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물리치료 대학교육부터
얼마전에 한국의 물리치료사들을 위한 웹싸이트에 들어갔었다. 제도를 변화하기 위해 수많은 치료사들이 많이들 노력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수 있었다. 그 중 흥미로운 글들이 있어 한국의 물리치료계의 “항쟁”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할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학교를 들어갈때가 1990년도 중반쯤이였으니까, 강산 한번 바뀌었다고 하자. 그때도 물리치료사 단독개업에 대한 헌법소원을 했었다. 물론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지금은 또 다시 단독개업은 하되 의사의 감독 아래서라는 조항으로 진행을 하고 있는듯 하다. 여기에 덧붙여서 이제는 한의사와 손을 잡고 의사들과 항쟁을 하고 있는 모습니다. 이런것 저런것 좋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한국은 의사들이 주도하는 의료계이니만큼 절대적으로 그들은 그들의 밥그릇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는 않을것이다. 더불어서 우리와는 학문적 관계가 직접적이지 않는 한의학과의 연대 또한 그리 오래 가지 못할것이다.
과연 우리나라의 물리치료계의 문제는 무엇일까? 문제를 알수 있다면 답을 찿는것은 간단하지 않을까? 서두가 길었나보다. 문제점은 우리를 교육시켰던, 지금도 수많은 물리치료과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는 “대학교육”에 큰 문제가 있다. 문제의 토대가 되는 “대학교육”을 바로 잡지 못한다면 한국의 물리치료사의 밝은 미래는 없을듯 하다. 그 이유로는 내면적 충실성을 꼽을수가 있을것이다. 외면적으로 볼때 물리치료학과는 대학원 과정도 설립되었고, 물리치료박사 학위자들도 대다수 배출되었다. 하지만 “직업 전문성”이란 내용을 볼때 외형적으로만 성장했지 내실은 그리 다지지 못한 모습이 많다.
한 예로 대다수의 한국의 물리치료사들은 외국과 한국을 비교할때 모든 조건이 비등한데 왜 우리만 단독개업할수 없고, 왜 우리가 환자를 진료할수 없느냐고 불평들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큰 ‘착각’과 ‘오만’이다. 한국의 물리치료와 물리치료 선진국(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과는 감히 비교를 할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한국의 물리치료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혁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싶다.
단독개업이던 진료권 보장이던, 남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값진 희생말이다. 지금 우리가 싸우려는 상대는 누구인가? 의료계의 메인 흐름인 의사들이다. 그들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동등한, 혹은 상등한 교육적 토대를 마련했을때 개업이던, 다른 선진국들과 같은 진료권 보장을 요구할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첫번째로 우리의 교육여건은 어떠한가? 의대와 비교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교육시설을 가지고 있다. 의료의 기본인 해부학 실습실조차 없어 상당수는 외국이나 의대 실습실을 이용하여 실습을 하고 있다. 이보다 못한 경우는 졸업하기까지 해부학 실습조차 받지 못한다. ‘그림’과 ‘해부학 모델’로 공부한 학생들이 실제 카데바(cadaver)를 가지고 공부한 학생들보다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를 이해하는데에는 많은 한계점들이 있다. 또한 해부학 실습이 1주일, 2주일해서 많은것을 얻을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잘 짜여진 학습 계획표에 의한 교육이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기만 하다.
선진국의 물리치료학과의 경우 1년 혹은 1.5년동안 해부학 교육을 실습과 같이 받는다. 예를 들자면 1주일 학습분량을 4일(월-목)동안 공부하고 1일(금) 3-4시간정도 해부학 실습을 선학습한것만을 가지고 실습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1-1.5년정도면 쌓이는 수많은해부학 지식속에 실습이 어우러져 배우는 학생들에게 참된 지식을 심어주게 되는것이다.
두번째로, 한국의 물리치료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진에 문제가 많다. 한 예로 40명 혹은 100명 정원의 학생들을 배출시키는 물리치료학과에 몇명의 교수가 있는가? 많아 봐야 5-6명정도이고 나머지는 시간 강사들이 많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자기 전공과는 별개의 과목들을 가르치는 교수와 강사들이 많기에 교육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극대화 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선진국의 물리치료학과는 어떠할까?
호주의 S대를 예를 들어보자. 200명정원에 약 10개의 튜토리알 그룹(그룹당 18-20명)이 있다. 또한 약 5-8명정도의 교수들이 있고 약 35명정도의 렉쳐러들이 포진하고 있다. 튜터를 포함한다면 그 수는 셀수가 없을듯 싶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영국식 실습교육을 따라가다 보니 “강의+실습”이 함께 병행된다. 물론 강의는 경력이 많은(10-20년) 력쳐러(lecturer)들이 하고 튜토리알에서는 튜터(tutor)들이 소규모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물론 튜터들의 경력은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박사학위를 이상자 이던지, 경력 10년이상이 즐비하다. 이런식으로 따진다면 한국의 교수진은 이곳의 튜터의 지위 밖에 안되는 듯 싶다. 여기서 말하는 경력이란 한 분야만을 집중적으로 학문 탐구한것을 뜻한다. 예를 들자면 나의 해부학 튜터인 경우 해부학 실습실 경력 30-40년은 된다. 그분의 연세가 우리들의 할머니 연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 짜여진 교육인프라에서 배우는 학생들의 학문적 성취를 우리는 감히 의심할수 없을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수 자질에 있지 않나 쉽다. 한국에서 교수임용시 Academic career보다는 Clinical career를 좀더 따지는 성향이 깊다. 두 영역다 ‘교수’라고 호칭 되기 위해서는 모두 중요한 항목이다. 하지만 단순히 외국에서 한 가지의 치료방법에 대한 자격증을 습득했다고 교수임용을 시킨다는것은 상식 이하의 행동이다. 대학이라는것은 탄탄한 이론적 바탕을 학생들에게 전도해 주고 임상이전에 물리치료란 학문을 개괄적으로, 폭넓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진정한 물리치료의 영역과 한계성을 보여줄만한 교수가 많이 있는것 같지는 않다. 한 예로 내가 학교를 다닐때 외국에서 자격증을 취득한 A 교수가 대학교수로 채용되었다. A 교수가 일반 해부학과 신경해부학, 기타 여러분야(운동치료)의 과목등을 가르쳤다. 결론적으로 ‘학문적 깊이’가 교수라고 불리기에는 부족했기에 현재 새롭게 물리치료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이 교수가 자격미달인 교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냥 임상에 남아있었으면 훌륭한 선생으로서 각인 되었을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물론 한국 교육 여건상 한 교수가 여러 과목들을 커버해야한다는 큰 문제점이 있지만 말이다.
세번째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 기자재, 그중 “전공서적”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자기가 했던 실험, 연구했던 과제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칠때 더 많은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전도해 줄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은 어떠한가? 타인이 썼던 책을 교재로 쓰거나 많이 뒤쳐진 정보들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한 예로 영문서적을 강의 교재로 쓰면 무엇인가 폼이 나는것 같이 보일진 몰라도 교수 혹은 강사 자신들의 지식은 절대 아니다. 여러분들도 공부해 봐서 다 알것이다. 내가 직접 실습도 하고 이론 공부도 한 지식들은 내 마음속에 깊게 자리잡고, 나의 역량을 증대 시켜줄수 있다는것을… 하지만 우리가 받는 교육은 그리 깊지도 그리 폭넚지도 않은 지식들이었다. 오히려 위와는 반대인 상황이 우리의 현실에 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때 한 가지 기억이 남는것이 있다. 해부학을 가르치던 모교수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한글로 된 해부학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며 ‘큰 가슴근’, ‘작은 가슴근’등을 내 머리에 주입시켰다. 물론 한국인의 자긍심까지 좋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우리의 자긍심을 논하기 전에 외국에서 발전된 학문들에 대해서 벤치마킹(benchmarking)해야될 시점이다. 아마도 이 교수는 현재 우리의 위치와 현실을 잘 몰랐던것 같다.
마지막으로 물리치료도 하나의 학문이다. 학문은 언제나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서 변해야 하는것이 정설이다. 또한 학문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닌 흘러가는 물줄기와 같다. 물리치료는 영국에서는 ‘Physiotherapy’, 미국에서는 ‘Physical Therapy’라 호칭한다. 이 말에 함축되어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물리적인자들을 사용한 과학적 치료다.
우리의 학문이 곧 과학이라는 것이다. 과학이라는것이 무엇인가? 원인과 결과가 명확해야하고, 논리성이 명확할때 이것을 우리는 과학이라 칭한다. 그런 의미에서 선진 물리치료는 이미 Biomechanics, Evidence based Physiotherapy등 과학적 학문을 물리치료에 접목시켜 개별적 환자에 대한 치료를 정량화 (dosage) 하고 있는 추세다. 이것은 마치 약국에서 감기약을 살때 일반환자에 대한 투약량이 표준화 되어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도 과학적인 물리치료학을 설립할수 있는 인프라스트럭쳐(infrastructure)가 많이 부족하다. 석.박사학위자들의 리서치 영역도 아직 과학적 물리치료를 시작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한 예로 호주에서는 “Pedro”라는 물리치료 리서치 프로그램이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지고 있다. 더불어서 학부에서조차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지만 한국은 임상선생들 혹은 대학원에서 소개를 해주고 있다.
더불어서 한국에서는 보바스 (Bobath) 테크닉이 신경계 물리치료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테크닉은 1950-60년대의 컨셉을 그대로 쓰고 있다.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변했는데 말이다. 이것은 마치 카이로 프락틱의 컨셉과 똑같다. 척추의 바른 정렬을 통한 ‘만병통치’라는 팔머의 주장과 똑같다는 말이다. 그런의미에서 한국의 신경계 물리치료는 선진국과 비교해서 많이 뒤떨어져 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점차적으로 물리치료의 주류에서 배척하고 있는 위와 같은 치료방법에 대해서 아직까지 보듬고 코어(core) 치료로서 강요/강조 되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보바스 테크닉의 과학적인 증명 없이는 치료사들이 더 이상 환자에게 이 치료 테크닉을 적용하면 안된다. 이것은 마치 신차 개발후 20-30년동안 엔진 교체없이 디자인만 바꾸어서 차를 소비자에게 파는것과 같은 이치라 본인은 생각한다.
결론의 글이다. 한국의 물리치료는 대학교육에 달려있다. ‘대학교육’의 질이 더욱 높아 질때 우리는 더욱 치료사로서 당당해질수 있다. 우선 교수들의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 현실이 이런데…라는 하소연보다는 10년 앞을 내다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하겠다. 더 이상 물리치료과 학생들을 속이지 말자!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니면 가르치려는 시도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부터 비전공 교수들이 마치 자기 전공인양 여러 과목들을 가르쳤기에(원인제공) 우리가 여기까지 이렇게 흘러 온것이다.
더불어서 교수 자기가 배운/전공한 내용에만 중점을 둘것이 아니라 물리치료의 광범위하면서 전문적인 면에 초점을 둔 대학교육을 펼쳐야 할것이다. 물리치료는 정형물리치료만 신경물리치료만 있는것이 아니다. 왜 우리는 아직까지 심장.폐질환 환자를 위한 물리치료는 손도 못되고 있는가에 나는 큰 의문점이 있다.
또한 우리는 미래의 치료사이다. 학문을 이론적인것 부터 실용적인것까지 대학 교육에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졸업뒤 사비를 들여서 여러가지 세미나를 들으면서 처음부터 다시 계속 배워야 한다. 왜 그럴까? 대학교육에서 처음이라는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 못했기때문이다. 또한 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다수 교수들이 아직까지 물리치료의 처음과 끝이라는것을 모르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교수들은, 자신들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겸손해야 하고 더욱 학문을 탐구하려는 진실된 노력이 있어야 할것이다. 이런 혁신적이고 자아 희생적인 변화만이 우리라는 물리치료 공동체의 발전과 밝은 비젼을 제시해 줄수 있다.
시간 관계상 좋은 글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표하고 싶다. 이 글에 대해서 논쟁을 원하시는분이 있다면 그분과 행복하게 논쟁을 하고 싶다. 나는 그 논쟁을 통해 내 시각을 넓힐수 있고 내 지식을 살찌울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