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마음
鄭 木 日
그 분의 눈매는 시골집 마당에 쌓이는 달빛,
한밤중 달빛이 거느리는 고요와 같아서
늘 내 마음에 그리움을 담아 주신다.
말씀하실 때 잠잠히 띄우시는 표정엔
미풍의 부드러움과 산의 명상이 깃들어 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신다.
그분의 눈매엔 모든 잘못을 씻어 주는 샘이 있어 무엇 하나 기실 수 없다.
그 분의 표정 속엔 숲이 있다.
풀벌레 소리 곁에 피어나는 무명의 풀꽃 향내가 배어 있다.
풀밭에 앉아 쉴 때처럼 편안하게 만들어 주신다.
아직 그 분처럼 부드러운 눈매를, 표정을 가진 분을 보지 못했다.
수백 년간쯤 무덤 속에 파묻혀 있던 백자(白磁) 항아리의 곡선처럼 은근하고,
아득한 평화를 지니신 분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항상 마음을 맑게 하는 샘을, 제 마음을 울릴 줄 아는 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그 분을 대하면 새벽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찌하면 가난한 내 마음속에도 샘을 만들 수 있겠는가.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종을 가질 수 있을까.
마음이 맑게 깨어 있어야 생각도 아름다워진다고 말씀하신다.
욕심에 충혈 되고 피로에 지친 내 눈은 언제나 흐려 있다.
허전하게 비어 있는 내 마음에 그 분은 정화수를 한 그릇 부어 주신다.
그 분의 가슴 속에는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일까.
가만히 대하기만 해도 눈 오는 날의 순수가 되살아난다.
그 분의 마음가짐은 언제나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무욕(無慾)에 두고 있다.
필요 없이 더 가지고 있음으로써 거추장스럽지 않을까 걱정하신다.
내가 어두운 생각에, 침울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너처럼 행복한 사람도 어디 있겠는가?” 말씀해 주신다.
여태껏 내가 누려 왔던 것이 왜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눈보라 속에서도 살그머니 눈뜨는 매화를,
음지에서 향을 뿜는 난(蘭)을 생각조차 못 하였을까.
어떻게 달빛의 고요 같은 그런 눈매로 남을 대할 수 있을까.
남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흐려지지 않는 달빛 속일 수 있을까….
남모르게 밤중에 잠깐 머물다 가는
달빛의 고요처럼 나는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
날짜 변경선에서
나는 고도 11277미터 상공에 있다. 서울발 일본 동경 나리타공항 경유, 미국 L. A행 대한항공기에 탑승 중이다. 비행기는 3만 7천 피트의 속도로 가고 있다. 출발지 시각 오후 6시 35분, 목적지 시각 오전 1시 35분, 화면 지도상에 날자 변경선(DATE LINE)이 나오고 목적지까지 5시간, 잔여거리 1026KHE 지점을 통과 중이다.
태평양을 내려다본다. 망망하다. 아찔하다. 몽롱하다. 나는 공중에 유폐돼 있다. 하늘, 공중, 영원, 순간…. 이런 관념들의 징검다리를 넘어가고 있다. 허공, 무한, 우주…. 이런 징검다리에서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 속으로 떨어져 미아가 될지 모른다. 보이지 않고 관측할 수 없는 공간과 거리는 두려움과 공포와 신비를 동반한다.
항공기 안에서 승객들은 잠을 자거나 영화를 보고 있다. 나는 고도 상공에서 별이 되어 흐르는 중이다. 밤하늘에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게 비행기라는 걸 소년 때 알게 되었다. 지금 별 하나, 점 하나로 가고 있다. 삶도 인생도 지워질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 않은가. 숨 한 번 쉬고 갈 뿐이 아닌가.
항공기는 날짜 변경선을 지나고 있다. 삶 속의 여행인가, 시간 속의 여행인가. 공간 속의 여행인가. 나는 공간 이동 중이며, 또한 시간 이동 중이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 영원한 물음 앞에서 당황한다. 여행 중이긴 한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시발지와 목적지를 알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목적지를 모르는 여행객이 되어 떠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연령은 삶의 행선지를 말해 줄 뿐이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지만, 이동 중, 여행 중이다. 비행기를 타면 한 번쯤 방정맞은 생각이 떠오르는 걸 억제하지 못한다. 생각이 떠오르는 걸 막을 재간이 없다. 뜻밖의 일로 항공기가 사고가 나면 승객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순간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삶, 일생, 운명은 순간에 불과하다. 상황은 눈 깜짝할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사고가 발생한다면, 기자 출신이기에 지금 항공기 안에 벌어지는 상항을 기사로 작성하여 알릴 수 있는 방법을 취할 것인가? 아내에게 못다 한 말들을 편지에 담을 것인가?
나는 1945년 생, 해방둥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집어 삼켜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그 후 미국과 대동아 전쟁을 벌였다. 미국의 원자탄 투하로 일본은 패전국이 되고 한반도는 해방을 맞게 되었다. 내 인생 중에 일어난 일이다.
비행기는 지금 지구에서 가장 넓은 바다, 태평양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나는 한반도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고 있다. 아, 한반도만은 아직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남. 북한이 ‘6자 회담’이란 걸 만들어 한반도 문제를 협의하고 조종하고 있는 중이다. 힘의 균형, 자국의 이익을 위한 힘겨루기 속에 한반도는 분할돼 있다.
휴전선이 그대로 있어 마음대로 넘나들 수 없다.
고도 11000미터 상공에 떠서 날자 변경선을 지난다. 순간인가 영원인가를 구분할 수 없다. 인간의 상상력은 한계가 있다. 절대, 영원, 무한, 진실, 진리…. 이런 말들은 하나씩의 관념일 뿐, 명확하지 않다. 몽롱한 말들이 구름이 되어 스쳐간다. 삶과 일생도 구름인가.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증명할 수 없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인지,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날짜 변경선을 지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갈 적엔 하루를 덤으로 받는 셈이 되어 어리둥절하고, 미국에서 한국으로 갈 적엔 어느새 하루가 실종되어 낭패스럽다. 날자 변경선을 넘을 적마다 하루씩이 가감되는 ‘시간이동’ 상황에 얼떨떨해진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며 역사, 운명, 일생, 순간, 영원이란 말이 일직선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간 이동과 공간 이동 속에 있다. 나는 지금 어디 쯤 지나고 있는가. 항공기 안에서 억류된 게 갑갑하여 자주 시간을 재고 있다. 인간은 아직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3차원 세계에 산다.
만약 내가 하루살이라면 날짜 변경선을 어떻게 지날 수 있을 것인가? 하루를 벌수도, 버릴 수도 있다. 하루가 보장된 24시간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 하루살이에게 하루는 곧 일생이 아닌가. 인간도 어디까지나 하루씩만을 사는 존재이지 않은가.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닥쳐오지 않았다. 인간은 오로지 오늘을 살 뿐인 존재이다. 누구나 삶 중에 불현듯 날자 변경선을 지날 때도 있을지 모른다. 여행엔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날짜 변경선을 지나며 삶의 집중력, 하루의 집중력을 생각한다. 그것은 순간의 집중력이 아닌가. 모든 게 스쳐 간다. 순식간에 스쳐가 버렸다. 순간에의 최선이야말로 날자 변경선을 넘을 수 있는 힘이 아닐까. 날자 변경선을 스치며 ‘나는 과연 어디로 가는가?’ 묻는다.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영원에서 순간으로’
창원 메타쉐콰이어 길
내가 사는 창원은 가로수가 좋은 도시다.
창원의 가로수길 중에서 이색적인 곳이 메타쉐콰이어가 있는 창원대로와 도청 앞길, 창원전문대 앞길 등이다. 창원의 넓은 도로는 전국 도시 중에서도 손꼽힌다. 창원대로변에는 봄이면 벚나무가 화려하게 계절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지만, 그 기간은 매우 짧다. 어느새 자취를 감춘 채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벚나무 뒤에서 메타쉐콰이어가 이 도시의 제왕인 양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창원대로를 완전 장악하고 자신의 영토임을 벚나무보다 훨씬 큰 키로 유감없이 보여준다. 메타쉐콰이어는 벚나무보다 훨씬 뒤에 심어진 가로수인데도 성장 속도가 빨라 여느 나무들이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 집안이나 좁은 뜰에선 다른 식물들이 치여서 견뎌내지 못한다.
메타쉐콰이어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속성수이며 장수목이다. 화석나무라고도 불려진다. 일직선으로 쑥쑥 커 올라 하늘을 치솟는 모습은 경이와 놀라움을 안겨준다. 볼 때마다 한 치씩 키가 자란다. 금방이라도 하늘에 닿으려는 듯 넘치는 기세, 힘의 맥박이 전해온다. 나무의 모습이 이등변삼각형을 이뤄, 살아있는 피라미드의 대열을 보는 듯하다. 키다리 나무로 씩씩하고 날렵하다. 소나무는 구부러진 곡선미와 여유를 주고, 느티나무는 사방으로 벌어져 포근함을 주지만, 메타쉐콰이어는 산뜻하고 날씬하며 청신감을 준다.
옆으로는 벌어지지 않고 오로지 위로만 일직선으로 치켜 올라 밋밋하게 느껴지지만, 군거더기가 없고 깔끔한 느낌을 안겨준다. 지칠 줄 모르게 성장하는 이등변 삼각형의 꼭지점은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가. 곧은 성정의 직선미와 넘치는 생명감이 창원의 대로와 잘 어울리는 나무다. 놀라운 제공권을 확보한 나머지 어느새 도로를 완전 점령하고, 그들의 영토임을 선포하고 있다.
창원은 우리나라에서 공원이 가장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곳곳에 공원이 조성돼 있어서 시민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메타쉐콰이어는 공원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나무이다. 창원 시민으로서 메타쉐콰이어를 관찰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재미이다. 이른 봄부터 푸르초롬한 빛깔이 향유를 바른 듯 윤기를 내면서 차츰 윤택을 머금고 짙어가 도시를 신록의 찬가 속으로 이끌어간다. 대로에 두 줄로 합창대원들이 줄지어 서서 신록의 깃발을 휘날리며 봄의 교향곡을 합창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름이면 녹음이 두텁지는 않지만 지칠 줄 모르는 기상으로 단정하고도 씩씩한 모습이 여름 무더위를 씻게 만든다. 가을이 되면 초록 잎들은 어느새 적갈색으로 변하여 이국적인 풍치를 드러낸다. 겨울이면 단풍을 떨쳐낸 섬세한 가지들이 하늘로 뻗어 올라 전체가 훤히 보이는 투명 나무로 변하고 만다.
가을의 커피색 같은 부드러운 간색은 원색이 주는 알록달록한 색감과는 달리 포근하고 온화하다. 색깔에서 커피 맛을 음미하게끔 만든다. 메타쉐콰이어를 보려고 창원전문대 앞길로 차를 몰기도 하고, 잠시 내려 산보를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보고 싶은 길 중 담양 메타쉐콰이어 길이 유명하지만, 창원도 이에 못지않다. 창원은 들판을 끼고 않고 도심에 있어서 풍경이 다를 뿐이다. 길가에 도열해 있는 메타쉐콰이어 모습은 흠 잡을 데 없는 미남들의 환영대열인 양 느껴진다. 이 길을 걸으면서 나무들과 대화를 나눌 때, 가슴이 설렘을 느낀다. 이 순간엔 나이를 잊는다. 하늘과 태양을 향해 오로지 심신을 이상세계로 뻗히며 성장과 평창을 위한 숨을 내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스러운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생명체로서 메타쉐콰이어보다 높은 공간에서 하늘과 대화를 하며 햇살을 받는 존재가 또 있을 것인가. 이 나무의 향상성은 조금도 꺾일 기세가 아니어서 태양을 향한 힘찬 찬송이 들려오는 듯하다. 메타쉐콰이어 길을 걸으면 어느새 젊음의 맥박과 기상을 되찾을 것만 같다.
외롭거나 한가한 날이면, 창원의 메타쉐콰이어 길을 산책하길 좋아한다. 쭉 뻗은 대로변의 녹색 이등변삼각형의 대열이 열병하고 있는 속으로 걸어가면, 자신도 모르게 왜소한 어깨가 활짝 펴지면서 큰 숨을 내쉬고 상쾌함이 가슴까지 차오른다. 언제 어디까지 올라갈 지 알 수 없는 이등변삼각형의 꼭지점과 눈 맞추며 나무가 이룬 피라미드의 신비를 느낀다.
창원의 메타쉐콰이어 길을 걸으면 양길에 도열해 있는 사관생도들의 거수경례를 받는 듯
가슴이 넓어지고 뛰는 맥박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