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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지만원
Subject
일사부재리 헌법 무시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경 과
1993.2.25.김영삼이 문민정부라며 출범했다.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르고 청사진이 없는 사람들이 과거에 집착하듯이 그 역시 꾼 정치이외에는 배운 게 별로 없어 보였다. ‘민주화’라는 명찰을 단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 역시 과거청산이 대통령의 첫 번째 임무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1993.5.13. 그는 처음으로 역사평가의 말문을 열었다. “12.12사태의 성격을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적인 사건이었다.” 12.12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 중의 한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했다. "이 불행한 역사 때문에 우리 국민은 1993. 2.25. 이 땅에 문민정부를 세우기까지 긴 고난의 역정을 걸어왔다, 이제 우리는 비로소 그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있는 것이다."같은 취지로 1995.12.12. `12.12 16주년' 담화도 발표했다.
1993년7월29, 이성 잃은 민주화의 굿판 속에서 정승화 등 32인은 전두환,노태우 등 12·12사건 관련자 34인을 내란 및 반란죄 등으로 고소를 제기했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는 1994년10.29. 위 고소사건을 포함한 8건의 고소·고발사건에 관하여 모두 불기소처분을 하였다. 내란죄에 대하여는 12·12사건으로 신군부는 군 주도권을 장악하였을 뿐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헌법기관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국헌문란의 목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혐의 없음 처분을, 반란죄에 대하여는 혐의사실은 인정되나 여러 정상을 참작하여 기소유예처분을 한 것이다. 청구인들은 검찰의 처분에 불복하여 항고 및 재항고를 하였으나 모두 기각되자 1994.11.24.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였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재직기간 동안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정지되는지 여부를 판단한다음 내란죄에 관한 부분은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각하하고, 나머지 죄에 관한 부분은 적법성은 인정되나 검찰의 불기소처분이 자의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했다.
1989.12.15. “1노3김”이 ‘5공청산대타협’에 의해 김영삼은 “내년부터는 5공청산이라는 4 글자는 안 쓰는 것이 좋겠다고 공언했다. 그 후 김영삼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역사평가는 후대에 맡겨야 한다“ 등 5공에 관한 보복을 하지 않을 방침을 피력해 오다가 갑자기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시켰다. 전두환은 1995.12.13. 군형법상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 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및 미수, 초병살해 등 6개 혐의로 고향인 합천에서 검거돼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 1996.12.16에는 서울고등법원, 사건 96노1892에 의해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에 처한다는 판결을 받았고(판사: 권성, 김재복, 이충상), 1997.4.17. 대법원 사건96도3376에 의해 원심이 그대로 확정됐다(재판장 윤관, 박만호, 최종영, 천경송, 주심 정귀호, 박준서, 이돈희, 김형선, 지창권,신성택, 이용훈, 이임수, 송진훈). 그리고 1997.12.21.에 만 2년의 복역을 마친 후 사면됐다.
판 결
고등법원 판결은 “정승화의 내란 방조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했고, 오히려 죄는 전두환 등에 있다고 판결했다. ”정승화의 체포가 합수부의 직무상 적법하지도 않고, 대통령의 시후 승낙으로 체포가 정당화될 수도 없으며 체포는 반란행위에 해당한다. 대통령은 강압 받은 상태였고, 육군참모차장도 12.12를 쿠데타로 보면서 병력을 동원하려 했고, 윤성민 차장의 석방명령에 불복했고, 1.12.당시 합수부가 일부 병력을 동원한 것은 불법“이라는 요지로 구성돼 있다. 전두환 측이 상고를 했지만 대법원은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나는 이 판결이 중심을 잃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기초사실에 대한 위 12회의 내용들에는 하자가 없다. 단지 판단의 질과 시각에 이견이 있는 것이다. 첫째, 정승화의 내란방조죄가 성립하지 않는 다는 판결 내용에 이견이 있고, 둘째, 전두환의 상황처리가 어째서 반란죄인가에 대한 판결 내용에 상당한 이의가 있다. 셋째, 만일 정승화가 구속되지 않았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아예 없다.
눈에 띄는 판결의 하자
예를 들어 판결문은 윤성민 참모차장이 “즉시 정승화를 석방하라”고 명령했는데 전두환이 따르지 않았고, 윤성민 차장이 12.12를 쿠데타로 인정하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정당한 지휘권 내에 있는 정당한 병력이고, 합수부가 동원한 병력은 반란군이라고 규정했다.
윤성민은 정승화의 심복이다. 자기가 충성하는 상관이 체포되었는데 도의상으로라도 윤차장이 어찌 그만한 말 한마디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가 잡혔는데 자식이 가만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체포된 정승화가 “나를 풀어 놓아라”라고 명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인데 합수부가 그 말에 순종할 리 없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합수부는 김재규 내란사건을 윤성민에게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서 윤성민은 사건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사건에 대한 정보, 정승화가 그 사건에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상태다. 의사결정은 정보가 있을 때에 합리화된다. 윤성민장군이 “즉시 석방하라”고 했다면 그것은 충분한 정보를 기초로 한 이성적인 의사결정의 결과가 아니라 “감히 새파란 2성장군이 내 상관을 체포해?”하는 식의 감정적인 언어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훗날 윤성민 장군은 전두환 아래서 장장 5년에 걸쳐 국방장관을 했다. 참모 차장일 때에는 정보가 부족해서 전두환에 저항했지만 그 후 차분 한 상태에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아 판단했을 때에는 정당성을 인정했다. 그래서 전두환의 신임을 받아 역사상 최장의 국방장관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쌍방간 다툼이 없는 기초사실”을 놓고 재판부의 판결 하나하나를 분석하여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는 사법부에 대해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재평가 차원에서 하는 일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수많은 재판을 경험하면서 평균적인 재판관들의 사고 범위에 대해 많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나도 전두환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1993-96년 사이에 지식을 흡수하기 위한 경영학 분야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강연에 열중하느라 과거를 규명하겠다느니, 의식개혁으로 한국병을 고치겠다느니 하는 김영삼의 몽유병적 행로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12.12 와 관련하여, 육사 출신 장교들과 이건영 3군사령관과의 전화통화, 장군답지 못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죽여, 죽여' 하는 김 빠진 소리 등이 담긴 육성 테이프가 마치 신기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광고하던 월간조선의 상업적 정서에 대해서도 식상해 있었다.
특히 월간조선에서 다룬 12.12를 보니 정승화는 학자풍의 고고한 인품을 가진 정직한 군인이었고, 전두환 등은 몹쓸 사람 정도로 폄하돼 있는 글을 접했다. 내용을 보니 사실자료는 거의 없고, 감정과 편견에 차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면 1996년 월간조선1월호 “전두환 구속은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가(1)-조갑제 15년 취재기-에서 그랬다.
이렇게 무관심한 사이에 나 역시 세간의 인식들과 시각을 같이 해왔다. 12.12 사건 시에 나는 미국에 있었다. 한국에서 출장나온 대령을 만나 12.12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동기생들이 2성장군이었을 때 대령을 달고 있던 육사 선배였다. 그는 당시 전두환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12.12는 하극상이라는 말을 했다. 또한 미국에서 돌아오자 마자 중령으로 보안사에서 중요한 과장직을 맡고 있다는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박정희는 애국심에서 국가를 살리기 위해 거사했지만 전두환은 정승화와의 파워게임에서 이겨 대통령이 됐다". 관심이 별로 없었던 나는 그들의 생각을 지금까지 견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대한 수사기록을 뒤지면서 내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기자들이 각색해서 전파한 기사, 적색분자들이 유포한 억측, 근거 없는 뜬 소문이 진실을 너무나 왜곡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왜곡된 정서가 널리 확산돼 있었다. 나 역시 중령 때, "누가대통령을 해도 전두환만큼 못하겠느냐"는 식의 생각을 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그를 미워하고 조롱했다.
하지만 이후 너무나 형편 없는 대통령들을 겪으면서 그래도 전두환은 그 후에 나타난 여타의 참새같은 대통령들에 비해 봉황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본인 및 기족들의 비리가 있었지만, 방대한 수사 기록들에 나타나 있는 전두환 만큼은 10.26의 진실을 구명하려는 즉 대통령을 시해한 범인을 응징하고, 그 범죄 위에서 자라는 독버섯을 반드시 제거해야 하겠다는 순수하고 애국적인 장교였다. 그의 끈질기고 과감한 대쉬는 그 시대에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모범장교의 모습이었고 본다.
12.12의 정당성, 증명할 자신있다.
광주사태에 대해 분석하려면 10.26과 12.12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12.12가 내란 목적의 반란이 아니면, 5.18의 성격도 매우 달라질 것이다. 12.12부터 5.18까지 6개월여에 걸쳐 쿠데타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난센스다. 12.12가 반란이 아니면, 5.18 광주사태는 민주항쟁이 아니라 불순한 반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방대한 수사기록과 전두환을 응징한 판결문 속에서 12.12가 반란이 아니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자신이 있다.
전두환은 10.26 첫날부터 정권을 잡으려는 야심을 가졌는가? 12.12는 그런 야심의 발로였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당시 전두환의 위치에 있었다 해도 나 역시 전두환처럼 했을지 모른다. 나 역시 손해를 감수하면서 불의에 도전해 왔으니까.
열심히 살다 보니 출세도 하고 돈도 버는 것이다. 출세를 하고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인생은 타락한다. 마찬가지로 전두환은 당시 참신한 영혼을 가지고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몰입한 것으로 보인다. 진실을 규명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정상에 이른 것이다. 나는 지금에서야 충분한 자료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자료가 없을 때에 나는 전두환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료를 조사해보니 생각이 180도로 바뀌었다,
문서공개할수록 방정희가 빛나듯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문서가 공개될수록 12.12도 빛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2.12에 대해, 내가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듯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 역시 분석되지 못한 정서와 악의적인 여론재판의 노예가 됐을 것이라고 나는 감히 장담한다.
2005.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