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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창사 78주년 특집극 '유행가가 되리'에서 필자. | | 나는 연극이 좋아 배우의 길을 선택했다. 고교시절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길이니 어언 50여년,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닌 것 같다.
산판(山坂) 작업장에서 일하다 큰 부상을 입고 고생하시는 아버님을 지켜보면서 의사의 꿈을 가졌던 내가 결국 배우의 길에 들어선 것은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끼’를 어찌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나에게 진정한 배우의 혼을 불어넣어 주신 여러 선생님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연극 배우로 출발한 나는 동인제 극단과 국립극장 활동을 하며 60여편의 연극에 출연했다. 또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63년 인연을 맺은 TV드라마에는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출연하며 관객과 호흡하고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나는 1940년 6월7일 정읍시 수성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님(박형석-권순남)은 식당과 여관업을 영위하셨고, 나는 5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나 서초등학교와 호남중학교를 졸업했다. 요즘은 전기와 석유, 가스 등 편리한 연료가 일반화돼 있지만 당시는 주요 땔감이 장작이었다. 아버지는 순창에서 산판(山坂)을 운영했는데, 그 곳에서 나오는 장작을 서울 지역에 판매하는 등 사업수완도 발휘, 집안 형편은 부족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 흉내내기를 좋아하고, 어른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등 명랑하고 활동적이었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통과해야 입학이 허용됐다. 나는 인근의 호남중학교에 응시했는데 머리가 좀 좋았던지 3등으로 입학했다.
우리 집안은 외가까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그 때문에 집안에 신부님들의 왕래가 잦았다. 나는 신부님들에게 재롱도 많이 떨었고, 성당에 가서는 성극(聖劇) 구경도 했다.
우리 고향은 워낙 물이 맑고 좋았기 때문에 어려서 나는 물놀이를 많이 했다. 또 교통편이 부족한 때였지만 온 식구들이 한꺼번에 트럭을 타고 변산해수욕장에 가서 열흘이고 보름이고 놀다 온 기억, 무안박씨 집성촌인 정우면 초강리에 시제 모시러 가서 문중어른들을 뵌 기억, 산판에 간 기억 등이 선하다.
내가 서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어린 나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죽음이었다. 어른들은 ‘서울이 무너졌다’, ‘천안이 무너졌다’ ‘평택이 무너졌다’하며 불안해 했고,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우리 식구도 짝을 이뤄 피난을 갔는데, 나는 누이동생과 함께 입암리 석산 마을에 있는 고모네 집으로 가 있었다. 좌익 출몰이 잦은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약 한 달가량 생활했는데, 요란한 총소리가 무섭고 해서 동생과 함께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당시 어머니는 이평에서 외가 식구들과 함께 빌린 큰 정자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인민군들에게 마을이 점령된 후에는 학교에 나가서 노래도 배우고, 비행기가 오면 ‘항공!’하고 외치는 공습 훈련도 받았다.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내장산 쪽에서 빨치산들이 많이 내려왔다. 대낮에 강물에서 포탄도 발견됐다. 당시 경찰들은 밤에 빨치산들이 들어오면 어디론가 도망했고, 우리는 마루 밑에 지하 방공호를 파고 숨는 생활을 했다.
전쟁과 빨치산으로 인한 혼란은 중학교 3학년 때가 돼서야 수그러들었던 것 같다.
프로필
△정읍 출생 △호남중, 서울 휘문고,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 △동인제 연극활동 △국립극장 단원 △63년 KBS 공채 1기 △연극배우, 영화배우, TV 탤런트 △제5회 동아연극상(68년) △제13회 대종상 남우주연상(74년) △제15회 한국 연극·영화예술상, 영화연기상 △제24회 한국방송대상(97년) △SBS TV 연기대상 △MBC TV 연기대상 특별상 △KBS TV 연기대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