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밥상
행복이란 것을 망각하고
혼자 밥을 먹는 오늘
눈물을 씹는 것인지
현실을 씹는 것인지
목이 메여오는 것을 참으며 밥을 먹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같이 밥을 먹을 자리가 점점 적어져 가고
가족이라는 의미조차 희미해져 가는데
눈을 떴을 때
모두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바쁜 아침의 일과가 되어 버려
같이 모여서 밥 먹어 보는 것이 소원으로 바뀌는데
먼동이 트는 아침
햇살이 피어오르는 바다는
행복한 아침 밥상을 차려두고
日常으로 출근한다
극락 가는 길
-법정스님 다비식 날에
갈 때는
가진 것도 다 버리고
그냥 가라 했는데
올 때처럼
빈 몸으로 가라 했는데
열반으로 가시는 님
무엇을 가져가십니까?
무엇을 버리셨습니까?
가실 때
정말로 빈손으로 가시라고
속세 남은 중생들
걸친 가사 한 벌마저 훌훌 벗도록
저리도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옷조차 필요 없는 곳이
극락정토란 말입니까
진정 극락 갈 때는
정말로 알몸이어야 합니까?
배려를 배우다
한 이틀만 지나면
덥수룩하게 자라는 수염
특별한 일이 없으면
면도하기 귀찮아 하루씩 더 버티기도 하지만
부러진 어금니 치료를 위해
수염 더부룩한 턱을 간호사 앞에 내밀 땐
쑥스러웠다
얼마나 게으르면
면도도 하지 않고 오느냐고 속으론 흉을 보았겠지만
까칠한 감촉을 참아가며 치료를 했겠지만
치료를 하는 순간
속으로는 무지 욕했을 것인데
치과에 가는 날 만큼은
보드라운 간호사 손을 위해
꼭 면도를 하고 간다.
간호사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궁금하여
꼭 면도를 하고 간다.
눈은 내리는데
눈 온다는 일기예보는 있었지만
정말로 눈이 내릴 줄이야
허기진 배 움켜잡고 긴 밤 보채던 유년 시절
하얗게 눈뜨는 아침
맨발로 대청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발 시린 줄도 모르고 눈을 바라보곤 했었지
그런 눈이
밀가루로 보이다가
쌀가루로 보이다가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백설기같이 보였지만
깜장 고무신으로 하얀 발자국을 쿡쿡 찍고 있노라면
눈 치우시는 아버지께서는 눈 밟은 자리가 다져져
비질이 되지 않는다고 호통 치시면
못들은 척 일어나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곤 했었지
지금 나는
눈을 쓸어 낼 마당도 없고
눈을 밟을 마당도 없고
토담도 없고 장독대도 없는 곳에서
그냥 베란다 밖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
허기를 면한 요즘 생활 속에서
눈을 밟으며 집을 나서는 길
내가 밟은 발자국 누가 지워줄까
강아지들이 정말로 눈을 좋아하기는 할까
거짓말 공화국
- 다 돼갑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입을 크게 벌리시고
코로 숨을 쉬세요.
아~ 크게 벌리세요.
더 크게
옳지. 더 크게
그러나 끝날 줄 모른다.
반죽을 하는 동안에도
곧 나간다는 자장면 주문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밥 떠먹여 주시려고 아~ 하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의사가 날더러 아~ 입 벌리라 한다
의사가 코앞에서 거짓말하는데
따지지도 못하고
알면서도 속아야 하는 오늘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애가 된다더니만
고지식한 내가 말 잘 듣기는
성인이 되어서 처음이려니
입 벌리고 있는 지금은
거짓말 공화국에 여행 온지도 모르겠다
늦장부리는 일도 더러는
매실나무 두 그루를 마당에 심었다
삼년이 지나도 꽃이 피지 않아
케어 내려고 벼르다가도 늑장부려 케어 내질 못했다
가지는 무성히 벌었는데
마당이라서 그런지 꽃은 피지 않고
가지라도 확 쳐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송충이며 거미줄 때문에 흉측스러웠다
늘 찝찝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동안
해가 바뀌고 우수 경칩이 지나자
그때서야 가지마다 하얀 꽃을 피웠다
저렇게 많이 핀 꽃
몇 년 동안 밀린 꽃 다 피운 걸까
열매는 다 맺을 수 있으려나
낙화도 되기 전에
침부터 꿀꺽 삼키는 욕심은 수확부터 꿈꾸지만
늦장부린 것이 득 될 줄은
누군들 알았겠나?
무서운 세월
친구하나 하늘로 보낸 후
인생의 종점에 대해 생각을 했다
인명이 재천이라지만
하늘나라로 갈 나이는 아직 이른데
언제 친구 곁에 갈는지 몰라
평균 수명 계산하고
유전적 가족 계보도 따져보고
심상치 않은 세월이 어디에 있는지
달력까지 펼쳐들었지만
정년퇴직을 운운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자식들도
훌쩍 커서 딴 살림 살고
의지할 데라곤 남아 있는
이 몸뚱이 하나 뿐일 텐데
인생을 세월 속에만 가둬 둘 수 없지 않는가
아!
세월이 무섭구나!
무서운 세월이로구나!
마냥 청춘은 없는 것
욕심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욕심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욕심
딸 둘 아들 둘 있어야 한다고
진작부터 마음은 먹었지만
끝내 아들 하나에 딸 하나로 끝난 농사
여기서 욕심을 접어야 하는가
이모가 없고
삼촌이 없는 저들의 세상
살아 갈수록 겪어야 할 외로움
어찌 견뎌낼까
성급한 마음에 생긴 셋째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면서
생긴 사실조차 몰랐다가
서럽게 울던 아내의 눈 물속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네게 주어진 인연 이것이라면
이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가
참선 중에 일어 난 일
담배를 물고 있으면서도
담배를 찾는다.
숟가락을 들고 있으면서
숟가락을 찾는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도
안경을 찾는다.
통화를 하고 있으면서도
전화기를 찾는다.
밤마다 꾸는 꿈꾸면서도
기억 속엔 아무것도 없다
망각연습을 하면서도
망각 사실을 몰라 꿈을 꾼다.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꿈
해몽만 앞서서 뛰어 간다
끝없는 종점
석축을 타고 등반을 하는 담쟁이
단단하게 쌓아 올렸다고 믿었던 석축도
틈새도 있어 허름하게 보였는지
틈 따라 자박 자박 발걸음 옮긴다.
찬바람 불 때까지
뿌리를 박으며 올랐겠지만
날이 더우면 덥다고
쉬어가면서도 갔겠지만
작년에도 올랐듯이
올해도 봄이 왔다고 오르는 저들
가을이 오기까지
끝까지 오르고 오를 텐데
오르면 오를수록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유도 생길 터
서두르지도 않으면서도
디딘 발자국마다 뿌리 하나씩은 꼭 남기는 담쟁이
그 앞을 지나다니는 나
뛰지도 않고 자박 자박 걷고 있지만
오십년이 넘도록 걸어서
뿌리 두 개 겨우 남겼는데
담쟁이가 다다를 종점은 어디일까
내가 걸어서 닿을 종점은 어디일까
남겨 놓은 뿌리는 어떻게 될까
술병 속을 걸었다
잘못 깃들여진 탓에
몹쓸 병에 걸린 것이라고
자각하는 순간
작은 병속을 걷기 보다는
큰 병속에서 걷는 것이
훨씬 편할 거라 생각하며
연거푸 들이키는데
처음 술을 마신 때가
두 되짜리 주전자 들고
새참 받으러 갔을 그 때지
아마
틀에 박힌 말
종합검진 후
의사와 면담을 하기 위해 병원엘 갔다
병원이란 소리만 들어도
알레르기가 생길 정도의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내키지 않더라도 정기 건강진단이란 푯말 앞에선
꼼짝할 길이 없어
결국 의사와 대면을 했다
“비만이시네요.”
“원래 비만입니다.”
“담배 피우세요?”
“네. 피웁니다.”
“끊으세요.”
“끊으려면 처음부터 안 피웠지요.”
“운동 합니까?”
“네. 합니다. 숨쉬기 운동도 하고요 새마을 운동도 하고요......”
“열심히 하세요.”
누가 그런 말 할 줄 몰라 이러나
원두막의 추억
1.
춘삼월 지나고
오뉴월 접어들면
순했던 햇살
정수리에 내리 꽂히고
딱히 쉴 곳 없는 벌판
원두막 한 채를 지어야
여름 한철 산다고 했지
2.
햇살도 피하고
소나기도 피하고
낮잠도 자고
무릎 베고 누우신 어머니
흰 머리카락도 뽑았던 원두막
땅거미 질 무렵
종일 묻혔던 흙을 씻으려 우물물 길어 올리면
물속에 비친 달도 얼굴을 찡그리는 저녁
원두막에 올라 남폿불을 켜고
시장간 아버지 기다렸지
3.
호떡이라도 싸오시려나
눈깔사탕이라도 싸오시려나
개구리 울음
자장가 삼아 잠들곤 했던 원두막
반딧불도 잠을 청할 즈음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지 못하고
단 잠을 잤던 원두막
이젠 어디에다 원두막을 지으랴
내 땅 내 밭 하나 없는 지금
어디에다 지으랴
거미줄 걷으며
거미줄을 걷어 냅니다.
처마 밑이며, 정원의 나뭇가지 사이며
눈에 보이는 거미줄은 죄다 걷었습니다.
빈 집도 아닌데
인제는 끼니 걱정도 덜고 사는데
거미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계속 거미줄을 칩니다.
거미줄을 걷고 보니 정말로 많았습니다.
거미들도 경기 영향을 받는 걸까요.
미꾸라지 잡을 때
통발을 놓아도 저리는 놓지 않는데
거미란 놈은 유별스레 거미줄을 많이 쳐 대네요.
덕분에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긴 작대기로 거미줄을 걷지만
거미줄 걷는 일이
반절 소일거리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
긴 장대에다 둥글게 휜 철사를 매달고
철사에다가 거미줄을 칭칭 감아
잠자리 잡던 기억이 새로웠습니다.
지금 거미줄을 걷고 있지만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 요즘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모과나무의 뚝심
새로 지은 건물 조경수로 심은
모과나무 몇 그루
찬바람 일던 어느 날
누군가가 가지를 전지 하였다
단발머리 이발도 저렇게는 못할 텐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심 갈 정도로
흉측스럽도록 전지를 했다
그런 나무에게 봄이 오고
남은 가지마다 움을 틔웠다
가지를 잘라도 팔다리가 잘려도
싹 틔우는 저 의지
죽지 않고 살려는 저 의지
가지 자른 이한테 반항하는 것 같다
기특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엇는데
가을까지 몇 개나 버틸는지
사지를 못 쓰도록 다 자른 체로
움을 틔우는 끈질김
고래힘줄보다 더 강했다
낙우송
오월이 다 지나가도록
잎을 피우지 않았다
주위 나무들은 모두 움을 틔웠는데
꽃샘추위가 길어서인지
싹 틔울 생각도 안 한다
예전 같으면 이미 파릇파릇 할 텐데
올 한해 움 안 틔우고 지내려는 걸까
추위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저리도 버티는 것인가
겨울이 추우면
농사짓는 일에 덕이 된다고 하나
목덜미를 쏙 집어넣은 채 엉거주춤 거리도록
거꾸로 돌아가는 계절 같다
봄을 잃은 슬픔 때문에 기다림이 길어지면
제 아무리 맛깔스런 봄이라 하더라도
등 돌리기 일쑤인데
생사를 판명하지 못하는 낙우송의 봄
오월이 지나야 알 수 있을까
벚꽃 때문에
길거리가 환했다
날씨도 한 몫 거들었지만
화사하게 핀 꽃 때문에
더 환했다
새로 생기는 도로마다
열에 아홉은 가로수 종을
벚나무를 심었나 보다
다니다 보면
거의가 벚꽃나무인 것 같다
비라도 내리면
우두둑 따 떨어져 버리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행렬
벚꽃이 좋아서 일까
명절처럼 교통체증이 심했다
벚나무를 몽땅 베어버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