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살짝 계곡으로 내려서면 청신한 계류를 만날 수 있다./(오른쪽)금강송이 동무를 해 주는 십이령 길.
길은 계속 계곡을 끼고 간다. 계곡 가로 졸참나무,
서어나무, 누리장나무, 물박달,
층층나무, 쪽동백, 다래덩굴, 고로쇠나무들이 원시의 기운을 내뿜는다.
사이사이로 단풍나무가 가을 햇빛에 곱다. 이제 곧 물이 들면 계류도
광채를 더할 것이다.
십이령골과 십이령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재 직전까지는 계속 찻길이다.
십이령길이 찻길을 버리고 새재로 올라서는 지점까지는 쉬엄쉬엄 걸어도
1시간30분 정도. 거듭 강조하지만, 이 길을 걸으며
옛길의 분위기가 망가졌다고 타박하는 건 감정의 사치거나 낭비다.
계곡 물소리에 귀를 맡기고 나무들의 춤사위를 따라 함께 너울거릴 일이다.
환상적인 계곡이라고 하면 분명 호들갑이 되겠지만 자연의
충만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이 일대가 산양 서식지임이 그것을 보증한다.
새재가 가까워지면서 길은 가풀막으로 바뀌고 거의 말발굽 모양으로
휘어 돌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왼쪽 산기슭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급하게 흐르는 작은 계곡이 새재로 오르는 길이다.
이곳에서부터 찻길과는 안녕이다.
도로공사를 하면서 허문 산허리의 바위에 붉은 스프레이
페인트로 화살표가 되어 있기 때문에 길을 잘못들 염려는 없다.
화살표시를 따라 10여 분쯤 된비알을 오르자 홀연히 당집 하나가 나타난다.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祀)라는 편액을 달고 있다. 이곳이 바로 새재(595m)다.
새재를 넘어 대광천까지는 마냥 내리막길이니 무거운 짐을 진 바지게꾼들이야
어찌 성황님께 무사 안녕에 대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안도와 한숨이 섞인 노랫자락이 절로 나왔을 법하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후렴)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
한 평생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
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 대마 담배 곡물 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평생 내 지겐가 /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
꼬불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노.”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나올까>
(글 이정숙, 사진 김부래)에서 인용.
일제 강점기에도 바지게꾼들 수없이 넘어 다녀
조령성황사의 내부에 있는 중수 기록을 보면 소화 10년이라고 적혀 있는데
서기로는 1935년이다. 미루어 보건대 최소한 보부상이 전국적으로 조직화되고
보부청이 설치된 1866년(고종 3년) 이전부터 일제강점기까지도 바지게꾼들이
끊임없이 십이령길을 넘나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길이 잊혀지기 시작했을까.
두천2리 노인회장 김용호(73)씨의 얘기를 들어 보자.
“북면(흥부장)에서 장사꾼들이 미역이나 어물을 사서
하루만에 여기(두천2리)를 와요.
여기서 하루 자고 이삼일씩 걸려서 춘양 봉화장으로 갔지.
그래서 이곳에는 주막도 있었고,
또 이곳 사람들이 등짐을 져 나르는 일을 하기도 했어요.
마지막으로 그 사람들을 본 건 1950년대 중반이야. 6·25전쟁이 끝나고
무장공비 때문에 장사꾼들의 발길이 끊어졌지.”
<산행 개념도>
무장공비가 아니어도 그 무렵부터는 바지게꾼의
구실은 없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통로로서 길의 운명은 문명을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한편 김용호씨의 얘기 속에 왜 내성(봉화) 사람인 행상의
우두머리에 대한 불망비가 이곳에 섰을까 하는 의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산마을 사람들에게
행상들은 상당한 보탬이 됐을 것이다. 농한기에는
등짐을 져 주는 일로 가용을 보탰을 것이니
마을 사람들에게 바지게꾼은 장사꾼 이상의 존재였을 것이다.
더욱이 일제 말기인 1944년에 그야말로 ‘억지 춘양’격으로
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영주와 춘양을 잇는 철도를 놓기 시작하여
1955년에 철암까지 영암선이 개통된 후 교통의 요지가 된 영주로
상권이 넘어가기 전까지 이 지역 상권의 중심지는 봉화였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알고 보면 당시 행상의 우두머리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난 인물이었을 것인데, 인품 또한 되바라진 장사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재에서 다시 찻길을 만나게 되는 대광천까지는 편안한 내리막이다.
시작 지점인 두천리 불망비의 해발고도가 112m인데 비해 대광천 합류지점은
460m로 새재와의 표고차가 135m에 불과하다.
빼어난 풍광은 없지만 재잘거리는 계곡물을 따라서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취재에 동행한 김부래 선생은 태백시의 금대봉과
대덕산 일대에서 생태 모니터링과 숲해설을 하는 분으로
이 일대의 지리에도 밝다. 눈빛승마, 바디나물,
이삭여뀌, 큰참나물, 기름새 등
무심히 스쳐보냈을 들꽃들을 하나하나 일러준다.
끈적끈적한 표면을 이용하여 씨앗을 퍼트리는 도독놈의갈고리 씨앗을
귀에 붙여 주기도 한다.
덕분에 지루함이라고는 느낄 새도 없이 대광천이다.
▲ (왼쪽)십이령골에서의 탁족. 옛길 걷기의 즐거움이 배가된다./
(오른쪽)내성행상 불망비.
금강송 군락지에서 약 3.7km 떨어진 지점이다.
불망비에서 이곳까지는 약 9.5km. 걷는 시간만 따지면
3시간10분에서 30분 정도. 충분히 쉬고 즐기면서
하루를 보내기에 적당한 길이다.
이곳에서부터 옛길은 대광천과 나란히 달리는
917번 도로를 따라 1km쯤 가다가 찻길을 버리고 저진치,
지심곡, 평전, 한나무재, 넓재를 지나 울진군 서면
광회리에 닿는다.
옛길을 걷는다는 것은 문명에 감금된 육체의 권능을 회복하는 일이다.
옛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다.
자연의 파동에 공명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동수단으로서의 걷기가 아니라,
생태와 역사를 길동무시키고 우리 산천을 몸으로 읽는 일이다.
옛길을 새로운 길로 다시 열어가는 일이다.
자료제공: '월간 산'지에서 발췌
산행지도:
심원한 숲길 울진 십이령 옛길 열두 고개
울진 십이령길의 답사 코스는 울진군 북면 두천 1리 바깥말래에서 시작하여 발재(두천리)∼새재(서면 소광리)∼대광천(소광리 후곡동에서 1박)∼느삼밭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서면 광회리)∼외광비에 이르는 1박2일 거리. 이 중 발재∼새재 구간이 옛길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십이령의 백미다. 반면 새재 이후로는 대부분의 옛길이 임도로 대체되고 남아있는 옛길도 찾기가 쉽지 않아 초행자에게는 옛길 걷기의 즐거움이 다소 반감될 수 있는 것이 흠. 따라서 추천 구간은 두천리∼발재∼새재∼대광천까지 9.2km 약 3시간 30분 가량, 여기서 버스가 다니는 후곡동까지 5킬로미터를 걷는 시간을 감안하면 당일산행으로 가능하다.
십이령 들머리는 두천 1리 바깥말래 내성행상 불망비 비각앞. 비각을 지나 왼쪽 언덕에 오르면 효자각이 있고 이곳에서 등성이를 따라간다. 대형버스가 다닐만한 임도에 도착하면 이곳이 발현동. 당집이 선 발재가 훤히 보이고 마을에는 폐가 한 채가 있다. 발재 마루에서 10여분 내려가다 간이창고가 서있는 십이령골 합수점에서 약 1시간 30분 가량이 십이령 옛길의 백미 구간. 길이 U자로 급회전 하는 곳에서 10여분 오르면 왼쪽으로 새재 성황사로 오르는 옛길을 만난다. 새재 성황사까지 10여분. 새재에서 소광리 대광천 마을길까지 약 40여분, 길이 넓고 좋다.
↑ 개념도
울진→두천리행 시내버스가 울진군청 앞에서 06:20, 11:00, 13:30, 16:30, 18:10경에 있다. 울진→소광리행(후곡동 경유 소광분교 종점) 버스가 울진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08:00, 17:00에 있다. 동·하절기에 버스 운행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 울진버스(☎054-783-4141)로 문의.
두천리에는 숙식할 곳이 없다. 울진 읍내나 승용차가 있다면 두천리에서 10분 거리인 덕구온천(☎054-782-0677)을 이용. 또한 덕구온천 근처 구수곡휴양림이 올봄 개장 예정이므로 울진군청(☎054-785-6393 문화관광과)으로 문의해볼 만하다. 덕구에 별미 옹심이칼국수(☎783-5820) 집이 있다. 감자, 메밀, 콩가루, 밀가루를 섞어 뽑은 면과 감자 옹심이를 곁들인 칼국수는 담백한 맛이 일품이며 가격도 3천원으로 저렴하다. 소광리에는 후곡동 창수상회(☎782-9939/783-4057)에서 숙식이 가능하다. 주인 남의석씨의 훈훈한 인심과 구수한 입담으로 십이령 얘기는 물론 소광리 황장소나무도 안내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