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껍데기를 여러가지 형태로 오려내 器物(기물)에 붙인뒤 옻칠로 마감하는 螺鈿漆器(나전칠기). 자개라고도 불리는 나전은 청자와 함께 고려시대 공예문화를 상징하는 예술품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螺鈿匠(나전장)보유자 李亨萬(이형만.51)씨는 인간문화재였던 故(고) 一沙(일사 )金奉龍(김봉룡.1902∼94)의 수제자로 그의 줄음질 기술을 잇고 있다. 나전장의 기술 중에서 줄음질장은 실톱으로 자개를 오려서 붙이는 기법, 끊음질장은 자개를 실선으로 가늘게 자른 뒤 칼로 잘게 쓸어 붙이는 기법을 말한다. 끊음질은 다시 직선 끊음질(고 沈富吉·심부길 보유)과 곡선 끊음질(宋芳雄·송방웅씨 보유)의 두가지 방법으로 나뉜다. 지난 66년 金奉龍씨가 처음 인간문화재로 지정될 때의 공식 명칭은 나전칠기장. 나전 기법중 끊음질은 지난 7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4호로 따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95년 나전장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통합됐다.
우리나라에서 근대 나전의 본고장은 경남 통영. 김봉룡씨를 비롯해 송방웅·이형만씨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통영의 어촌에서 태어난 李씨가 나전을 배우게 된 것은 초등학교 졸업후 고향에 있던 경상남도 기술원양성소에 들어가면서부터.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불의의 사고로 오른쪽 팔뼈가 부러지면서 진학을 못해 놀고 있던 그는 당시 기술원양성소가 중학교 과정까지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李씨는 이곳의 소장으로 있던 金奉龍의 눈에 들어 63년 졸업하자마자 그가 차린 개인 공방에서 개인 전수를 받기 시작했다.
“일사 선생님은 제게는 부모님과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를 거둬서 지금까지 오게 했습니다.” 李씨는 이때부터 밤에는 충무고등학교 야간부를 다니고 낮에는 공방에서 기술을 배웠다. 67년 군에 입대한 李씨는 68년 金奉龍이 옻칠로 유명한 원주로 이사하자 70년 제대한 뒤 곧 원주로 찾아가서 계속 나전을 배웠다. 75년 생계 때문에 부인과 함께 부산에 개인 공방을 설립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金奉龍의 곁을 떠나기도 했다. 李씨는 이를 ‘도망’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의 부산생활은 거래하던 가게가 부도나는 바람에 3년만에 파산하고 빈털터리로 다시 원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원주로 다시 온 李씨는 당시 金奉龍의 집 근처에 공방을 차리고 스승을 도우면서 자신의 일도 했다.
金奉龍은 李씨에게 언제나 엄격한 스승이었다. 李씨는 통영시절에 金奉龍이 서울로 간 틈을 이용해 밥상에 칠을 했다가 너무 두껍게 올리는 바람에 주름이 잡혀 망치게 되자 집으로 도망한 일이 있었다. 결국 사흘후 집으로 찾아온 金奉龍에게 붙잡혀가 다시 나전을 계속하게 됐다. 원주시절에는 李씨가 갖고 간 완성품을 金奉龍이 칼로 쑤셔놓으며 아무 말 없이 가보라고 한 적도 있었다. 인두로 접착한 조개껍데기가 미세하게 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 얼굴에 칼을 댄 것과 마찬가지 기분이었어요. 그러나 정말 선생님이 세밀한 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담배·술 등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객지에 와 사느라 친구도 없었던 金奉龍은 매일 낮 李씨의 집에 들르곤 했다. “매일 오셔서 4∼5시간정도 얘기하시는데 처음 한달간은 제 일을 하기 위해 선생님이 안오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저에게 참을성과 어른 모시는 자세를 가르치기 위한 인간 교육이란 것을 느꼈습니다.”
“88년은 선생님이 나전에 종사한지 7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점심을 함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같이 계시던 스님 한 분이 ‘참 오랜 세월 동안 나전에 기여하셨습니다’라고 하니까 선생님께서 ‘그까짓 70년’이라고 딱 한마디 하시는 거예요. 그해 전승공예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아 의기양양해하던 저에게 건방진 태도를 갖지 않도록 간접적인 교훈으로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 뒤부터 李씨는 항상 생각해 보고 나서 행동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 중국에 가 있어 임종을 못본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나전칠기가 일제시대에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해 李씨는 金奉龍의 스승인 나전장 全成圭(전성규·?∼1940)의 일화를 들려주며 반박했다. 1920년대에 일본 회사의 초청을 받아 3년계약으로 金奉龍을 비롯한 제자 5명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일한 적이 있다. 1년이 지나자 일본측에서 일본인 문하생을 받아 자개 오리는 기술을 가르치면 연봉으로 쌀 3백석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全成圭는 “다른 사람이 일본에 들어와 가르치는 것은 관여할 바 못되지만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천5백년 된 우리 나전예술을 연봉 3백석에 팔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제자들을 데리고 철수했다는 것이다. 全씨는 금속세공용 실톱을 자개 오리는 데 이용해 줄음질 기술을 혁신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나전칠기는 작품 한 점을 제작하는데 보통 1년 이상 걸린다. 白骨(백골)을 목재로 만들 경우에는 습기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백골은 자개를 붙이고 옻칠을 하기 전의 바탕재질로 목재, 도자기, 대나무, 금속 등 여러가지가 쓰인다. 완성품을 만드는 데 평균 50가지 정도의 공정을 거치는 나전은 자연산 조개와 옻칠이 내는 빛깔이 특징이다. 조개는 남해안 전복껍데기를 최고로 치지만 요즈음은 수입 조개껍데기도 사용한다. 옻은 내구성이나 접착력, 강도, 방충효과등에서 천혜의 자연도료이지만 다루기가 어렵고 값이 비싼 것이 흠이다. 현재 원주산 옻칠 원료의 가격은 한 貫(관.3.75㎏)에 80만원대. 대용칠로 널리 쓰이는 캐슈는 최상품 한 관에 약1만2천원이다.
“기능쪽 문하생들은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죽여야만 합니다. 생활이 어려워 후회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기능보유자가 돼 한 업종에서 최고 수준까지 올랐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기도 합니다.” 李씨가 제작하는 나전칠기들은 원료값 때문에 값이 비싸 개인 판매를 주로 해왔는데 그나마 지난해부터는 나전업계의 불황으로 판로가 거의 막힌 상태다. 사양산업이 되어 지난해부터 일반 대량생산 업체의 경우 반수 이상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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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형만씨가 스승인 一沙 김봉룡(왼쪽)으로부터
나전칠기제작기술을 배우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