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의 여신도들
그 때 이현필 선생은 밤이 늦도록 말씀을 가르쳤다. 음식은 거의 잡수지 않았다. 그저 공부하다간 잠깐 무를 깎아 먹고는 또 공부를 계속했다. 제자들이 밥 먹는 동안에 이선생은 몰래 밖으로 피하여 나갔다. 그렇게 잡숫지 않기 때문에 젊은 몸이지만 피골이 상접(相接)했다. 영양실조가 되고 피부는 뼈에 감겨 붙었고 배는 등에 가 닿는 듯한 모양으로 앉아 있는 그 모습은 필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뒤따라가는 순교자의 모습이었다. 더구나 그 당시 이현필이라면 공산당이다, 가정 파괴자다, 기성교회 교인을 유인해가는 이단자라 하여 핍박이 심했었다. 가련하고 측은한 마음에 존경하는 마음이 뒤섞여 그에게 마음이 더 끌렸다. 한번은 어떤 청년이 이선생에게 절하려고 하니 이선생은 굳이 만류시키면서 “절하지 마시오. 저도 똑같은 인간입니다”면서 기어이 못하게 했다. 후에 누군가가 왜 절을 안 받느냐고 물으니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절하는 것을 만류시킨 성경을 펴 들고 설명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행 10 : 26).
강부남 권사는 “과연 이 양반의 길은 옳다”고 감동했다. 강부남씨 형제는 1남 4녀의 5형제였다. 맏이 화선(1894-1984), 둘째가 남순(김금란 수녀의 모친, 1898-1963), 셋째가 차남(1901-1950, 순교), 마지막이 부남이었다. 맨 먼저 이현필 선생을 따라 다니던 강부남씨는 그 때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던 언니들인 화선, 차남씨들에게 권유하여 결국 그들도 함께 이현필 선생을 따라 다니고 그중에도 남순씨는 이선생에게 열중해서 딸 금남양도 서리내 갈보리에서부터 모녀가 이선생을 시중하며 일생 독신으로 지내는 처지였지만 형제 중에 가장 먼저 이선생을 따르고 나섰던 강부남씨 자신은 결국 가정생활에 파묻혀 살림하느라고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이 일을 늘 원통히 여겨 “나 같은 낙오자는 탈선한 창녀라고나 할까요? 높은 산 몰랑이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진 느낌입니다.“고 말할 때마다 흐느꼈다. 그는 전주에서 살았다.
그 무렵 그의 언니 되는 분이 “우리 형제 중에서 부남을 뽑아서 주님의 일을 하게해야 한다.”면서 금식기도 하노라니 이현필 선생은 그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먹으라 하시는 음식을 금식은 왜 하오. 들에 나가 나물을 캐서라도 뱃속에 넣어야지” 했다. 그 후 강부남 권사는 자기 회갑(回甲)기념으로 광주 방림(芳林)에 있는 동광원 안에 손님 접대할 방 내빈실을 지어드렸다.
맏언니 화선씨는 본래 불교 신자였다. 살림이 넉넉했기 때문에 그의 집은 어느 절간인양 승려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동생이 산길로 다니다가 한번은 호랑이를 만나고는 혼비백산하여 넋을 잃고 정신 이상이 됐다. 화선씨는 동생을 고쳐주려고 백방으로 애쓰다가 마지막엔 교회에 데리고 가서 기도받기로 했는데, 자기는 불교인이니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어 교회 문 앞까지 동생을 인도해 주고는 자기만 되돌아가려 했다. 동생이 교회 문 앞에 서서 언니보고 먼저 들어가라 조르기에 할 수 없이 동생을 데리고 들어가 앉았다가 그날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예수 믿기로 결심한 분이다. 동생의 병도 얼마 후에는 깨끗이 완쾌됐다.
남자 동생은 부자로 살던 자기 누나들이 어디서 굴러든 거지같은 이현필을 따라 다니는 통에 거지꼴이 된 일에 부아통이 터져 이현필을 몹시 미워했다. 한번은 이현필 선생이 자기 집에 찾아왔길래 그 곁에서 이선생이 무슨 수작을 하는가 그 동정을 일일이 감시해 보았다. 자기 생각에는 이현필이란 자가 남의 재산을 갈취에 먹으려는 수단으로 일부러 성자로 꾸며 밥 안 먹는 체 할 터이지, 그래도 자기만은 남 몰래 어느 틈에 뭘 먹을 테지 하고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감시했다.
새벽부터 성경공부하면 10시경에 끝나는데 보리 가루를 자루에 넣어 벽에 걸어 놓고 거기 모인 이들이 한 숟가락씩 퍼먹고 지내는데 이선생은 그것도 안 먹고 밖에 나갔다. 뒤쫓아 나가보니 이선생은 샘가에서 몸에 물을 끼얹고 산의 솔밭 사이로 깊이 들어갔다. 옳지, 딱지뿌리라도 캐먹으려는가 보다 짐작하고 계속 뒤쫓아 가보았으나 이선생은 소나무 밑에서 기도만 드렸다. 이렇게 3일이나 계속하였으나 그는 자기가 못 견디어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결국 감복하고 말았다.
5남매 중 셋째인 차남씨는 6.25때 이현필 선생을 따라 화학산(화순군)에 숨어 있다가 도구밖골(도구봉)에서 찬란한 순교를 했다. 그 차남씨가 한번은 이선생을 따라 산중 길을 가고 있었는데 가다가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 곳에 이르러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데 이선생은 그 갈래길에서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서 묵상하고 있었다. 그 때 차남씨의 귀에 어디선가 “왼편쪽으로!”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선생은 그 쪽으로 걸어갔다 한다.
이현필 선생의 영향이 질풍같이 남원 일대를 휩쓸 때 그 운동은 요즈음 ○○파 신흥종교처럼 선전하고, 대중 집회하고 광고하고 한 것이 아니었다. 이선생은 언제나 몰래 숨어 다녔다. 누구 집에 찾아가 만날만한 믿음의 동조자의 끄나풀이 있어야 찾아갔다. 그것도 아무도 몰래 살짝 찾아가는 것이지만 어느새 그가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교인들이 몰려오면 이선생은 그들을 피해서 도망가는 그런 태도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끌려 다녔다. 자석이 쇠붙이를 끌 듯 사람을 끌었다.
김금남 양은 남원읍에서 예수 잘 믿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면서 남원읍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일제 말엽께 전화 교환소에 다니며 감독 노릇을 했고 사무실에서도 큰 신임을 얻었다. 경건한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집 안에서도 아버지는 남자들끼리 윗방에서만 거처하시고 어머니는 딸들을 데리고 아랫방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김양은 남녀 교합으로 자녀를 생산하는 줄을 몰랐던 너무나도 순진한 처녀인 그는 사무실에서도 과장의 지나친 호의를 받든가 일하다가도 남자들과 시선이 마주치기만 해도 임신하는 줄 여겨 남자들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소학교 졸업하던 때부터 자기의 장래 방향을 어떻게 정할까 망설이다가 19세 때는 두 가지 문제를 두고 계속 기도했다. “간호학교를 다녀 유명한 나이팅게일 같이 그 방면에 나의 일생을 바칠 것인가?” “수녀(修女)가 될까?” 새벽마다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러 갔다. 그 때는 일제 말이어서 교회 문을 닫았는데도 김양은 교회 담을 넘어 들어가서는 열심으로 기도했다. 그러던 중 어느 때 그에게 “네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신비스런 음성이 들렸다. 그 후 자나깨나 산 제사로 드리는 길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중에 마음에 응답되기를 “일생 동정(童貞)을 지켜 주님께 바치는 길이다”고 깨달음이 왔다.
한편 김금남 양은 혼기가 되고 다니던 직장도 이제는 싫어지고 나이가 성숙해 가니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왔다. 마음이 안정치 못하여 어디론가 가서 있고 싶었다. 17세가 되던 그 때까지는 김양은 아직 이현필 선생 구경을 못한 때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외출한 사이에 아기를 업은 체 엎드려 있다가 그냥 잠들어 꿈을 꾸었다. 꿈에 교인들을 따라 산길로 가는데 오른쪽에 십자가의 큰 문에 이르렀다. 열 수 없을 만큼 육중한 십자가의 문을 어찌 열까, 사람의 힘으로는 열 수 없으니 믿는 마음으로 열어보자 하고 힘껏 밀어보니 의외로 쉽게 스르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는 나비 같은 어린 소녀 천사들이 문을 열어주면서 안으로 영접했다. 맨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거기에 언제 오셨는지 어머니가 안식하며 쉬고 계셨다. “저도 어머니 계신 곳에서 쉬고 싶어요” 하니까 그 분이 성경의 신구약 합부를 주면서 말씀하시길 너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여기 말씀을 다 읽고 거기에 네 발걸음을 다 맞추고 오라 하는 말씀을 하셨다. 저는 한 손으로 그 책을 잡고 또 한손으로 예수님을 붙들고 엉엉 울다가 그만 우는 소리에 꿈을 깨고 말았다.
그 무렵 이현필 선생의 감화를 받은 남원 사람들 중에 광한루(廣寒樓)바로 뒷거리에서 목공소를 차리고 있던 오북환 집사와 그밖에 몇몇 분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선생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기성교회에는 출석하지 않고 오집사 목공장에서 집회하던 때다. 김금남 양은 어머니가 매양 다니는 이현필 선생 집회에 자기도 나가보고 싶었으나 그 기회를 얻지 못했다. 또 이선생도 처음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날 새벽 어머니가 또 그 집회에 혼자간 사이에 김양도 어린동생을 보다가 아기가 울기 때문에 업고는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그들이 모이는 장소에 찾아갔다. 문 밖에서 이리저리 엿보다가 방안에 혼자 있는 이현필 선생을 얼핏 보았는데 잠깐 본 그 때 인상은 바싹 야윈 분이 조그만 키에 너무 말라서 백발 노인 같이 여겨졌다. 한번은 김금남 양이 자기가 일생 동정을 지키고 싶다는 것을 어머니께 의논했더니 어머니도 딸의 소원에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어머니가 자기 딸에 대하여 걱정하고 이현필 선생에게 의논했더니 그 때 이선생의 의견은 광주 성경학교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알아보겠다고 약속했다.
김양이 혼기(婚期)가 되어 막상 결혼하느냐, 수녀로 나서느냐 하는 자기 장래를 결정치 못해 고민하던 끝에 어머니와 둘이서 이 문제를 위하여 석달 열흘(百日) 기도를 하기로 했다. 그 장소는 남원에서 20리나 걸어 들어가는 김금남 양의 숙부님의 소유인 갈보리 농장이었다. 임야가 우거진 숲속에 있는 초막(草幕)에 가서 모녀는 기도하기로 했다. 김양의 아버지는 아내와 딸이 이현필에게 빠져 들어가는 일과 딸의 백일기도의 계획을 중지시켜 보려고 여러 가지로 방해하다가 나중에는 기도하는 모녀에게 식량을 보내주지 못하게 했다. 모녀가 갈보리에서 백일기도를 한다는 소문이 퍼져 마을 사람들은 노처녀가 도를 닦는다면서 신기해서 매일 구경꾼들이 갈보리 초막으로 찾아 왔었다.
백일기도를 하는 동안에 읽은 성경 말씀은 그렇게도 감동이 될 수 없었다. 구구절절이 모조리 내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백일을 끝맺기 사흘 전에 이현필 선생이 그리로 찾아왔다. 사실 김금남 양이 이선생의 얼굴을 친히 마주본 일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한 번 문밖에서 얼핏 엿본 일은 있지만. 이현필 선생이 오셨다 하니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뛰어 나갔는데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한 뒤에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왔다. 한 분은 젊은 청년이었다. 누구일까? 그 청년은 방안에 모였던 사람들을 보더니 히죽이 미소했다. 그분이 바로 이현필 선생이었다. 조용하나 어딘가 싸늘한 분이였다. 백일기도를 통해 김금남 양은 자기 장래를 수녀 되기로 결정했다.
그가 이렇게 자기 일생을 수녀가 되어 동정을 지키려 결심하던 때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시험 같은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초막 뒤에 있는 연못가에 나갔더니 편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내용은 김양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였다. 어머니께 그 사실을 알리고 며칠 지냈더니 꼭 같은 편지가 또 그 장소에 놓여 져 있었다. 그러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여자의 마음이라지만 여심(女心)이 한번 결심 하고 나설 땐 칼날보다 날카롭고 화살같이 돌이키지 않는다.
그는 이현필 선생의 제자가 되기로 했다. 자기완성(自己完成)을 이루려고 초인(超人)같이 인간의 본능마저 극복하며 살아가는 이현필 선생은 남 보기에 식욕(食慾), 성욕(性慾), 물욕(物慾), 명에욕(名譽慾)을 모조리 초월한 분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면에서 그를 신인(神人)같이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존경을 했다. 이선생은 갈보리에 와서 있는 동안도 줄곧 생식(生食)을 하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며칠에 한 번씩이나 잡수었는지는 몰라도 그때가 초겨울이었는데도 먹다 남은 것을 보면 가루를 물에 타서 잡수었다가 남겨두었는데 곰팡이가 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것을 두었다가 얼마 후에 그냥 또 잡수곤 했다.
어떤 날 밤은 선생이 뒷산에 올라가 온 밤을 새고 새벽에야 하산해서 초막에 돌아오는 것을 보면 이선생 잔등에는 서리가 하얗게 엉겨 덮이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그 순교자 같은 처절하고 엄숙한 모습을 바라볼 때는 사람 같지 않았다. 꼭 예수님을 보는듯한 인상이었다. 그런 모양으로 하산해서는 떠오르는 아침 햇볕 쪽을 향하여 몸을 녹이면서 창백한 얼굴로 해를 마주하고 서 있는 그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에 뭐라 형용키 어려운 엄숙한 감격이 왈칵 일어나 눈물이 나왔다. 평생 잊어버릴 수 없는 숭엄한 모습이었다. 그 일생 한 걸음 한걸음을 모두 그렇게 걸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님이 산에 자주 가서 기도하시던 것처럼 이현필 선생도 매양 산에 혼자 가 머물기를 좋아하셨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지 않았는가. 성인과 수도자는 바다보다 산을 좋아한다. 누구든지 이현필 선생이 자주 다니시던 서리내 산이나 지리산 줄기, 그리고 화학산 소반바위, 각시바위, 도구봉 등에 한번 가보라. 잡초는 우거지고 칡넝쿨은 뻗어 나무꾼의 길마저 없는 그런 산중에 이선생은 때때로 혼자 가서 지냈다. 신비에 쌓여서 산을 벗 삼고 침묵 가운데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