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저널 창간 28주년 기념
- 분 석 -
종로구 역대 민선 구청장
3명에 대한 평가는 ‘〇’, ‘⧊’ 그리고 (?)
시대적 상황과 주민정서 속에 제각각 다른 특색
정흥진 초대.2기 - 민원 살피는 실력파 의회주의자
김충용 3.4기 - 구청장놀이 한 청렴한 온정주의자
김영종 5.6.7기 - 독선으로 소송 잦은 가산주의자
종로저널 28년의 역사 속에는 종로구 민선 구청장 3명에 대한 구정 전개 및 활동 상화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민선 기수별로 보면 총 7기로 나눠지지만 구청장 수는 3명이다. 그러니까 1995년 제1기 정흥진 종로구 민선 구청장이 탄생되어 1998년 제2기 민선 구청장까지 역임했고, 2002년 제3기 김충용 종로구 민선 구청장이 선출되어 2006년에 제4기 민선 구청장까지 당선, 역임한 바 있다. 그리고 2010년 제5기 김영종 종로구 민선구청장이 당선되어 2014년 제6기와 2018년 제7기인 현재까지 근무 중이다.
이들 세 명의 구청장은 제각각 구정 방향과 특색이 다르다. 출신 정당도 틀리거니와 정치적 성장 배경도 저마다 다르다. 그 당시 종로지역의 시대적 상황도 틀리지만 주민 정서와 분위기도 사뭇 다르기 때문에 이들 세 명을 비교, 분석한다는 것이 매우 이채롭다. 물론 초대 정흥진 구청장과 지금의 김영종 구청장은 같은 정파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뿌리와 배경은 ‘따로 또 같이’라고 할 수도 있어서 분명 차이가 있다.
우선 1995년 맨 처음 민선 정흥진 구청장의 당선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종로사회가 아무도 예측 못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종로사회는 오랜 여당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토착 기득권층이 주도세력으로 엄연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 토착세력은 공화당 시절부터 이어져 온 종로사회 전통적 지배세력이었다. 지방자치가 30년 만에 부활되면서 토착세력은 토호들을 중심으로 종로구의회를 장악하면서 지속적으로 종로사회를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4년 전 종로구의회가 구성됐을 때 총 22명의 구의원 중 21명이 그들 토호들로 구성됐다. 지역 토호들의 제도권 진입 신호였다. 그만큼 종로사회는 종로 토호 또는 토착 기득권층들의 세상이었다.
그런 풍토에서 1995년 처음으로 민선 구청장을 선출하는 선거는 당연히 여당인 민정당 후보가 당선될 것으로 점쳐졌는데, 막상 투표 결과는 야당인 평화민주당 정흥진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그 때 정흥진 당선자에게 당선 소감을 묻자, 정흥진 당선자 왈, “내 허벅지를 꼬집어 보세요”였다. 당선 사실이 여전히 믿지지 않아서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보면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다는 농담이었다. 그만큼 정흥진 후보자조차 자신의 당선 사실을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일대 혼란과 변화의 시작이었다.
정흥진 초대 민선 구청장은 종로구 서울시의원 출신이었다. 정치 경력이라고는 김대중 총재의 개인 경호원으로서 비서 출신이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양대 체육과를 나와 잠시 교사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의 별명은 ‘풍차돌리기’라고 한다. 김대중 총재 경호원 당시 전경들이 달려들면 전경 한명을 번쩍 들어 올려 풍차돌리기로 다른 전경들을 막았다는 전설이 별명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태권도 실력도 대단히 뛰어 나 발로 상대방 빰을 자유자재로 때렸다고 전해진다.
1991년 지방자치 부활 이후 첫 지방선거가 실시됐을 때 그는 창신동과 숭인동 지역 제3선거구에서 서울시의원 1명을 선출하는데서 당선됐다. 당시 종로구는 3명의 시의원을 뽑았는데 종로구 제1, 제2 선거구에서는 모두 여당 후보가 당선됐지만 제3지역만 정흥진 후보가 당선된 것이었다. 정 시의원은 4년간 시의원 활동을 한 후, 1995년 초대 민선 종로구청장 선거에 출마를 했다. 정흥진 초대 민선 종로구청장의 당선 과정과 배경을 설명하자면, 별도의 에피소드와 히스토리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모두 생략하고 종로구 초대 민선 구청장으로서의 구정활동만 분석해 본다.
정흥진 초대 민선 종로구청장은 시의원 출신답게 철저한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종로구의회 의원들과 정파를 떠나 친분이 좋았다. 한마디로 구의원을 비롯해서 구의회와 협력과 소통을 잘 하는 구청장이었다. 정 구청장이 그런 까닭은 그 당시 구의원 대다수는 여당인 민자당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초대 민선 구청장으로서 구청 공무원들보다는 구의원들이 더 친숙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 구청장 시절에는 민선 구청장 초기였기 때문에 민선 구청장과 구청 공무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흘렀다. 구청 공무원들 중 주요 간부들은 전통적인 관료 출신들이다. 관료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오랜 습관과 관행 상 아무리 구청장이라고 해도 관선 구청장과는 달리 민선 구청장과의 관계는 매우 어색한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관료로서 오랜 시간 주민위에 군림했던 공무원들이 하루아침에 주민이 민선 구청장으로 부임했다고 해서 금방 상하 관계에 굴종할 수 있는 정서는 아니었던 것이다. 실로 민선 초기에는 구청장과 구청 간부들 사이가 서먹서먹하고 팽팽한 분위기였다. 구청장 명(命)이 잘 서지도 않았으며, 공무원 보고도 엉터리가 많았다. 심지어 구청장 판공비가 얼마인지, 그리고 업무추진비가 어디에 얼마나 숨어있는지 잘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그러한 분위기가 반년 이상 흐르고 새해 예산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민선 구청장이 스스로 터득하고 깨우치며 비로소 명(命)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 공무원들과의 관계와 업무처리는 상당 기간이 흘러야 조금씩 가능해졌다. 그러니까 정흥진 초대 민선 구청장은 구청장 취임 이후 구청 공무원들과의 신경전이 우선 급선무였다. 구청 공무원들을 휘하로 잡아두는 것이 필요했던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 구청장은 매우 슬기롭고 담대한 구청장이었다.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그리고 수월하게 공무원들을 장악했다. 일단 공무원에 대한 인사권이 주효한 까닭에 서서히 종로구 접수에 성공하는 모습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종로구민을 서서히 포섭하면서 민심을 얻었다. 민원이 들어오면 거의 모든 것을 수용했다. 주민이 원하는 일은 가급적 들어 줬다. 법과 조례가 장애가 되도 편법과 변칙을 쓰더라도 우선적으로 주민의 편에서 행정 처리를 했다.
더군다나 그 당시 종로 분위기는 전통적 토호세력이 주도하던 분위기에서 소외받던 주민들이 서서히 들고 일어나던 분위기였기 때문에 정 구청장은 이를 적극 활용하고 동시에 우군으로 만드는 전략으로 접근하여 주민들의 인기를 얻어 냈다. 그래서 1998년 제2기 민선 종로구청장 선거에서도 무난히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정흥진 전 구청장은 구청장 재임시절에 대해서 주민들 대다수가 잘했다고 평가를 한다. 소탈하게 잘 웃고, 주민들과 친하게 지내는 위민행정으로 일관했는데,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민원을 잘 들어 주면서 주민의 입장에서 주민 위주의 행정을 전개하는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력이 있는 구청장이었다.
<공무원들에게 휘둘리는 민선 구청장>
종로구 민선 3기 김충용 구청장은 행운아 케이스다. 경희대 약대를 졸업한 후 종로구에서 약국을 오랫동안 운영하면서 종로구 약사회장도 역임했다. 바르게살기운동 종로구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지역 봉사도 열심히 하면서 정치권 진입을 오래전부터 기획을 했다. 그래서 1998년 서울시 의원 선거에도 출마를 했었지만 낙선을 했고, 그 이후 모 지역신문사를 인수했다. 김충용 전 구청장은 “약사회장과 바르게살기 회장 백날 해봐야 주민들이 잘 알지도 못한다”면서 지역신문사를 운영하면서 주민들에게 이름을 알리고자 전략적으로 신문사를 인수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정인봉 국회의원 후원회장을 지낸 인연으로 한나라당 종로구청장 후보 공천을 받고 2002년 제3기 종로구 민선 구청장에 당선됐다.
김충용 제3기 종로구 민선 구청장은 참으로 선량한 구청장이었다. 자신이 어렵게 살아온 옛 날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서인지, 종로구 관내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눈물까지 흘리는 순정파 구청장이었다. 그런 연유 탓인지 종로장학회 설립이라는 행운도 뒤따라 종로구 장학사업의 꽃을 피우기도 했다.
하지만 김충용 구청장은 구청 행정 업무를 잘 몰랐다. 정흥진 전 구청장은 시의원을 4년이나 했기 때문에 그래도 행정에 대한 기초 지식은 있었지만 김충용 구청장은 약사와 국민운동단체장 경력이 전부이기 때문에 행정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스스로도 구청 업무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편이었다. 그냥 단순히 공무원들이 보고하는 데로, 공무원들이 시키는 데로 따라갈 뿐이었다. 민원인이 찾아와도 담당 공무원들을 물어 보고, 공무원들이 안된다고 하면 그냥 “안된대요‘하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민원인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일이었다. 그냥 사람만 좋은 구청장 일뿐 이었다.
다만 한 가지 훌륭한 부분은 청렴했다는 것이다. 김충용 민선 3,4기 구청장은 참으로 청렴했다. 민원인들로부터 일체의 용돈을 받지 않았다. 공무원 진급관련에 있어서도 부정과 비리가 거의 없었다. 한번은 모 과장이 서기관으로 진급한 다음 이천만원을 들고 찾아 왔는데, 김 구청장은 이를 즉시 종로장학회 기금으로 넣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특히 김 구청장이 청렴했던 것은 그가 구청장으로 취임한 이후 몇 년간은 월급을 한 푼도 받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김구청장은 자신의 월급을 모두 종로장학회에 입금시켰다. 본래 약국 운영으로 재력이 튼튼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구청장 월급을 고스람히 장학회에 입금시켰다는 사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공무원이나 주민도 별로 없다. 그냥 몰래 선행(?)을 했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부인만 속을 태웠다.
김충용 민선 구청장의 오점은 구청 행정을 잘 모르고 그저 구청장 놀이로 임기를 채웠다는 비판이다. 구청 공무원들에게 휘둘린 채 지역발전과 구민 복리증진에 대한 구청장 소신과 의지가 철학적으로 빈곤했던 것이다. 그래서 큰 업적도 없지만 큰 사고도 없이 지나갔다.
<소송과 고소고발이 끊이지 않는 구청장>
2010년 제5기 종로구 민선구청장에 당선되어 제6기와 제7기까지 10년간 근무 중인 김영종 구청장에 대해서는 현직이기 때문에 아직은 평가 및 분석이조심스러우면서도 이르다는 감이 있다.
다만 지난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그가 해놓은 일이 별로 없다는 평이 우세한 편이다. 심지어 같은 당원들 사이에서도 지난 10년 간 10억 원에 이르는 주민혈세를 월급으로 받고서도 한 일이 별로 없다는 지적은 대세적인 주민들의 평가다.
오히려 당파와 진영논리에 젖은 가산주의적 행정 전개로 종로구청이 전라남도 곡성군 분실이라는 오명을 얻고 있기도 하다. 5촌 조카를 정무직 공무원으로 10년 간 재직시키면서 최근에는 5급 상당으로 진급까지 시켰다는 소문(?)에 구청 공무원들은 매우 불편한 심기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독선적 행정으로 지역언론을 탄압하는 전형적 자치독재의 전횡은 차치하고서라도 도시개발행정에 있어서의 직권남용적 업무처리로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는 등 종로구 지방자치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상황이다.그래서인지 유난히 구청 행정에 대한 고소고발이 끊이지 않는 상태에서 행정심판을 비롯하여 행정법원의 쟁송과 민사법원 배상청구 소송 등이 난무하는 실정이다. 공무원들조차 개인적인 직무유기와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경찰조사가 빈발하고 있고, 구청장조차 뇌물의혹 및 공직자윤리법 위반 혐으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아직 임기가 1년 반 정도 남은 상태에서 전반적인 분석은 유보해야겠지만 역대 종로구청장과는 매우 상이한 실정인 것만은 틀림없는 모습이다. 앞으로 임기가 끝나고 나면 그의 12년 종로구청장 모습이 종로구 역사에 어떻게 남을 지 지켜 볼 일이다. <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