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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치는 달은 아름답다.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사내 하나이 굴 찾아 돌아간다 - 이런 달밤에 - 75쪽, '달밤' 모두 1977년, 고3 때 민영(70) 시인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난다. '제가 살고 있는 이곳 창원에서는 선생님의 시집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당돌한 부탁일는지 모르지만 이번에 나온 선생님의 시집 <용인 지나는 길에>를 한 권만 보내 주시면 정말 감사히 읽겠습니다'라는 거의 협박에 가까운 그런 내용의 편지를. 하지만 시인이 시집을 부쳐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눈에 띄는 여러 시인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냈지만 한 번도 답장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을까. 정말로 <용인 지나는 길에>라는 시집이 도착했다. 그것도 시인이 자필로 쓴 짧막한 격려글까지 담아. 그때부터 나는 민영 시인의 시를 가슴에 묻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뒤, 그러니까 민영 시인의 시 '엉겅퀴꽃'이 노래가 되어 곳곳에 울려 퍼지기 시작할 무렵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민영 시인을 직접 만날 수가 있었다. 역시나였다. 시인의 첫 모습은 시인이 쓴 짧고 단단한 시처럼 자그마했다. 차돌처럼. "시는 나에게 지금도 외경스러운 예술이다. 원고지를 펴고 책상 앞에 앉을 때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아득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그럼에도 내가 시를 외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내가 살아온 한 시대의 얼굴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시인의 말' 몇 토막 '엉겅퀴꽃'의 시인 민영 선생이 고희를 맞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인 정호승과 문학평론가 황현산이 그동안 민영 시인이 펴낸 첫 시집 <斷章>(단장, 1972)에서부터 <해지기 전의 사랑>(2001)까지 모두 일곱 권의 시집에서 시를 가려뽑아 시선집을 엮었다. <달밤>(창비)이 바로 그것. 이번 시집은 모두 4부에 '첫눈' '아내를 위한 자장가' '달빛' '별빛' '풀빛' '불빛' '냉이를 캐며' '중랑천'연작 3편, '가을 초혼가' '엉겅퀴꽃' '바람 부는 날' '철원평야' '해질 무렵' '묘비명' 등 123편의 시가 실려 있다. 마치 "돌에 새긴 이름// 돌에 갇힌/ 아우성// 아, 돌에 박힌/ 피!"(수유리에서)처럼.
황현산은 '단단한 의지와 겸손한 감정'이라는 해설에서 "조심스런 마음으로 이 일곱 권의 시집에서 적게는 열다섯 편 많게는 열아홉 편의 작품을 고르게 뽑았다"고 적었다. 황씨는 민영 시인의 시집들은 "말에 바치는 줄기찬 믿음과 정신의 자리를 곧고 맑게 닦으려는 의지"의 결정체이며 "어두운 시대에 맞서 피눈물을 흘리는 충정을 고르게 담고" 있다고 강조했다.
시집 달밤 발간 기념 국민일보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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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대 보고 싶으면 산수유꽃 한 가지 귓등에 꽂고 찾아가리. 그대의 집 창문에는 황혼의 불빛 어른거리고 파도의 거친 숨결이 조약돌을 굴리리. 해지기 전에 나 그대 마음에 떠오르면 패랭이꽃 한 무더기 가슴에 안고 찾아가리. 그대와 나 사이에 모래톱이 솟을지라도 즈믄해의 사랑 그 꽃잎에 입술 대이려 찾아가리. -민영 시인의 <해지기 전의 사랑> 시인은 책머리에서 '어느덧 望七十의 고개에 다다랐'을 때 이 시를 썼다고 했다. 지금은 그로부터 두어 해가 더 흘러 이제 시인은 그 고개를 막 넘어 섰다. 그렇다면 '패랭이꽃 한 무더기/ 가슴에 안고 찾아가'고 싶었던 해지기 전의 사랑도 그만인 것인가. '그대와 나 사이에/ 모래톱이 솟을지라도/ 즈믄해의 사랑 그 꽃잎에/ 입술 대이려 찾아가'고 싶었던 그 사랑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민영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인 <해지기전의 사랑>(시와시학사)을 처음 읽은 것은 이태 전의 일이다. 시인께서 지인을 만나기 위해 순천에 오셨다가 순천작가회의 식구들이 보고 싶다고 전화를 해오셨다. 작달막한 체구에 온화한 인상이 퍽 인상적인 노 시인의 손에는 노을 색 표지의 예쁜 시집이 몇 권 들려 있었다. 그날 시집이 내 차지가 되지는 못했기에 나는 몇 주가 지나 서점에 들러 시집을 샀다. 민영 시인이 다시 순천에 오셨다. 순천작가회의가 주관하는 <문학아카데미 시창작교실>에 초청 강사로 오신 것이다. 강연 제목은 '작가에게 고향이란 무엇인가?'였다. 시인의 고향은 강원도 철원이다. 시인이 태어난 해는 1934년. 한참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을 때이다. 이를 견디지 못하여 시인이 4살 되던 해, 먹고 살길을 찾아 부친이 먼저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떠난다. 1년이 지나자 부친으로부터 올라오라는 전갈이 왔다. 시인은 엄마의 품에 안겨 먼 이국땅 간도로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섯해를 살다가 해방을 맞는다. 시인은 6·25 후 잠시 고향에 머물지만 고향인 강원도 철원은 전쟁의 화마가 스쳐 지나간 뒤여서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미군의 폭격에 의해 향교 앞 작은 마을도 사라지고 없었다. 시인은 잔잔하다 못해 청중들이 함부로 숨을 내쉴 수조차 없도록 작고 느린 목소리로 시대와 역사의 질곡 속에서 고향을 잃고 떠돌았던 지난 과거의 상흔들을 고통스럽게 훑어나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내공의 울림이 느껴지는 뭉클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고향은 나에게 한 대접의 피고름이다." 민영 시인은 사십이 되니까 고향에 대한 시가 나오더라고 했다. 그리고 나이 칠십이 되니 몸이 조금씩 아프더라고 했다. 보통 사람들은 사십만 되어도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고, 선생님은 건강이 좋으신 거라고 말씀드리자 선생은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몸이 아플 시간조차 없었노라고 했다. <신경림의 시인의 찾아서2>(우리교육)를 보면 그가 해방 후 6·25 직전까지 명동에서 담배 장수를 하고, 남대문 시장에서 어물가게의 점원으로, 부산에서는 부두 노동과 땅콩 장수로, 그리고 인쇄소 해판공 등으로 일했던 이력들을 살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유명한(?) 일화도 소개된다. '<현대문학>에 시로 추천을 받고 문단에 나올 무렵도 그는 바로 그 <현대문학>을 조판하는 공원이었다. 그 무렵 박재삼 시인이 <현대문학> 편집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달에 뽑힌 감동적인 신인의 시가 몇 년 동안 줄곧 얼굴을 맞대고 빨리 해 달라, 고쳐 달라며 아옹다옹하던 조판공의 것임을 알고 면구해 했다는 일화는 문단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가 떠난 고향. 타향에서 얻지 못한 것들이 시가 되지요. 누구나 처음부터 글을 쓰려고 고향을 떠나지는 않아요.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싹이 있으면 어디서든지 그 싹을 키워서 글을 쓰게 되지요. 나는 글을 써야지. 나는 꼭 글을 써야지. 나처럼 힘들고 어렵게 산 사람들에게 그런 삶들을 그대로 그려서 보여주어야지. 아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왜 쓰는가? 나도 가끔은 내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져볼 때가 있다. 순천이라는 이 작은 도시에서 해마다 30명이 넘은 사람들이 돈도 안 되는 문학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민영 선생에게 시가 없었다면 그의 인생이 온전했을까?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이어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부정과 부패와 군사독재로 얼룩진 부끄러운 나라에서 호흡조차 편히 할 수 있었을까. 4월에 피는 꽃들을 어찌 바라볼 수 있었을까. 그에게 시마저 없었다면. 돌에 새긴 이름 돌에 갇힌 아우성 아, 돌에 박힌 피! -<수유리에서> 그날 민영 시인은 뒤풀이를 마치고 순천까지 마중을 나온 경남작가회의 시인과 함께 진주로 떠나면서 순천작가회의 시인들에게 시집을 한권씩 선물해 주셨다. 이번에는 내 차례까지 와서 나도 시집을 한 권을 얻을 수 있었다. 제목을 보니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인 <바람 부는 날>(한길사)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집을 펴보니 강연 도중에 낭송을 해주신 시가 눈에 띄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천리를 가면 검은 강물 한 줄기 소리 없이 흐르고 우뚝 우뚝 거친 산 솟아 있는 곳 그 산밑이 내 고향 마을이라네. 참솔 같던 젊은이들 총 맞아 죽고 꽃다운 홀어미들 지쳐 잠든 곳 불에 탄 집터마다 쑥대풀 서걱이고 도깨비불 밤이면 펄럭인다네. 잿더미에 흩어진 뼈 벌레 되어 우나니 예 살던 살붙이들 어디로 갔나? 내가 자라 길 떠난 뿌리의 고샅 이 세상 일 마치거든 돌아가려네. -<고향생각> 시를 읽고 나니 무언가 알 것 같기도 했다. 노시인의 해지기 전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그것은 바로 고향이 아니었을까? 혹은, 고향 하면 떠오르는 그 어떤 것. 나라는 깨졌어도 산천은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 말했던가. 바로 그때의 그 산천. 여리고 푸른 것들. 인간의 욕심에 의해 뿌리까지 뽑혀버린 순정한 눈빛들. 사십이 되기까지는 시조차 될 수 없었던 망향의 설움들. 시인은 그 깊은 상처들과 화해하기 위해 해지기 전에 마지막 사랑을 나누려고 한 것은 아닐까? 들국화 핀 골짜기 길을 오르다가 구멍 뚫린 철도 하나를 보았다. 총소리와 함성이 뒤섞이던 삼십오년 전 그날 이 철모의 임자는 쓰러졌을까? (들고 간 술 한 잔을 그 아래 부어 놓고 가을 제사를 지낸다.) 이름 없이 죽은 전사의 넋이여 그대가 어느 편 사람이었든 상관하지 않으마! 아, 가을빛 짙은 철원 평야 억새풀 흐느끼는 옛 싸움터에 오늘은 국경 없는 바람이 분다. -<추석날 고향에 가서> 아, 이런 진한 마음일진데 룡천역 폭발사고로 무수한 생목숨이 날아가 묻혀버린 북녘을 바라보며 노 시인은 지금쯤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
첫댓글 hi
회기동 민영 선생님을 찾아뵈었었죠.집에서도 두루마기를 입고 계시고 따뜻한 차 한잔 고향 후배에게 권하시는 사모님의 자상한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