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끝자락을 장식한 영등포역 공연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여러 가지 만만치 않은 장애요소가 있었지만......
저 개인적으로 이번 5월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달입니다. 그 중에서도 지난 24일은 제가 철도에 입문한 지 만 2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하루는 철도업무와는 큰 관련 없이 수원에도 다녀오고, 영등포역 공연에 쓸 현수막 도안 협의하랴 이은경 선생님 대신 강의 맡으랴 바쁘게 지내다가 레일아트 번개팅으로 피날레를 장식했습니다.
그 며칠 후인 28일, 퇴근길에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보름 전쯤 갑자기 간암말기 판정을 받고 행방을 감췄던 친구가 세상을 떴다는 부음이었습니다. 정말 착잡했습니다.
철도에 몸담은 20년 동안 저는 네 명의 친구를 먼저 보냈습니다. 모두 사고로 인한 순직 또는 전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흔에 접어든 시점에 또 다른 친구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순간적인 사고와는 양상이 다른 과로사로…….
친구의 빈소는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포일성당에 마련돼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가면서 전국에서 친구들이 계속 모여들고, 누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장지까지 갈 것인지 협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도권에 근무하고 있고 마침 장례일(5월 30일)이 쉬는 날이라 조금 무리를 하면 갈 수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겐 벌여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영등포역 공연……. 떠난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기에 전 친구들의 양해를 구하고 새벽녘에 출근을 위해 집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5월 30일, 드디어 공연을 하는 날이자, 비록 가보지는 못하지만 친구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날입니다. 퇴근길에 영등포역에 들러 공연준비상황을 둘러보고 귀가했습니다. 좀 쉬다가 카메라를 챙겨들고 조금은 비장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는데, 대전 쪽에 사고가 나서 호남·전라선이 불통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착잡했습니다. 그러면 역 분위기가 말씀이 아닐텐데 공연을 잘할 수 있을까?
영등포에 도착하니 다섯시, 공연을 위해 무대용 현수막을 걸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역 분위기는 생각보다 조용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가 여행사 관계자를 만나 레일아트 후원관계를 협의하고, 역장님께 간단히 인사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공연 준비작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영등포역 직원들의 도움으로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의자가 배치되고, 전원이 준비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공안직원도 배치되었습니다. 한 쪽에서는 오늘의 협찬사인 보성녹차 쪽에서 손님들께 녹차캔을 나눠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박우물 님도 앰프며 스피커를 갖고 일찌감치 도착하시고 우리의 '바욜린걸' 김지연 님도 곧 도착했는데, 문제가 하나 터졌습니다. 전원이 연결됐는데도 키보드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시작시간은 다가오고 날은 더운데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게다가 대방동 여성플라자 쪽 공연이 순조롭지 않은지 박우물 님께 계속 전화가 오고 있었습니다.
키보드가 안되면 바람소리님들이 공연을 할 수 없는데……. 결국 20여분이나 애를 태우던 키보드는 키보드 쪽 연결 잭을 뽑았다가 다시 꽂는 것으로 어이없게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여섯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순서를 맡은 바람소리 님들이 아직 오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박우물 님이 담뱃가게 아저씨로 공연을 시작하고, 전자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 님이 분위기를 띄워주기 위해 한 곡을 멋지게 골랐습니다. 무대 뒤에서는 바람소리 님들이 도착하여 준비를 서둘고 계셨습니다. 조금 걱정을 했는데 다행입니다.
바람소리 님들의 공연, 김준수 선생님, 장선희 선생님, 그리고 새롬이와 모처럼 동국이까지 왔는데 앰프가 좀 이상했습니다. 외부에서 빌려온 고급장비인데 도무지 마음먹은 대로 조작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일 당황한 사람은 공연자들보다도 박우물 님이 아니었나 합니다. 공연자들의 아름다운 선율을 관객들께 제대로 전달해드리지 못하는 아쉬움, 안타까움을 옆에서 지켜보며 저도 참 안타까웠습니다.
비록 앰프는 시원찮았지만 바람소리님들의 공연은 정말 멋있었습니다. 저도 TV에서 공연장면을 잠깐 보기는 했지만, 공연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가족으로 구성된 팀이라는 플러스 알파를 완전히 배제하더라도 두 분의 아름다운 화음은 듣고 보는 이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팬플륫, 께나, 오카리나, 새롬이의 키보드, 동국이의 장구, 그리고 그 다양한 남미의 민속악기들이 쏟아내는 신비한 음색들……. 실내가 좀 더워서 연주가 힘들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동국이와 새롬이가 환히 웃는 모습으로 연주를 하면 더 좋겠습니다. 너무 잘하려고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안쓰러우니까요. 그리고 새롬이가 전공하는 해금연주도 하루빨리 듣고 싶습니다.
일곱시가 되어가자 약속대로 올포올댄스팀이 도착했습니다. 아니! 최돈선 선생님도 오셨습니다. 지구인 원장님만 오시고 최 단장님은 학원에 남아서 레슨을 담당하기로 하셨는데. 그리고 지난 마로니에 공연에서도 선보인 꼬마요정들도 예쁘게 의상을 갈아입었습니다. 공연을 시작하기도 전에 금방 영등포역이 환해진 것 같습니다.
바람소리님들의 황홀한 안데스음악에 푹 빠져있던 손님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올포올 댄서들의 모습에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서도 올포올의 힘찬 기운, 한없는 부드러움, 깜찍함, 대담함이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빅토리였던가요? 김지연 님과 올포올 최돈선, 지구인 님이 함께한 레퍼토리 또한 멀리서 지켜보았지만 환상적이었습니다.
올포올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에서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쁜 올포올 님들을 조금이라도 더 잡아두기 위해 저는 바쁘지 않은 분들은 공연이 끝난 후 저녁을 함께 먹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주차권을 알아보러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올포올 댄서들께서는 정말 요정처럼 홀연히 자리를 모두 떠버렸던 것입니다.
"이럴 수가…….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럴 줄 알았으면 옛날얘기에 나오는 나무꾼처럼 옷이라도 숨겨놓을 걸……."
주차장까지 나가보고 전화도 해봤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젠 김지연 님의 마무리 공연입니다. 김지연 님은 누가 뭐라고 해도 레일아트의 간판스타입니다. 바네사 메이보다 훨씬(^^) 예쁠 뿐만 아니라 그녀가 뿜어내는 열정과 카리스마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좀 덥기는 했지만, 앰프가 시원찮기는 했지만 우리의 '바욜린걸'이 쏟아내는 빅토리, 사계 중 여름, 캉캉 등은 듣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여덟시, 정말 아쉬움을 남기고 공연이 끝났습니다. 못내 아쉬워하는 팬(^^)들을 꼭 껴안고 지연 님은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아마 총각들은 쑥스러워서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의자들을 치우고, 막을 내리고, 장비를 정리하고 나서,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금강산, 영등포에 근무하던 시절 가끔 들르던 식당입니다. 바람소리님들, 김지연님, 박종호 님, 콜밴 아저씨, 그리고 저와 영등포역 식구들이 참석했습니다. 오늘의 메뉴는 맛있는 된장찌개와 냉면입니다. 참 좋은 시간이었지만 함께하지 못한 올포올 식구들이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이번 공연에는 영등포역 직원들이 신경을 많이 써주었습니다. 특히 저를 통해 이번 공연을 요청한 정혜련 님은 제가 영등포역에 근무하던 시절 같은 팀에서 일했던 후배입니다. 또한 이번 행사를 적극 지원한 고객지원팀 김광용 팀장은 이번 공연을 위해 친구의 장례식 참석을 포기한 제 동기입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준비에 몸고생 마음고생을 해준 영등포지역관리역 영업과 직원들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앞으로 이벤트가 아닌 정기공연이 되면 이런 수고는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이렇게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다음엔 굳이 제가 나서지 않아도 영등포역에서는 영업과 고객담당자와 레일아트가 직접 협의하여 얼마든지 새로운 공연들을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집에 남아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드리지는 못했지만, 이제 땅에 묻히는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별 하는 일 없이 영등포역에서 하루의 반을 보냈지만, 이렇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호흡을 함께하고 이렇게 우리 철도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이웃들에게 살맛 나는 세상을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저도 조금 힘들었지만 이젠 먼저 간 친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첫댓글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친구분 일은 정말 마음 아프셨겠네요. 어떻게 위로를 해드려야 할지...저희가 약속시간을 당겨놓구 늦게 가서 정말 정말 죄송했어요. 다음엔 그런 실수 없도록 하지요 죄~송...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영등포역 직원들과 손님들을 대신해서 인사드립니다.
여기와서 영등포역후기를 읽었습니다...전 그날 동생과 함께 여기저기를 다녀야했지요...많이 힘든일도 겹치셨었군요... 메세지만 박우물님께 띄웠었습니다...화이팅입니다.
최 선생님, 모처럼 멀리서 오신 동생분과 좋은 시간 보내셨군요. 조만간 반가운 얼굴로 다시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