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동제일교회 ☞ 찾아가는 길 : 서울 중구 정동 02-753-0001-3 ( 서울 덕수궁 남쪽 돌담길을 따라 가면 돌담이 끝날 무렵 길 건너에 있다. )
2) 배재학당 ☞ 찾아가는 길 : 정동제일교회 남쪽으로 연결되어 있음. 1885년 8월 3일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본 학당을 설립. "培材學堂"이라는 학교명은 1886년 6월 8일 고종 황제 하사함. 우리나라 근대 교육기관의 효시이다.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따라 지 은 일층 건물이다. 학당의 내 부에는 예배실, 강의실4개, 도서실, 교장실 그리고 산업부를 위한 반 지 하실 등이 있다.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오긍선 김정식(소월) 김진호 나경손(도향) 신봉조(화암) 등이 이 곳 츨신들이다.
3)양화진 외국인 묘지 ☞ 찾아가는 길 : 전철 2호선 합정역에 내려 합정동 로타리에서 당산철교 쪽으로 길을 따라 3-4분 정도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정문이 있다.
4)인천내리 교회 ☞ 찾아가는 길 : 동인천 지하철역에서 시내쪽으로 약 200미터 가면 오른쪽에 교회가 있다. 미국 북감리회 외국 전도부의 매클레이는 1884년 고종황제를 알현해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의 윤허를 받고 미국에서 5천 달러를 모금하였다. 의료선교를 위해 스크랜톤과 교육선교를 위해 아펜절러 목사 부부를 파송하되었다. 부활절 아침 두 선교사는 한국땅 제물포항에 첫 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내리교회 4층 본당 뒷편에는 1백년이 넘는 교회역사를 사진으로 찍어 전시하고 있다. 내리교회의 첫 예배는 1885년7월19일이다. 그러나 이 때 한국인이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은 없다한다. 대예배당 입구 맞은 편에 역사자료관이 있다.
5)강화읍 교회 ☞ 찾아가는 길 : 강화대교를 지나면 왼편에 갑곶진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오른편에 강화군청이 있다. 사거리가 나올 때까지 곧 장 가다가 사거리서 오른편으로 돌아 약간 올라가다 다시 오른편으로 돌아서 가면 교회가 나온다
성공회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 종파이다. 1889년 11월 1일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는 영국해군 종군사제인 Charles John Corfe(한 국이름: 고요한)를 한국 선교부의 주교로 임명하였고 1890년 9월 29일 고요한 주교가 인천 에 도착함으로서 성공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되었다.
강화선교는 1893년 7월 왕란도 (Warner)신부가 강화 외성 출입문인 진 해루 밖 나루터에 한옥 한 채를 마련함으로서 시작 하게 되었다. 성공회 선교단장 조마가 신부가 1896년 강화읍 동문 안에 성베드로 회당을 마련하고 선교를 시작 함으로서 강화읍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700평의 대지위에 배 형태의 터를 닦아지어진 교회는,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과 종각이, 복판에는 성당이, 고몰에는 교회를 관리하는 주교관이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교회내부는 로마네스크 바실리카 성당 양식을 응용해 지어졌다.
6)천곡 교회 ☞ 찾아가는 길 : 수원에서 42번 국도를 따라 구반월을 지나 주유소앞 삼거리에서 좌회전 한다. 도로를 따라 300m가량 내려가다 사거리(우측은 상록수역)에서 다시 좌회전하여 50m정도지나 주공아파트 방향으로 가면 왼쪽에 상록수 공원이 나타난다.
천곡교회(현 샘골교회)의 시작은 1907년 일제시대이다. 감리교회내 역사적인 의의를 가진 무지내교회와 한 구역에 있다. 천곡교회가 사회적으로 아려 지기 시작한 것은 1931년 최용신선생이 부임하면서부터 이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인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바로 이 최용신 선생이다.
최용신이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농촌 사람들을 위해 천곡교회를 빌어 농촌계몽운둥을 시작한 것은 10월 2일이었다. 지원생은 많고 장소는 협소하여 오전, 오후, 저녁 3부제로 밤늦도 록 가르쳤다. 최용신은 유학중에 얻은 병과 과로가 겹쳐 1935년 1월 23일 26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현재는 아파트 단지로 둘려 쌓여 당시의 모습은 찾아볼 수는 없지만 천곡교회 (현 샘골교회)와 시립루씨어린이집에 최용신선생의 유품 및 관련 자료들이 있으며, 최용신 선생의 묘가 있다.
7)제암 교회 ☞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오산 인터체인지에서 발안으로, 발안에서 조암 방향으로 1. 5Km 쯤 달려가면 제암리 마을에 닿게 된다 제암교회 이야기: 개화기에 이 마을에 사는 안종후(安鐘厚)라는 젊은이가 한문을 배우려고 서울을 왕래하면서 1905년 아펜젤라를 만나 예수를 영접하였다. 예수를 믿게된 안종후는 자기 집 안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특별히 안종후의 집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그랬더니 제암리에 가면 한글을 배울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2-10리 밖에 사는 이웃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안종후는 열심히 전도하여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 1911년에는 8칸짜리 초가 예배당을 지으면서 제암리에도 교회가 생겼다.
8)순교자 기념관과 소래교회 ☞ 찾아가는 길 : 경기 용인군 추계리 산 84-1. 서울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양지 톨게이트에서 빠져 42번 국도를 타고 이천 방향으로 4㎞가량 더 달리다보면 국도 한 곁에 순교자기념관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소로로 접어 들어 5백여m가량 오르면 큰 바위에 새겨진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니라'는 글귀가 나온다. 조선조 말엽인 1884년 이 땅에 기독교 씨앗이 처음 뿌려진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전도하다 숨진 순교자수는 2천6백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초기에는 '혹세무민' 한다고, 일제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의 중심세력이라며, 6·25때에는 반공산이라는 이유로 이들은 소리 없이 죽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89년 11월 건립된 기독교순교자기념관에는 유명 무명의 수많은 순교자들 중 지금까지 알려진 2백2명의 순교자 유물들이 그들이 희생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9)매봉 교회 ☞ 찾아가는 길 : 천안에서 시내버스 또는 시외 버스가 운행된다. 지령리교회라는 이름으로 1907년에 설립된 매봉교회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나왔다. 그들의 독립만세 소리에 철로경비대가 몰려와 무차별 사격을 가해 조인원 전도사와 유관순의 부모와 교우등19명이 피살되었고 부모 잃은 유관순은 앞장서서 더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왜경은 어린 소녀를 낚아채 가두고 무서운 고문을 가했으나 굴하지 아니하고 아침저녁으로 옥중기도와 만세를 부르다가 다음해 10월 살해되었다
10)금산 교회 ☞ 찾아가는 길 :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290-1 소재 금산교회에 전해지는 역사를 소개한다. 당시의 금산교회의 학습과 세례문답이 얼마나 엄격했는가 하면, 우선 한글을 알아야 하고,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면 학습과 세례문답에서 합격 할 수가 없었다. 만일 양조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교인이 되고자 할 때는 그 양조장을 정리하지 전까지는 학습과 세례를 주지 않 았다고 한다.
11)목포 양동 교회 ☞ 찾아가는 길 : 목포행 버스를 타고 목포에 도착 양동교회까지 택시로 가면 된다 1987년 봄 목포시 양동에서 목포(당시 양동교회)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양동교회. 1910년 교인의 헌금으로 한국 최초의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1942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제직20여명과 박연세 목사는 검거되었고 대구로 이송되었던 박목사는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이 곳 양동교회는 당시 목포의 모든 교단이 성령 안에서 하나로 만날 수 있었던 구심점 역할을 감 당했다.
12)여수 애양원 ☞ 찾아가는 길 : 순천 터미널에서 애양원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30-40여분 가면 된다. 사랑의 사도 화해의 종 손양원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중 해방과 함께 출옥. 다시 애양원교회로 돌아와 환자들과 같이 동거하며 사랑을 실천하면서 목회를 하여 모두들 손목사를 부모처럼 따랐다. 그러던 중 여수 반란사건으로 두아들을 공산당의 손에 잃었고 두 아들을 잔인하게 죽인 재선을 석방케 했을 뿐 아니라 양아들로 삼았다. 6.25 동란중 공산당에 체포되어 동28일 총에 맞아 순교하였다. 유적지에 순교자기념관과 기념묘지에는 순교 묘비가 있다. 손양원 목사와 사모에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애양원 규칙상 정상인은 출입할 때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장화를 신도록 되어있으나 손목사는 중환자실을 거침없이 드나 들었으며 나병 환자의 환부에 사람의 침이 약이 된다며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손목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수감되기 전 그의 아내는 " 여보 이 말씀(계2:10) 아시죠, 신사참배 응하면 내 남편 자격 없습니다" 라는 말을 전했다 한다.
12)영광 염산 교회와 야월교회 ☞ 찾아가는 길 : 염산교회: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암리 소재 / 야월교회: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471-1 소재 6.25때 우리나라 곳곳에서 순교를 당한 이들이 많이 있으나 이곳은 손꼽을 만한 곳이다. 염산교회 연혁에 의하면 전교인의 3분2가 넘는 77명이 모두 순교했는데 특히 김방호목사,허상장로,노병재집사,기삼도 성도는 신앙을 굳게 지켜온 순교자로 전라도지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교자들이며 많은 순교사화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평화로운 동리 야월리에는 공산군의 침입으로 쑥대밭이 되고 교 회에 출석하던 65명이 순교한 참화의 현장이다. 기독교인들은 불에 타 숨졌으며 몽둥이로 두둘겨 패서 실신하면 새끼줄로 묶어 바다에 던져 넣어 죽였으니 해지는 바다엔 저녁놀이 핏빛을 띄었다
13) 제주도의 선교사 이기풍목사 ☞ 찾아가는 길 : 제주공항에서 시외버스터미널(2.3km)가지 가서 그곳서 기념센터(17.2km)까지 가는 버스를 타야한다. 이기풍 목사는 어려서부터 재치 있고 슬기로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동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외웠으며, 열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서 붓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묵화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한참 건축하고 있던 장대현 교회를 때려부수기도 하는 등,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의 종교로 보고 수 차례 박해를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에게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다. 한 귀로 듣 고 한 귀로 흘려버린 채 집에 돌아와서 마루에 누워, 평양에서 돌팔매질로 양코배기의 턱을 깨어 피를 흘리게 했던 일을 한참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그런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 니 머리에 가시관을 쓴 분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는데, 이런 소 리가 들렸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너무나도 놀라서 깨 어보니 꿈이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기풍은 그 자리에 엎드렸다.
생전 눈물을 흘릴 줄 몰랐던 눈에서 회개의 눈물이 콧물과 뒤범벅이 되어 한없이 흘러내렸다. 이후 이기 풍은 1901년까지 매서(성경책을 파는 사람, 나중에는 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인 권서로 불림)로서 함경도에서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어려운 제주 도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며 수많은 제주인을 복음으로 전도했다. 그의 유해는 광주기독교 묘지에 안정되어있고 기념관은 제주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