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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삼한시대에 의성에는 전국적 규모의 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못이 있던 자리에는 지금 유허비가 남아 있다. 사진은, 안계고등학교 담장 아래에 있는 유허비석 주위에 누군가가 붉은 고추를 말리고 있는 풍경.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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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돌(立石)은 역사가 쓰이기 이전인 선사(先史)시대의 거석(巨石)문화를 보여주는 유적 중 한 가지이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巨) 돌(石)을 세워놓거나(立) 아래를 괴어(支) 놓는(支石墓, 고인돌) 것이 하나의 문화였다.
거대한 모습에 힘입어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는 입석은 신앙의 대상이거나, 세력을 다투는 마을 사이의 경계선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선돌은, 고인돌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 있는 것과는 달리 홀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다 구조 또한 아주 단순하다는 점 때문에 제대로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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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계면의 '선돌'. 의성군에서 가장 큰 입석으로, 그것이 있다는 이유로 마을이름도 '선돌마을'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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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계면 선돌마을에 있는 '선돌'은 그것이 그대로 마을이름이 되었다. 즉, 선돌은 아득한 옛날부터 그 일대 주민들에게 큰 정신적 영향을 끼쳤던 존재인 것이다. 금성면의 5층석탑이 자신이 존재하는 마을의 이름을 '탑리'라고 지은 것처럼 말이다. 본래 '조문탑'이었던 것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탑리탑'이 된 것은 결국 그 탑이 사방 넓은 지역에까지 자신의 존재를 크게 알렸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의성 최대의 선돌, 안계면 선돌마을의 이름을 낳고
선돌마을의 선돌은 높이 2m20cm, 폭 1m20, 두께 50cm로 의성 군내의 입석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관어대(觀魚臺)라 불리는 마을 뒤편의 강가 절벽이 지금도 유명한 낚시터라는 점, 마을 앞이 안계 평야의 끝자락이라는 점,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곳이 나룻배를 타고 구천면으로 건너던 길목이었다는 점, 선돌마을 사람들이 사냥을 하기 위해 청화산을 드나들었으리라는 점 등을 생각하면, 선돌은 당시 이 일대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농사, 어렵(漁獵), 교통, 사냥 등 모든 것들이 잘 되기를 기원하여 세워진 신앙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선돌 뒤 관어대에서 강물을 따라 계속 펼쳐지는 높이 25m의 가파르고 긴 강변 층암(層巖) 절벽은 부흥대(賦興臺)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워낙 빼어난 절경이라 선비들이 놓칠 리 없었으니, 눈부신 경치를 아래로 굽어보며 노는 절벽 위는 사시사철 시(賦)를 읊조리며 신나게(興) 즐기는 소리가 끊일 줄 몰랐고, 예로부터 선비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이 단골로 열려온 명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흥대 바위 정상에서 2007년 5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구멍, 용자리를 나타내는 듯한 구멍 등 300개를 넘는 성혈(星穴)이 발견되었다. 성혈은 원시인들의 신앙 생활을 말해주는 표시이므로, 그렇게 많은 성혈이 이곳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선돌 일대가 아득한 옛날 신앙 숭배의 장소였음을 다시 한 번 증언해준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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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혈이 발견된 부용대 전경. 아래 사진은 위천 너머 구천면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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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처럼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선돌에 따라다니는 전설이 없을 리 없다. 조선 헌종(1834~1849 재위) 때 이야기이다.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말을 타고 가는데 돌이 굴러와 길을 막았다. 목사가 크게 호통을 쳤다.
"왕의 명령을 받고 가는 사람을 네가 감히 가로막다니, 이 놈, 무서운 줄을 모르는구나!"
돌이 길가로 비켜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호랑이가 나타나 또 길을 막았다. 죽을힘을 다해 싸운 끝에 목사는 범을 물리쳤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밤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목사는 하룻밤을 이곳에서 보내고 이튿날 상주로 출발했다.
어제, 산적들이 목사를 해치고 물건을 빼앗으려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목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산적들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 그곳을 떠났다. 돌과 호랑이가 목사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었다. 그 후 사람들은 호통소리에 자리를 비켜'선' '돌'이라 하여 마을 들머리의 입석을 '선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전설의 내용은 선돌의 종교적 의미와 전혀 닿지 않는다. 그런 전설이 입석에 추가된 것은, 조선 헌종 시절이 이미 19세기였으므로 원시신앙의 숭배 대상이었던 선돌이 계속 종교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설을 거느릴 만큼 떠받들려졌다는 것은 여전히 사람들이 이 선돌을 경외(敬畏)의 대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선돌은 찾기가 쉽다. 위천의 위성교를 왼쪽으로 두고 정면에 나타나는 산모퉁이를 돌면 선돌마을이 나타나는데, 마을 중간쯤의 왼편 길가에 바짝 붙어서 세워져 있다. 선돌 바로 뒤에 장문단(張文端) 정효각이 함께 있어 더욱 눈에 잘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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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음면 우체국에서 장제지로 가는 언덕길에 자리잡고 있는 고인돌. 고인돌 너머로 비봉산이 보인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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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사람들의 무덤인 고인돌도 청동기 시대에 의성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을 증언해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김종우 저 <의성의 유훈>에 따르면 봉양면 장대동에 20기, 화전면에 12기, 문흥동에 11기, 구미동에 9기, 금성면 초전동에 13기, 점곡면 윤암동에 12기 등 모두 11곳 군집에 87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의성에는 고인돌들이 많다. 의성군의 고인돌들 중에서 가장 찾기 쉬운 곳은 금성면 초전리 고인돌 군집이다.
고인돌 군집, 청동기 때 의성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
고인돌은 세계적으로 6만 기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5만 기 이상이 우리나라 남북한에 있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특히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은 한 곳에 대규모로 모여 있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명예까지 얻었다.
우리나라에서 고인돌 발굴 조사가 처음으로 실시된 것은 1927년이다. 대구 대봉동 고인돌들이 그 대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대구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2천여 기)보다도 더 많은 3천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는데, 일제 시대에는 일본인들이, 또 해방 직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원석으로 마구 가져가고 훼손하는 바람에 대부분 없어져버렸다. 만약 대구의 고인돌들이 고이 남아 있었더라면 세계적 관광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하찮게 보이는 문화재도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제자리에 곱게 보존해야 하는 까닭을 잘 말해주는 사례이다.
초전리 고인돌 군집은 봉양면 도리원에서 출발하여 장대서원 앞을 거쳐 금성면으로 오는 927번 도로를 달리다가, '금성산 고분군'에 거의 닿았을 즈음에서 만날 수 있다. 즉, 조문국 유적인 금성산 고분군, 천연기념물인 제오리 공룡발자국 화석, 국보인 탑리5층석탑을 보러 가는 길에 함께 답사하면 좋다는 말이다. 이곳저곳 어지럽게 다니는 것보다야 순서를 잘 잡아 착착 답사를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이 답사로는, 의성 일대에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이 남긴 초전리 고인돌 유적, 조문국 고분군 유적, 국보인 모전석탑 유적, 목화 유적, 금성산성 유적, 선운마을 중요민속자료 등등을 한꺼번에 두루 구경할 수 있는, 정말 배가 부른 길이다. 물론 굶어죽은 것으로 추측되는 빙하기 시대 공룡들의 발자국까지 볼 수 있으니, 그들 앞에서 배부른 느낌을 드러내어야 하는 좀 미안한 길이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