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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다가오는 기별을 들을 수 있을까? 아무도 묻지 못한 질문을 공들여 조형함으로써 인간의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을까? 인간이라는 지금의 무늬는 오랜 과거와 먼 미래를 잇는 진화의 율동에 어떻게 조응하고 있을까? 물질과 의식과 언어의 임계를 넘어 쉼없이 나아가는 인간의 정신사를 '집중'으로써 통으로 조망할 수 있을까? 생명체 중 유일하게 자기초월의 좁은 길에 들어선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영혼'의 자리는 어떻게 갱신될 수 있을까? 놀라운 이 생명과 정신의 도정에서 '공부'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인간은 이 광대무변한 시공간 속에서 구원의 소식이 될 수 있을까?" (<집중과 영혼>, 2017, 글항아리. '서언'중에서)
윗 글은, 지난 9월에 출간된 철학자 김영민의 신간, <집중과 영혼>의 서문 중 일부이자, 당일 강연원고의 초입이다. 저 물음 하나 하나가 10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의 걸음 걸음을 안내한 길잡이이자, 수많은 생각의 갈래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도록, 끝내 답하고자 스스로를 밀어나가게 한 동력이기도 했을 것이다. 강연은, 저 각각의 물음에 대한 저자 자신의 응답을 밝히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자체로 선뜻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는 책에 대한 길라잡이이자, 요약(?)이기도 하였다. 인문학이란, 도무지 '요약'이 쓸모없는 것이지만, 물음을 징검돌 삼아 내를 건너가듯, 나 또한 '요약'을 방편 삼아, 이 뒤늦은 후기를 남겨본다.
" 1) 미래에서 다가오는 기별을 들을 수 있을까?"
결론은, "있다"이다. 저 대목이 너무 거칠다면, "들을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다"거나, "이런 조건을 갖춘다면 들을 수 있다"정도로 보완이 되겠다. "지성과 영성이 융합되어 자발적으로 퇴행할 때" 달리 말하자면, "(개인이 자신의 에고를 죽이고) 무심에 이르렀을 때", 혹은, " 알면서 모른 체 할 때". 홀연히 내게 깃드는 소식처럼, 인간은 미래에서 오는 기별을 감지하고, 예감하고, '안다'.
"2) 아무도 묻지 못한 질문을 공들여 조형함으로써 인간의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 바로 꿸 수 있다. <"사소한 질문에 대한 옳은 대답은 별 게 아니다. 그러나 옳은 질문은 그 정답을 몰라도 주요한 발견의 지침이 된다(Edward Wilson) -강연원고 중에서 재인용>
아! 물음이 삶을, 공부모임을, 제 존재를 이끌어 가는 모습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가. 예컨대 이런 질문들, "......왜 사람은 한 치도 나아지지 못하는 걸까. 커지지도, 깊어지지도 못한 채, 대책없이 나이만 먹어가기에 점차 힘이 달리고, 총기가 흐려지고, 몸과 생활은 나날이 후줄근해지고야 마는 게 소위 '인간의 일생'이라면, 대체, 사람은 왜 굳이 이 별볼일 없는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야 하는 것일까"(청라, <어른, 아이가 아닌> 중에서), 혹은, "어째서 사람들은 대부분의 판단에서 자기자신을 예외로 하는 게 일반적일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로 대표되는 그런 현상들은 어째서 그런가/우리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나는, 내가 만나는 타자와 내가 속한 곳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는가"(씨알서원) 같은. 그러므로, 틈만 나면 퍼지고 흐려지는 몸뚱아리와 정신을 곧추 세울 수 있게 하는 각자의 '물음 하나'. 그것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기까지야 하겠냐마는, 아무래도 시시하다.
"3) 인간이라는 지금의 무늬는 오랜 과거와 먼 미래를 잇는 진화의 율동에 어떻게 조응하고 있는가?"
"마음은 아무 낯선 주제가 아니지만, 사람의 무늬를 알고자 했던 내 공부길에서 마음의 이력과 그 '너머'에 눈을 돌린 것은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집중'으로써 일이관지하고 '영혼'을 그 가능성의 한 결절로 삼은 게 곧 그 중요성에 응하고 그 의의를 밝히고자 한 때문이었다...(중략)...여전히 묻지 않고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마음의 '활동'에 의해서 무엇이 생성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강연 원고 중에서)
뇌과학자 박문호의 강의를 듣다보면, 마치, 신영복 선생이 감옥 안에서 목격했다는 '목수의 집그리기' 장면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보통은, 내남없이 '집을 그리라/그린다'하면 지붕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가며 그리지만, 실제로 집을 지어본 목수는, 아래부터 그려가더라는 것이다. (궁금한 이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어 보시길!) 박문호의 강의 또한 내겐 유사한 감동과 감흥을 주었는데, 보통 인간을 머리부터 그려가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 장구한 진화의 역사를 되짚으며 척수동물에서부터 점점 신경계가 위로 솟아 드디어 '뇌'라고 부를만한 것이 생겨나는 과정을 듣고 있다보면, 당장 오늘 하루의 삶을 두고 의미가 있니, 없니 하는 말들이 다 쓸데없는 푸념으로 느껴질만큼, '인간존재'에 대한 경이로움과 경외감이 솟구친다. 백년어 강연자리에서는 오해가 절로 붙을 수 있는 '영혼'을 아껴 사용하였지만, 또 여전히 김영민 선생이 그리고, 재정의하고 있는 '영혼'이 희미하지만, 아직은 다 정의되거나 확인되되지 않은, 따라서 당연히 합의도 요원한, '이성을 넘어선 이성' 정도로 일단 슬그머니 잡아만 두자. 이 질문은 다음에 따르는 물음과 밀접하므로.
"4) 생명체 중 유일하게 자기 초월의 좁은 길에 들어선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영혼'의 자리는 어떻게 갱신될 수 있을까"
어떤 것을 정의하거나 이해하고자 할 때, "무엇은 무엇이다"도 가능하지만, "~이 아니다"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후자가 갖는 생산성이 인간의 문제를 탐구할 때는 훨씬 나은 경우도 많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영혼'이라는 개념(-아직은 '어휘'일수도 있는)에 대해, 선생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며, "생성되어 온 것이며, 생성되고 있으며, 필시 생성될 것"이며, "육체만이 아니라 심지의 의식의 자의적인 우여곡절로부터도 벗어나려는 탈물질화의 터미널 쯤으로 가정해 볼 수 있으"며, "언제나 내가 아닌 것으로 가려는 인간, 끊임없이 자기를 초월하려는 인간의 특성"과 연관해 볼 때, 어쩌면 영혼은, "여느 의식의 부분이 감당할 수 없을만치 섬세하고 유현해진 정신의 돌연변이적 사태로 가정하는 게 적절한 설명이 아닐까?" 역시, 물음으로 끝났지만, 다음 부연만큼은 꼭 기록해둘만하다.
"여러분들은, 청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청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특히 수행하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청소'란 형식이 마음의 구성과 연관이 있습니다."(강연 중에서)
여러 후학들과 독자가, 또 청중이 "이 책이 수행론이냐?"고 의문을 표할 때, 늘 "아닙니다. 인간론입니다"고 답하신데에는, 이 책 전체가, 영어, 독일어, 불어, 일본어, 한국어 자료를 넘나들며 참고문헌만으로도 16페이지에 달하는 광대한 탐구의 결과임을 떠올리면 쉽게 동의되는 부분이다. 선생이 그려놓은, 인간존재의 넓은 스펙트럼 중 한 모습은 이러하다.
".....프란체스코의 경우처럼, 짐승이 깃들게 하는 신인(神人)의 전설은 고금동서에 드물지 않는데, 이들은 죄다 달인의 기량과 정성으로써 자신의 터를 장소화시켜 그 그늘에 '이웃'이 머물게 하였다. 돌과 쑥부쟁이가, 나무와 고양이가, 새와 걸인이, 학생과 사기꾼이, 도깨비와 귀신이."(강의 원고 중에서)
그러니까 선생은, <영도의 인문학과 공부의 미래>라는 책의 부제를 물음 삼아 4년을 걸어온 것이고, 그 끝에 저와 같은 소식(-어떤 사람들에게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수준을 넘어, 제 삶의 지향점이 될 수도 있는)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이미 다른 어느 곳으론가 옮겨가 또다시 거닐고 계시겠지.
"5) 놀라운 이 생명과 정신의 도정에서 '공부'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일찌기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는 말로 세간을 놀라게 하였고, 선생의 유명한 저작 중의 하나인 <공부론>은, '학인'을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베스트셀러이기도 하였지만, 인간을 탐구하는 도정에서 다시 '공부'를 언급하는 까닭이 금방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인용문을 보자.
"여기에서 '공부'라는 극히 인간적인 메타활동이 도드라진다. 공부는 인간이라는 정신의 특이성에 최적화된 수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수행성의 갈래갈래에서 달인과 성인의 이야기가 출몰하는 것은 외려 자연스럽다. 이는 인문학적 실효(實效)에 대한 내 오랜 고민과 실존적 선택이 겹쳐 응결된 의욕이다"(강의 원고 중에서. 강조는 인용자)
나 또한, '스물 일곱살 이후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 공부의 의미와 가치를 삶으로 체현하고자 애쓰는 사람 중의 하나로, "약속도 제대로 못 지키는 사람들이 들뢰즈를 읽고 있다"는 김영민 선생의 20년 전 발화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행여 제 <앎-말-삶>의 행색이 저런 형국은 아닐까 전전긍긍하던 스승과, 그 스승을 지독히 본받고자 했던 동학들과의 인연이 접힌 이후, 스스로 자문했던 물음이, "도대체 공부는 어떻게 해야 사람이 바뀌는 것일까/어찌 공부하면 바뀌지 않는 것일까"였다. 물론, 그리 묻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참으로 신산스런 장면과 풍경들을 적잖이 거쳐온 덕분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공부-인간-미래-장소'를 꿰는, 선생이 소개한 다음과 같은 인용구를 곱씹어본다.
" .....때때로 저는 책이 저를 통해 씌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단 그런 책들이 저를 통과해버리고 나면, 저는 텅 빈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죠...(중략) 여러분은 신화란 자신도 모르게 자기한테 들어온 생각이라고 제가 썼던 것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저는 한 번도 제 개인의 정체성을 깨달았던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자신이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든지, '나를'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는 사건이 일어나는 일종의 교차로 입니다."(레비 스트로스. < 강조는 인용자)
내 몸이 신이 깃드는 신전일진대 어찌 함부로 할 것이며, 내 정신 또한 신성이 깃들고 장차 천지만물이 조응할 수도 있는 '장소'에 버금가건만 어찌 갈고 닦지 않겠는가. 그러니 공부는, 의욕이고, 미래이며, 의무이자, 수행인 셈이다. (이 글을 쓰는 조금 전만 하더라도, 자정을 맞아 삼십 분 정도 독경을 했었다. 아직은 드물지만, 내 존재가, 레비스트로스를 빌리면 '교차로'이자, 당일 강연에서 등장한 '전화기' 혹은, '회로' 거나, 아니면, 어떤 에너지의 전달체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방금 전 자정 독경이 그러하였다. 목탁을 쥔 내 손과 입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속도로 움직였고, 그 힘이나 의지는(-내가 의식하기로는)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어떤 '공명'같은 느낌이었다. 그 '진동'이 지나간 후, 나는,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방언'이라는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행여 이 글이 검색에 걸려 오해를 불러올 가능성을 염려해 덧붙이자면, 나는 대단히 평범한 사람이다. 마음을 모아-혹은 '마음을 비우고' 한 가지 행위를 반복하면, 이를테면, 염불이나, 절이나, -좀 질감이 다르겠지만, 달리기나, 테크노 댄스나..... 정도와 질감의 차이는 있겠으나 누구나 그 '근처'로 갈 수 있다고 여긴다)
* '전화기'를 부연하자면-
"인간은 많은 경우에 주체가 아니고 통로에 불과합니다. 그 때 오가는 지식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주체들의 전화기입니다.헤겔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식으로 인간을 이해했던 사람들인데, "신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 신은 인간 정신을 이용해서 자기가 누군지 안다"는 말이 그렇겠지요."(강연 중에서)
"6) 인간은 이 광대무변한 시공간 속에서 구원의 소식이 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태어나 죽기 전에 할(될)만한 것은 오직 두 가지인데, 달인과 성인이 그것이다, 그 나머지는 오직 혼동이며 혼돈일 뿐이다. 무릇 달인과 성인이란 '감사없는 노원(怒怨-'노여움과 원망' 인용자)의 자리'를 훨훨 동뜨게 넘어선 정신의 개화일 것이다. 노원이라는 정신의 울혈은 산자와 죽은자, 이승과 저승을 묶는 부정적인 고리가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그의 영혼은 오염된다. 달인과 성인의 담론은 이 부정적 고리를 넘어선 영혼의 지경을 형용하려고 한 셈이다"(강의 원고 중에서)
이 인용문이면 충분하다 생각되지만, 이 대목도 기록해 둔다.
" 달인과 성인을 설명할 때, '장소'개념은 핵심적입니다. 사람이 깃드는 '장소'말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엄마'입니다. '엄마'는 대표적인 장소이지요. 어떤 엄마들은, '장소'가 아니라 그저 '공간'이고 '기능'입니다"
이 날 강의에서, 내 공부의 지향점을 나타낼 분명한 한 마디를 또 얻었다. '장소'/장소가 되는 사람'. 나는, 우리는, 어떻게 저리로 나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