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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당 부군 행장(信古堂 府君 行狀)
선부군(先父君)의 휘는 우명(友明), 자는 군량(君亮), 본관은 황해도 풍천으로 국자진사 휘 유(裕)의 후예이며 시조 이후로 명성과 지위 높은 이가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 선부군의 고조 휘 흥길(興吉)은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추증(追贈)되고 중조 휘 언(焉)은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추증되고 조 휘 숙동(叔仝)은 가정대부(嘉靖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경연(同知經筵) 춘추관사(春秋館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이며 고 휘 분(昐)은 중훈대부(中訓大夫) 행예문관(行藝文館) 교리(校理)지제교 (知製敎) 겸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 승문원(承文院) 교리(敎理)였다가 그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 참찬관(經筵 叅贊官) 춘추관(春秋館) 수찬관(修撰官)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 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추증되고 비(妣) 거창신씨(居昌愼氏)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휘 선경(先庚)의 따님으로 성화(城化-명 헌종의 연호) 신묘년(辛卯年 1471년)정월 임진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일찍이 부친을 여윈(1478년) 뒤에 스스로 스승을 따라 학문에 힘쓸줄 알았고 점차 성장하여서는 문조(文藻-글을 짓는 재주)가 기발(奇拔)하고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백형인 진사공 우량, 계(季)씨인 진사공 우영과 함께 문행이 있었으므로 삼주(三珠-세 구슬)로 칭하였고 모두 진심으로 숭앙(崇仰)하였다.
홍치 11년(연산군 4년, 1498년)에 진사시에 합격한지 얼마 안되어 모친이 별세하자(연산군 10년, 1504년 향년 67) 상사(喪事-초상이난 일)와 장사(葬事)에 예제(禮制-상례에 관한 제도)를 따르되 애(哀)와 경(敬)을 다하였고 마친 폐조(廢朝-연산군 시대)의 단상령(短喪令-삼년상의 기한을 줄여 한 해만 상복을 입는 일.)이 엄중하였으나 동요됨이 없이 3년상을 입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천성이 본시 고아(高雅)한 터이라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가 겨우 40여세에 출세하는 일과 잡다한 번뇌를 단념하고 다만 서적을 가져 자악(自樂)하였다.
부친 교리공이 피병(疲病-피로해지는 증세)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은지 얼마 안되어 별세(성종 9년, 1478년, 향년 42)한 뒤부터 생계가 넉넉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선대에서 물려받은 집을 털끝만큼도 수축하는 예가 없어 거의 무너져 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고 가사의 경리를 일체 나의 모친에게 위임하여 많은 식솔에 식량이 모자라 끼니를 거르게 되어도 언제나 느긋하였다. 어려서는 조비 정부인 김씨에게서 자라 특별한 사랑을 받은 터이라 전토(田土)와 노비(奴婢-사내 종과 계집 종)를 많이 떼어주려 하였으나 적극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만년에는 조그만 당을 지어 이름을 신고(信古)라 하고는 뜨락에 매(梅), 죽(竹), 백(栢)을 그 사이에는 약초(藥草)를 가꾸었고 꽃나무 따위는 심지 않았으며 깨끗이 소지된 한칸의 방안에는 궤안(几案)을 바르게 진열하였고 가득 쌓인 서적도 차례가 정연하였으며 벼루와 종이 같은 것까지도 조심스럽게 다루었고 조금의 먼지만 끼어도 즉시 소지하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반드시 맞는 맞는 지기를 가려서 서로 교류하였으며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모두 맞아주었고 혹 주식(酒食)까지 내어 대접하되 형편의 유무를 불계(不計)하였으며 배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친절히 가르쳐 주어 조금도 게을리하는 기색이 없었다.
백형공(우량)이 부친의 상을 만나 너무 애통해 하다가 일찍 별세한 뒤로 계씨(季氏-우영)와 우애가 지극하여 그 거리가 좀 멀었으나 서로 오가며 묵기를 십여일 사이에 서너번씩 하였고 혹 주식(酒食)을 돌려가며 마련하여 안팎이 모여 즐기기를 한번도 빠트린 달이 없었으며 혹 연고가 있어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 서로 시통(詩筒-시를 죽통에 넣어 서로 왕래하는 것)을 대신 보내는가 하면 가끔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여 생선을 잡고 산채를 마련하여 천진스런 놀이로 유쾌히 마시고 읊조리면서 마음껏 즐기었다.
무인년(戊寅年-1513년)에 모제(慕齊) 김안국이 본도의 관찰사로 암혈(巖穴)에 숨은 선비를 찾아내는 일로 급무를 삼다가 부군을 만나보고 매우 존경하는 한편 당사(堂辭)까지 지어준 뒤에 안우(安遇), 노필(盧㻫), 김대유(金大有) 세사람과 함께 조정에 추천하여 영경전(永慶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현능참봉(顯陵參奉)으로 옮겨지자 공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위졸(衛卒)을 사애(思愛)로 거느렸으니 아무리 말단 지위였으나 사람에게 준 해택이 많았다.
이에 중종이 반정하고 나서 의로운 선비를 뽑기 위하여 별과를 실시하자 시험 전날에 김대유가 부군을 찾아와서 응시여부를 상의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부군은 끝내 이를 다행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庚辰年(경진년 1520년) 봄에 벼슬을 내놓고 귀향하였다가 3년이 지난 癸未年(계미년 1523년) 시월 辛丑(신축)일에 신병으로 별세하니 향년 53세이다.
함양군 북쪽 주곡에 신부인(愼夫人)의 묘 아래 안장하니 이해 12월 17일 이었다.
부군은 단중(端重)하고 풍채(風采-사람의 겉모양)에 자성(姿性)이 간결하고 평화로운 기색에 언어가 강직하였으므로 누구나 바라보기만 하여도 사(私)로서 접근하지 못한 줄을 알았으며 평소에 정숙(整肅)한 의관으로 단정히 앉아서 부득이한 연고가 아니고는 눕거나 기대는 예가 없었으며 항간(巷間)의 예(禮) 아닌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세속의 재리(財利) 추구를 마음 속에 둔 적이 없었는가 하면 담박과 청고(淸苦)로 본분에 안착하고 간약(簡約) 함을 지켜 털끝 만큼도 사치스러운 것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어버이 섬기는데는 효(孝)를 조상 받드는데는 경(敬)을 다하고 친인(親姻)에게는 인(仁)을 붕우(朋友)에게는 신(信)을 쌓았으며 노비(奴婢)에게는 은혜 삼년상의 기한을 줄여 한 해만 상복을 입는 일.않은 뒤에 회초리를 가하였다. 그러나 외인의 비행(非行)에 대해서는 일찍이 면책(面責)한 적이 없었다. 만년(晩年)에는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덕의(德義)가 더욱 깊어 마을에서 모든 일을 다 물어서 결정하여 한결 같이 존경하고 신임하였으며 아무리 불초(不肖)한 자라도 잘못을 누우치고 조심하여 함부로 굴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신고당(信古堂)』이라 칭하였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일찍부터 시 짓기를 좋아하며 청담한 데다가 격력(格力-다섯 가지 시법 중의 하나)이 있었고 또 시의 시의 원류(原流)를 탐색(探索)하여저 당송시대 것까지도 일호 틀림없이 판별하였는가 하면 글자의 청탁(淸濁)·고저(高低)와 편방(偏傍-한쪽으로 치우침)·점화(點畵)를 모두 정밀히 해득하였고 또 해서(楷書)에 능하여 경정(勁正)한 자화(字畵)가 동진시대 필의(筆意)를 깊이 체득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보물로 삼았으며 저서로 시집이 집에 간직되어 있다.
일찍이 한 사람이 강경과(講經科-경서를 외게하여 사람을 뽑는 시험)에 사용하기 위하여 경전(經傳-‘성경현전(聖經賢傳)’의 준말.)의 주석(注釋) 옆에 점을 찍고 줄을 그어 놓는 것을 보고는 『주석(注釋)도 성현들의 말씀인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나무랐으니 이것이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나 부군(府君)의 소양(所養)을 대충 엿볼 수 있다.
선부인 순흥안씨는 전적(典籍-조선시대 성균관의 정6품 벼슬) 기(璣)의 따님 즉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예로 정부인에 추증되고 후부인 안동권씨는 생원 시민(時敏)의 따님 즉 고려시대 정승 한공(漢功)의 후예로 역시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소생(所生)은 4남 3녀인데 장남 희(禧-복)는 진사로 선부인의 소생이고 차남 진(禛-복받을)은 전동지중추부사(前同知中樞府事)이고 제3남 관(祼-강신제)은 제원도(濟原道-충청도 금산의 제원역을 중심으로 한 역도) 찰방(察訪-역참일을 맡아보는 외직 문관) 제4남 록(祿-복)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장녀는 찰방 임숭사(林崇社)에게 차녀는 부장(部將-오위의 종육품) 최우(崔佑)에게 출가했으니 역시 선부인의 소생이고 제3녀는 행(行)목사(牧使-목을 다스리던 정3품 외직 문관) 영천(靈川) 신잠(申潜)에게 출가했으나 차녀와 같이 후사(後嗣-대를 있는 자식)가 없다.
진사(進士)는 처음 병조참판(兵曹參判) 방유녕(方有寧)의 따님을 맞이하여 2녀를 두었으니 장녀는 충의위(忠義衛) 박리(朴理)에게 차녀는 현감(縣監) 최언광(崔彦光)에게 출가 했으나 後嗣(후사)가 없고 承仕郞(승사랑) 梁應麒(양응기)의 따님을 맞이하여 3남을 두었으니 士俊(사준), 차남은 士豫(사예)이고 제3남은 士价(사개)는 儒業(유업)에 종사하고 있다.
禛(진-복받을)은 奉常寺(봉상사)判官(판관) 安處順(안처순)의 딸을 맞이하여 7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士訓(사흔)은 진사로 별좌에 제수되었다가 지금은 그만 두었고 차남은 士誨(사회), 제 3남은 士訢(사흔), 4남은 士諤(사악), 5남은 士詮(사전), 제6남은 士詹(사첨), 제7남은 士諗(사심)이며 장녀는 柳起에게 차녀는 許成弼에게 출가하였다.
3남 찰방 관(祼)은 부사과(副司果) 표곤운(表晜雲)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사선(士善)이고 차남은 사상(士尙)이며 3남은 사소(士召)이다. 장녀는 노잉(盧仍)에게 시집갔는데 같은 노씨가 아니다. 차녀는 강위로(姜渭老)에게 시집갔다.
임찰방에게 시집간 장녀는 1남3녀를 낳았는데 아들 기암(起巖)이 문재가 있었으나 요절하였고 장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양응정(梁應鼎)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문위천(文緯天)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참판(參判) 윤의중(尹毅中)에게 시집갔다.
증손에 남녀 약간명이 있다.
공이 점어서 일두(一蠹) 선생의 가리(家理)와 이웃해 살았으나 선생은 서울에 많이 있었으며 안음(安陰-안의)의 수령이 되어서야 때때로 왕래하며 그 문하에서 공의 타고난 아름다움과 옛것을 믿고 의를 좋아하는 돈돈함으로 학업을 물었다. 어려서부터 그러하였으니 계획하고 응함에 우의(友誼)에 깊이가 있었고 가르치고 수학함이 바르고 멀고 아득하여 그 설이 있음을 듣지 못하면 잠시 엎드려 생각하였다.
공이 초년에 일찍이 속되게 얽어매는 것을 물리치고 끊어버리고 담박함에 마음이 노릴며 운치 있고 빼어난 것을 승상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학문을 함에는 또한 자못 기록하고 열람하며 탐구하고 토의함의 풍부하게 일삼았다. 중년 이후에 이르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서책에 전일(專一)하여 일실(一室)에 단정하게 앉아 손으로 초록하고 입으로 외우며 돈독히 하며 좋아하고 싫어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세움과 행실을 다스리는 것이 높아서 늙음과 젊음으로서 사이가 있지 않았다. 한 집안의 모범으로 향리에 스며들어 업신여길 수 없었던 것은 짐짓 뜻이 진실로 학문을 얻음에 있었는데 지금 궁구하고 찾는 바가 없으니 나로부터도 감히 갑자기 그렇게 한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아! 슬프다. 내가 태어나 오륙 세에 자못 구두(句讀)를 익히며 조석(朝夕)으로 모셨는데 일찍이 중용과 회암(晦庵-주자의 호)선생의 잠명과 발어를 손수 써서 그것으로 그것으로 하여금 외우게 하였다. 그 발 뒤에 성과 이름을 제함에 미쳐서는 휘하고 칭하지 않았는데 지금도 오히려 유첩이 있으니 다만 그 세월만을 쓴 것이다. 또 짐짓 기억에 혹 내가 장난하고 놀면 바로 걸음을 옮기어 정좌하게 하였고 혹서 책에 다가오고나 가까워지면 문득 그 서책으로 하여금 머리에 받들어 얹게 하여 시간이 지나서 그치게 하였으니 그 깨우치고 기름이 바른 것에 이르게 하고자 하여 넉넉함을 드리워 미혹하지 않도록 한 것이 지극하였다. 엄한 얼굴 갑자기 멀어져 길을 잃은 듯이 학문을 잃었고 그 장성함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능히 따라 살피며 느끼어 발할 수 없었으며 헛되이 일생을 보내며 마침내 이름도 내지 못하고서 거칠게 떨어지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으니 다시 어찌 도망하겠는가.
또 공이 세상을 하직하고 지금 이미 50여 년인데 내가 은택을 입어 벼슬을 훔쳐 오늘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묘도에 표가 있지 않았다. 비록 진실로 기대함도 있었겠으나 그 태만함은 정성스럽지 못함이 또한 이미 심하였다. 공이 이제 2품관 참판으로 추증되어 마땅이 비석을 세워 덕을 기록하여 후손에게 밝게 보여야 할 것이나 내가 병으로 쇠약하여 죽을 날을 모르겠으니 크게 두려워 능히 감추어진 덕을 천양하여 망극한 생각을 펼 수가 없었다. 이에 감히 세계의 차례와 행실을 위와 같이 찬하니 장차 작자에게 청하여 채택하는 바가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 공이 학행과 덕성의 아름다움으로 조금도 세상에 드러남을 얻지 못하여 그 기록할 수 있는 것이 여기에 그친다. 내가 또 흐릿하여 나의 백형이 세상에 있을 때 찬술을 묻지 못하였다. 지금 비록 그 대강을 형용하였으나 전해 듣고 상상의 끝에서 나온 것이 많고 또 행사를 하나하나 가르키며 밝히어 쓰지 못하여 빠트리고 누락됨이 많으니 내가 애통해하는 것이 이것에서 무궁하구나. 그러나 그 이미 쓴 것은 내 비록 내세울 것은 없으나 또한 가리고 속이는 것은 효가 아님을 알기에 어찌 구차하게 하겠는가.
만력 3년(1575년) 윤 12월 모일에 아들 진이 삼가 행장하다.
- 2024년 1월에 풍천노씨문효공파세보 권지상 112-116과 국역옥계선생문집197-204을 다시 옮겨 적다.
11세 신고당[우명] 산소 <=[클릭하면 산소로 이동]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지의금부사 행종사랑 현능참봉 신고당 노공신도비명
만력 3년(선조 18년, 1575년) 겨울에 판서 노군이 천령(天嶺)에서 거상(居喪)을 하고 그 이듬해 가을에 큰아들 사훈(士訓)에게 행장과 편지를 주어 서울로 보내어 광산(光山) 노수신(盧守愼)에게 부탁하기를 “이제 선친 묘소의 나무가 많이 자랐는데 묘소의 동남쪽에 비석이 없으니 이는 정말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대로 사적이 인멸되어 나의 잘못만 가중될까 염려되니 그대가 빨리 신도비명을 지어주게나”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노씨는 황해도 풍천에서 이름난 성씨였는데 국자진사 위 유(裕)가 사실 제일 먼저 드러났고 그 뒤 오(五)대를 연이어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날로 드러나고 번창하였다. 휘 흥길(興吉)에 이르러 이조 참의 증직을 받았고 휘 언(焉)은 병조참판의 증직을 받았으며 휘 숙동(叔仝)은 사헌부 대사헌 겸 예문관 제학을 지냈고 휘 분(昐)은 예문관 교리로 이조 참판의 증직을 받았는데 이는 공의 사(四, 고조)대이다. 거창신씨(居昌愼氏)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선경(先庚)이 외조부인데 성화(명 헌종의 연호) 신묘년(성종 2년, 1471년) 1월 임진일에 공이 태어났다.
공의 이름은 우명(友明), 자는 군량(君亮), 호는 신고당(信古堂)이다. 일찍 부친을 잃었으나 독서와 글 지을 줄을 알아 명장과 행실을 정립하였고 공의 형 우량(友良)과 아우 우영(友英)이 모두 진사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은 삼주(三珠)라고 지칭하였다.
어려서부터 조부와 조모의 사랑을 받아 자랐으므로 재산을 넉넉히 주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평소 일두 선생(一蠹先生)-정여창(鄭汝昌)의 호)의 이웃에 살았는데 일두 선생이 안음 군수로 나가자 왕래하며 배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홍치(명 호종) 무오년(연산군 4년 1498년)에 상사(上舍-진사)의 선발로 뽑혔다가 이윽고 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그때 한참 역월제(易月制-삼년상의 달 수를 날 수로 계산하여 복을 입는 제도)가 시행되었고 있었으나 공은 흔들리지 않고 삼년상의 제도를 지켰다. 이로 말미암아 과거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나이 겨우 40이 넘었는데도 세상의 일을 걷어치우고 다만 성경현전(聖經賢傳-성현들이 지은 책)을 읽는 것을 즐겁게 여겼고 허술한 집에 끼니가 떨어져도 담담하게 있었다.
만년에는 조그만 서재를 짓고 주위에 매화나무와 대나무 잣나무를 심은 다름 사이마다 약초를 심었다. 항상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아무리 하찮은 것도 잘 정리하였다. 사람들과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놀 경우에는 반드시 분변하여 놀았으며 사람들이 찾아오면 누구나 반드시 맞아들였고 때에 따라서는 주식(酒食)을 차려 대접하였고 후학을 가르칠 때 정성을 쏟아 게으른 빛이 없었다. 성경현전을 열람하다가 붓으로 지운 데가 있을 경우 노하면서 “어느 것 하나 가르친 말씀이 아닌 것이 없는데 가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막내 아우의 사는 곳과 그리 가깝지 않았으나 십여일 사이에 반드시 너댓번 만나고 무슨 일이 있을 경우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 때로는 서로가 경치 좋은 수석으로 초대하여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면서 즐기기도 하고 혹은 번갈아 가면서 음식을 장만해 놓고 내외가 모여 강회(講會)를 갖는 등 그대로 넘어간 달이 없었다.
무인년에 모재(慕齋) 김선생(金先生)이 본도의 안찰사(按察使)로 와서 초야의 훌륭한 선비를 물색하다가 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매우 기뻐한 나머지 공을 위해 신고당기(信古堂記)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안우(安祐), 노필(盧㻫), 김대유(金大有)와 함께 조정에 추천하여 현릉참봉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공이 손을 씻고 참봉의 직책을 수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었다.
이때 조정에서 대과를 보았다. 공이 모재 김공과 상의한 다음 비로소 과거장에 나갔다가 경진년 봄에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왔다. 판서군의 나이 오, 육세였기 때문에 중용(中庸)과 회암잠명(晦庵箴銘- 회암은 주자의 호)의 발문을 손수 써서 가르치면서 주자(朱子)의 이름인 희(憙)자가 나오면 그대로 읽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리고 책을 넘어서 갈 경우 그 책을 받들어 머리에 이게 하고 장난을 치면 끌어다가 바르게 익히도록 하되 반드시 한참 동안 하다가 그치었다. 계미년(1523년) 10월 신축일에 병환으로 행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12월 계축일에 그 고을 북쪽 주곡리 남쪽으로 향한 자리에 묻었다.
공은 좋은 옥처럼 순수하고 깨끗하며 따스하고 자상하여 예의에 벗어난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게으르거나 거만한 태도를 몸에 나타내지 않았다. 오직 어버이를 효성을 다하여 섬기고 조상을 공경을 다하여 받들며 인척들과 화목하고 벗들과 신의를 지키며 사동들에게 인정이 있었으므로 그 고장에 표상이 되어 사람들이 공의 호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외의 일들에 있어서는 마음이 깊고 맑아 건실하였는데 대채로 타고난 자품이 그러하였다.
근원과 끝을 찾아 당·송을 아는데 백분의 1,2도 빠트리지 않았고 또 음악의 학문에도 깊이 사성(四聲)과 육체(六體-과거에 보이던 시(詩)·부(賦)·표(表)·책(策)·논(論)·의(疑)의 총칭.)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해서(楷書)에도 필력이 대단하여 동진의 필치와 은연중 부합하였다. 그러나 공은 본디부터 원대한 운치가 있고 마음이 담박하였으며 기록하고 열람하며 탐구하는 학문을 숭상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민낙(閩洛)의 학설에 심취되어 읊으면서 뜻을 찾고 독실히 실행하였다. 아아 지극하다. 공은 정두일 공은 고을에서 얻어 원우(元祐-송 철종때 연호인데 그때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의 기풍으로 발휘한 자인가싶다.
부인은 순흥안씨인데 전적 안기의 따님이고 문성공 안유의 후손이다, 아들 희(禧)는 진사로 참판 방유영(方有寧)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큰딸은 충의위 박리에 시집가고 다음은 현감 최광언에게 시집갔다.
이어 승사랑 양응기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사준, 사예, 사계를 낳았다. 사위 임숭두는 찰방인데 아들은 기암이고 딸은 참의 양응정, 문위천 참판 윤의중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사위 최우는 부장이다.
후부인은 권씨인데 그 파계가 신라에서 나뉘었다. 김행이란 분이 안동군수로 있다가 고려 왕건 태조를 만나 지금의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십대를 걸쳐 문탄공 한공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다. 증조 계우는 사용이고 조부 금석은 봉사이고 부친 시민은 생원이며 모친 팔계 정씨는 행목사 종아의 따님이다.
아들 진(禛)은 이조인데 봉상판관 안처순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사훈, 사회, 사흔, 사악, 사전, 사첨, 사심이고 딸은 유기와 허성필에게 시집갔다.
아들 관(棵)은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인데 사맹 표제윤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사선, 사상, 사소이고 딸은 모씨와 강위로에게 시집갔다.
아들 녹(祿)은 경주 이선원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은 언홍, 언수이고 사위는 신잠인데 목사이다.
부인은 홍치 경술년 시월 계축일에 태어났다. 성품이 정숙하고 단정하며 민첩하였으므로 노씨 가문에 시집오자 할머니와 어머니 부인들이 서로 칭찬하였다. 전부인에게서 난 아이들을 가정에 모아 길렀으므로 친척들이 이복의 아이인 줄 몰랐으며 제사를 잘 받들어 모셔 추위나 더위 속에서도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더 경건히 하였는데 공으로 하여금 시종 고상한 기개를 이루게 한 것은 모두 부인의 내조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부인은 실로 덕 있는 사람이므로 반드시 그 보답을 누릴 것이오.”하였다. 그런데 공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이 외롭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살면서 생활의 기획이 조리가 있었고 사물을 대하고 사람을 접할 적에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다. 아드님이 이십여년 동안 고을원으로 있으면서 봉양하였지만 의식을 절약하여 베풀기를 좋아하여 재산을 모으지 않았으며 부탁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화려한 것과 세상의 이끗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때문에 판서군이 편안하게 고을원살이를 하여 과오가 없었으니 아아 어질도다 을해년(乙亥年-1575년) 시월(十月) 병진일(丙辰日)에 노환으로 세상을 뜨고 이듬해 정월 정미일에 공의 묘소 곁에 묻히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기품 중에 맑은 것은 공께서 받은 것
의지의 곧은 것은 공께서 실천한 것
정미한 그 의리는 공께서 완성된 것이네
세상 위해 나셨다면 시운이 막혔을터
후손에 길 터주어 훌륭한 이 배출했지
천리가 없을소냐 그 가정을 볼지어다.
모친의 영화 속에 자손들이 번창했네
남쪽에서 모범되자 우리 임금 편안했고
공의 명성 걷지 않고 계속해서 펼쳐지니
만년토록 나의 명이 부끄러움 없을 걸세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의의정겸 영경감춘추관사 노수신 지음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 씀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남응운 전서를 씀
첫댓글 옥계 선생의 부친 신고당 선생은 순흥안씨 부인과 권씨 부인을 두었는데, 옥계 선생은 권씨 부인이 낳으셨슴. 옥계 선생과 친분이 있는 노수신 선생이 지은 비문에는 권씨 부인이 순흥안씨 부인 소생도 차별없이 돌봤다고 함. 옥계 선생이 어머니 권씨 부인을 봉양하기 위하여 근처에 수령으로 봉직하였으나, 선정을 베풀 수 있게 노심초사한 내용이 보임. 즉 옥계선생은 신고당 선생의 고고한 성품과 권씨 부인의 보이지 않는 가르침에 의하여 청백리에 추앙되고 효성의 본보기가 된 듯함(편집중).
노수신 1543 문과 33인 급제; 옥계 선생과 성균관에서 동문 수학한 시기가 거의 일치함.
1523년 신고당 선생 졸하셨는데 그 때 옥계선생 나이 6세임. 1478년 부친(교리공)이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으니 이 때 신고당 선생 나이 7세로 추정됨. 향제 간 우애가 깊고, 조부(1403-1463)모의 사랑속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김일두 선생에게서 사사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