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면
1. 화기지설(火氣之設)
청자촌이 조성된 대구면 용운리 일대는 청자제작에 관련된 ‘화기지설’이 전해 오는 땅이다.
대구면 미산리, 사당리, 용운리, 용문리, 항동 일대 마을 사람들은 아주 예전에 이 곳 정수사의 스님들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릇 굽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정수사의 스님의 말에 의하면 “대구면 일대는 화기의 땅이기 때문에 그릇을 굽게 되면 이로울 것이나, 화재가 자주 발생해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불을 이기려면 여러 곳에 우물을 파서 재앙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물(못, 둠벙 또는 관정)을 여기저기 수 백군데 팠는데, 현재 청자를 구웠던 가마터는 일백여개 발견되었지만 우물을 판 장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러한 이야기는 상당히 타당성 있는 말로 불을 많이 다루는 가마터가 수 백군데 있었다면, 흙을 굽는데 쓰이는 물이나 허드렛물도 꽤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사시사철 가마의 불이 꺼지지 않은 가운데, 그에 따른 화재예방 조치로써 소방수의 확보 또는 불을 끄는 화재진압 기술도 상당히 발달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대해 미산부락에 사시는 이화종(우리 동창 성희 아부지이시다) 씨와 나눈 이야기이다.
“전에 계치 조씨가 있었는데, 그 양반 말을 들으면, 청룡서 불이 나든지, 계치서 불이 나든지 해야 된다는 그런 말이 있었어. 어려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불이 나면 물이 필요했겠네요?”
“옛날엔 계치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 갔제. 미산에는 건수라도 있는디, 당전에는 물이 안 나왔어. 우물을 파도 물이 안나와. 그러니깐 아마, 저 우게(위에) 정수사 골짜기 물을 갔다 썼을 것이여. 지금은 저수지로 되었지마는. 자기를 구울려면 물이 상당히 필요했을 텐디, 어떻게 공급했는지는 잘 모르제.”
옛날 이곳 대구면 에서도 당시 대부분의 마을이 그랬듯이 아마 공동우물의 형태나 우물이 없는 곳에서는 냇물이나 강 자체가 공동 우물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용샘 또는 참샘’이라는 지명이 미산이나 수동마을 또는 백사(나까똘)에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시대 공글샘이라고 콘크리트로 만든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논 귀퉁이에 있어서 논물을 댈 때는 건수가 스며들어 우물로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번은 양모씨 아이가 우물에서 놀다가 빠졌는데, 깊은 물속이고 미끄러운 콘크리트 벽에서 30여분 버티고 있다가 마을에서 가져온 간지대(대나무)를 잡고 올라와 살았다고 한다.
2. 붉은 바위와 욕심 많은 고동영감
사당리 당전 마을에 있는 고려청자 사업소에서 서북쪽으로 산 중턱에 "붉은 바우(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이 바위틈에서는 쌀뜨물이 흘러 나왔는데 붉은 바위 위쪽에 있었던 절의 도승이 바위 속에 쌀을 가득 저장해 두었기 때문이라고 전해 오고 있었다.
어느 봄날 술꾼들이 주막에 모여 앉아 붉은 바위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중에 잔꾀가 많고 부황한 소리를 잘하는 한 사람이 고동영감에게 흥정을 붙여 공술이나 얻어먹자고 제안을 했다.
그래서 먼저 산 주인에게 승낙을 받아내고 건너 마을에 사는 욕심쟁이 고동영감을 찾아가, 바위 속에 수만 석의 쌀이 들어 있으니, 이 바위를 사두면 큰 부자가 될 것이라고 그럴 듯 한 말로 관심을 사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현장까지 확인 시켰다. 욕심 많은 고동영감은 이 말을 그대로 믿고 행여나 다른 사람이 먼저 사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겨, 그 날로 많은 대금을 지불하고 바위를 샀다.
그 후 고동영감은 남 몰래 붉은 바위에 올라가 바위틈 사위를 막대기로 쑤시면서 쌀이 나오는가를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쌀은 고사하고 쌀뜨물마저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의심이 생긴 고동영감은 흥정꾼들에게 쫓아가 대금을 반환해 달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흥정꾼들은 도리어 화를 내면서 "누가 쌀이 나오는 구멍을 쑤시라고 하더냐, 그대로 두고 있으면 쌀이 저절로 나오는 구멍을 쑤셔버렸으니 구멍이 막혀 이제 쌀이 나오기는 영영 글렀다고" 하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하고 붉은 바위를 바라보면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붉은 바위라 불리던 것을 "고동바위"라고도 불러오고 있다.
또 실제로 들었다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여그 양칠중 씨라고 있었는디 성전양반이라고도 했어. 그런데 수동에 사는 윤치호 라는 사람이, 그 당시 얘기 들어보니까, 술값은 아쉽고 그러니깐 ‘금바우’라고 속여 양씨한테 폴아(팔아) 묵었어. 그 뒤로 고동바우 고동바우 했는디, 그 성전양반은 양자 들여서 살다가 돌아가셨지. 그러한 말이 있었고 내 귀로 직접 들었다.” 어려서 수동에 사신 적이 있는 이화종(미산 거주) 씨의 이야기이다.
3. 구강포와 구십포
가. 구강포
구강포(九江浦)는 강진만의 가장 남쪽에 있는 대구, 칠량, 강진읍의 어딘가에 해당된 포구(浦口)의 명칭인데, 아직도 제대로 정의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중동지역 동남부에 위치한 아랍 에미리트 사람들이 6세기경 대구면의 하저에 왔다 갔다”는 말과, 저두리의 산 이름인 저두산에 구십동이란 지명이 있어 이를 두고 ‘구십포’라 이름했다 한다.
그래서 산(山)에 관한 기록인 산경포(山經袌)와 물(水)에 관한 기록인 수리지(水利志)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보았지만 신통한 게 없었는데, 오직 1481년에 작성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이 보인다.
구강포(九江浦)에 관련된 자료는 1723년에 작성된 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여지승람,
1859년에 엮어진 동환록, 1967년에 간행된 강진군지 등이 있다.
‘정수사 여지승람’은 이웃하는 산세를 설명하는 계국(界局)편에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이른 바, 구강포(九江浦) 30리쯤에 명산(名山)이 있다”고 한 것은 정수사가 있는 천개산(天盖山)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다산의 외손자인 윤정기가 지은 ‘동환록(東寰錄)’의 강진 편에 “구십포는 곧 구강포인데 남당(南塘)이라고도 한다. 강진현의 남쪽 5리에 있고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의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 때 배를 정박하던 곳이니 곧 탐진(耽津)이라 한다”고 한다.
1967년에 간행된 강진군지 상권에 있는 읍면의 지세와 산천편의 군동면과 대구면에 대한 설명이 있다. 군동면 편은 “월출산에서 시작된 작천과 장흥의 가지산에서 발원한 예양강(탐진강)의 큰 냇물이 장흥읍의 송암리 동쪽으로 합류하여 군동면의 중앙을 통과 금천, 나천, 호계, 삼신리의 큰 들판에 물을 대주고 구강포(九江浦)에 유입한다”고 하고, 대구면 편은 “천태산에서 발원한 ‘뒷내’라는 계천은 동북에서 흘러와 대구면의 중앙을 통과하여 구강포(九江浦)에 유입한다”고 되어 있다.
강진은 포구를 낀 지명이 많은 데, 마량의 원포(垣浦), 대구의 구십포(九十浦), 칠량의 장포(長浦), 군동의 영포(令浦)와 백금포(白金浦), 강진읍의 남포(南浦), 도암의 율포(栗浦)등이 있다.
나. 구십포
우선 구십포(九十浦)에 관련된 자료로는 1481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국여지지(1659-1674), 호남좌도 금릉현 천태산, 정수사여지승람 (1723-1885), 강진군지(1923) 등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세 가지로 나누어 적었는데 “첫째 ‘구십포’는 강진의 남쪽 6리에 있고, 둘째 물이 흘러오는 근원은 월출산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흘러와 강진현의 서쪽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합하여 「구십포」가 되고, 셋째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의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 때 타고 온 배를 이곳에 머물렀다. 그래서 탐진(耽津) 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강진군지’ 대천(大川)편에 “구십포는 강진의 남쪽 5리에 있다. 여러 고을의 개울과 냇물들이 이 구십포에 흘러와 합하여 넓고 큰 바다로 흘러간다. 그래서 구십포라 한다. 탐진(耽津)은 옛날에 탐라국의 성자(星子)가 신라의 조회에 참여하거나 나라에 토산물을 바칠 때 배를 이곳의 나루에 정박하였다.
그래서 탐진이라 부르고 고을의 명칭으로 삼았다. 또 성자진(星子津)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구면 하저(下猪)에 위치한 저두산(猪頭山, 347) 골짜기인 구십동(九十洞)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정되는 구십포(九十浦)는 17세기부터 구강포(九江浦)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또 탐라국 사람들이 육지로 오고 갈 때에 배를 정박하던 나루터의 뜻으로 성자진(星子津) 또는 탐진(耽津)이라 하였으며, 고을의 명칭도 탐진현(耽津縣 757-1417)이라 하고, 탐진현의 나루는 남당포(南塘浦)라 하였으니 지금의 남포(南浦)이었음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구면에 있는 하저마을의 옛 명칭이 구십포(九十浦)이고, 그 때의 나루터는 강진읍의 남포마을로 보아도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듯하다. 따라서 구십포의 영역은 가우도의 동쪽인 대구면의 중저 마을부터 남쪽에 있는 백사 마을까지가 될 것 같다.
이상과 같이 구십포의 물은 칠량의 장포, 구십동 계곡, 항동의 여섯 골짜기 물, 청용 관찰봉 정상에서 발원한 물들이 합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