해서이다. 이(李) 자는 파자하면 木+子(목의 아들)이므로 오행상극상 금극목이므로 금씨라는 발음자체를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기록된 역사는 어찌할 수 없는 연고로 소리만 성 김씨로 바꿔부르게 한 것이다.
동이족의 왕조인 고조선(금씨왕조)이 한무제의 난동에 의해 무너지면서 동이족들이 남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가 가야와 신라이며 그들의 성씨는 본래 금씨(김씨=금씨=무씨)였으므로 당시에 사용하던 무씨에서 금씨로 바로잡아 사용한 것이다. 그들의 후손들이 후에 본래 거주지였던 만주지역에서 금나라와 후금(청나라) 왕조를 세운 것이다. 측천무후(무씨=금씨=김씨)는 당나라 왕권을 차지한 뒤 주나라를 세우기도 했다.
결론 환웅무리 = 상(은)왕조 = 무씨 = 금씨 = 김씨(가야왕조, 금왕조, 청왕조)
金씨는 한민족 정통 성씨, 李씨는 중국계 성씨로서 동북아의 패권다툼은
金씨(한민족)와 李씨(중국한족) 간의 경쟁이라고 보아야 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