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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한 송이 흰 백합화
장 성 원 (張 誠 源)
윤 항서(尹 恒瑞)는 서울 세종로 네거리에 있는 신문사의 문화부 기자였다. 종교 미술 문화재를 담당했다.
1974년 이 신문사에서 종을 울렸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국내는 물론 외국에
까지 큰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유례없는 정부의 광고탄압으로 신문사는 경영상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기업광고가 하루아침에 뚝 끊어져 광고란이 백지로 나가다가 국민들의 눈물겨운 격려 광고로 근근이 버텨나가는 형편이었다.
광고탄압이 오래 가면서 경영진과 기자들 사이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 기자들 사이에서도 기사보도 문제를 놓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맞섰다. 나아가서 자유언론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신문제작을 거부할 것이냐, 제작에 참여할 것이냐, 양분되어 균열이 심각해졌다.
윤 항서는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문발행만큼은 유지돼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지면紙面과 펜이 없는 기자는 무기가 없는 군인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여는 결국 정권과 적당히 타협하고 사실상 자유언론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어느 쪽에 서야할지 참으로 판단이 어려웠다.
75년 3월 초 어느 날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문화부 수석기자 박 윤하(朴 潤夏) 선배가 윤 항서에게
“윤형, 오늘 점심 약속 있어?”
“없습니다.”
“그럼 잘됐네. 같이 갑시다.”
박 선배는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어가고 있는 주동인물이었다. 박 선배를 비롯해 문화부 기자들이 앞장서 운동의 횃불을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둘이서 신문사 문을 나서면서 박 선배가
“낙동강으로 갑시다. 천 주필과 약속이 돼있어.”
낙동강은 다동에 있는 소금구이 집이었다. 천 주필은 천 관우 선생을 가리켰다. 천 관우는 7년 전에 이 신문사의 주필을 지냈지만 여전히 천 주필로 통하고 있다. 지금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아 박 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에 대항하는 정치적 협의체를 주도하고 있다. 사학자요, 언론인으로 특히 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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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기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내일이 경칩인데도 거리에는 찬바람이 휘몰아쳐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소금구이 집으로 갔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식당의 방방마다 손님들이 얇게 썬 등심을 숯불에 구어 안주로 먹으면서 술도 마시고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식사도 했다.
박 선배와 윤 항서도 네 상이 차려져 있는 방으로 안내되어 천 주필이 오기를 기다렸다. 옆 자리 손님들은 자기들끼리 조용하게 반주를 주고받으면서 식사를 했다.
약속시간보다 10여 분 늦게 천 주필이 들어섰다. 육척이 넘는 장신 거구였다. 어떤 여기자가 우스개로 천 관우의 몸집을 ‘천 관(貫) 나가는 소와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육중한 체구와는 달리 얼굴 생김새는 준수했다. 어렸을 때는 ‘신동’으로 신문에 보도된 적도 있었다.
“박 형, 늦어서 미안합니다. 윤 형도 오셨네. 오랜만입니다.”
천 주필은 후배라도 말을 놓지 않고 형이라고 부르면서 존대 말을 썼다. 주필을 그만둔 지가 벌써 7년이 지났지만 많은 기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박 윤하가 먼저 요즘 신문사 사정과 동태에 관해서 자세하게 천 주필에게 설명했다. 천 주필은 소금구이 몇 점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면서 박 윤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 주필은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마셨다. 말술이었다.
세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손님들이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천 주필을 힐끔 힐끔 쳐다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 자리 손님들이 모두 나간 것을 확인한 천 주필이 말문을 열었다.
“박 형, 고생 많이 하고 있습니다. 후배들이 정말 장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박 정희 유신정권은 머지않아 망하고 말 것입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무너지게 돼 있습니다. 시간문제입니다. 국부라고 추앙받던 이 승만의 절대 권력도 이 기붕 일가의 경무대 집단자살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천 주필은 몇 가지 실례를 들면서 서슬이 시퍼렇던 권력도 결국 한 편의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예정돼 있다고 예언자처럼 열변을 이어 나갔다. 평소에 톤이 높지 않았던 천 주필의 말이 이 날은 힘이 있었다.
“경제개발을 내세워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반시대적 독재체제를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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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완전통제 받는 이런 상황을 기자들이 모르는 체 한다면 언론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역사에 죄를 짓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은 당당합니다.”
박 윤하와 윤 항서는 일방적으로 한참 계속되고 있는 천 주필의 강론과 격려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때 종업원이 된장찌개 그릇을 상 위에 올려놓고 사그라진 숯불을 빼내 갔다. 그제야 천 주필은
“나 혼자 말을 많이 했네. 어서 식사들 하세요.”
자기는 밥에 손도 대지 않고 두 사람에게 식사를 권했다.
박 윤하가 말씀 잘 들었다며 숟가락을 잡았다.
윤 항서가 둘이서만 먹기가 미안해서
“주필님도 식사를 좀 하셔야지요.” 했지만
“나는 됐습니다. 소주도 많이 마셨고 고기도 몇 점 먹었고......”
그러면서 남아있는 술을 자작으로 더 마셨다.
두 사람의 식사가 끝나자 천 주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와는 달리 말의 톤이 낮아졌다.
“권력에 맞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신변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고 직장에서 쫓겨나 생계가 막막할 수도 있고. 긍지를 가지면서도 한편으론 외롭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자유언론운동에 뛰어든 후배들의 험난한 앞길을 예견한 듯 걱정스러워 하는 표정이었다. 몇 해 전 신문사를 떠난 천 주필 자신도 지금은 일정한 수입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렵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다고 근황을 털어놓았다.
천 주필은 헤어지면서
“절대 권력과 싸워 당장은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힘과 칼을 휘두르기 때문입니다. 희생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승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두 사람을 고무했다.
천 주필을 만난 다음 윤 항서의 마음은 제작거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절대 권력은 절대 망 한다’, ‘우리는 역사의 승자가 될 것이다’라는 천 주필의 확신이 윤 항서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윤 항서가 그렇게 마음잡아 가고 있을 때 신문사는 광고 격감에 따른 경영난이라는 이유로 일부 부서를 폐지하고 소속 기자와 간부들을 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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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전격적인 조치에 기자측은 「광고탄압으로 비롯된 경영난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 경비절감의 필요성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기자들에 대한 집단해고는 받아들일 수 없다. 경영이 어려우면 전체 기자들의 급여를 깎아도 좋으니 해직을 시키지 말아 달라」는 성명서를 냈다.
회사는 이 성명서가 회사의 조치에 반발한 것이라며 성명서를 낸 주동 인물 박 윤하를 해고했다. 박 윤하는 온후하고 합리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지켜나가는 사람이라 후배들의 신망을 얻어 운동을 이끌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 사태가 급속도로 악화했다. 신문제작 참여파와 거부파가 확연하게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제작거부 쪽으로 기울어져 가던 윤 항서는 아내의 외가 오빠이기도 한 박 윤하가 해고되자 신문제작을 거부하기로 확고하게 마음을 굳혔다.
윤 항서는 그런 결심을 아내 김 형숙(金 亨淑)에게 알렸다. 아내는 아주 담담하고 태연하게 남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잘 하셨어요.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지요.”
매사 신중하고 꼼꼼한 윤 항서와는 달리 김 형숙은 성격이 활달하고 대범했다. 결혼 6년차. 네 살 난 아들이 하나 있었다. 평소 아내의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렵게 내린 자기의 결단을 저렇게 한 마디로 평가해버리는가 싶어 가벼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내가 신문사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먹고 살려고......”
“옳은 일을 하시겠다는 분이 그런 걱정은”
윤 항서는 조금 면박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아무려면 우리 세 식구 입에 풀칠이야 못 하겠어요. 내가 행상에 나서든지, 음악학원을 차려 피아노를 가르치든지......”
아내는 이미 무슨 대책을 세워놓은 사람처럼 자신 있게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내는 얼마 전부터 이제 아이도 컸으니 음악학원을 차리고 싶다는 계획을 말해왔다.
김 형숙은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재원이었다. 몸매가 날씬했다. 한복을 입으면 전형적인 동양미인의 맵시가 났다. 특히 눈이 크고 시원하게 생겨 매혹적이었다.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띠어 온화하면서도 지성미가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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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형숙과 박 윤하는 사촌척이었다. 박 윤하의 당고모가 김 형숙의 어머니다. 두 사람의 고향은 전주. 박 윤하와 김 형숙의 집안 모두 천석꾼이라고 불
렸던 부자들이었다.
원래 전북 부안 출신인 김 형숙의 아버지는 서울 전문학교를 졸업한 인텔리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로 유명한 집안 형의 영향을 받아 조선 공산당원,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가 전주형무소에 수감 중 6.25가 터지자마자 처형됐다. 김 형숙이 여섯 살 때였다. 김 형숙은 외동딸이었다.
전주 부근 네 군데 처형현장을 돌아다닌 끝에 가까스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낸 어머니가 어린 딸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던 모습이 지금도 김 형숙의 뇌리에 살아있다. 김 형숙은 절망의 절벽에 서 있는 어머니를 붙잡아 준 유일한 끈이었다. 어머니는 “네가 없었으면 나도 네 아버지 뒤를 따라갔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머니는 얼마 되지 않는 남편의 유산을 정리하고 친정의 도움을 받아 완산동에 방 세 개짜리 집 한 채를 장만했다. 하숙생을 두어 생계를 꾸려나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고 방 하나가 비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방에 여수에서 올라와 전주에서 행상을 하는 건어물 보따리장수 아줌마들을 잠재워 주곤 했다.
이를 고맙게 여긴 아줌마들이 팔다 남은 멸치와 미역을 사례로 조금씩 내놓았다. 맛이 시장에서 파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유통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산지에서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이에 착안한 어머니가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집 가까이 있는 남문시장의 한 쪽 구석 네 평 가게에서 건어물장사를 시작했다. 부지런히 전주와 여수를 오가면서 장사에 열중했다. 그것은 생계를 위한 것이었지만 남편을 잃은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머니 가게는 돈을 잘 벌었다. 그 덕분에 김 형숙은 무난하게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보면서 자란 때문인지 김 형숙은 겉으로 부드러워 보였으나 마음이 단단하고 굳센 여자였다.
50대 중반인 어머니는 지금은 도소매를 겸할 정도로 꾸준히 가게를 키워 이웃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됐다. 그런데도 가끔 “네 손을 잡고 네 아버지 면회를 갔을 때가 행복했다.”고 말해 딸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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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졸업 후 김 형숙은 큰 외삼촌의 친구가 이사장으로 있는 군산 어느 사립 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사장과 교장 모두 음악 팬이어서 학생들의 음악 과외연습과 대외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김 형숙의 제자 가운데 두 학생은 피아노 연주 실력이 뛰어났다. 김 형숙은 이 두 학생을 외가 오빠 박 윤하가 다니고 있는 신문사의 음악콩쿠르에 내보내기 위해 함께 상경, 문화부에 잠시 들렸다.
윤 항서와 김 형숙이 처음 만나 서로 얼굴을 보고 통성명을 한 곳이 바로 이 문화부였다. 윤 항서는 헌칠한 미남이었으나 말수가 적고 숫기가 없어 부끄러움을 타는 편이었다. 반면 김 형숙은 쾌활했다.
윤 항서는 첫눈에 김 형숙의 미모와 성품이 마음에 들었다. 김 형숙을 만난 이후 날이 가면 갈수록 윤 항서는 더욱 더 김 형숙이 그리워졌다. 밝고 꾸밈이 없는 김 형숙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면 자기의 마음도 밝아지고 가슴에 활기가 넘치는 것이 느껴졌다. 윤 항서는 자기가 김 형숙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가 지나서 윤 항서는 회사에 1일 휴가원을 내고 군산으로 김 형숙을 찾아갔다. 내향적인 윤 항서로서는 용기를 낸 결행이었다.
아무런 사전연락 없이 윤 항서가 불쑥 학교를 찾아와 김 형숙은 적잖이 놀랬으나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니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시고. 군산에 무슨 볼일이 있으셨어요?”
‘김 형숙 씨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이 말 대신에 윤 항서가 겨우 한 말은
“예에 김제 금산사에 취재할 게 있어 왔다가 서울 올라가는 길에......군산은 제가 군산비행장 공군부대에서 장교로 복무한 정든 고장입니다.” 이렇게 엉뚱하게 답변했다.
“그러세요.” 김 형숙은 그런가보다 했다.
마침 김 형숙이 오후수업이 없어 둘이서는 학교 근처 다방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시작한지 조금 지나 윤 항서가 인연因緣을 화제로 꺼냈다. 김 형숙과 자기가 만나게 된 것도, 자기가 군산을 찾아온 것도 깊은 인연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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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우주 만상이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만나 이
야기를 나누는 것도 교묘하고 절묘한 인연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불교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세상엔 좋은 인연도 많지만 악연도 있다고 그러시데요.”
“맞습니다. 악연이 많지요. 사람들이 탐욕을 부리고 욕정과 화를 참지 못해 악연을 만듭니다. 그래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중생들이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요. 그것을 마음공부라고 합니다. 봄과 꽃, 꽃과 나비는 좋은 인연이고 농부와 폭풍우, 백성과 폭군은 악연이지요. 우주의 삼라만상
과 우리 인간사가 좋은 인연과 악연으로 얽혀져있다고 합니다.”
“불교공부를 많이 하셨나 봐요. 표현이 시적이고 깊은 뜻이 있어요. 스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것 같아요”
윤 항서는 그 칭찬에 흡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말머리를 바꿔 김 형숙이 음악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 윤 항서도 음악에 나름대로 조예가 있기 때문에 김 형숙의 말상대가 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누었지만 두 사람 모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호흡이 맞고 즐거웠다.
윤 항서가 저녁식사 대접을 한 후 장항선 막차 열차를 타고 상경하기 위해 군산~장항 도강선을 탈 때는 김 형숙이 도선장까지 바래다주는 친근감을 보였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 내내 윤 항서는 뜻을 이룬 듯 흐뭇했다. 차창 밖으로 떠오른 달과 구름 사이로 김 형숙의 웃는 얼굴이 계속 비쳐졌다.
윤 항서는 김 형숙도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상당 시일이 지났는데도 답장이 오질 않았다. 두 번째 편지를 보냈지만 역시 회신이 없었다.
사실 그 무렵 김 형숙에게는 혼담이 들어와 있었다. 학교 이사장이 자기 누님의 아들을 소개한 것이다. 군산에서 유명 양조장을 경영하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김 형숙의 어머니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좋다’고 반절은 승낙한 상태였다.
그러나 김 형숙은 이 혼처가 싫어졌다. 남자를 세 차례 만나보았지만 딱 질색이었다. 대화를 하면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놀러 다닌 이야기, 자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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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돈이 많다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천박해 보였다.
그때 윤 항서가 군산을 찾아왔고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김 형숙은 인물 됨됨이나 학벌이나 아는 것이, 이 남자와 윤 항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단지 이사장의 생질이기 때문에 그쪽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원만하게 혼담을 매듭짓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윤 항서에게 답장을 보내는 것은 혼담을 정리한 후에 할 심산이었다.
윤 항서는 계속 열애熱愛의 연서戀書를 보냈다. 편지에 일련번호를 매겨 아홉 번째까지 보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형숙 씨가 내 가슴에 심어놓은 사랑의 꽃씨가 나도 모르게 싹이 나서 싱싱하게 자라나고 있습니다. 나는 그 꽃의 이름을 형숙과 항서의 ‘인연의 꽃’이라고 부르렵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어떤 비바람이 휘몰아쳐도, 꺾이지 않고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꽃으로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형숙 씨의 모습이 내 마음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형숙 씨의 미소가 내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형숙 씨의 눈빛이 내 마음에 햇빛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형숙 씨의 말씀들이 내 마음에 신록의 잎사귀들처럼 생동하고 있습니다.」
「형숙 씨! 나는 형숙 씨와 일생을 동행하겠습니다. 형숙 씨와 손을 잡고 동행한다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자신이 있습니다. 형숙 씨와 함께 노를 저어 간다면 파도가 험난한 바다일지라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항해할 수 있습니다.」
「형숙 씨. 나는 유심론唯心論을 신봉합니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데 경제적으로 물질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물론으로 인류의 역사나 인간관계를 보는 것은 지나치게 물질을 우위에 두는 견해입니다. 나는 물질 위에 인간의 마음과 정신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물질이 마음을 지배하는 사회는 타락하고 부패하 고 서로 싸우는 사회입니다. 인간의 따뜻한 마음들이 물질을 다스릴 때 그 사회가 건강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드디어 윤 항서는 고대하던 김 형숙의 답장을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뜯어본 편지에는 회답이 늦어 미안하다며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가능하시면 오는 26일(일요일) 오후 3시 전주 시 전북도청사 정문 옆 ‘싸리문’ 다방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어머니와 제가 나가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윤 항서는 가슴이 뛰도록 기뻤다. 어머니가 윤 항서를 보기로 한 데는 박 윤하의 권고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자초지종 딸의 이야기를 듣고 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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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박 윤하에게 윤 항서에 관해 자세하게 알아보았다.
윤 항서는 충남 출신으로 명문가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정부고위직을 지낸 분이고 형님 두 분은 의사와 법대 교수라고 했다. 윤 항서는 아들만 셋 있는 집의 막내아들로 어느 무엇보다도 심성이 착하고 신실하다는 것이다. 그만한 신랑감이 없으니 둘이 서로 뜻이 맞으면 결혼을 서두르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어머니는 사윗감의 직업이 기자라는 게 탐탁하지 않았으나 친정 조카들 가운데 어려서부터 가장 재주 있는 윤하 조카가 다니는 신문사의 후배라는 데 마음을 놓았다.
‘싸리문’ 상면이 있은 다음 김 형숙이 윤 항서의 부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윤 항서의 어머니가 안사돈 될 부인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게 못마땅하다고 말했으나 항서의 아버지가 쓸데없는 소리 그만두시라고 일축해버렸다. 아버지는 “과묵하고 속이 깊은 항서와 명랑하고 시원시원한 형숙이가 잘 어울릴 것”이라고 만족해했다.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윤 항서는 천하를 얻은 듯 했다. 결혼식을 올린 후 사직동 셋집에서 밀월蜜月의 신혼살림을 차렸다. 신문사 월급으로 넉넉하지 않게 살아갔지만 스위트 홈을 꾸려 나갔다.
아들도 얻었고 윤 항서는 미문美文기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김 형숙은 남편의 글재주가 자랑스러웠다. 남편의 기사를 읽고 스크랩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여가시간을 활용해 인근 교회에 나가 초중고 유아반의 음악지도를 했다. 남편은 종교 미술 문화재 담당 기자답게 여러 종교에 관해 박식했고 종교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었다. 부부간에도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치 않았다. 다만 유일신唯一神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김 형숙은 아들을 데리고 교회에 갈 때 “그래도 네 손을 잡고 형무소에 있는 네 아버지 면회 갔을 때가 행복했다.”고 말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마음이 짠해지면서 그렇게 말하던 어머니의 심정을 이제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단란하고 평온했던 김 형숙의 가정에도,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 논난을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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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고 기자들이 이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하면서 풍파가 밀려왔다. 이 운동이 기세를 올리자 정부는 기업광고 해약을 막후 조종했고 신문사는 경영난과 제작거부를 이유로 기자들을 집단해고하기에 이른 것이다.
정권은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우회적으로 기자들을 한꺼번에 몰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고도의 술책이었다. 이 같은 공작은 정부에 협력하고 이 신문사를 음해하려던 다른 언론사 사장의 계략으로 추진됐다는 설이 나돌았다.
천직으로 알고 신문 방송 제작에 정열을 바쳤던 기자와 PD 아나운서들은 이렇게 유일한 무기였던 펜과 마이크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제 그들은 거리에서 언론자유를 외롭게 외쳐야 했다.
사외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투위)를 결성, 계속 싸워 나가기로 했다. 박 윤하가 투위를 주도하고 윤 항서도 물론 투위에 참여했다.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시민들을 상대로 반 유신 유인물을 열심히 나누어 주기도 했으나 어쩐지 광야의 목소리처럼 메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중앙정보부와 경찰 등 기관들은 걸핏하면 이들을 연행하고 구류하거나 구속했다. 조직 와해 작전을 편 것이다.
이런 수난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옷가게를 차리는 사람, 쌀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생계를 위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둑잡지에서 편집 일을 하다가 기관이 잡지사에 압력을 넣어 쫓겨난 사람도 있었다.
윤 항서와 김 형숙은 감시를 받으면서 동네에 음악학원을 개설했다. 학원은 어렵사리 돼 나갔다.
기자들이 대량 해직된 지 어느덧 1년여가 지났다. 투위는 회원들끼리 점조직으로 연락해 광릉수목원에서 봄철 야유회를 갖기로 했다. 흩어진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의를 나누고 결속을 다지자는 취지였다.
윤 항서와 김 형숙도 만사를 제치고 나갔다. 대의大義를 위해 굽히지 않고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나온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당당해 보였다. 남편들 대신 어려운 살림을 떠맡고 있는 부인들끼리도 반가워하고 서로를 위로했다.
5월 하순의 광릉 숲은 신록의 궁전이었다. 숲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정기精氣가 가슴의 압박감을 시원하게 씻어내 주었다. 울창한 나무 잎들 위에 내리비쳐 반짝이는 맑고 찬란한 햇살은 삶의 환희를 느끼게 하고 희망이 샘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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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만들었다.
행사는 투위 총무 일을 맡고 있는 하 종선(河 鍾璿)의 사회로 진행됐다. 1년
반 전 10월 24일 편집국에서 전체 기자가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을 때 우렁찬 목소리로 성명서를 낭독했던 사람이다. 투위 결성 이후에도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열혈남아熱血男兒였다. 윤 항서의 4년 후배로 원만하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아 총무 일을 스스로 맡아 하고 있다. 박 윤하, 윤 항서, 하 종선은 특히 가까이 지내는 선후배였다.
진행의 첫 번째 순서로 위원장 박 윤하가 인사말씀을 했다. ‘오 바람이여, 예언의 나팔이여!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 수 있겠는가?’ 널리 애송되는 시구를 인용해 고난을 이겨나가자는 요지의 격려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구호를 함께 외쳤다. 박 윤하가 먼저 외치고 일동이 따라 외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는”
“역사의”
“역사의”
“승자다!”
“승자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고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음주 없이 도시락 점심을 먹은 다음 2부 여흥시간을 가졌다. 몇 사람이 먼저 노래를 불렀고 사회자가 “우리 소프라노 김 형숙 여사의 노래를 듣겠습니다.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김 형숙은 먼저 우리 가곡 ‘선구자’를 열정적으로, 다음엔 김 호 작사, 김 성태 작곡 ‘한 송이 흰 백합화’를 청아淸雅한 목소리로 불렀다.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 / 고요히 머리 숙여 홀로 피었네 / 인적이 끊어진 깊은 산속에 / 고요히 머리 숙여 홀로 피었네 / 어여뻐라 순결한 흰 백합화야 / 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 / 부끄러 조용히 고개 숙였네 / 가시에 찔릴까 두려함인가 / 고개를 숙인 양 귀엽구나 / 어여뻐라 순결한 흰 백합화야 /
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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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이어지는 동안 어느덧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가시밭길을 외롭게 걷고 있는 자기들의 심경과,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의로움이 영원할 것을 믿는 신념을 잔잔하게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정숙靜肅해지고 있음을 느낀 김 형숙은 이번에는 ‘희망의 나라로’를 힘차게 부른 다음 노래를 끝냈다.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옆 자리에 앉아있는 하 종선의 부인이 “언니의 노래를 듣고 눈물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뿌듯했다”면서 선곡이 좋았다고 칭찬했다.
모임은 시종 아무런 탈 없이 순조롭게 끝났다. 모처럼 유쾌하게 하루를 보내 모두들 만족해했다. 그토록 물샐 틈 없이 투위의 움직임을 감시하던 기관의 정보망도 이날 행사 정보는 입수하지 못 했다.
투위가 점조직으로 연락한데다가 수목원에 다른 명의로 모임 신청을 냈기 때문이었다. 투위라는 이름을 쓰면 정보가 바로 올라가고 모임 허가가 나지 않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하 총무가 기지를 발휘해 「양평 가평 포천 3개 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친선대회」라는 이름으로 신청서를 낸 것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과 국회의원 3분의 1을 선출하는 헌법기관이었다. 그 대의원들은 지방에서 위세를 부렸다.
유신헌법을 누구보다도 극렬하게 비판해온 하 종선이 한편으론 비꼬는 심사로, 한편으론 허허실실로 이들의 이름을 빌어 신청서를 내 본 것이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하종선의 예상대로 무난하게 허가가 나왔고 정보기관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체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뒤늦게 허가 찔린 것을 안 경찰서는 하 종선을 연행, 5일간이나 경위를 조사했고 결국 하 종선은 구속됐다. 4개 월 후 추석을 앞두고 풀려났으나 건강이 이전 같지 않아 보였다. 석방된 다음 날 박 윤하 등 몇몇이서 옥고를 위로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 자리에서 하 종선은
“소가 웃을 헌법을 만들어 놓고 이에 반발하는, 아니 반발이 아니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말이야, 온갖 수법으로 탄압하는 정권이 그 정도 일로 사람을 몇 달씩 구속시키다니. 족제비도 낯짝이 있고, 빈대도 콧등이 있는 것 아니냐”며 일갈했다. 이 경상도 사나이의 호방한 기백과 유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통쾌하게 웃어대며 소주잔을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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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는 바람 잘 날 없이 파란중첩이었다. 긴급조치를 발동, 대학의 문과 강의실을 강제로 닫았지만 캠퍼스의 반 유신 데모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울분을 참지 못한 대학생이 할복 자결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제적과 정학 처분을 받은 학생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대통령은 또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해야했다. 극약처방으로 연명하는 절대 권력이었다.
투위는 9호의 철퇴를 맞았다. 박 윤하와 하 종선 등 6명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여 9호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사실은 유언비어를 날조한 것이 아니라 유신헌법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돌린 것이다.
투위에 부음이 전해졌다. 간암 투병생활을 해왔던 손 천주(孫 千柱)선배가 이승을 하직했다는 소식이었다. 운동의 앞장에 서지는 않았지만 후배들의 활동을 뒤에서 묵묵히 지원했던 선배였다.
손 선배는 실향민이었다. 원산이 고향이었다. 6.25 이전 공산치하에서 논밭과 신앙과 자유를 모두 빼앗기고 숨죽이며 살다가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손 선배는 자유민주주의와 언론자유에 대한 지지가 열렬했다. 언론자유 없이는 자유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고 자유민주주의 없이는 독재가 있을 뿐이라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 가곡 ‘바위고개’의 작사 작곡이 모두 이 흥렬로 되어있지만 사실 작사는 원산 출신 이 서향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흥렬, 이 서향 두 사람은 원산이 고향으로 친구 사이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 서향이 월북했기 때문에 이 서향의 이름이 지워진 것으로 안다고 이야기했다.
박 윤하와 하 종선은 옥중에서 부음을 듣고 가슴이 메었지만 명복을 빌 뿐이었다. 박 윤하는 손 선배가 병상에서도 눈물을 지으면서 가보고 싶다고 말하던 명사십리를 영혼이나마 실컷 달려보도록 기원했다.
얼마 후 박 윤하와 하 종선 등 6명은 형기를 다 마치지 않고 풀려났다. 병 주고 약주고, 약 주고 병 주는 통치방식에 따라 구속과 석방이 그야말로 엿장
수 마음대로였다.
며칠이 지나 투위는 이들의 출소기념 전체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하 종선은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온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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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로 농사를 짓고 자식을 공부시킨 어머니가 자식이 하도 미우셨던지 ‘너는 왜 가막소를 실속 없이 처갓집 드나들 듯이 들랑거리느냐’며 나무래 십디다. 나는 가만히 있었지. 그랬더니 말이야, 어머니가 갑갑하셨던지 ‘이제 나이도 들고 했으니 속 좀 차리라’고 타이르시더라고요.”
하 종선은 어머니 생각이 났던지 잠시 쉰 다음 말을 계속했다.
“그래도 떠나올 때는 동네 어귀까지 나오셔서 ‘부디 몸조심하라’고 신신당부 하시고 한약 봉투를 손에 쥐어주십디다. 어머니 손을 꼭 쥐고 ‘어머니 염려마세요’라고 말씀드렸지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하 종선이 웃음을 띠고 말을 이었다.
“여러분! 저는 이번 출소로 3성 장군이 됐습니다. 지난 번 구속, 지지난 번 구류, 이렇게 3성 장군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힘냅시다!”
모두들 한바탕 웃고 고난 속에서도 패기와 여유를 잃지 않고 있는 대인大人다운 그에게 또 한 번 박수를 보냈다.
인명은 재천在天이라고 했던가. 이런 하 종선이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싸늘한 육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의사는 심장마비라고 간단하게 진단했지만 사람은 누구나가 심장기능이 멈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것이 아닌가.
투위 사람들은 정신적 육체적 과로, 과중한 압박감, 고문 후유증, 옥고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그의 심장을 갑자기 멈추게 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투위는 충격과 애통 속에 빠져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위의 투지를 북돋아 주고 총무를 맡아 운동을 이끌어 오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가 이렇게 돌연 세상을 떠나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장례는 그의 공적을 높이 사 투위장으로 모시기로 했다. 장례식장은 그가 다니던 가톨릭성당으로 정했다. 많은 야당 정치인, 재야인사, 성직자, 언론인, 신자들, 그리고 하 종선의 친구들이 많이 참석했다.
주임신부의 집전으로 장례미사가 진행됐고 투위 측의 요청으로 고별 시간에 세 가지를 추가했다. 박 윤하 위원장의 애도사, 김 형숙의 추모의 노래, 미망인의 인사말씀이었다.
박 윤하의 애도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하 형! 불러도 왜 대답이 없소. 하 형! 불러도 왜 웃질 않고 있소. 왜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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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우리 곁을 바람처럼 홀연히 떠나 우리를 비통하게 만드는 것이요.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를 그렇게 힘차게 불렀던 하 형! 당신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소. 그런데 도대체 어디로 가신 것이요. 하 형이 노래했던 대로 하 형은 선구자였지.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선구자였지.“
엄숙한 분위기가 더욱 숙연해졌다.
“하 형! 선구자여! 그 기상, 그 익살, 우리는 잊지 못 할 것입니다. 소가 웃을 유신헌법이라고, 빈대도 콧등이 있는 것이라고, 3성 장군이 됐노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던 하 형의 해학을 우리는 오래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투위 사람들이 훌쩍였다.
“하 형! 선구자여! 누구든지 만나면 이별이라고 했지. 지난 번 고향을 떠나 올 때 꼭 잡았다던 어머니 손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박 윤하는 흐느꼈다. 눈물을 훔치면서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리와도 마지막 손을 잡아야 할 시간이 됐나봐. 인간사가 참으로 무상하네. 잘 가오. 또 만납시다! 우리가 자유언론운동을 하지 않아도 될 광명천지에서.”
애도사가 끝나고 김 형숙이 추모의 노래를 불렀다.
미망인의 의사에 따라 광릉야유회에서 김 형숙이 불렀던 ‘한 송이 흰 백합화’를 불렀다.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다음으로 미망인 민 혜경(閔 惠慶)의 인사말씀이 있었다. 슬픔에 복받쳐 있었으나 또렷한 목소리였다. 조문객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한 후, 세 살 난 딸 ‘나리의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라며 이렇게 읽었다.
“나리 아빠! 이제 나리 아빠가 귀가할 시간, 누가 우리 집의 초인종을 누르
지? 초인종을 누를 사람이 없네. 내가 만든 김치찌개 맛있다며 함께 밥을 먹
어 줄 친구가 없네. 이제 누가 우리 나리를 무동 태우고 어깨춤을 추면서 놀
아 줄까. 이제 나리에게는 그렇게 놀아줄 아빠가 없네. 나리가 아빠 어디 갔느
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가르쳐 주세요. 누가 우리들의 소박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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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빼앗아간 거지? 야속하네.“
여기저기서 오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아빠와 내가 연애할 때, 그림을 공부한 내가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크고 멋진 화실을 만들어 주겠다고 언약했었지. 가난한 기자와 살면서
그것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살아왔는데 이제
소망이 무너져버렸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텅 빈 방에서 머릿속에 보
고 싶은 나리 아빠 모습을 그리고 있어야겠네.“
미망인이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김 형숙이 얼른 나가
부추겼다. 다시 중심을 잡은 미망인은 가까스로 말을 마쳤다.
“나리 아빠! 나 방안에 틀어박혀 있지 않을 거야. 거리로 뛰쳐나올 거야. 자
유언론을 외치는 대열에 끼여 나리 아빠의 빈자리를 내가 채울 거야. 그리고
말이야, 나리 아빠는 말이야 라는 말을 구성지게 썼지. 우리 나리를 구김살 없
이 키우고 고향 어머님께 효도할게요. 믿어줘요. 잘 가요.“
이후에도 투위 사람들의 연행, 구류, 구속, 장례식은 잇따랐다.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 수 있겠는가?‘ 희망을 노래한 시구와는 달리 겨울이 오고 겨울
이 지나가도 봄이 오지 않고 또 겨울이 오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1978년 7월 6일, 박 정희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재적대의원 2,581명 중 2,578명이 출석해 2,577명이 박
정희 단일후보를 지지했다.
99.9%의 지지로 당선된 것이다. 한 표도 반대표가 아니라 무효표였다. 100
% 지지나 다름없었다. 선거는 종신대통령을 추대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이런 선거를 보고 윤 항서는
절망적이었다. 절대 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상당 기간 어려운 일로 전망했다.
장기적인 대응을 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박 윤하는 이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끈기 있게 싸워 이겨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그러나 윤 항서는 자기는 박 윤하와도, 또 정면 돌파 형이었던 하 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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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 개성과 견해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윤 항서는 고심 끝에 아무런 기약 없이 무기력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현실도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혼탁
한 속세를 떠나 초연超然하게 산속에 파묻혔던 옛날 선비들처럼 산사山寺로 들
어가기로 결심했다.
갈 곳은 고향에 있는 사찰의 암자로 정했다. 윤 항서는 대학재학중 이 암자
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했기 때문에 잘 아는 곳이었다. 윤 항서는 원래 아버지
의 뜻에 따라 법대에 갔고 사시공부를 했으나 법률공부가 싫어져 중간에 작파
하고 신문기자가 되었던 것이다.
윤 항서는 여러 종교의 경전들을 다시 읽고 특히 이참에 산스크리트를 집중
적으로 공부할 계획이었다. 신문사 해직 직후 한동안 어느 대학교수에게 산스
크리트 초보를 배운 적이 있었다. 산스크리트에서 한문으로, 한문에서 다시 우
리말로 이중 번역된 불경이 아니라 본래 산스크리트로 쓰여 진 불경 그대로를
읽고 싶었다.
김 형숙은 남편의 이런 결정이 마땅치 않았지만 마지못해 응낙했다. 김 형숙
은 주중에는 음악학원 레슨을 하고 일요일엔 교회에 나가고 토요일에 새벽 같
이 일어나 사찰로 가야했다. 남편이 갈아입을 옷가지며, 먹고 싶어 하는 음식,
책, 일용품 등을 갖다 주었다.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남편 얼굴을 보고 사찰 앞마을 식당
에서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윤하 오빠 옥바라지를 한 언니 이야기가, 오빠 면회를 갈 때마다 부부간의
정이 새로워지고 깊어지더라고 하더라고요. 나도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당
신 얼굴을 보니 정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아요.“
윤 항서도 김 형숙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료한 일상에 활력이 다시
채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는 아내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고생이 많을 텐데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로 고맙소.”
식사를 마치면 둘이서는 사찰 경내로 들어가 한 바퀴 산책을 했다. 스님의
독경과 목탁 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여기 저기 거닐면 어느새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졌다. 김 형숙은 특히 가을날 오후 맑은 고요 속에 잠겨있는 사찰을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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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했다.
두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암자까지 올라가 윤 항서의 방에서 두 사람
만의 시간을 가진 후 함께 내려와 사찰 앞마을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지곤 했다.
암자는 사찰 후문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다. 해발 6백m가 넘는 주봉主峰
으로 올라가는 계곡 옆길을 따라 1km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주봉은 거기서
곧장 올라간다.
암자는 갈림길에서 서북쪽으로 꺾어져 1km 떨어진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
다. 암자 앞마당에 서면 사찰과 마을이 멀리 내려다보인다.
갈림길에서 암자까지는 수목이 울창하고 비교적 가파른 길이다. 주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더러 있으나 암자로 가는 길은 인적기가
거의 없었다.
암자에는 법명이 석구인 스님이 계셨고 스님 밑에서 잡일을 맡아하는 만공
거사라는 사람과, 공양주인 안 보살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석구 스님은 유신체
제에 상당히 비판적인 학승學僧으로 윤 항서 내외를 따뜻하게 보살펴주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만공 거사는 체격이 건장하고 생김새가 무뚝뚝했다.
자기 말로는 대학을 다녔다고 하는데 우직스러워 보였다. 묻는 말에나 겨우 대
답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윤 항서가 암자에 온 지도 3개월이 넘었다. 김 형숙은 이제 토요일이면 서
울과 이곳을 오가고, 암자를 오르내리고 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절기는 벌써 입동이 지나고 소설이 다가왔다. 울창했던 낙엽수 잎들이 거의
다 떨어지고 몇몇 개 마른 단풍잎들만이 가지에 붙어 펄럭이고 있었다. 산중은
쓸쓸했다.
그날 설의雪意를 품은 듯한 짙은 회색 구름이 낮게 산을 덮고 있었다. 으스
스하고 음산한 날씨였다. 이런 날 산중은 일찍 어두워진다.
오후 2시가 지나 김 형숙이 자기 혼자 산을 내려가겠다며 채비를 서둘렀다.
윤 항서가 같이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애써 말렸다.
“당신 감기 기운 있는데 고생할 것 없어요. 이제는 눈을 감고도 내려갈 수
있는 길인데 뭘. 나 혼자 빨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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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는 그전에도 혼자 내려간 적이 있었다. 윤 항서는 1백 m쯤 따라나섰다
가 김 형숙이 어서 돌아가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발길을 멈추었다.
김 형숙이 다시 1백50 m를 더 가 길이 꺾어지는 곳에 이르렀을 때 윤 항서
가 큰 소리로 외쳤다.
“조심해서 잘 가요!”
빠른 걸음으로 걷던 김 형숙이 뒤돌아서서 웃는 모습으로 손을 크게 흔들어
댔다.
그 이튿날 아침 8시가 돼 사찰 스님 한 분이 암자로 올라왔다. 윤 항서에게
전갈이 있어 올라온 것이다. 암자에는 전화가 없고 사찰에만 전화가 있어 급한
용건이 있는 경우 사찰 스님에게 전갈을 부탁해놓았던 것이다. 서울 아버지에
게 전화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윤 항서가 암자에 온 후 이런 전갈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웬만한 일로는
전화하실 분이 아닌데 윤 항서는 궁금했다.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의 첫 목소리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차분했다.
“야, 어멈 지금도 거기에 있냐?”
윤 항서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불길한 예감으로 쭈뼛해졌다.
“아니요. 어제 일찍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래, 이상한 일이다. 서울 집에는 아직 오질 않았다. 오늘 교회에도 나가
야할 텐데......“
아버지의 목소리도 처음과는 달리 긴장하는 듯 했다.
김 형숙이 암자에 갈 때는 아들을 가까이 사는 할아버지 댁에 맡겨놓고, 서
울로 돌아와선 데리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밤이 돼도, 일요일 아침이 돼도 며
느리가 오지 않아 이상하다싶어 사찰로 전화를 한 것이다.
혹시 교통사고가 났나 싶어 알아 봤지만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까지
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윤 항서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는 한편 법대 교수인
형이 잘 아는 경찰요직에 특별수사를 부탁하도록 했다. 경찰이 4일 동안 수사
망을 집중적으로 폈다.
그 결과 김 형숙이 암자에서 불과 7백m 떨어진 으슥한 숲 큰 바위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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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은 뜻밖에도 만공 거사였다. 거사는 처음엔 범행
을 부인했으나 경찰이 물증을 들이대자 범행을 자백했다.
“범행과정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수사관이 다그쳤다.
“그 여자는 암자에서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다가 만났습니다. 평소에 예쁘다
고 생각해서 한번 껴안아만 보려했는데 반항이 하도 거세 그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너는 그 전에도......” 거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거사는 전과자였다. 강간 치상죄로 7년 징역을 살고 4년 전에 출소한 사람
이었다. 석구 스님은 거사의 전력을 전혀 모르고 주지스님이 부탁해 데리고 있
었다고 했다.
김 형숙의 주검은 낙엽과 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착하고 밝았던 가인佳人이
악마의 손에 의해 이렇게 무참히도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윤 항서에게 마
지막으로 손을 흔들어댄 지 5, 6분 후의 일이었다. 사람이 어찌 몇 시간 후의
일을 알 수 있는가, 아니 몇 분 후의 일을 알 수 있는가.
윤 항서는 악몽을 꾸는 듯 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잠자고 있는
김 형숙이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눈앞에 누어있다. 윤 항서는 싸늘한 김 형숙
의 손과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통곡했다.
“거사 놈이 당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내가 죽였다.”고 울부짖었다.
갑작스런 비보悲報는 투위 사람들을 경악과 슬픔 속에 빠지게 했다. 하 종선
과 같은 동료를 잃었을 때와는 또 다른 비애와 허무를 느끼게 했다. 김 형숙은
투위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투위 사람들과 그 부인들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만
들기 위해 앞장서서 애써왔다.
윤 항서는 장모가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장모에게 알릴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남편이 학살당한 후 어머니 삶을 지탱해준 유일한 피붙이였던 김 형숙
이었다.
박 윤하와 윤 항서의 둘째 형이 전주로 내려가 모시고 올라왔다. 어머니는
딸의 잠자는 듯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참 방성대곡한 후 사부인의 부추김을
받고 눈물을 거두었다.
영결식은 병원장례식장에서 김 형숙이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의 집전으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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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됐다. 친인척들, 투위 사람들과 그 부인들, 윤 항서와 김 형숙의 친구들,
교인들이 다수 참석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 김 형숙의 아들이 상복을 입고 상주 노릇을 하고 있어 보
는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손자 손을 잡고 있는 윤 항서의 아버지는 노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았다. 아들만 셋을 두고 딸이 없는 윤 항서의 아버지는 막내며느리 김 형숙
을 딸처럼 여기고 유난히 아끼고 사랑해 왔다.
하 종선의 미망인 민 혜경이 조사를 읽었다. 하 종선이 별세한 후 김 형숙
은 민 혜경을 자주 만나 위로하고 각별하게 돌보아주었다. 친자매처럼 가까이
지냈다.
“언니! 제가 언니라고 부르는 언니가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언니라고 부를
때 정감이 언니만큼 깊은 언니는 없습니다. 그만큼 언니는 인정이 많았습니다.
마음씨가 착하고 너그러우면서도 시원하게 탁 트인 여인이었습니다. 전주에 내
려가면 어머니 가게에서 멸치를 몇 포대씩 가지고 와서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
어주곤 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오천 명에게 나누어 먹인 예
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한 언니였습니다. 언니는 혼자 먹으면 아무리 많이 먹어
도 배가 고프고 나누어 먹으면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이런 언니를 왜 하나님께서는 빨리 데려가셨는지, 그것도 악한을 만나게 해서
말입니다. 언니를 잃은 슬픔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커졌다.
민 혜경은 끝부분에 이르러
“언니! 언니는 이제 언니가 즐겨 부른 노래 <한 송이 흰 백합화>가 됐습니
다. 언니는 투위와 하 종선을 <한 송이 흰 백합화>에 비유해 노래 불렀지만
이제는 투위가 언니를 <한 송이 흰 백합화>에 비유해 노래 불러야 합니다. 투
위도 언니도 하 종선도 모두 <한 송이 흰 백합화>입니다. 흰 백합화는 자유언
론실천운동의 상징입니다.“
그때 투위 사람들과 그 부인들, 그리고 교인들이 노래를 합창했다.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
「가시밭의 한 송이 흰 백합화......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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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를 마친 다음에도 윤 항서는 여전히 악몽을 꾸는 듯 했다. 생시生時와
몽환夢幻이 구별되지 않고 환상에 시달렸다. 잠을 못 자는 밤이 며칠 씩 계속
됐다. 수면제를 복용해도 소용없었다. 눈을 감으면 만공 거사 도깨비가 김 형
숙을 뒤쫓아 가 괴롭히는 환영이 어른거렸다.
김 형숙이 그렇게 된 것은 자기 때문이었다는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내가 전생에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이런 끔직한 업보를 받는가!“ 이렇게
넋두리하면서 탄식하는 일이 많았다.
윤 항서는 하루하루를 폭음으로 보냈다. 아버지와 형들이 타이르고 박 윤하
와 친구들이 말려도 듣질 않았다. 걸핏하면 다른 사람들과 티격태격 시비를 걸
고 갑자기 엉엉 울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윤 항서가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것 아니냐고 걱정했다.
겨울과 함께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갔다. 윤 항서가 어느 날부터 홀연히 모
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투위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어떤 사람은 윤 항서의 성
격으로 보아 어디 멀리 가서 순애殉愛를 했는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때 윤 항서는 아버지에게만 말씀드리고 혼자서 남해안 지방을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거기 조금씩 올라오고 있는 봄기운을 마시면서 새벽이
고 낮이고 걸었다. 번민하면서 걷고 걸으면서 번민했다.
윤 항서는 아내와 만공 거사의 악연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아내와 자기의 순
결무구無垢한 아름다운 인연만이 영생永生하도록 기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잘못은 자기에게 있었다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
했다. 아내가 용서하겠다는 계시를 하늘에서 내려주는 듯 했다.
다음은 아내와 거사의 악연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해답이 쉽게 풀리질 않았
다. 여러 날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다. 악연과 보복에 집착하는 한 괴로움과 분
노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악연을 빨리 끊고 싶었다. 윤 항서는 단안을 내렸다. 악연의 끈을 일도양단
一刀兩斷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바로 거사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폭음과 방황과 고뇌를 끝낸 윤 항서는 서울로 올라와 법원 요로에 거사를
관대하게 처벌해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바보 같은 짓
이라고 비웃었지만 윤 항서의 아버지와 형들, 박 윤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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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원서의 요지는, 첫째 가해자를 극형이나 무기징역으로 처벌한다고 해서 피
해자가 살아나지 않고, 둘째 하나의 악연으로 두 사람이 귀중한 생명을 잃을
것이 없고, 셋째 악연의 사슬은 어느 한 쪽에서 먼저 끊어버려야지 악연이 새
로운 악연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윤 항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리니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윤 항서 자신이 용서 받고 싶어
거사에 대한 관대한 처벌을 탄원한다고 밝혔다.
남쪽의 화신花信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윤 항서와 김 형숙이 다정하게 오르
내리던 암자로 가는 길 숲에도 봄이 다시 찾아왔다. 연분홍 진달래꽃들이 여기
저기 피어 봄바람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윤 항서는 짐을 꾸려 암자를 떠나 내려오면서 이렇게 독백獨白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든, 사업을 하는 사람이든, 학문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
이든, 성직자이든 권력욕 재물욕 색욕을 무리하게 탐내는 데서 악연이 생긴다.
탐욕이 악연을 만든다. 아름다운 인연을 누가 만드는가? 부처님인가? 아니다.
예수님인가? 아니다. 공자님인가? 아니다. 개개인이 부처님과 예수님과 공자님
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살아간다면 아름다운 인연의 지상낙원을 만들 것이
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극락에도 가고, 천당에도 갈 것이다.‘
사찰 부근에 이르러 윤 항서는 자기도 모르게 ‘한 송이 흰 백합화’를 부르고
있었다.
「......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 끝 >
후기: 자유언론 자유언론운동을 꿋꿋하게 밀고나갔던 동아투위 위원들의 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크고 작은 수난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이 단편을 썼다. 특히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를 비명에 잃고도 가해자
를 용서했던 한 후배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다. 2016년 7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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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의인 열명만 있으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주님말씀처럼
바로 당신들이 의인이셨습니다
장성원 학형께서 보내주신
단편소설 '한 송이 흰 백합화' 잘 받아 읽습니다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함 없이 몇 번을 읽었으나
문학에 문외한인 나로선 감히 어떤 독후감을 쓰겠습니까 마는
그러나 꼭 덧붙인다면 松 柏(송백)은 이전에도 송백이고
엄동설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松 柏일 뿐이다 라고 써봅니다
용서야말로 자비 중의 자비 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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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