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수영비행장(센텀시티)
옛 수영비행장(水營飛行場)은 해운대구 우동과 재송동 일대 37만여평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은 재송포에 쌓인 토사로 메워진 충적평야에 인근주민들을 동원하여 비행장을 건설하여 1944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군용 비행장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해운포(수영만)의 하구는 지금처럼 협소한 것이 아니라 샌텀시티(옛 수영비행장)가 바다로 만의 형태가 되어 있었는데 수영강과 해운대의 우동천에서 흘러내린 해운포만을 메운 것이다. 1740년 편찬된『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해운포(海雲浦)는 동래부(東萊府) 동쪽 10리로 지금의 수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부산정보단지 조성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샌텀시티 자리는 수영강과 온천천에서 실려 내려온 토사의 퇴적으로 형성된 충적평야로,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인근 주민들을 강제 징용하여 1944년 비행장을 건설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군사물자 수송을 위한 군용비행장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전쟁 이후 교통부에서 인수하였다. 1958년 1월 30일(대통령령 제1341호) 군용비행장으로 사용되어 오던 시설을 개․보수를 하여, 1958년 8월 30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항공기가 취항하는 부산비행장으로 개항되었다.

1954년경 수영비행장 전경(오른쪽 위쪽 산이 금정산)
그 후 1963년 9월 3일 부산국제공항으로 승격되었으며, 부지 면적은 1,094,133㎡였고, 활주로 2,012m에 폭이 45m였다. 당시 활주로 길이와 강도로서 B-727기종까지 취항이 가능하였으나 계기 착륙장치(ILS) 시설이 없어 악천후에는 항공기 취항이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수영비행장의 1일 수용 능력이 2,400명 정도로 대형항공기 출항 비행장으로서 규모가 작아 격증하는 관광객과 수출화물을 감당하기 곤란하여 1976년 8월 1일 김해국제공항이 개항되면서 수영비행장은 군사비행장으로 이용되다가, 1996년 2월 16일 군용항공기지에서 제외 되면서 비행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1960년대 수영비행장 활주로 전경
김해공군비행장은 1969년부터 군기지 건설을 시작하여 1973년 활주로(2,740×45m)와 평행유도로를 준공하였다. 1974년부터 공군비행장을 일반공항으로 개발하기 위한 기초 조사 및 항공시설 공사를 시작하여 1975년 6월 국내여객청사 준공, 1976년 6월 국제여객청사와 활주로 및 계류장을 준공하여 동년 8월 1일 부산국제공항에서 김해공항으로 이전 개항함으로써 DC-10 등 대형 항공기가 취항할 수 있는 전천후 국제공항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동년 10월 4일 김해국제공항金海國際空港으로 개칭하였다.
1976년 8월 이후 수영비행장은 국방부에서 군용비행장으로 관리되어 오면서 활주로 양측 외곽 부지를 임대해 주어 컨테이너야적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1994년 6월 2일 수영비행장 부지 등 부근 275만평이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되었고, 같은 해 8월 18일 국방부에서는 부산시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영 군사비행장을 시 외곽지역으로 이전키로 최종확정했다고 발표하였다. 1995년 12월 20일 부산시에서는 해운대구 우1동 1254번지 일원 수영비행장 1,151,690㎡(약 35만평)을 도시계획법에 따라 주거 상업업무기능 등 조화 있게 배치된 시가지조성을 하기 위해 일정규모 이상의 구역에서 실시하는 시가지 조성사업으로 결정 고시하였다. 1996년 2월 16일 수영비행장이 군용항공기지에서 제외되면서 비행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수영비행장 앞 해수욕장(지금의 시립미술과 부근임, 뒤쪽이 동백섬)
옛 수영비행장과 관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1967년 3월 4일 독일연방공화국(西獨)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 부부가 부산국제공항인 수영비행장을 통하여 부산을 방문하였다. 수영비행장에는 많은 의전단과 환영인파가 모여 성대한 환영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부산시청 앞 광장에서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 내외분의 부산방문 환영행사가 성대히 거행되기도 하였다.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과 영부인 빌헤르민 뤼브케 여사는 공식(비공식) 수행원을 대동하고, 1967년 3월 2일~6일까지 5일간 우리나라를 방문하였다. 뤼브케 대통령 부부의 방한(訪韓)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 부부의 방독(訪獨)에 대한 답방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67년 독일 뤼브케 대통령 부부 부산방문 영접장면으로 추정됨(1967. 3. 4)
1977년 9월 15일 월남난민수용소가 APEC 나루공원은 부근인 재송동 1500번지에 처음 설치되었다. 1975년 월남이 패망한 이후 자유를 찾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월남을 탈출한 소위 보트피플 중 우리나라 외항선에 구조된 22명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1982년 11월 23일 마지막 남은 3명을 떠나보내고 문을 닫았다. 마지막까지 수용소에 남아 잇던 구엔 민토(당시 41세, 전 월남군 소령), 트란 딘 구옹(당시 20세, 전 대학생), 탐 티우 오아(당시 21세, 전 기능공) 등 3명은 네덜란드에 정착하기 위해 1982년 11월 23일 김해국제공항을 거쳐 출국하였다.
1984년 5월 5일 어린이날 수영비행장에는 30만 명의 군중이 움집 하였다. 유사 이래 그 넓은 들판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기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2005년 4월 3일 선종(서거)한 로마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생전에 수영비행장을 찾아 움집한 군중뿐만 아니라 부산시민에게 은총을 내린 축복의 날이었다. 교황은 우리말로 “전능하신 천주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하며 부산시민과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내리는 강복을 빌었다. 단상에서 내려온 교황은 군중의 맨 앞에 앉은 장애우들의 손을 잡고 볼에 입을 맞추어 그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이들에게 축복을 내린 뒤 석별을 아쉬워하는 군중들을 뒤로한 채 수영비행장을 떠났다.
수영비행장 앞쪽 해변은 수영해수욕장으로 해운대해수욕장 보다도 해수욕객들이 많았다고 한다. 수영해수욕장은 수영강의 강물과 바닷물이 어울린 해수욕장으로 지금의 시립미술관 앞에서 경동아파트 부근까지 길이가 1㎞에 폭이 30여m로 물이 맑고 수심이 얕아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이 찾았다고 한다.
지금은 매립되어 각종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매립되기 전까지는 이곳 앞바다에서는 멸치잡이가 성행하였다. 여름 방학 때면 부산시내 남녀 중학교 학생들의 하계훈련 장소로도 이용되기도 하였다.
1996년 4월 8일 부산광역시와 육군본부간에 국유재산 매매계약 체결로 부산시에서 인수하였다. 부산시에서는 1996년 7월 31일 옛 수영비행장에 대해 건설교통부에 도시기본계획변경 승인 신청하여 동년 12월 18일 승인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개발에 착수하였다.
부산시는 1996년 8월 2일 수영정보단지개발주식회사 설치조례를 제정하였고, 8월 14일 SK그룹과 수영정보단지개발 기본합의서를 체결하였다. 동년 12월 10일 수영정보단지개발(주)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1997년 9월 20일 지방산업단지(공원결정 포함)로 지정 고시되었고, 2000년 1월 6일 부산정보단지(공원포함) 실시계획 승인을 받았다. 2000년 5월 12일 부산정보단지를 센텀시티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동년 10월 12일 센텀시티 기반조성(공원) 공사를 착공하여 2005년 11월 30일 기반조성 공사가 준공되었다. APEC 나루공원은 2005년 APEC정상회의를 기념하기 위하여 2004년 11월 12일 착공하여 2005년 10월 21일 준공하였다. 2006년 3월 APEC 나루공원 시설물 관리권이 부산시에서 해운대구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루공원 전경(2008년도)
첫댓글 독후감 한 말씀식 부탁해용.....^ㅎ^