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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투쟁 - 민중의 정당방위
증 언 자 :윤석진(남)
생년월일 :1961(당시 나이 19세)
직 업 :재수생(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9. 7
개요
5월 19일부터 차량시위에 참여, 외곽지역의 시민들을 수송하는 일을 했다. 광주고속, 중앙고속 등지를 다니면서 시위차량을 징발하기도 했다. 5월 21일 도청 앞 집단발포를 목격했다. 재수생의 신분으로 겪은 광주민중항쟁 이후 많은 의식의 변화를 일으켰다.
잘 죽었다, 독재자여
나는 곡성 겸면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교육방식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결정한 것은 소신껏 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늘 남에게 신세지지 말고 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광주 인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자취생활을 하면서 그야말로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김삼수한문선생님이 당시 박정희정권하의 한반도 실정에 대해 많이 말씀해 주셨다. 직접적인 형식이 아닌 비유, 은유적으로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주셨다. 나는 특히 역사,세계사 등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 선생님 말들을 귀담아들었다. 우리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속에서도 사회에 대해서 조금씩 눈을 떠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때 10·26사태가 일어났다. 동신고등학교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나는 그날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라디오를 켰다. 김성진 문공부장관이 "박대통령이 유고되었다"고 울면서 방송을 했다. 그것을 듣는 순간 박대통령이 죽은 모양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6시 40분쯤 스쿨버스를 탔는데 라디오에서는 계속 조용하고 차분한 그야말로 장송곡 같은 음악만 흘러나왔다. 7시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방송이 정식으로 나왔다. 그것을 듣은 학생들이 스쿨버스에서 내리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잘 죽었다는 식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조회를 하러 들어왔을 때에도 우리들은 웅성거렸는데, 담임선생님은 그 사실에 대해서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방송이 나왔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셨다. 교무실에 알아보고 오겠다고 내려가셨다. 담임선생님은 5분쯤 지나 다시 돌아오더니 확실하다고 하셨다. 그날 우리는 계속 자습을 했다. 우리 교실은 교무실 바로 위층이었는데, 김재수라는 친구가 "데모를 하자"고 했다. 우리는 그때 무서운 것이 없었기 때문에 쿵쿵거리면서 소란을 피웠다. 나도 성격이 날카로워 비위 상하는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독재자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잘죽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일국의 원수가 그렇게 암상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했지만.
데모를 하자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놀라 올라오셨다. 교감선생님과 학생과장이 김재수를 끌고 나가셨다. 재수는 교실에 그대로 가방을 둔재 실종이 되었다가 일주일이 지나자 돌아왔다. 김재수는 인성고등학교 최고의 수재라고 할 만큼 뛰어난 친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성고에는 서클도 없는 상태였지만 그 친구는 이미 사회과학 공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학교도서관에 있는 양양이라는 사서를 통해 엄천난 양의 책을 빌려다보았기 때문이다.
입시에 실패하고
10·26사태에 대해서 충격은 받았지만 11월초에 예비고사를 보았고 본고사가 있었기 때문에 흐트러질 여유가 없었다. 뉴스를 통해 12·12사태에 대해서도 듣기는 했지만 전혀 신경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해 나는 본고사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조금 쉬다가 다시 광주에 올라온 것은 3월말쯤이었다. 양동에 있는 친척집에서 생활하면서 재수를 하게 되었다. 친척 아저씨가 건축계통의 십장을 했기 때문에 광주가 아닌 지방에서 일이 있을 때면 애들까지 데리고 공사장으로 떠났다. 그런 때는 내가 밥을 직접 해먹으면서 생활해야했기 때문에 나는 반하숙생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학원에 다니기 전에 집에서 어느 정도 공부하는 자세를 잡기 위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5·18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에 보도되는 내용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5월 15일이었다. 텔레비전 저녁 뉴스 시간에 계엄군이 시내에 진주해 있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하는 모습과 통금시간이 9시라는 것도 발표되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시위차량에 오르다
이튿날(19일) 아침밥을 먹고 나서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언덕으로 을라갔다. 시내 곳곳에서 연기들이 치솟고 있었다. 나는 연기나는 곳에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발산대교를 건너 농성동 로터리로 갔다. 도로변에는 시민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화정동쪽 도로에 목재와 폐타이어 등으론 바리케이드를 쳐놓았는데 그것이 불타고 있었다. 또한 간간이 시위차량들이 지나다녔다. 그중 내가 맨 처음 본 것은 군용트럭으로 적재함 위해 일본 낫(만발이 크고 길어접었다폈다할수있음), 쇠스랑, 손도끼, 각목 등을 들고 시위대가 타고 있었다. 시위대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다. '김대중씨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그들은 구호를 외쳤다. 시외버스도 지나갔는데 유리창이 없는 상태에서 시위대는 상반신을 내놓고 있었다. 시위차량 앞에는 '살인마 전두환 찢어죽이자'는 플래카드를 달고 다녔고, 사람들은 붉은글씨로 구호가 씌어진 띠를 머리에 묶고 있었다. 지금도그들이 외치던 구호 중에 '김일성아, 내려오지 말아라' 던 구호가 생생하게 기 억난다.사람들은 로터리 부근과 인동에 모여서 그러한 것들을 구경하고 환호하면서 박수를 쳐주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2시간 가량을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은 다음 걸어서 도청 쪽으로 갔다. 유동 삼거리쯤 왔을 때 금남로 쪽이 사람들로 꽉차 있는 것이 보였다. 금남로 5가는 시민들이 너무 많아 움직이면 부딪칠 정도였다. 나는 그 틈을 비집고 계속 걸어갔다. 시민들의 맨 앞쪽에서는 투선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다시 뒤로 빠져나왔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에 시위대 차량인 군용트럭이 한 대 서 있었다. "이 차는 왜 여기에 있다요?" "사람들을 실어 나르려고 있소."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그 차에 올라탔다. 그 차는 외곽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수송하기 위하여 돌아다니는 차였던 것이다. 당시 시위대 차량을 운전하는 살마들은 대개 운전면허중이 있는 사람보다는 운전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나 운전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매우 서툴렀다. 내가 탄 차고 마찬가지였다. 외곽으로 돌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손을 들면 태워주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차를 타라고 했다. 대동고 조금 지나 효천쪽으로 갔을 때였다. 운전을 잘 못해서 급정거를 해버렸다. 적재함에서 각목을 들고 서 있던 나는 그 바람에 오른손 손가락 2개가 찢어져버렸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어 피가 툭툭 떨어졌다. 차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할수없이 대성여고 앞에서 혼자 내렸다. 어떤 집으로 들어가 붕대를 좀 달라고 했다. 다친 손가락에 약을 발라주더니 면장갑 한 켤레를 주었다. 면장갑을 끼고 다시 돌아오는 차를 타고 구호를 외치면서 시내로 돌아왔다. 그 차에서 내려 어떻게 하다 보니까시위차량이 부족하다고 하여 차량을 징발하러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차량징발
우리가 맨 먼저 간 곳은 중앙고속터미널이었다. 터미널홈에 차 몇 대가 세워져 있었지만 키를 모두 뽑아가버린 상태였다. 사람들이 터미널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나왔다. "시위차량이 부족하니 그레이하운드를 좀 내주시오." "차를 줄 수 없소." 그 말을 들은 1백여 명의 흥분한 사람들이 세워놓은 차에 달라붙어 밀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중앙고속 건물 안으로 들어가 회사기물과 기타 시설물들을 모두 부숴버렸다. 그곳에서 나와 백 미터 정도 위로 올라가니까 25톤 타이탄트럭들이 주차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몇 사람이 붙어서 타이탄트럭을 밀어붙이니가 시동이 걸렸다. 그때마다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끌고 나갔다. 일부 사람들이 광주고속터미널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한쪽에서 터미널에는 차가 없고 금호고등학교 가는 곳에 있는 정비공장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즉시 우리는 정비공장으로 몰려갔다.과장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나와 두말하지 않고 차를 골고 가라고 했다. 우리는 차를 가지러 갔지만 누군가가 "광주고속도 광주의 재산이니까 끌고 가지 말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그냥 나왔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중앙고속과는 대조적으로 선선히 차를 내주려고 그랬던것 같다. 나는 다시 시내로 돌아와 사람들과 어울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으나 공수부대와 대치한다거나 격렬하게 시위를 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해질녘쯤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인 20일은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얀 면장갑을 끼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은연중에 눈에 띄었을 것 같아서 였다.
싸움에도 힘이 있어야 이길 수 있다.
21일에는 오전에 집을 나섰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 차에 탔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유동이나 북동쯤에서 였을 것이다. 이미 사람들이 많이 타 있는 시외버스였다. 유리창을 빼버린 상태에서 상반신을 내놓고 각목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월산동 외곽도로로 갔을 때였다. 도로 주변에는 주민들이 많이 나와 있었고, 아줌마들이 도로가에 가마솥을 걸고 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시위차량을 세워 커다란 그릇에 주먹밥을 가득가득 담아서 올려주었다. 밥말고도 요구르트, 우유, 빵, 담배 등을 상자째 올려주고 양동이에 물도 떠서 올려주었다. 차안에 있는 짐 싣는 선반이 그러한 것들로 꽉차 있을 정도였다.차에 탄 사람들이 담배는 많이 태웠으나 음식은 많이 먹지 않았다. 계속 차를 타고 돌아다녀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먹고 싶은 사람은 그냥 개별저금로 먹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아줌마들이 음식을 올려주면서, "싸움도 힘이 있어야 이길 수 있다"고 한 말이었다. 아줌마들은 그냥 이웃끼리 쌀을 걷어 밥을 짓고 먹을 것을 장만하는 것 같았다.
우리 차는 대개 광주역 주변과 신우아파트 주변의 외곽도로를 돌면서 구호를 외치고 시민들을 실어다 일고 앞도로에 내려주는 일을 계속했다. 그래서 도청 앞 주변이나 금남로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도 코스가 일정하게 정해진 것도 없이 운전자가 스스로 정하든지, 아니면 차에 탄 사람들이 이쪽으로 가봅시다. 하면 그쪽으로 갔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청 앞으로 시민들을 모아오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차들은 서행을 했는데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운전자가 서툴렀고, 또 안에 타고 있는 사람 모두가 상체를 밖으로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도에도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유동 삼거리에서 지금의 YWCA 앞 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2∼4구의 시체를 대형 태극기로 상반신을 덮은 채 리어카에 시도 가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보였는데 한족발은 맨발이고 한족발은 까만 구두가 신겨져 있는 여고생들이었다. 리어카가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흔들거려 정말 안쓰럽게 보였다. 중앙여고생 4명이 대검에 찔려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는데 그 시체들이 아닌가 싶었다. 당시 중앙여고는 양동시장 근처에 있었는데 요한병원에 안치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리어카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따라가고 있어서 우리 차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그 리어카를 따라 서서히 서행하였다. 특히 운전사 바로 옆에 타고 있어 나는 리어카를 따라가는 사람들도 연도에서 그 대열을 지켜보는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훔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집단발포
오후 1시 정도 되자 우리는 금남로 5가에서 모두 내렸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나는 힘들게 가톨릭센터 맞은편 지 화도까지 올라왔다. 공수들이 도청 분수대를 중심으로 전일빌딩과 수협 앞주변으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골목골목에 서 있었다. 시민들은 투석전을 벌이다가 도청을 밀어 버린다고 군용트럭을 끌고 나왔다. 군용트럭 적재함에 휘발유를 부어놓고 고무줄을 잡고 내려옴과 동시에 적재함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은 채 관광호텔 앞가지 잘 갔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그러나 은행나무를 들이받고 그곳에서 타버렸다. 다음에는 불도저에 시동을 걸어 같은 방식으로 보냈다. 불도저도 가톨릭센터 앞 지하도 공사장에 거꾸로 빠져 버렸다.그때 느닷없이 총성이 울렸다. Ml6 사정거리는 상당했으므로 총소리를 들은 시민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건물 벽에 붙었다. 나도 어느 건물 벽으로 붙어 있었다. 총소리가 나기 전에 헬기가 계속 떠서 선무방송을 하고 있었으나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갑자기 당한 일이고 계속 난사를 했기 때문에 도망간다는 것 자체가 위험했다. 잠시 총소리가 뜸해지자 도로로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그때 ACP 장갑차 한 대가 도청을 향해 돌진해 갔다. 관광호텔 앞에서 장갑차 뚜껑을 열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애가 나왔다. 안전벨트를 맨 상태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탕, 탕." 총소리가 남과 동시에 그의 턱 부분이 아예 날아가버렸다. 목뼈가 허옇게 보이고 피가 솟구쳤다. 도청 옥상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총을 쏘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총알이 뚫고 나간 것이 아니라 분리를 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공수들은 총알이 지나가는 것을 느낄 정도로 계속 총을 쏘아댔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다. 구름 한 점 바람 한 점 없는 상태에서 금남로의 은행나무 가지가 툭툭 끊어져 내렸던 것이다. 그렇게 난사하는 총에 맞고 사람들이 푹푹 쓰러졌다. 그것을 보고 접근을 하라치면 거기에 대고 또 총질을 해댔다. 대인동으로 빠지는 길목에서 한 여인이 복부관통상을 입는 것도 보였다. 급히 헌혈차량이 만들어져 헌혈할 사람들을 싣고 갔다.갑자기 여러 가지 엄청난 상황이 벌어지자 아무것도 모르고 나온 국민학생들이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그애들에게 벽에 붙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벽에 붙은 채 걸음을 옮겨 금남로를 빠져 유동 삼거리 쪽에 왔을 때 총을 나눠주고 있었다. "총 쏠 줄 아요?" "몰라요." 총 쏠 줄 안다고 하면 무조건 카빈 1정과 실탄 한 클립씩을 주었다. 어떤 사람은 총을 받아 총 덮개를 풀고 개머리판을 버리고 몸체만 가지고 갔다. 총기의 몸체를 어깨에 메고 잠바를 걸치면 밖에서 보면 표가 나지 않았다.광주가 진압을 당하고 난 후에 총기회수가 제대로 안된 것은 그러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작위로 총을 지급해 주었기 때문에 오발사고가 많았을 것이다.총을 들고 외곽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에게 들어가라고 했다. 총을 다를 줄 아는 전문가들도 항상 총구를 하늘로 향하게 세워놓고 겨누지 않았다.
그런데 총을 잘 쏠 줄 모르는 나이 어린 사람들이 총알이 장전된 상태에서 그렇게 겨누었기 때문이다. 도로에 총을 쌓아놓고 나누어 주었는데 나눠준 사람이 학생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날부터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거의 안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통금 이전에 나는 집으로 돌아와 옥상에 올라가 시내를 살펴보았다. 불을 꺼달고 시위대 차량아 방송을 하고 다녀서인지 광주시내가 온통 암흑 속에 잠긴 상태였다. 총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시골로 내려가다
22일 아침에 도청이 시민군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청에 나가 시체들을 보기도 하고 집회장에 나가기도 했는데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내가 처음부터 집회장에 안아 내용을 모두 들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주변을 얼쩡거렸기 때문이다. 광주사태의 수습방안 등에 대해서 광주 시민 대토론회 형식들 취하고 있었던 것 같아. 왜냐하면 장휴동(김녹영,이필선 씨와 함께 국회의원 후보로 나왔다가 낙선한 사람) 씨가 나와 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언을 했다고 연설장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계획적인 프로그램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닌 그때그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은 나가서 이야기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나는 도청 앞에서 나와 외곽 주변을 돌아보았다. 광주천변에 차들이 굴러떨어져 있었다. 버려진 차는 기름이 떨어진 차였을 것이다. 주유소 주인들이 대부분 시위대 차량에게 기름을 조금씩밖에 넣어주지 않았다. 다른 시위대 차량이 와서 기름을 달라고 하는데 없다고 하면 격해진 시위대가 주유소 기름들을 막무가내로 부숴버릴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기름을 분재해 주었기 때문에 금방금방 기름이 떨어졌고, 그럴 때마다 차를 팽개치고 다른 차를 타곤 했다. 그리고 18, 19일은 많은 차량들을 불태웠는데 차체가 깨끗이 타버린 잔해들이 나뒹굴었다. 어린 아이들이 부숴져 버린 차에서 노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23일 저녁에는 주월동에 사는 고향 선배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니가 그곳으로 오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시골에서 자녀들을 광주로 내보낸 어머니들이 소문을 듣고 함께 올라오신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살고 있는 양동에 가보았으나 내가 없자 혹시나 하여 선배 집으로 오셨다가 나를 만난 것이었다.그 선배 집에서 선배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고 난 후에 시골로 내려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주월동 외곽도로를 거쳐 양동 집에 들러 책을 몇 권 챙겨서 풍향동,두암동을거쳐 서방까지 걸었다. 그때까지는 아무런 제지도 없었다. 교도소를 지나 곡성쪽으로 가는 구도로로 빠지는데, 계엄군들이 도로에 LMG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그들은 다행히 우리 일행을 제지하지 않았다. 주변 논에는 딸기들이 말갛게 익어 있었지만 따는 사람들이 없어 상해 가고 있었다. 고속도로에는 광주로 빠져나 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차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걸어서 갔다. 여교생들이 발이 부르터서 신발을 벗어들고 걸어가는 모습도 보였다.담양 대덕쯤에서 광주쪽으로 들어오는 차량들이 몇대 있긴 했지만 차비도 비싸고 차를 타려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아서 걸어간 것이다. 하루 종일 걸어서 6시경에야 집에 도착했다. 그 후 한달이상을 집에서 보내고 광주에 올라와 계속 공부를 했으나 시험에 실패하고 말았다.
변호사가 되려던 꿈은 깨지고
그 후 1년 동안을 더 공부하여 전남대에 입학했지만 5·18을 인해 나는 어릴 때부터 꿈꾸어왔던 변호사가 되려는 꿈이 깨졌다. 가장 자유로운 직업이 법조계라고 생각했지만 5·18을 겪고 난 다음에는 그들이야말로 권력의 시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5·18에 관련된 친구들이 상당히 많아 그 친두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그러했다. 결국 나는 문학을 하기 위해 인문계로 진학했다. 김재수도 서울로 진학을 했다가 실패하여 광주로 내려왔고, 또 의식수준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김성민이도 재수를 하고 있어서 같이 공부를 했다. 그때 읽은 책들은 바슐라르,파농,민테일러,김지하 시집 등이었다.5·18 당시에 광주는 그야말로 정당방위로 대응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5·18은 동학혁명이나 빨치산 투쟁과 맥을 같이하는 무장투쟁이었다. 민중항쟁이나 광주의거 차원이 아닌 한반도에 내재해 있던 질곡과 모순점들이 정치,사회, 문화적으로 얽혀서 표현된 무장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5·18은 어떤 계급이나 계층이 주도했다기보다는 모든 민중들이 참여한 종합적인 투쟁이었다고 보는 게 더 옳을 것이다. 27일 도청 상황은 노동자 계급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지 만. 내가 생각하는 5·18 민중항쟁의 근본 해결방안은 1차적으로는 정치적인 보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정치적인 보복이 없이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 절대로 창출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8·15 해방이 되고 나서 어떤 형태로도 정치적인 보복이 없었다. 그래서 구조적인 모순이 극대화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5·18주범들을 완벽하게 제거하지 않고서는 5·18 광주민중항쟁의 해결은 어려울 것이다. 정치적보복이라 동시에 광주의 명예회복이 가능한 것이다. 그동안 청문회,민화위 등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지만 광주민주항쟁을 밝히는 부분에서는 엄청나게 부족했다. 그다음 광주민중항쟁을 기념하는 기념탑을 건립하고 기념사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나는 미국에 대해서 처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는 속에서 미국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미국이 그동안 해온 행위들을 살펴보면 광주민중항쟁시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미국CIA에서는 박정희를 1961년 5월 31일자 전역을 시키기로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5 16을 통해서 패권을 잡은 박정희가 미국과의 밀착을 시도하고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한일 정상회담을 죄하였다. 박정희는 해방공간 이후 한국이 이미 신식민지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미국의 보호를 받지 않고는 장기집권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러던 박정희가 미국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해 청와대 도청사건을 일으켰다.실지 박정희 저격도 미국에서 김재규를 조종했을 가능성이 많았다고 항간에 떠돌았다. 그런 속에서 미국은 본질적으로 관련을 가지고 전두환을 창출시킨 것이다. 그것은 한미연합사의 작전지휘권을 미국에서 쥐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사·정리 장옥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