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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에 대하여(순수신학통론)
회개에 합당한 믿음의 열매는 중생의 씨로부터 태어나고 의롭게 하는(justifying) 믿음의 뿌리로부터 자라나는 거룩하고, 선한 행위이다.
선행은(good works) 우리의 선택과 소명의 확증(confirmation)을 위해, 우리 이웃의 지지(upholding)를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율법의 교훈에 따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서, 일어나는 중생한 사람들의 행동들이다.
우리는 선행에 대한 이 정의를 그들의 무죄한 상태에 있어 우리 첫 조상들에게 적용하기 않아야 하고, 그들이 타락의 상태에 있는 동안, 그들의 후손에게도-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 적용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첫 조상들에게 적용하지 않아야 하는데, 죄로 타락하기 전에 그들의 행위는 의롭게 하는 믿음에서 나오지 않고 그들이 창조되었을 때의 원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그들의 후손에게도 적용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들이 아담의 죄 가운데로 타락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정의(original justice)를 박탈당한 이래,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에 뿌리박은 믿음을 결여한 이래로, 그들은 참되게 선한 열매를 스스로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종류의 행위들의 효과적인 원인은 일차적이거나 이차적이다. 일차적이거나 주요한 원인은 단지 하나님뿐이다. 왜냐하면 그만이 하나님이시듯, 모든 좋은 은사가 처음 내려오는 것은 오로지 그로부터만 오기 때문이다(약 1:17). 그리고 그는 절대적이거나 관계적으로 원인으로서 생각되어질 수 있다. 우리는 그를 세 신적 위격이 본질 안에 관계되고 우리가 외적으로 부르는 다른 역사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내적인 역사들을 산출하기 위해 동등한 관계로 대등하게 되므로, 관계적인 원인으로서 그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처럼 비록 사악함 가운데 완악해진 자연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의 율법에 따르는 새로운 순종을 향하여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이 성자와 더불어 성부 하나님이실지라도, 성령께서는 더 높은 원인에 더 하위의 원인으로서나, 주요한 원인에 도구적 원인으로서 이 행위에서 성부와 성자에 어떤 점에서도 부수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는 이 행위를 위해 그들의 능력에 동등한 능력에 의해서 그들 양자와 일치한다. 동시에, 성령님은 이 행위에 있어 신적 위격의 질서에 따라 마지막 위격이요 우리에게 가장 친밀한 위격이신데, 왜냐하면 사도가 우리의 선행을 특히 그의 열매로 부르는 이유 때문이다(갈 5:22; 엡 5:9).
이차적인(secondary) 원인은 올바른 원리나 시작점으로부터 그 자신의 마음에서 선행을 산출하는, 성령에 의해 새로워진 인물이고, 그는 그처럼 그 자신의 개인적인 보고(store-house)로부터 행한다. 따라서 다시 태어난 자들은 그들이 선행들 안에서 행하도록,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그것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으로 불린다(엡 2:10).
이 원인은 그것 없이 어떤 선행도 시작되거나 완전하게 될 수 없는 첫 원인에 매우 의존한다. 물론, 선행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시고, 그가 또한 완성하시며, 성령께서 그의 앞선 은혜에 의해 우리에게 새 힘을 수여하셔서, 우리가 선행을 행함에 자발적이고 행할 수 있듯이, 그의 부수적인 은혜에 의해 그는 우리가 실제로 잘 행하도록 그것을 일으킨다. 어거스틴은 능숙하게 이들 단어들로 두 가지 은혜들을 묘사한다. “다시 태어난 우리는 우리가 뜻하는 것을 뜻하지만, 그 뜻을 행하는 그는 우리가 뜻하는 것을 반드시 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것을 행하지만, 그것을 일어나게 역사하시는 자는 반드시 우리가 행하도록 하시는 유일한 자임이 확실하다”(어거스틴, On Grace and Free Choice, chapter 16).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 안에서 그것들을 역사하시는 한, 그처럼 우리는 선행을 오직 성령께 돌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또한, 그것들을 실행하도록, 그가 그것들을 역사하시는 한, 그때 우리는 그것들을 또한 우리의 행위로 부를 것이다. 어거스틴이 바르게 지적하듯(어거스틴, 설교 93, On the Liturgical Season). 한편, 우리 자신의 행위와 혼합되어 있는 사악한 행실들은 성령에 의해 일어나게 되지 않고 이생에 우리에게 붙어있는 육신적인 악들로부터 흘러나오고, 우리는 그것들을 성령에게 돌리지 않고 오직 우리 자신들에게만 돌려야 한다. 어거스틴이 동일한 구절에서 지적하듯이.
도구적인 원인은 내적이거나 외적이다. 내적인 도구적 원인은 믿음이고, 그것을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를 포도나무에 가지처럼 그리스도께 접붙이시며, 그래서 그 안에 뿌리박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행 15:9; 요 15:5; 골 2:7). 그러므로 약 2:22 이르길,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행함에 있어 ‘시녀(handmaid)'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과 연결된다(계 14:12).
외적인 도구적 원인은 말씀의 설교이고, 그것을 집행함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에 적합한 생명의 새로움을 향하여 우리를 권고하고 몰아가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복음의 설교를 씨에, 다시 태어난 자들을 좋고 비옥한 토양으로 비교하시고, 눅 8:15에서 그는 선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그들은 들었고, 그들은 그 말씀을 지켰으며, 인내로 결실한다고 주장한다.
내용은(subject-matter), 동시에 선한 행위를 결정하기 위한 규칙인, 무엇이든 우리의 입법자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를 위해 규정하신 것이고, 그것에 대해 도덕법은 요약이고, 하나님이 명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에 대한, 그리고 그가 금하시고 불쾌해하시는 악에 대한 척도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것을 분명하게 선지자들을 통해 설명하셨고, 신약에서 그는 그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을 통해 설명하셨으며, 그는 다양한 환경들 때문에 어떤 백성의 구체적인 교훈에 그리고 전체로서 그의 교회의 일반적인 교훈에 그것을 완전하게 적응시키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멸하실 수 있는 유일하고 오직 한 분인 입법자이시듯(약 4:12), 그와 같이 역시 그는 자신을 위해 경건, 정직, 그리고 의를 위한 규칙을, 그의 피조물인 우리 앞에 놓기 위해 모든 권리를 요구하신다(신 12: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그리고 겔 20:18-19, “너희 조상들의 율례를 따르지 말며, 그 규례를 지키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따르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라.” 이것들로부터 우리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 명령하신 그 일들을 실행해야 하고, 우리는 오직 선한 것으로서 그것들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그들이 약간의 지혜나 마음의 겸손함을 소유하고, 사도적이고 교회적인 교훈의 인상 깊은 호칭으로 관 씌워졌을지라도(사 29:13; 마 15:9; 골 2:22-23), 로마 교황의 교사들의 전통에 따라 선한 의도로, 혹은 자의적 예배로부터 행해진 그것들을 선행의 수 안에 계수하지 않는 것은 옳다. 이 종류의 행위들은 수도사의 서원과 금식, 성자숭배나 그들의 성지로 순례, 그리고 유사한 일들이다. 이것들은 경건의 행위에 결코 실제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규정한 경건의 모든 행위들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숭배(adoration)로 인도하지만, 성자를 숭배하고 부르는 것은 또한 피조물에 대한 미신적인 존경(veneration)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개인들이 포함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명령된 경건의 모든 행위를 나타내도록 요구된다는 그 사실이 그것에 부가된다. 그것들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들을 행하도록 명령을 받은 것은 더 큰 공로와 보상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수도사들의 서원은(교황의 교사들 자신이 인정하듯)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그것들을 행하는 것에 매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만 임의적이고 탁월한 것이다.
선행의 형식(form)은 그들의 내적인 건전함과 또한 그들의 외적인 모습이 관계되는 한, 그들의 모든 부분들에 있어 하나님의 율법의 규칙과의 그들의 완전한 일치, 혹은 그들의 정확한 조화와 일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진리를 따라 마음과 심판을 아시므로, 그리고 그의 율법은 영적인 것이므로-말과 행실에 관련될 뿐만 아니라 생각과 욕망에도 관계되는-우리의 행동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해야 한다(롬 2:2,7,14; 빌 1:10).
선행은 세 가지 목적(goal)을 갖는다. 이들 중에 첫째는 우리에 관계하고, 즉, 하나님을 향한 우리 감사의 증거이고, 그것에 의해 우리의 선택과 소명 양자가 우리 안에 확증된다(롬 12:1-2; 고전 6:19-20; 벧후 1:5,9-10). 왜냐하면 베드로의 격려의 말이 분명하게 하듯,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의롭게 하는 믿음의 명백한 표와 같은, 그리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와 같은 그 행위와 같이, 우리의 선행에 의해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우리 선택과 소명을 더 확신하여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요 15:8에 그리스도의 약속도 있고, 거기서 복음을 듣는 자들은 선행의 열매에 의해 그들이 그의 진짜 제자들임을, 그리스도에 접붙여진 영원한 포도나무 가지임을 더 확실하게 알 것이라는 것이 보증 된다.
선행의 둘째 목적은 그들이 신자이든지 불신자이든지 우리의 이웃을 세우는 것(upholding)이다. 왜냐하면 선을 행함에 있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범죄도 일으키지 않을 때, 즉, 우리가 거치는 돌이 됨이 없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솔선수범할 때, 그리고 우리가 공개적으로 우리 믿음이 신실하다는 것을 보여줄 때, 신자는 우리와 같은 동일한 믿음 안에서 강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신자는 그것을 따르게 되거나,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선한 행실을 비난한다면, 그것에 의해 수치를 당하게 된다(고전 10:32).
선행의 셋째 목적과, 다른 둘이 종속하는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때, 그들 자신들이 책망할 것이 없고 진실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빛나는 광채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다른 사람들 모두를 그들의 선행의 빛에 의해 초대하도록, 하나님은 중생한 자들을 이 세상과 부정한 세대의 가운데에 두셨기 때문이다(마 5:16; 빌 2:15; 요 15:1-8). 끊을 수 없는 끈이 이 목적을 앞선 목적들에 연합하고, 그것들과 함께 완전히 선행을 계기로 합당한 질서에 이른다. 이 이유로 동일한 명칭에 의해 그것들이 존재하듯 불린다. 때로는 선행의 열매, 혹은 선행의 용도, 혹은 선행의 효과로 불린다.
이방인들의 도덕적이고 시민적 덕목들이 우리가 충분히 설명한 것같이 선행에 대한 정의의 빛 안에서 분석하기 위해 놓일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들로서 그것들을 우리가 칭찬할 수 있는 것은 조금도 없고, 또한 칭찬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 정의의 어떤 부분도 그것들에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덕목들은 그들이 육신적인 한 중생의 영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그것들은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무시하거나 거절하므로, (그것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롭게 하는 믿음으로부터 나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이 하나님이 그의 율법 안에서 요구하신 것을 믿음이 행하는 ‘믿음의 손’이므로, 그들 덕목들은 참된 사랑으로부터도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그 일을 행하는 자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또한 관련된 일반적인 목적이신, 하나님을 위해 이들 행위를 실행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이 시대에 그들의 삶과 더불어 중지되는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즉, 자신들을 위하여 사회적 명예를 획득하기 위해서나, 대중적인 찬사를 얻기 위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그것들을 행한다.
하지만 불신자들의 덕목들은 절대적으로 악하거나, 본래 그리고 그 자체로 악하지 않다. 그것들은 어떤 측면에서, 그리고 우연히 악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순하게 그것들 자체로 고려될 때, 질료적인 면에 있어 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이 사악한 것에 근거한 뿌리로부터 나오고, 그처럼 또한 그들의 형식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들의 뿌리로부터, 그것들은 사악하고 불순한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의 형식에 있어, 그것들은 있어야 하는 것과 다르게 실행되기 때문이다.
Cyprian이 이교적인 불신자들의 덕목들을 거짓된 덕목들로 부르고, Jerome이 그것들은 부패로 부르는 것이 그 이유이고, 반면 어거스틴은, 롬 14:23에 바울의 진술에 대한 눈으로, 그것들을 “죄 자체”로 부른다. 그가, “우리가 불신자들의 행위에 관하여 얼마나 많이 단정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사도의 말이 참되다는 것, 믿음, 등과 하나님의 명령과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하는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을 무엇이나 죄라는 것을 안다. 만약 이방인이 벌거벗은 사람에게 옷을 제공한다면, 믿음에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조인가? 그렇다 실제로, 믿음에서 행해지지 않는 것, 그것이 죄라는 그 범위에서. 그것은 벌거벗은 자에게 옷을 주는 바로 그 행위가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종류의 행위에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없기 때문에 그것은 죄이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오직 불경한 자뿐이다”, 라고 말할 때(Cyprian, on the vortue of suffering; jerome, commentary on Galatians, chapter 3; Augustine, on the palestinian proceedings, chapter 14, and against Julian, book 4, chapter 3.)
물론, 다른 측면에서 그들 행실들은 부분적으로 선하고 부분적으로 사악하다. 그것들 안에 부패를 억제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것들은 일시적인 행복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영원한 형벌의 경감을 위해, 현재 삶의 훌륭한 태도를 위해 유용하기 때문에, 선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악한데, 그것들이 영생을 획득하기에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Marcellinus에게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로마인의 예로 이것을 예시하여, 그는 말한다. “초기 로마인들은 비록 참된 하나님을 향한 어떤 참된 경건을 소유하지 못했을지라도 공화국을 세우고 덕들로 그것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바로 이 부유하고 걸출한 로마제국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종교 없이도 사회적 덕목들이, 참된 종교가 더해질 때, 백성들이 진리가 왕이고, 사랑이 법이며, 영원함이 삶의 길인, 다른 나라의 시민들이 되려고 한다는 것을, 어떤 사람이 이해하려고 하는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Julian에 대항하여 book 4 chapter 3에서 그는 기록한다. “Fabricius는 Catiline보다 더 적은 형벌을 받을 것인데, 전자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후자가 더 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Fabricius는 Catiline보다 덜 악한데, 실제의 덕목들을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고, 실제의 덕목들에서 많은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행은 세 가지 부속의 속성들이 있다. 즉, 필연성(necessity), 온전함(성실, integrity), 고결함(dignity).
필연성은 많은 방식에 있어 선행의 속성으로 고려된다. 선행은 ‘필연적(necessary)'으로 불린다. 1) 신적인 명령의 필연성에 의해; 2)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정해진 수단의 필연성에 의해; 3)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본성적인 의무(obligation)로부터 빚지고 있는 예배와 순종의 필연성에 의해; 4) 그 자신의 구원과 구원에 이르는 소명을 바르게 자각하고 있는 선하고 평온한 양심의 필연성에 의해; 5) 우리의 이웃에게 사랑을 보일 의무의 필연성에 의해.
교황의 교사들은 앞선 필연성들에 효과(efficiency)의 필연성을 더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짓으로 부인하는데, 선행은 구원의 시작을 위해서나(그것은 죄의 용서와 우리의 하나님과의 화해로 이루어진다), 영원한 영화와 미래의 불멸의 완전한 실현 안에 그것의 자리를 발견하는, 그것의 완성(consummation)을 위해서나, 마치 그것들이 유효적인 원인들인 양,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칭의를 뒤따르고, 그것들은 상속인들 안에 요구된 조건과 길로서 우리를 위해서만 하늘에 준비된 기업을 선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꾸며낸 견해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교황의 교사들이 오용하는 성경에 바로 그들 구절들로부터 반대의 것을 입증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구절들 중에 어떤 것들은 영생을 약속받은 자들에게 요구된 자질이나 조건을 보여준다(히 10:36, 등). 다른 구절들은 사람이 영생에 이르는 믿음의 표지(mark)와 길(way)을 보여준다(마 25:35; 약 1:25; 2:14). 그리고 다른 구절들은 시작했고 죄의 용서를 이루는 구원의 열매와 효과를 지시한다(눅 7:47, 등).
선행의 온전함(성실, integrity)은 우리가 완전하게 순전한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모든 힘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다른 명칭으로 이것은 온전함과 재능(the parts)의 완전함(perfection)으로 불린다.
성경도 경험도 정도의 완전함(perfection)과 같은 그러한, 어떤 다른 완전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들 양자는 가장 거룩한 사람들의 이 세상에서 선행조차도 불완전한 것으로 발견되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완전함의 빛 가운데 시험된다면, 다양한 흠으로 얼룩진 것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거룩하고 믿는 사람들의 행위들이 세 가지 이유들로 인해 특히 완전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1) 그것은 매일 작은 증가 안에서 자라고, 생의 마지막 호흡이 끊기기까지 완전함의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지 못하는 그러한, 이 시대에 그들의 중생의 상태와 방식 때문이다. 2) 육신의 악덕에 의해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붙어있는 타락한 정욕의 잔재들 때문이다. 3) 동일한 전장에서 서로 싸우는 원수들의 그것과 같은, 육(flesh)과 영(spirit) 사이에 지속적인 싸움 때문이다. 그들 상호간의 갈등으로부터 혼합된 행위들이 일어나고, 그것은 영의 속한 일이나 육에 속한 일로 불리는 데, 이 행위들이 지향하는 성질(quality) 때문이다.
이들 이유들로 인해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모든 곳에서 율법의 교훈을 그것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성취하는, 완전하게 순수한 어떤 사람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한다(시 143:2; 롬 7:7-8; 8:3; 약 3:2).
그러나 완전주의를 [선행의 정도에 있어] 지지하는 자들은, 특별히 교황의 교사들,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할 만한 역량이 있는 그렇게 많은 능력을 중생한 자들에게 그들이 부여할 때 정반대의 견해를 주장하지만, 또한 율법의 요구보다 더 행위를 성취할 수 있고, 더 많이 어려운 일들을 행할 수 있다, 즉, 공덕(supererogation)의 행위들을 더 성취할 수 있다.
성경의 지지 없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들은 성경으로부터 매우 많은 증거본문을 제시하고, 그것을 그들은 부당하게 세 가지 결론으로 이끈다. 1) 성도들이 이생의 ‘무대(arena)'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가능하다. 2) 육신의 행위들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와 혼합된, 율법과 양립할 수 없는 치명적인 죄들은 아니고, 그것들은 율법의 범위 밖에서 범해진 용서받을 수 있는 죄들이고, 그러므로 그것들은 율법과 더불어 그들의 의의 양립성을 방해하지 않는다. 3) 성도들은 그들이 율법의 교훈에 의해 행하도록 되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큰 행위를 실행할 수 있다.
이어지는 논거와 함께 우리는 그들의 첫 결론을 입증하기 위해 싸우는 그들 증거본문들을 그들이 부정확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논증할 것이다. 첫째는 그들이 제시하는 구절들의 하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다루지 않거나, 정도의 완전함에 따라 정확하게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하는 성도들의 일반적인 의를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어떤 구절들은 일반적으로 순종의 열의와 노력, 혹은 시작되었지만 정도에 있어 완전하지 못한 의에 대한 열의와 노력을 입증하지만, 그것은 마음의 성실함과 순종의 모든 요소들이 현존하는 한 율법에 일치한다(수 11:15; 왕상 14:8; 왕하 23:25; 대하 15:12; 시 119:11; 눅 1:6; 행 13:22). 다른 구절들은 성도들의 특정한 의, 혹은 의의 원인들(시 7,27, 그리고 119편), 혹은 의의 행실(시 106:30)을 다룬다. 두 번째 논거는 어떤 구절들은 보편적인 의의 완전함을 갈망하도록 유지되는 사람들의 의무를 다룬다(요 14:21; 롬 13:8; 갈 5:14; 골 4:12). 그리고 다른 구절들은 믿음의 지식(고전 2:6; 히 5:14) 안에서나 그것의 실천(빌 3:15; 약 3:2)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능가한 자들의 더 큰 진보를 다룬다. 그리고 세 번째 논거는 그들이 열심히 하나님의 계명을 수행하도록 그리고 십자가를 견디도록 신속하게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다(마 11:30; 요일 5:3).
사도 요한의 증거(요일 3:9)와 이어지는 것(요일 1:8)의 비교는 교황의 교사들이 그것에서 이끌어내는 두 번째 결과에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뒤에 구절에서 그는 그 자신의 진술을 해석하고, 사도는 앞의 구절이 특별히 죽음에 이르는 죄 외에, 무엇이든 어떤 죄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왜냐하면 그는 새롭게 태어난 자들은 그 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반면 사도의 앞선 선언(요일 3:9)은 어떤 사람도 죄가 없는 자가 없다고 주장하는, 요일 1:8에서 미리 만들어진 진술과 모순되는 것에 틀림없다.
그들이 이끌어낸 세 번째 결과는 또한 거짓 기초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어떤 구절에서도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제적인 명령들을 (그것들의 기능이나 특별한 은사 때문에 어떤 특별한 개별적인 것들만을 위해서만 묘사된다) 도덕법의 계명들보다 더 완전한 ‘counsels, 권고들’로 부르지 않고, 또한 어느 곳에서도 그 명칭 ‘여덕의 행위, works of supererogation)'를 그것들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서만 표현되어야 하는 경건, 절제, 혹은 사람에 대한 그들의 행위에 적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들을 하나님께나(율법의 첫 돌판에 따라) 우리 이웃에게(율법의 둘째 돌판에 따라) 돌려지는 ’의무들‘로 부른다.
우리는 복음이 가르치듯이 그들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선행의 가치(dignity)를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의 엄격함에 대항하여 그것들을 시험하여야 한다면, 그때 그들 자신의 불완전함 때문에 그들은 그의 호의와 은혜(beneficence)보다는 책망할 가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다운 은혜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그 자신의 완전한 의로 덮으시고, 우리를 위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열매로서 아버지께 우리의 행위를 드리시는, 그의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영원한 영광으로 그들에게 관을 씌우시고 이들 행위를 황송하게도 받아들이신다.
그들 자신의 불완전함이 우리 행위가 그들 자신 내적인 가치에 의해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실 외에, 동일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이어지는 네 가지 논거가 있다. 이것들 중에 첫째는 미래의 삶의 약속된 상급에 대해, 보상이 무한하고 영원한 것에 반하여, 그것들은 유한하고 일시적이므로, 그들의 행위의 양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일 사도 바울이 성인다운 순교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견딘 그 짧은 고난들이 하늘의 영광의 상급에 의해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뛰어나게 된다(롬 8:18)는 이것에 관하여 주장한다면, 그때 우리는 거룩한 순교자의 고난보다 적고 우리가 실행해야 하는, 우리의 행위로 인해 약속된 동일한 상급에 관하여 더 동일한 주장을 해야 한다. 교황의 교사들에 의한 일치(congruity)의 공로와 타당한(condign) 공로 사이에 구별이 바르게 사도에 의한 이 진술에서 도출될 수 있다는 그 주장이 진리에서 멀어서 우리가 그것을 완전하게 거절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와 하늘나라의 상급 사이에 어떤 동등한 균형이 없기 때문에, 선행은 어떤 공로도 소유하지 못하고, 상급은 균형 잡힌 의의 평가에 기초된 제공되어야할 보상도 아니다.
둘째 이유는 선행은, 그것들이 선한 범위에, 성령으로부터 나오고(일찍이 주제 7에서 우리가 주장했듯), 그러므로 그것들은 적절하게 우리의 행위들이 아니고 우리에 의해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물들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소유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우리는, 그의 영의 도구들로서, 그것들을 하나님께 드린다. 어거스틴이 바르게 진술했듯이(설교 39, On the Liturgical Season).
셋째 이유는 우리의 행위는 빚지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빚진 최고의 유일하신 주이시듯, 하나님이 그것들을 우리에게 권리로 요구하시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행위들이 우리의 주로서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면, 확실하게 우리는 그것들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반대로 그것들이 가치가 있다면, 그때 그것들은 그의 주인의 권리에 의해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들은 그의 주인의 권리에 의해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종의 비유에 의해 보이신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
넷째 이유는 우리의 행위들로 그것의 앞섬에 의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의무 아래 자신을 생각하셔야 하는 어떤 이로움을 얻는 그런 방식 안에서 그의 선의를 줄이는 어떤 것을 우리가 주 하나님께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익한 종들임은 이 고려 안에 있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그는 이 이유를 직접적으로 선행하는 이유에 연결하신다(눅 17:10). 그리고 욥 35:7은 우리가 읽도록 동일한 사고를 나타낸다.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리고 욥 41:11: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그리고 유사하게 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들 이유들에 우리는 바로 그 단어 ‘공로’ 그 자체가 ‘공로들에 관한 교리’ 만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부가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된 필사자들(scribes)에 의해 어디에도 사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비록 예수 시락이 그들 가운데 하나로서 여겨지지 않고, 우리의 관점에 자증적인 증인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그가 16장 13절에서 사용하는 그 헬라 단어 ‘erga’가 ‘일들(works)을 의미하고, 우리에 의해 가르쳐진 본문의 지정한 의미를 고수하기 보다는 라틴 번역자의 나쁜 표현을 따르기 좋아하는, 교황의 교사들이 생각하듯, 공로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히 13:16에 구절로부터 분명하고, 거기서, 그들의 ’등가적 공덕(condignity)의 공로‘를 구성하기 위하여, 그들이 옛 번역자의 선에서, 동사 euaresteitai를 -우리가 하듯-’소중히 여겨지는 것‘보다 ’받을 만하다‘로, 심지어 비록 이 뒤의 단어가 전자보다 더 잘 사도의 의미를 표현할지라도, 설명한다. 헬라어에- 그리고 또한 정통- 능숙한 어떤 사람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복음은 어디서도 받을 만한 가치가 없고 자비로운 보상으로서 외에 우리의 선행으로 인하여 빚지고 있는 삯으로서, 영생이나 우리 영혼의 구원을 약속하지는 않으므로, [등가적 공덕의] 동일한 공로를 위한 지지를 부여하기 위하여 (매우 자주 종교적인 글들에서 나타나는) 그 단어 ‘삯(wages)'을 제시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리고 그 이유로 때로 그것은 “믿음의 결국”(벧전 1:9), “하나님의 은사”(롬 6:23), 그리고 다시 “양자(adoption)의 은혜에 의해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인인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된 유업”(벧전 1:4)으로 불린다.
모세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맺어진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을 지키는 것에 있어, 그리스도께서 견디신 그 속죄의 치욕에 의존하는 믿음의 눈으로 그 상을 바라보았고, 그는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가치의 그 치욕의 부요함을 생각했다(히 11:26).
고용관계들이 행하는 그 길에 댓가로서가 아니고, 값없이 우리의 주요 하늘의 아버지에 의해 우리에게 할당될 유업으로서, 그리고 이 기대의 달콤한 위로에 의해 이 현재의 삶의 고난을 완화시키는, 아들들로 입양된 노예들에 어울리는 것으로서, 우리가 바라보는 한, 우리가 우리의 눈을 동일한 상급에 돌리도록 이생의 울퉁불퉁한 사막을 여행하듯,
고전 9:24에서 사도는 동일한 상급을 우리에게 썩지 않을 면류관의 상으로서 표현하고,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에 의해 우리는 종말까지 우리의 경주를 더 열심히 달려가도록 이끌어져야 한다. 그리고 빌 3:14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상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경주 과정의 용감하고 굳은 성취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힘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하늘의 소명의 상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값이 없으므로, 그것의 효과와 그것의 범위도 값이 없어야 한다, 즉, 영원한 면류관의 상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일한 사도가 그 썩지 않는 면류관을 그의 영화로운 오심의 날에 의로운 재판관이신 그리스도께서 수여하실 그것과(딤후 4:8), 하늘에 그를 위해 쌓여있는 의의 면류관으로서 정의하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 면류관을 그의 행위들에 대한 엄격한 평가에 따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데, 심지어 비록 그가 어떤 비행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가 그것에 의해 의롭게 여겨진다는 것을 단호하게 부인하기 때문이다(고전 4:4). 오히려, 그는- 진리의 유사한 법칙에 따라- [면류관]은 어떤 행위가 무엇이든지(선하든 악하든) 그 질에 상당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곳에서, 병행 구들은 분명하게 그리고 정반대로 설명된다(혹은, 그것에 반대되는 것과 비교하여). 이것은 롬 2:[6]-8에서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선행의 영광)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 그리고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 1:6-7).
불신자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이 종류의 관계로부터, 어느 한 쪽의 행위가 가치가 있다고 결론짓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은 정의(right)의 법에 의해 불신자들의 행위를 불의에 대한 형벌로 갚으시고, 신자들의 행위에는 그의 은혜언약의 복음을 따라 의의 면류관으로 갚으시므로, 그는 그것의 호의로운 선포에 의해 그의 긍휼에 못지않은 약속된 축복의 신뢰할 만한 지불에 의해 그의 의를 드러내실 것이다(히 6:10; 10:23; 요일 1:9).
정통 교부들이 그 단어들 ‘공로’와 ‘얻는 것(to earn)'을 사용할 때, 1) 그들은 그 단어 ’공로(merit)‘를 양 방향으로, 선행으로 인한 공로 혹은 악행으로 인한 공로로서, 이해한다. 이것을 어거스틴의 서신 40에서 보이고, 거기서 그는 경건한 사람의 선한 공로와 불경건한 사람의 악한 공로 사이에 구별을 한다. 2) 그들은 그 단어 ’얻는 것‘을 ’획득하는 것(to obtain)' 혹은 ‘취득하는 것(to acquire)'으로 이해한다. the Proceeding of the Council of Carthage, cognition 3, article 258에서처럼:“그들이 성도들을 학살하기 위해 세상의 통치자들로부터 획득한(obtained) 다른 사형집행인들과 Leontius, Ursatius, Macarius에 의해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피가 흘려졌는가는 젖혀놓자.” 그리고 the first Sunday of Advent로부터: “오 주여, 우리가 당신의 권능과 오심을 요구하기 위해 간청하오니, 당신의 보호하심에 의해 우리가 우리 죄인들을 위협하는 위험들로부터 피함을 얻도록(obtain) 하시고 당신의 구원에 의해 구원을 얻도록 하옵소서.” 3) 그래서 어떤 사람도 그들 단어를 오용하지 않아야 하고, 선행으로 인한 고유의 칭찬할만한 가치 있음을 고안하지 않아야 하며, 그들은 때로 선행이 영원한 생명의 지불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동정의 가치가 더 있다고 진술한다. 어거스틴, 시편 49편과 61편에 대해, 그리고 베르나르, 아가 67설교를 보라.
이 이유로 교황의 교사들은 더 엄하게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데, 성경의 그 말들을 치명적으로 왜곡하는 것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옛 교회 교부들의 말들을 치명적으로 왜곡하는 것에 의해, 그들은 선행의 공로에 대한 그들의 교리를 상기시키는 것에 있어 어떤 수치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 관해 말하면, 우리는 그것들에 안녕을 고하고, 일찍 이루어딘 논거를 유지함에 있어, 우리는 우리의 공로는 하나님의 동정(compassion)이라고 베르나르와 함께 결론짓는다.
synopsis of a Purer Theology. disputation 34, 2016 Brill. page. 342-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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