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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북쪽역(-파리에는 기차역이 모두 4개 있다. 독일로 가는 것은 'Gare de Nord'에서 탄다)을 향해, 이른 아침 호스텔 '웁스'에서 나섰다. 8시 기차를 타야하니 서둘러야 했다. 어제 새벽까지 함께 있었던 마리아는 물론이고 같은 방 식구 모두가 곯아떨어져 있으니 짐정리며 나서는 것도 조심스럽다. 여행 기술이 늘어간다는 것은, 신중하고 주도면밀해야 하는 일과 대책없이 나서보는 일을 분별하는 능력을 의미하기도 하는 걸까. 초행의 아침이동이 부담스러워, 며칠 전 미리 지하철을 타고 길눈을 익혀 둔 덕에 다소 여유로운 상태로 나섰지만, 국경을 통과해야 하니 영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웬걸! 정녕, 기차표 말고는 아무런 검사를 하지 않았다. LA공항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을 때도, "얼마나 있을거냐? 다음 일정이 어디냐?" 묻고는 무사통과였는데, 그 흔한 짐검사도, 여권 검사도 없이 국경을 오갈 수 있다니.....참으로 불쾌했던 호주나 미국의 입국심사와 너무나 대조적인데다, 인류역사에 또 하나의 큰 실험으로 기록될 법한 유럽연합의 한 측면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참고로, 프랑스에서 독일로 가는 것과, 독일에서 프랑스로 오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떼제에서 만난 독일인 카스튼은, 운전을 하건 기차를 타건 프랑스로 올 때 짐검사를 통과해야 한다고 했으니까요)
국경을 넘었다는 안도감에 조금씩 바깥 풍경에 눈길을 건넬 즈음, '아, 구름 모양이 참 특이하고 예쁘구나...'하고 전화기를 꺼내 사진을 찍었는데....
독일 쾰른으로 가는 기차역 안에서
어라! 구름이 아니라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였다.(- -;) 구름으로 착각할 만큼 깨끗한(?) 매연이랄까...시지각 중심의 인지가 갖는 한계를 또 한번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유럽으로 건너오면서, 몇 몇 다시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기별을 했었는데, 유일하게 터키 이즈닉에서 만난 대만여성 '위샨'과 소식이 닿았고, '독일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해. 남편이 있지만 우리집에서 카우치서핑해 줄께'라던 위샨네 집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쾰른역에 도착하자마자 느낀 무뚝둑한 독일직원들의 표정(-정말, 미소가 드문 나라다)을 보자, "너네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늘 심각해?"장난처럼 묻는 내 질문에, "우리가 잘 웃지 않는 건 사실이야. 우리 독일인들은 항상 의무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나도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하던 떼제의 카스튼과 힐마가 떠오르기도 하였다. 영어안내를 찾기 힘든 것은 프랑스나 마찬가지이고, 그나마 독일 사람들은 파리 사람들보다는 영어대답에 적극적이라 초행길에 물어야 할 것을 물어가며 "'I'll wait for you at tram stop 'Sulzgurtel"이라던 위샨의 짧은 메시지만 기억하였다. 찾아가는 방법에 대한 자세한 안내와 연락처가 담긴 위샨의 메일을 그만 실수로 날려버려, 그날 오후 위샨을 만나지 못하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형편이었던 것.
다행히, 동호회 지인의 얼굴과 꼭 닮은 위샨이, 트램 역에 앉아 반갑게 맞아주었고, 우리는 약 다섯달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위샨이 사는 동네의 안내판-낯선 길의 정보를 보관하는 것은 길치인 내게 매우 유용하다
마침 위샨의 남편은 일 때문에 대만에 갔고, 내가 떠나는 날 돌아온다고 하니 한결 부담이 적었다. 짐을 내려놓고, 함께 산책을 나가 동네 구경을 하였다. 일요일이었는데도 사방이 조용하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가장 지루했던 여행지로 영국과 독일을 꼽던 배낭여행자들의 인상이 틀린 말이 아니다. 그저 조깅하고 조용히 공원을 거닐 뿐인 독일인의 휴일 풍경. 도시를 다니며 길고양이나 유기견을 보지 못한 곳은 파리와 독일이 유일하였다.
빨간 신호를 대기하던 횡단보도에서, 다시 한번 '내가 독일에 왔구나!'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누구도 무단횡단이나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진지할 만큼 엄숙하게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에 나는 그만 웃음이 나고 말았다. 차들도 멈춰 서 있었건만, 결코 파란불을 기다리는 법이 없던 마리아("아르헨티나에선 막 건너! 난 못 기다리겠어!!")도 떠올랐고, 그나마 한 두 사람은 신호를 아랑곳 않던 파리와도 다른 풍경이지 않은가. 위샨은 웃는 나를 보며 '독일사람들은 엄격하고 철저해. 내가 조깅하면서 자전거 전용도로로 잠깐만 들어가도 뒤에서 막 신경질적으로 벨을 울린다니까...외국인이라고 봐주고 그런 거 없어'라고 덧붙였다.
빨간 등이 두 개나 들어와 있는 쾰른의 횡단보도
내가 머문 위샨네 집-방음효과와 기능성이 탁월했던 창(손잡이 위치에 따라 여는 방향을 달리할 수 있다. 창에서 느낀 독일공학이랄까!)
위샨은, 대만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남편과 함께 파리로 유학 와, 프랑스에서만 4년, 스웨덴에서 2년, 독일에서 2년, 유럽에서만 도합 8년째 살고 있었다. 타자에 대한 자연스런 기대와 그 기대의 배반은 언제나 나를 조형한 사회문화를 되비추는 단서이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 "오늘은 어디 갈꺼야? 시내에 몇 군데 가볼 만한 곳이 있긴 한데, 혼자 찾아갔다 올 수 있겠어?"라고 묻는 위샨에게서 스치듯 당혹감을 느낀 것은, 분명 당연히 함께 움직이리라 은연중에 기대했던 까닭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아시안이지만, 유럽식 개인적 자유주의가 훨씬 익숙한 유러피언이기도 했던 것.
그이의 배경과 성정에 대해 알아갈수록, 터키에서 고작 사흘을 만났을 뿐인 나(-위샨의 환기로 인지했을 뿐, 내 인상 속 그녀는 일주일쯤 같이 지낸 것처럼 친근했다)를, 자기집에 3박4일 내내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매우 특별한 호의였음을 느꼈고, 새삼 고마웠다. 위샨은 또 그이대로, "나도 처음엔 불편할까봐 약간 걱정을 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경험이다"고 덧붙여 다소 마음이 놓이긴 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터키에서 만나자마자 여간 똑똑하고 현명한 여성이 아니라 여겼던 위샨은, 오랜 유럽 경험과 대만이라는 배경, 경제학 전공자라는 관점을 아울러 역사와, 경제, 사회 전반에 관한 너른 이해와 지적호기심을 지닌 놀라운 여성이었다. 우리는 서로, '바로 어제 만난 친구같고 아주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같다. 신기하지?'라고 감탄하며, 사흘 동안, 때론 정확한 전달을 위해 사전을 동원해가며, 모자란 어휘력을 안타까워하며 하루 8시간 이상씩 대화(-'수다'가 아니었다)하였다.
교회 앞 조각상과 도심에서 본 조형물. '쓰레기 인간'이란 제목이 중의적이었다
짧은 일정 속에서나마 쾰른 시내와 주택가를 오가며, 진지하고 엄격한 독일과 함께, 묘한 독일식 호의를 함께 체감하였다. 트램과 지하철에 개찰구가 없는 곳은 처음이었고, 트램표를 낯선 내게 건네며, '이거 아직 쓸 수 있으니 써라(대부분 1시간 반에서 2시간의 유효시간이 있다)'던 남성도 있었다. 위샨의 말에 의하면 독일에서 흔한 풍경이라고 했다. 대학가 주변인데도 중고서점을 찾기 어려웠던 반면, 종종 집 앞에 책을 놓아 두어 누구든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게끔 하는 것도 그 나눔의 뉘앙스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 덕분에 나도, 알지 못하는 독일어였지만, '베티 프리단'에 관한 책을 한 권 입수, 기념품처럼 소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행자에겐 뭐니뭐니해도 맛이 중요한 변별거리! 내 입맛에, 독일의 음식은 호주보다는 나아보였지만, 프랑스보다는 훨씬 떨어졌다. 쾰른은 파리와 기차로 2시간 거리일 뿐인데 여러모로 차이가 나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였다. 시골 모퉁이 빵집에서도 최고의 조각케잌을 즐길 수 있던 프랑스에 비하면, 섬세함이 덜하달까.....길가의 조형물에서 느껴지는 미감도 프랑스에서 느낀 예민할 만큼 섬세하고 완벽한 조형미와는 다르게 어딘지 거칠고 투박하거나 무뚝둑하였다. 여행경험이 많은 위샨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맛에 대한 감각이 있나 봐. 최고의 맛을 아는 것 같아. 어디서도 가짜를 본 적이 없고....미술관도 파리에서 본 이후로는 세계 어디를 가도 별 감흥이 없더라니까...네 말처럼 거리공연도 파리가 최고지. 그래도 프랑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말하는 법은 정말 복잡하고 아이러니한 측면이 많아. 좋고 싫은 표현도 어찌나 복잡하게 돌려서 말하는지. 독일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고...참 다른 것 같아"
독일 속담에, '신은 프랑스에 산다'는 말이 있다며, 프랑스의 풍성한 환경과 문화를 부러워하던 힐마(-그는 조경디자인을 전공하였다), "너네 나라는 어느 나라랑 민족감정이 있어?"란 내 물음에, 귓속말로, "사실은.....우리는 전통적으로 프랑스를 싫어해. 그래도 지금은 유럽 연합에서 가장 좋은 파트너로 신뢰를 쌓고 있지"라고 응답하던 점잖은 카스튼의 얘기, 양 쪽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경험까지 지닌 위샨. 짧은 유럽 경험이었지만, 좋은 친구들을 만난 덕분에 유럽에 한층 가까이 다가선 기분이 들었다.
길가에 얌전히 놓여있는 책 한권.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십상이다
어느새, 내 긴 여행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위샨에게, 마지막 날을 자축하는 파티를 열자고 제안하고 케잌과 와인, 김밥과 촛불을 준비하기로 했다.
위샨네 집에서는 인근 교회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여전히 신을 믿지 않는 나이지만'(이제는 이 말이 상투어가 되어가는 듯), 교회에 가서 감사기도를 해야겠다 싶었다. 공항에 억류되었던 사람, 소매치기로 가방이 찢어진 사람(수잔의 가방도 그랬다), 멕시코에서는 다리에 총을 맞은 사람도 만나지 않았던가. 배낭여행자에게 공포의 대상인 '베드 벅(Bed bug, 빈대)의 피해도 남의 일인양 참으로 아무 일없이, 위험한 사고 없이, 7개월의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데에는, 굳이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수많은 사람의 호의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앙뜨완은 말했었다. "나는 신이 있다고 생각해. 기독교의 신은 아냐, 도무지 그 사람들의 말은 납득할 수가 없어. 하지만, 만약 백 명의 사람이 너를 위해 기도한다면, 분명 네게 좋을 일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야...." 진심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을 위해, 나도 그들을 떠올리며 기도하였다. 그리고는 내 새끼 손가락보다도 가녀린 양초에 불을 붙여 올리고, 공항으로 가는 차비를 제외한 모든 동전을 함에 넣었다. 나는 비로소 여행자가 된 것 같기도 하였다.
교회에서의 마지막 기도 후
위샨 조, 좋은 경제학자나 교사의 자질을 지닌 아름다운 여성이다
공항으로 떠나던 날, 위샨의 남편이 대만에서 돌아와 인사를 할 수 있었다. 한국 인구의 절반 정도인 대만은, 중국과의 복잡한 관계도 관계지만, 사회역사적으로도 한국과는 매우 다른 측면이 있었다. 위샨의 남편만 하더라도 인구의 15% 안팎이라는 소수민족('하가'라고 불렀다) 출신인데, 공식어인 만다린(-대만어도 아닌, 흔히 말하는 '북경어'이다. 중국의 정치적 압력으로 50년째 대만의 공식언어로 쓰여, 이제는 젊은이들 중에 대만어를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을 쓰지 않으면 위샨과 남편, 남편 가족과는 소통할 수가 없단다. 위샨이 같은 아시안이고, 중국문화권에 있으면서도 나에 비해 소수자에 대해 좀더 균형있고 열린 시각을 지닐 수 있었던데는 그녀의 총명함이 첫째겠지만, 대만의 그같은 환경도 작용했으리란 추정을 해 보았다. 예컨대 위샨의 고등학교 한 선생님은 '핑크(-이때는 반드시 '핑크'라 해야 느낌이 산다!)색 레이디 자전거'를 타고다니는 동성애자였다는 얘기나, 치앙마이를 비롯한 아동밀매를 바라보는 위샨의 시각, 현존하는 지상낙원처럼 생각되는 스웨덴에 대한 견해 등은, 나로 하여금 더 많은 식견과 공부의 필요성을 환기한 좋은 대화자리였던 것.
역시 나는 운이 좋은 여행자였다. 대만사람들이 혼인할 때 먹는 전통빵('경주빵'맛이 났다)과 시아버지가 위샨을 위해 만들어 보냈다는 하가의 전통음식 '우반'을 독일에서 맛보는 희한한 환대와 배웅을 받으며 위샨네 집을 나섰다.
<오른쪽이 '우반'-쌀가루와 고구마(는 아니나 비슷한), 문어(는 아니나 비슷한!)를 섞어 쪄서 만든다고 한다. 일본 간식 다코야끼 같은 맛이 났는데 위샨이 좋아한다고 시아버지(!)가 만들어 보냈다. 위샨과 나는 대만과 한국, 일본 3국의 음식문화에 관해서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특히 '김밥'과 관련한 대화는 퍽 흥미로웠다. 위샨의 학창시절에도 소풍을 가면 어머니가 김밥을 싸주셨다니>
첫댓글 어떤 사건의 의미를 우리는 언제, 어떻게 실제에 근접하게 헤아릴 수 있게 될까. 씨알서원에서 읽었던 <신의 역사>, "은근히 신비주의인 데가 있다"며 놀림을 받기도 했던 나는, 선생과 동학을 통틀어 유일하게 종교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k선생은, 아는 사람은 알지만 공부를 안했으면 박수무당이나 목사가 되었을 법한 사람이고...내 지난 행위와 인연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지금 여기에 데려다 놓은 듯한 이 기분. 역시 '사후적 재구성'이 가져오는 착각일 뿐일까. 내 영성이 더 열리면 나는 무엇을 얼마나 더 알게 될까. (2018년 4월, 영산성지를 다녀온 내가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