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도 |
작물 |
농가호수 |
면적(ha) |
생산량(m/t) |
소득(백만원) | ||
조수익 |
경영비 |
소득액 | |||||
1970 |
참외 |
0 |
0 |
0 |
0 |
0 |
0 |
수박 |
3,740 |
791 |
18,526 |
278 |
238 |
40 | |
계 |
3,740 |
791 |
18,526 |
278 |
238 |
40 | |
1974 |
참외 |
606 |
120 |
1,524 |
152 |
78 |
74 |
수박 |
2,637 |
662 |
25,518 |
1,021 |
398 |
623 | |
계 |
3,243 |
782 |
27,042 |
1,173 |
476 |
697 | |
1977 |
참외 |
2,485 |
452 |
9,704 |
1,347 |
528 |
819 |
수박 |
1,421 |
350 |
17,045 |
856 |
437 |
419 | |
계 |
3,906 |
802 |
26,749 |
2,203 |
965 |
1,238 | |
1983 |
참외 |
5,393 |
1,418 |
38,176 |
13,601 |
4,489 |
9,112 |
수박 |
1,910 |
565 |
15,825 |
5,336 |
1,180 |
3,526 | |
계 |
7,303 |
1,938 |
54,001 |
18,937 |
6,299 |
12,638 | |
1995 |
참외 |
6,370 |
3,075 |
99,015 |
144,794 |
45,677 |
99,117 |
수박 |
396 |
200 |
6,980 |
6,274 |
1,830 |
4,446 | |
계 |
6,766 |
3,275 |
105,995 |
151,070 |
47,507 |
103,563 | |
1998 |
참외 |
6,146 |
3,188 |
105,000 |
158,400 |
47,520 |
110,880 |
수박 |
290 |
160 |
6,500 |
7,600 |
2,280 |
5,320 | |
계 |
6,436 |
3,357 |
111,500 |
166,000 |
49,800 |
116,200 | |
2000 |
참외 |
6,197 |
3,539 |
122,234 |
1,608 |
492 |
1,116 |
수박 |
230 |
114 |
4,086 |
42 |
11 |
31 | |
계 |
6,427 |
3,653 |
111,500 |
1,650 |
503 |
1,147 | |
2003 |
참외 |
5,347 |
3,703 |
120,803 |
2,171 |
695 |
1,476 |
수박 |
129 |
79 |
2,423 |
29 |
9 |
20 | |
계 |
5,476 |
3,782 |
123,226 |
2,200 |
704 |
1,496 |
위 자료에 따르면, 성주군에서 참외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1974년부터이다. 그 전까지 성주 지역에서는 주로 수박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수박보다 참외를 더 많이 짓게 된 때는 1977년으로 나타났다. 그 후 1998년까지 성주 지역에서는 참외 농사를 짓는 농가수와 면적이 꾸준히 증가하였고, 농가 수입은 천 억대에 달할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2000년 이후에는 갑자기 농사 면적은 늘어났으나, 소득은 100분의 1수준으로 급전직하하였다. 이는 농산물 개방, IMF 외환 위기, 경기 불황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주 지역에서 참외 농사를 많이 짓게 된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1974년과 1977년에 주목해야만 한다. 아마도 이 즈음 성주 지역에서는 참외 농사의 선구자가 나타났거나, 국가나 관 주도의 참외 농가 육성책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로는 성주참외원예농업협동조합의 재배연혁을 들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71년에 접목 방법이 삽접(대목에 구멍을 내어 뿌리를 자른 접수를 꽂는 접목 방법)에서 호접(대목과 접목에 각각 칼집을 내어 뿌리째 서로 끼워 넣어 접목하는 방법)으로 바뀌었고, 1977년에는 작목회가 조직되었고, 주력 산물을 수박에서 참외로 교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후에는 참외 농사를 보다 잘 지을 수 있는 시설과 기술, 품종이 계속적으로 계발되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1970년대에 성주 지역 참외 농사에 있어서 전환점을 만들어준 인물이나 정책이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본다.
이에 성주군청 공보실(054-930-6061)과 성주참외원예농업협동조합 사무실(054-933-4700)에 이와 관련한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해 보았다. 그 결과 익명의 성주참외원예농업협동조합 직원으로부터 ‘이담식 성주고등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1970년 즈음에 성주농고(현 성주고등학교) 평교사로 재직 중에 호접법이라는 접목 방법을 개발하시고, 참외 농사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셨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번에는 성주고등학교(054-931-2151)에 전화를 걸었으나, 토요일이라 연결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자세한 사실은 이담식 선생님과의 통화 이후에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주 지역의 참외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바로 ‘금싸라기 참외’ 재배 성공 때문이다. 금싸라기 참외는 메론과 접목한 것으로 당도에 있어서 이전 품종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흥농종묘에서는 1988년 금싸라기 참외를 전국적으로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성주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때부터 성주 지역 참외의 금싸라기 참외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주과채류시험장에서는 꾸준히 유기농법 등을 꾸준히 개발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성주 지역 참외가 유명하게 된 것은 6천 억 원 가량의 피해를 남긴 1987년 태풍 '셀마' 때문이었다. 이 때도 유독 성주 지역은 태풍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참외로 유명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5. 결론
자료 수집과 가설 검증 결과, 성주 지역에서 참외 농사를 많이 짓게 된 주원인은 인간의 선택적 노력 때문인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이런 노력이 자연적․인문적 환경 요인과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이룬 것이라 하겠다.
6. 느낀 점과 더 알고 싶은 점
이번 조사를 통해 정보를 선택하여 지식을 구성하는 것이 쉽지 않음과 성주 지역의 참외 농가가 최근 어려운 형편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앞으로 학생들에게 조사학습과제를 낼 때, 이번 조사의 경험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실제로 이담식 선생님과 대화를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면, 더 좋은 보고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이 매우 안타깝다. 그러나 답사를 통해 교수님으로부터 성주 지역 참외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까닭에 대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좋은 경험을 하게 해 주신 송언근 교수님과 자료 수집에 협조해 주신 본교 권영철 교감 선생님, 그리고 농협 직원께도 감사의 말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