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_증헌대부 이조판서 겸지의금부부사 행종사랑 현능참봉 신고당 노공신도비명
만력(萬曆)[명(明) 신종(神宗) 연호(年號)] 3년[선조(宣祖) 8년 1575년] 겨울에 판서 노군이 천령(天嶺)에서 거상(居喪)을 하고 그 이듬해 가을에 큰아들 진사 사훈(士訓)에게 행장과 편지를 주어 서울로 보내어 광산(光山) 노수신(盧守愼)에게 부탁하기를 "이제 선친 묘소에 나무가 많이 자랐는데 묘소의 동남쪽에 비석이 없으니 이는 정말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대로 사적이 인멸되어 나의 잘못만 가중될까 염려되니 그대가 빨리 신도비명을 지어 주게나" 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노씨는 황해도(黃海道) 풍천(豐川)에서 이름난 성씨였는데 국자진사(國子進士) 휘함 유(裕)가 사실 제일 먼저 드러났고 그 뒤 오대(五代)를 연이어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날로 드러나고 번창하였다. 휘함 흥길(興吉)에 이르러 이조참의 증직을 받았으며 휘함 언(彥)은 병조참판의 증직을 받았으며 회함 숙동(叔仝)은 사한부 대사헌 겸 예문관 제학을 지냈고 휘함 분(昐)은 예문관 교리로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았는데 이는 공의 4대이다. 거창신씨(居昌愼氏)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선경(先庚)이 외조부인데 성화(成化)[명(明) 헌종(憲宗)의 연호(年號)] 신묘년(辛卯年)[성종(成宗)2년 1471년] 1월 임진일(壬辰日)에 공이 태어났다.
공의 이름은 우명(友明) 자는 군양(君亮) 호는 신고당(新古堂)이다. 일찍 부친을 잃었으나 독서와 글 지을 줄을 알아 명망과 행실을 정립하였고 공의 형 우량(友良)과 아우 우영(友英)이 모두 진사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은 삼주(三珠)라고 지칭하였다.
어려서부터 조부와 조모의 사랑을 받아 자랐으므로 재산을 넉넉히 주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평소 일두선생(一蠹先生)[정여창(鄭汝昌)의 호]의 이웃에 살았는데 일두 선생이 안음군수(安陰郡守)로 나가자 왕래하며 배우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홍치(弘治)[명(明) 효종(孝宗)의 연호] 무오년(戊午年)[연산군 4년 1498년]에 상사(上舍)의 선발에 뽑혔다가 이윽고 모친의 상을 당하였다. 그때 한참 역월제(易月制)[3년상의 달수를 날수로 계산하여 복을 입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으나 공은 흔들리지 않고 3년상의 제도를 지켰다. 이로 말미암아 과거 보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나의 겨우 40이 넘었는데도 세상의 일을 걷어치우고 다만 성경현전(聖經賢傳)을 읽는 것을 즐겁게 여겼고 허술한 집에 끼니가 떨어져도 담담하게 있었다.
만년에는 조그만 서재를 짓고 그 주위에 매화나무와 대나무 잣나무를 심은 다음 사이마다 약초를 심었다. 항상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아무리 하찮은 것도 잘 정리하였다. 사람들과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놀 경우에는 반드시 분변하여 놀았으며 사람들이 찾아오면 누구나 반드시 맞아들였고 때에 따라서는 주식(酒食)을 차려 대접하였고 후학을 가르칠 때 정성을 쏟아 게으른 빛이 없었다. 성경현전(聖經賢傳)을 열람하다가 붓으로 지운 데가 있을 경우 뭐 노하면서 “어느 것 하나 가르친 말씀이 아닌 것이 없는데 가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막내 아우와 사는 곳과 그리 가깝지 않았으나 10일 사이에 반드시 너댓번 만났고 무슨 일이 있을 경우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 때로는 서로가 경치 좋은 수석(水石)으로 초대하여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면서 즐기기도 하고 혹은 번갈아 가면서 음식을 장만해 놓고 내외가 모여 강회(講會)를 갖는 등 그대로 넘어간 달이 없었다. 무인년(戊寅年)의 모재(慕齋) 김선생(金先生)이 본도(本道)의 안찰사(按察使)로 와서 초야의 훌륭한 선비를 물색하다가 공을 만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매우 기뻐한 나머지 공을 위해 신고당기(信古堂記)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안우(遇安), 노필(盧필), 김대유(金大有)와 함께 조정해 추천하여 현능참봉(顯參陵奉)에 재수하였다. 그런데 공이 손을 씻고 참봉의 직책을 수행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었다.
이때 조정해서 대과(大科)를 보았다. 공이 모재 김공과 상의한 다음 비로소 과거장에 나갔다가 경진년(庚辰年) 봄에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왔다. 판서군(判書君)의 나이 5,6세였기 때문에 중용(中庸)과 회암잠명(晦庵箴銘)[회암은 주자의 호]의 발문(跋文)을 손수 써서 가르치면서 주자(朱子)의 이름인 희(憙)자가 나오면 그대로 읽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리고 책을 넘어서 갈 경우 그 책을 받들어 머리에 이게 하고 장난을 치면 끌어다가 바르게 익히도록 하되 반드시 한참 동안 하다가 그치었다. 계미년(癸未年) 10월 신축일(辛丑日)에 병환으로 행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12월 계축일(癸丑日)에 그 고을 북쪽 주곡리(酒谷里) 남쪽으로 향한 자리를 자리에 묻혔다.
공은 좋은 옥처럼 순수하고 깨끗하며 따스하고 자상하여 예의에 벗어난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게으르거나 거만한 태도를 몸에 나타내지 않았다. 오직 어버이를 효성으로 다하여 섬기고 조상을 공경을 다하여 받들며 인척들과 화목하고 벗들과 신의를 지키며 사동들에게 인정이 있었으므로 그 고장의 표상이 되어 사람들이 공의 호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외의 일들에 있어서는 마음이 깊고 맑아 건실하였는데 대체로 타고난 작품이 그러하였다.
근원과 끝을 찾아 당송(唐宋)을 아는데 100분의 1, 2도 빠뜨리지 않았고 또 음악의 학문에도 깊이 사성(四聲)과 육체(六體)[ 시(詩)·부(賦)·표(表)·책(策)·논(論)·의(疑)의 총칭.]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해서(楷書)에도 필력(筆力)이 대단하여 동진(東晉)의 필치(筆致)와 은연중 부합하였다. 그러나 공은 본디부터 원대한 운치가 있고 마음이 단박하였으며 기록하고 열람하며 탐구하는 학문을 숭상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민낙(閩洛)의 학설에 매우 심취되어 읊으면서 뜻을 찾고 독실이 실행하였다 . 아 아! 지극하다. 공은 정일두(鄭一蠹) 공의 고을에서 얻어 원우(元祐)[송(宋) 철종(哲宗)의 연호(年號)인데 그때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의 기풍으로 발휘한 자인가 싶다.
부인은 순흥안씨(順興安氏)인데 전적(典籍) 안기(安機)에 따님이고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에 후손이다.
아들 희(禧)은 진사로 참판 방유영(方有寧)에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큰딸은 충의위(忠義衛) 박리(朴理)에의 시집가고 다음은 현감 최광언(崔光彦)에게 시집갔다.
이어 승사랑 양응기(梁應麒)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사준(士俊), 사예(士豫), 사개(士价)를 낳았다. 사위 임숭두(林崇杜)는 찰방인데 아들은 기암(起岩)이고 딸은 참의 양응정(梁應鼎) 문위천(文緯天), 참판 윤의중(尹毅中)에게 시집갔다. 그리고 사위 최우(崔祐)는 부장(部將)이다.
후부인(後夫人)은 권씨(權氏)인데 그 파계가 신라에서 나뉘었다. 김행(金幸)이란 분이 안동군수로 있다가 고려 왕건 태조를 만나 지금의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10대를 거쳐 문탄공(文坦公) 한공(漢功)에 이르러 더욱 드러났다. 증조 계우(繼祐)은 사용(司勇)이고 조부 금석(金錫)은 봉사(奉事)이고 부친 시민(時敏)은 생원(生員)이며 팔계정씨(八溪鄭氏)는 행목사(行牧使) 종아(從雅)의 따님이다.
아들 진(禛)은 이조판서인데 봉상판관(奉常判官) 안처순(安處順)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사훈(士訓) 사회(士誨) 사흔(士訢) 사악(士諤) 사전(士詮) 사첨(士詹) 사심(士諗)이고 딸은 유기(柳起)와 허성필(許成弼)에게 시집갔다.
아들 관(祼)은 제원도(濟原道) 찰방(察訪)인데 사맹(司猛) 표곤운(表晜雲)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사선(士善) 사상(士尙) 사소(士召)이고 딸은 모씨(某氏)와 강위로(姜渭老)에게 시집갔다.
아들 녹(祿)은 경주 이선원(李先元)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은 언홍(彦弘), 언수(彦壽)이고 사위는 신잠(申潛, 1491~1554)인데 목사이다.
부인은 홍치(弘治) 경술년(庚戌年) 10월 계축일(癸丑日)에 태어났다. 성품이 정숙하고 단정하며 민첩하였으므로 노씨 가문에 시집오자 할머니와 어머니 부인들이 서로를 칭찬하였다. 전부인에게서 난 아이들을 가정에 모아 길렀으므로 친척들이 이복의 아이인 줄 몰랐으며 제사를 잘 받들어 모셔 추위나 더위 속에서도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더 경건히 하였는데 공으로 하여금 시종 고상한 기개를 이루게 한 것은 모두 부인의 내조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부인은 실로 더 있는 사람이므로 반드시 그 보답을 누릴 것이요.’ 하였다. 그런데 공이 세상을 떠나자 부인이 외롭게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살면서 생활의 기획이 조리가 있었고 사물을 대하고 사람을 접할 적에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다. 아드님이 20여년 동안 고을원으로 있으면서 봉양하였지만 의식을 절약하여 베풀기를 좋아하여 재산을 모으지 않았으며 부탁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또 화려한 것과 세상의 이끝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때문에 판석군이 편안하게 고을원살이를 하여 과오가 없었으니 아 아! 어질도다. 을해년(乙亥年) 10월 병진일(丙辰日) 노환으로 세상을 뜨고 이듬해 정월 정미일(丁未日) 공의 묘서 묘소 곁에 묻히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기품 중에 맑은 것은 공께서 받은 것
의지의 곧은 것은 공께서 실천한 것
정미한 그 의리는 공께서 완성된 것 이었네
세상 위해 나셨다면 시운이 막혔을 터
후손에 길 터주어 훌륭한 이 배출했지
천리가 없을 소냐 그 가정을 볼지어다.
모친의 영화 속에 자손들이 번창했네.
남쪽에서 모범되자 우리 임금 편안했고
공의 명성 걷지 않고 계속해서 펼쳐지니
만년토록 나이 명이 부끄러움 없을 걸세.
대광 보국 승록 대부 의정부 의정 겸 연경연 감춘추관사 노수신 지음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승 씀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남응운 전서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